〈 49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49화
나는 물러서서 일행을 보조했다.
지상으로 떨어트린 후라고 해도 와이번과의 드잡이질은 에리와 바리스의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다.
와이번의 숨을 완전히 끊었을 때, 딱딱하게 굳은 베르칸의 표정을 보았다. 다시 고개 돌려보았을 때, 베르칸은 기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수상하군.’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와이번의 머리를 가르고 두개골 속을 파내 그 속의 결정체를 꺼냈다.
와이번의 사체는 여러 가공품을 만들 수 있는 좋은 재료지만, 이곳에 온 목적이 있는 이상 결정체만 수거하는 정도가 적당했다.
나와 수희는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했다. 웬만한 이는 나의 표정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추측할 수 없다.
하지만, 저 바바리안은 달랐다.
거짓말을 하거나 감정을 속이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바리스나 에리는 느끼지 못할 정도지만, 분명 수상한 기척을 내비쳤다.
‘베르칸, 상대가 나라니, 운이 너무 나쁘군.’
수상한 기척 자체가 상황을 설명했다. 추측할 수 있게 했다.
베르칸은 ‘속이는 데 익숙하지도 않고, 속이고 싶지 않지만, 속여야 하는 상황’에 빠졌다.
나 역시 옛날에는 많이 속았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아니었다.
고통과 죽음을 통해 얻은 교훈은 마음을 갈아낼지언정 지혜를 부여했다.
“쉴만한 곳 없나?”
베르칸이 예상보다 뛰어난 나의 무력에 경계한다면, 방금은 폭발적으로 힘을 끌어낸 것이라 휴식이 필요하다고 오해시킬 필요가 있다.
일행은 나의 역량을 알고 있다.
이 정도 부유물 유지와 전투로 지치지 않음을 알고 있다. 또한 ‘평상시와 다르네요.’라고 말하지 않고, 각자 조심스럽게 경계하는 지혜가 있다.
“쉬어갔던 터가 있어. 바닥을 골라둔 곳이라 이곳 돌밭 위에 눕는 것보다 나을 거야.”
별다른 정리를 하지 않은 채 베르칸의 뒤를 따랐다. 와이번의 시체는 시간이 지나면 미궁의 신비에 의해 사라질 것이다.
*
베르칸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우리는 그가 잔뜩 굳어진 얼굴로 일행을 이끈 곳을 보았다.
“여기···. 여기인데.”
주변을 둘러보고 다시 앞의 터를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일인가요?”
보다못해 바리스가 나섰다.
“아니, 아니야.”
“베르칸씨, 여기 미궁이에요. 그 정도로 충격받은 것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알아야 함께 방법을 찾지요.”
“아무것도 아니야.”
부정하는 말에 수희마저 나섰다. 수희의 손이 검 손잡이에 살짝 닿았다. 최악의 경우 베르칸을 침묵시키고 미궁층을 빠져나가겠다는 의미였다.
수희의 행동이 베르칸을 진정시켰다. 살기를 띠기 시작하는 분위기에 바로 진정하고 일행을 경계했다.
베르칸의 경계가 나에게 닿았다.
어떤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 쉼터가 있었어. 전에 왔을 때 오래 이용할 생각으로 시간을 들여 작업해뒀어. 주변을 넓히고 바닥을 평평하게 다졌지.”
일행은 베르칸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다듬으면 쉼터로 쓸 만해 보였지만, 인간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다시 돌아간···. 건 아니군요.”
인간이손을 대고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풍화된 것이 아니었다.
손을 대기 전의 모습이었다.
나는 일행에게 경계 신호를 보냈다. 일행을 살피는 베르칸을 무시하고 쉼터를 자세히 살폈다. 묵직하게 쌓인 경험과 [미궁 이해] 스킬이 나의 추리를 도왔다.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차렸다.
와이번 둥지로 들어오면서 카이바린의 메달뿐만 아니라, 레리아나의 검에도 집중하면서 계단을 내려왔었다.
‘무기고 미궁층의 레오나드 성에서 일어났던 기이한 일이 이곳에서도 일어났다.’
현재 이 미궁층은 베르칸이 왔었던 ‘와이번 둥지’가 맞았다.
다만, 그가 방문하기 전의, '과거의 와이번 둥지'였다.
*
*
*
불을 피웠다. 작게 타오르는 모닥불에 독성이 낮은 몬스터의 고기가 익어갔다.
“베르칸씨, 우리도 베르칸씨를 돕고 싶어요.”
헤스티가 베르칸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익은 고기를 들어 올렸다. 무심하게 고기를 씹었다.
베르칸을 압박하는 분위기를 피하려는 헤스티 나름의 조치였지만, 모두가 헤스티 같진 않았다.
“그냥 털어놓는 게 어때?”
수희가 마치 습관인 듯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베르칸은 답하지 않았다.
“나 혼자 가보겠다.”
베르칸은 파티 탈퇴를 이야기했다.
일행은 베르칸에게 불신의 눈빛을 비췄다. 믿음의 기본은 정보의 공유였다.
아무리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말한다고 해서 혹 그 말이 진실일지라도, 일행은 감동하고 넘어갈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아저씨, 아저씨가 미안하다고 하면 다인줄 알아?”
수희가 까칠하게 나갔다. 살짝 내 눈치를 살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금 더 나갔다.
“같이 밖으로 나가요. 나가서 계약 파기 보상을 해줘요. 아저씨가 준다고 했던 재물, 일부라도 받아야겠어요.”
“난 해야 할 일이있다.”
“그러니까, 그 일이 뭐냐고요?”
“······.”
대화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몇 번이고 말이 겉돈 후에 나는 베르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베르칸, 네가 혼자 가는 것과 일행이 함께 가는 것, 어느 것이 성공할 확률이 높지? 아니, 너 혼자 가서 성공할 확률이 있나?”
베르칸은 머뭇거렸다.내 말이 유도하는 말임을 알아차렸겠지만, 이마저도 거부한다면 교섭할 생각 자체가 없는 것이다.
“···. 아마도···. 살아나오기 힘들 것이다.”
나는 고개를 일행에게 돌렸다.
“애초에 베르칸, 너는 죽을 자리를 찾아온 거지? 너 보상을 제시하는 것 보면, 주변을 정리하려는 것 같았어. 마치 자살하려는 것처럼,
그건 그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있었다는 말이지.”
베르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죽을 자리임을 알면서도 해야 할 일,
나는 동료가 필요했다. 하지만, 동료는 나의 전부가 아니었다. 동료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해서 생명을 버려가며 복수를 하지 않았다.
이는 일행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동료 한 명 한 명의 복수를 맹세하기에는 미궁에서 동료는 너무도 쉽게 죽었다. 거기에 복수할 대상은 끊임없이 리젠 되어 다시 나타났다.
팔짱을 끼고 다시 베르칸을 노려봤다.
“네가 후회하는 일을 나는 몰라. 리버밸런스가 연관되었겠지만, 추측일 뿐이지.
하지만, 그 일을 되돌릴 기회가 왔다는 건 안다.”
리버밸런스의 이름이 나왔을 때, 베르칸이 움찔거렸다. 그에 나는 확신했다. 음모에 미숙한 베르칸의 태도는 내게 확신을 주었다.
“나를 따라라. 리버밸런스가 해주겠다고 한 것을 내가 해주겠다. 네가 말하기만 한다면 말이야.”
베르칸의 얼굴에 온갖 상념이 스쳐 지나갔다.
베르칸이 이곳을 알기에 안심하고 피울 수 있었던 모닥불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리나란을 구해다오.”
베르칸은 한 소녀의 이름을 내뱉었다.
* * *
나는 일행을 이끌었다.
행동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정보가 필요했다.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전진해야 한다.
베르칸과 리버밸런스는 관계가 있다. 단순한 적이거나 의뢰자가 아니다.
*
바리스가 베르칸과의 거리를 띄우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생긴 거리를 수희가 좁혀 채웠다.
단순한 진형 유지에도 둘의 성격이 드러났다. 바리스는 베르칸이 돌발행동을 했을 때 일행을 보호할 시간을 원했고, 수희는 즉시 보복할 수 있는 거리를 원했다.
예민한 분위기 아래에 일행은 전진했다.
“예전에 왔을 때, 여기서 다시 한 마리를 잡았었어.”
베르칸의 조언이 달라졌다. 이곳에서 사냥해야 된다가 아니라 그 이유를 설명했다. 나는 베르칸에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며 수희를 불렀다.
귓가에 속삭였다.
“수색을 해줘. 이 주변이 아니라 우리의 전투를 숨어서 볼 수 있는 곳 위주로, 그리고 이거.”
팔찌를 하나 넘겼다. 특별한 물건은 아니었다. 마법적인 효과는 없지만, [종속화]시킨 물건이었다.
팔찌에 대고 기호를 그리면 나와 연결되어 있기에 단순한 통신을 할 수 있다.
수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칸을 흘깃 노려보곤 빠르게 멀어졌다.
어버스나이트의 힘을 잃어버린 수희는 은신 특성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녀가 익혔던 경험과 노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일행이 예상하지 못한 다른 적이 있다면, 접근 예상 경로에 숨어서 살피는 수희가 먼저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일행과 함께 있는 베르칸은 수희의 위치를 알 수 없다.
이는 베르칸에 대한 견제가 될 것이다. 더 숨기는 것이 있어 외부의 적과 연락을 하려고 해도 특별한 마법 도구가 없는 한, 보이지 않는 수희에게 들킬 것이다.
“온다. 베르칸 도발해.”
나의 감지능력이 베르칸보다 뛰어남을 숨기지 않았다. 그가 와이번의 접근을 말하기 전에 지시를 내렸다.
베르칸을 완전히 믿을 수 없는 만큼 먼저 움직이게 해야 했다.
나는 상관없지만, 일행은 와이번을 상대하면서도 베르칸을 경계할 것이다. 믿지 못하는 만큼, 한눈에 와이번과 베르칸을 함께 담을 수 있어야 집중의 낭비가 줄어든다.
“알았다.”
베르칸이 돌멩이를 하나 들었다. 첫 번째 와이번을 상대할 때와 다르게 과감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투척 자세를 취했다.
그의 자세에 불안함은 없었다. 오히려 한 소녀를 구해달라고 털어놓은 후로는 홀가분해 보이기까지 했다.
또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믿음과는 별개로 이전 와이번과의 전투에서 우리는 그에게 무력에 대한 믿음을 이미 주었다.
그가 살기를 담아 돌멩이를 와이번이 오는 방향으로 던졌다.
처음 적을 상대하는것과 두 번째로 상대하는 것은 달랐다.
적을 아는 만큼 공격과 회피의 효율이 올라갔다. 여유는 자신뿐만 아니라 일행을 돌아보게 했고, 일행과 연계할수록 뿜어내는 공격력이 상승되었다.
저번 전투, 나는 와이번과의 전투가 처음이 아니었다. 다만, 부유시킨 바위를 타고 넘으며 와이번을 상대하는 것만이 처음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나 역시 첫 전투보다 더 압도적으로 와이번을 밀어붙였다. 일행이 와이번에 적응하는 만큼 내가 만드는 결과도 더 커졌다.
저궤도에서 바윗돌을 타고 이동하는 바리스가 와이번에게 무시할 수 없는 공격을 넣었다. 헤스티의 중력 마법이 더욱더 정교해져 기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탈출 대비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중력 마법을 준비하던 페로가 헤스티가안정됨에 따라 공격에 가담했다. 아이스 스피어를 날렸다.
베르칸 역시 마찬가지였다. 믿음과는 별개로 서로에 대한 무력의 이해는 연계로 이어졌다.
나는 와이번의 목 절반을 갈랐다. 추락하는 와이번의 날개를 바리스의 검이 찢었다.
일행은 전투를 이어가며 전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