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44화
미궁 지하 5층, 일행의 거점이 된 미궁층.
‘굳은 땅의 은둔자’.
“적이 왔어. 강해.”
“인간이라는 뜻이지? 적대행위를 하고 있나?”
“그래, 인간이야. 천천히 접근 중이야.”
미궁층 내에 기파를 방사해 방문자를 탐색하던 에드샤가 경고했다.
“그럼, 가자.”
에드샤에게 인간은 적이지만, 우리에게는 거래 가능한 대상이다.
준비는 끝났다. 미리 접근자를 확인할 수 있는 경계 지점을 확보했고, 강자를 맞이할 곳도 정해두었다.
*
에드샤가 기세를 잔뜩 일으킨 채 언덕 위에서 아래를 내려보았다.
나와 일행은 에드샤가 지켜보는 언덕 아래에서 방문자를 맞이했다.
다만 에리는 언덕 위쪽에서 에드샤와 함께했다. 에드샤가 너무 위험하다며, 에리가 나와 함께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반대했다.
나는 에드샤의 주장에 동의했다.
‘에리는 에드샤의 약점이야.’
내가 이용할 수 있는 약점은 적도 에드샤에게 이용할 수 있는 약점이었다.
굳이 에드샤가 에리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방문자에게 보여, 비밀을 노출할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방문자와 우리 일행은 싸우기 위해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
땅속을 흔들어 견제하기 쉬운 곳에서 한 무리의 인간과 만났다.
“정말로 엔피씨를 통제해냈군. 자네의 특성인가?”
나는 질문하는 어버스나이트 가랑트런트에게 어깨를 으쓱이고 물었다.
“가르쳐줄 수 있지만, 그쪽 특성도 알려주겠어?”
“거참, 수희가 건방져진 건 자네한테 배운 건가.”
상대의 특성을 물어보는 것은 금기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나는 가랑트런트의 무례에 바로 반존대로 대했다.
가랑트런트는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나보다 강했다.
그가 어버스나이트 내에서 신망이 있다고 해도 일행은 외부인, 그는 힘의 법칙에따라 나를 쉽게 대하려 했다.
‘그렇다고 해도 숙일 필요 없지. 나의 가치는 나의 무력이 아니니까.’
미궁 3층에서 아이들의 등에 글을 새겨 보냈다. 내가 어버스나이트의 비밀을 알고 있음을 알렸다.
수희의 처녀를 파괴해 어버스나이트 특성 중의 하나를 파괴했다. 파괴 자체보다 파괴하는 법을 안다는 것이 중요했다.
거기에 카이바린 사도의 위치를 알아낸 것까지 포함하면, 어버스나이트 교단에서 나를 죽이면 오히려 손해였다.
사로잡아 고문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미 늦었다.
나 역시 강해졌다. 마법사 게르다르프를 죽이면서 가랑트런트에게도망칠 정도의 힘을 얻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반존대를 거두고 바로 반말을 했다.
나는 한발 더 나아갔다. 수희를 언급해, 흥정에 우위를 정하려는 가랑트런트에게 역공했다.
“자네는 부하가 없어? 아니면 자신의 부하를 존중하지 않기에, 나의 부하도 존중하지 않는 건가? 예의를 갖춰.”
수희는 나의 부하라는 말이었고, 나의 부하니 모욕하지말라는 의미였다.
가랑트런트는 말문이 막혔다.
애초에 성립하지 않는 말싸움이었다. 나는 가랑트런트의 성격과 원하는 것을 알고 있고, 가랑트런트는 나에 대해 몰랐다.
“돌아가. 나는 너희들에게 사도의 위치라는 귀중한 정보를 팔았지. 그 대가로 돌아오는 것이 압박인가? 뭐, 나름 만족스럽군.
어버스나이트는 은혜를, 아니 은혜 이전에 거래를 모른다는 걸 알아냈으니 손해는 아니야. 기세는 그만 내뿜고 꺼져.”
말뿐만 아니라 내심으로도 보상을 포기했다.
에리는 에드샤의 보호를 받으며 언덕 위에 있으니 괜찮았지만, 바리스나 버텨낼 뿐 수희와 헤스티는 버거워했고, 페로는 아예 바리스의 뒤로 피했다.
고분고분하다가는 어버스나이트에 종속될 뿐이고, 수희가 일행에게 일으킨 일이 반복될 뿐이다.
“큼. 자네 말 좀 조심하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리스, 모두를 데리고 빠져.”
바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바리스였다. 격이 다른 가랑트런트의 기세를 받고도 눈빛은 굳건하기만 했다.
나는 왼손을 들어 올려 오른쪽 위에서 왼쪽으로 내리면서 허리를 푹 숙였다. 보기만큼은 예의가 발라 보이는 인사를 하면서 말했다.
“혼돈마저 뒤집어진 천칭에 평가당하리라.”
저주와 같은 말을 내뱉고 몸을 돌렸다. 등 뒤로 가랑트런트의 의심에 찬 기세가 섬뜩하게 쏟아졌다.
하지만,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가랑트런트가 정말로 무식하고 교단에 충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헛소리라고 치부하고 나를 죽이고 손을 털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가랑트런트를 알았다. 가랑트런트는 교단에 충심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내 말을 쉽게 보지 못하고 사도에게 보고할 것이며, 고심할 것이다.
혼돈은 어버스나이트 신성을 암시하는 말이며, 뒤집어진 천칭은 미궁 지하 7층 레리아나를 데리고 나왔던 성에서 본 리버밸런스 교단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평가’라는 단어는 어버스나이트가 싫어하는 단어였다. 이는 이전 회차에서 얻은, 근거가 있는 단어였다.
혼돈이 평가당하면 더 이상 혼돈이 아니었다. 측정할 수 없기에 혼돈이었다.
‘혼돈마저 뒤집어진 천칭에 평가당하리라.’
이를 일차적으로해석하면, 리버밸런스에 의해 어버스나이트가 멸망당한다는 의미였다.
어버스나이트 교단은 내 말이 꾸며낸 헛소리인지, 예전에 어버스나이트에게 알렸던 ’혼돈은 순수를 추구한다.‘는 어구처럼 유래가 있는 어구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거짓은 진실에 섞는 법이다. 내게 진실을 들은 적 있는 어버스나이트는 ’평가당하리라‘는 예언적인 문장이 내가 만들어낸 문장임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이제 어버스나이트 교단은 리버밸런스 교단을 살필 것이다.‘
리버밸런스 교단을 조사해야 했다.
일부러 어버스나이트와 리버밸런스를 충돌시키면 파편이 튈 테고, 파편 속에서 진실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카이바린 사도 위치 정보 제공의 보상으로, 리버밸런스에 대한 정보를 구해달라고 거친 방식으로 요청했다.
* * *
* * *
다시 미궁 탐험을 재개했다.
미궁 지하 9층.
일행의 시선이 각자 맡은 방향을 향했다. 기본 경계를 마치자,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천장이 보이지 않았다. 최소 20m까진 비어있었고, 그쯤 해서 흐린 구름이 위쪽 전체를 덮었다.
공중도 공중이지만, 길도 문제였다.
마치 3층짜리 건물이 잔뜩 지어진 도시가 파이어 볼을 수백 수천 개 맞고 폐허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건물은 바싹 주저앉은 것에서부터 절반 정도만 남은 것까지 대부분 파괴되었다.
“까다로운 곳인데.”
장애물이 많아 비행형 몬스터를 상대하기에는 오히려 유리했다. 건물 잔해는 인간보다 컸고, 이는 비행 몬스터의 급강하와 직선 비행을 방해했다.
문제는 벽면이었다. 다른 미궁층과 달리 절대적이지 않은 벽면은 탐험의 변수였다.
1차원적인 선형 구조라면, 길만 따라가다 보면 계단이든 보스든 결국 만날 수 있다.
2차원 평면 구조는 탐색 범위를 겹쳐가며 흰 종이에 한 가지색 물감으로 전부 칠하는 것처럼 탐색해야 했다.
이런 평면적인 탐험은 점점 더 깊이 들어간다는 느낌이 없기에 긴장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집중력을 흩트리기 쉬웠다.
거기다가 인간의 크기보다 큰 잔해는 무언가가 숨어있기 좋은 크기였다. 오나홀 몬스터라도 숨어있다가 달려들면 상황에 따라서 큰 위험이 되었다.
*
나는 손을 옆으로 뻗었다. 우선적으로 손이 닿는 건물 벽이었을 덩어리를 [종속]시키며 입을 열었다.
“기습에대비해, 너무 위만 경계하지 말고. 특히, 에리는 정면과 아래만 신경 써. 그리고 이 미궁층부터는 에리가 앞장선다.”
나만 경험치를 많이 얻고 성장한 것이 아니었다. 에리 역시 성장했다.
단순 전사의 능력은 바리스나 수희를 따라가지 못했지만, 대지 계열 마법에 큰 성과가 있었다.
일시적으로 발아래의 흙과 돌을 끌어모아 갑옷처럼 덧대거나 방벽을 만드는 방어능력뿐만 아니라 지면 위를 통해 접근하는 적을 빠르게 알아차렸다.
나와 바리스의 감각이 워낙 탁월하다 보니 그에 가려졌을 뿐, 땅 위로 걷거나 기는 적 탐색을 맡길 만했다.
“경계.”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후루히, 후루키 후루루-.
한 마리의 울음에 응답하듯 다른 놈의 울음이 이어지며 합쳐졌다.
“하피다. 날아올 테지만, 무릎 아래 경계도 소홀히 하지 마라.”
지시를 내리고 몸을 숨겼다. 일행 역시 몸을 숨겼다.
“헤스티, 벽에 너무 붙지 마라. 이 벽 약해. 벽이 뚫릴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처음으로 상대하는 패턴이다 보니 주의해야 할 것이 많았다.
바리스는 변수에 대응할 만큼 체력과 기량이 높았고, 수희와 페로는 다양한 경험을 해왔던 만큼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
에리 또한 전사에다가 방어에 강점이 있는 대지 마법을 쓰는 만큼 돌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
‘하피의 속도가 빠르지 않아.’
물론, 평지를 뛰는 고블린이나 코볼트보다는 빨랐다. 하지만, 땅을 축으로 삼은 인간의 넋을 흔들 정도의 속도는 아니었다.
‘거기에 울음소리.’
몬스터의 급이 낮으면 단순한 외침이지만, 급이 높을수록 울음소리는 언어에 가까워진다.
처음 들렸던 ‘후루히, 후루키 후루루-’에서 ‘후루루-’는 세 마리 이상이 호흡을 맞춰 함께 소리를 냈다.
“페로, 헤스티 완전히 몸을 숨겨. 초반 견제 마법 쓰지 마. 중력 마법은 내가 지시하겠다.”
지시를 변경했다.
짧은 시간에 지시를 번복하는 것은 위험했다. 하지만, 일행에게는 이를 녹아낼 역량이 있었다.
일행은 단순하게 상황에 얽매여, 반응만 하는 단계를 넘었다. 나의 지시에서 내가 예상하는 바를 추측하고 표정을 굳혔다.
헤스티와 페로가 함께 중력 마법을 쓰는 것.
에리와 헤스티가 같은 곳에 어스 마법과 파이어 계열 마법을 쓰는 것은 쉬웠다. 페로와도 마찬가지로 한 곳에 윈드 스피어를 추가해 동시에 날리는 것도 쉬웠다.
하지만 중력 마법은 달랐다. 중력 마법은 타겟 영역과 발동 영역이 일치하는 마법이었다.
파이어 볼이나 윈드 스피어는 마법사의 지팡이 근처에서 마법을 발동해 완성 시킨 후 타겟을 향해 날렸다.
두 명이 동시에 쓰더라도 각자의 발동 영역에서 마법을 일으켰다.
하지만 중력 마법은 영역 마법이었다.
타겟 영역에 바로 발동을 일으켰다.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지.’
기초부터 쉽지 않았다.
각자의 영역을 섞지 않고 맞붙여서 발동하는 기초도, 영역의 모서리를 서로 접촉하는 만큼 서로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 길이 험난하고 멀어, 카이바린 교단의 마법사 계파조차 각자의 힘을 키우는데 집중했을 뿐 합격 마법을 연구하지 않았다.
그렇게나 많은 마법사 자원이 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미궁의 적은 한계를 뚫지 않고서는 상대할 수가 없다. 합격 마법은 마법사의 한계를 뚫어내는 바른길이었다.
‘전에는 이를 알면서도 강조하지 못했어.’
이때까지의 회차에서는 마법사들에게 합격 마법을 강조하지 못했다.
각자 주관이 강해도 너무나 강했다.
하지만 이번 회차에서는 헤스티와 페로, 둘 다 달라졌다.
헤스티는 나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커졌고, 페로는 늙은 몸이 된 이후로 무심해졌다.
일단 합격 마법의 경지를 어느 정도 이상까지 이끌어내면, 나중에 각자 개성이 강해지더라도 합격 마법 조율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