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43화
“네놈, 네놈.”
게르다르프가 분노에 말을 잇지 못했다.
한 집단에서 리더의 강력한 무력은 집단의 전력을 상승시킨다. 하지만, 그런 집단에서 강력한 리더가 떠났을 때, 남은 집단의 전력은 리더의 무력이 아니라 지도력에 좌우한다.
지도력을 갖춘 리더와 함께했던 집단이라면, 떠난 뒤에도 얻은 경험과 구축된 시스템으로 일정 이하로 전력이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강하지만 지도력이 떨어진 리더와 함께했다면, 떠난 뒤에 남는 건 원래의 자생력도 잃어버린 군중일 뿐이다.
나는 비웃음을 터트리며 달려들었다.
미세한 차이로 피해내고 반격해냈다. 혹, 수준이 낮은 자가 본다면 전투가 금방 끝날 거라고 느낄 정도로 압도적으로 밀리는 상황.
하지만, 끈덕지게 이어냈다.
끝날 것 같으면서도 끝나지 않는 전투는 마법사들의 집중력을 흩트렸다.
나의 일행은 마법사들의 허점을 물 흐르듯이 파고들었다.
이전에 내가 리딩을 하지 않을 때는 수희의 흐름에 일행이 따랐지만, 상황이 바뀌어 바리스가 수희를 포함한 일행을 리딩했다.
파괴력은 줄었지만, 안정적으로 변했다. 수동적으로 변했다는 뜻이 아니었다. 유들유들하고 끈기 있게 상대 그룹의 결속을 갈랐다.
’수가 적지만, 오히려.‘
바리스가 이때까지 쌓아온, 자신보다 강한 적과의 전투 경험은 마법사들의 수가 더 많은데도 바리스가 이끄는 파티가 적을 포위하는 기세를 만들어냈다.
“멍청이들만 데리고 다녔구만.”
“시끄럽다. 네 놈만 죽으면 끝날 일이다.”
아니다. 마법사들이 멍청이가 아니라 게르다르프의 지도력이 멍청이를 만든 것이다.
내가 그의 부하를 비하하는데도, 억지로라도 반박하지 않고 자신의 무력으로만 종결하겠다고 선언했다.
리더가 부하를 멍청이로 생각하고, 이것을 부하에게 다 드러내는 집단을 상대로, 바리스가 질 리가 없었다.
나와 게르다르프의 전투는 격렬하고 빨랐다. 격전의 화려함 너머에서 마치 배경처럼 바리스는 일행을 이끌어 마법사들을 하나씩 쓰러트렸다.
마법사들의 마지막 숨을 페로가 카이바린의 이름으로 끊었다.
게르다르프가 한 손에 지팡이를 쥔 채로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카이바리님이시여, 저와 함께하소서. [신성 폭열]”
혹시나 하는 생각에 몸을 뒤로 빼면서 일행에게 신호를 보냈다.
미리 연습했던 것처럼 페로가 뒤도 돌아보지않고 빠지면서 탈출 스킬을 준비하고, 헤스티는 페로에 접근하면서 견제준비를, 바리스, 수희, 에리는 큰 상처를 입더라도 페로를 보호하는 극단적인 엄호 태세로 페로를 둘러쌌다.
“크크크.”
나는 허망해하는 게르다르프를 향해 입술 끝을 비틀어 올리고 비웃어줬다.
“너 일부러 부하들이 죽도록 내버려 뒀던 거지? 신성 폭열이 아니라, 연속 사망에 적용되라고. 크흐, 어쩌나. 그분께서는 다른 생각이신걸.”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아니지. 자랑스러워해야지. 너의 희생으로 그분께서 방도를 마련하실 수 있게 되었어.”
게르다르프가 혼란에 빠지도록 놀리면서도 카이바린 신성을 직접 거론하지 않았다. 굳이 신성을 모욕할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었다.
나는 일행에게 다시 신호를 보냈다. 일행을 탈출 태세를 풀고 공격 태세로 전환시켰다.
게르다르프의 혼란이 그대로 마법사들에게 전해졌다. 미궁 안쪽으로 도망칠 정도로 멘탈이 와해되었다.
미궁에서 홀로 도망치는 것은 자살과 같았다. 해당 미궁층 수준에 맞지 않는 자는 절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죽임을 당했다.
*
나의 레리아나의 검이 게르다르프의 사지를 누볐다.
페로의 아이스 스피어가 붉게 물든 채로 피를 게워내는 게르다르프의 가슴을 카이바린의 이름으로 꿰뚫었다.
전투는 빠르게 종결되었다.
혼란에 빠진 데다가 나까지 마법사들을 상대하기 시작하자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수희는 경계를 좀 해줘. 페로는 확인 사살을 해주고. 바리스, 헤스티, 에리는 전리품을 수거해.
카이바린 교단의 제사용품은 그냥 버리고 간다. 아. 그리고 이제 귀중품도 챙겨.”
카이바린 교단은 극히 약해졌다. 마법사들과 게르다르프의 연속 사망으로 얻은 신성력이 크다고 해도 결국 사도를 지키는 데 소모될 신성력이었다.
예전 회귀에서도 망하는 만큼 원래 망할 예정이지만, 나와 연관되면서 가속되었다.
더 이상 카이바린 교단의 멸망을 가속화해서 얻을 이득이 없었다.
전리품 수색과 확인 사살에 수희를 빼고, 제사용품을 버리고 가는 것 역시 이 때문이었다. 괜히 신성이 소멸되는 마지막 순간에 나를 떠올리게 해 신성의 저주를 받을 이유가 없었다.
“귀중품여?”
헤스티의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 예전에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해냈다.
“지하 10층, 상인의 요새. 싱싱한 고기를 구할 수 있다던.”
“그래.”
이때까지는 금이나 은은 물론이고 마법과 연관성이 적으면 보석까지 줍지 않았다. 거래할 대상이 없기에 무게만 나갈 뿐이었다.
하지만, 게르다르프와 마법사들을 처치하고 얻은 경험치로 한 단계 높은 전투력을 갖추게 되었다.
카이바린 교단의 힘이 약해지면서 ‘상인의 요새’에서 카이바린 사제들과 마주쳐도 무시해버릴 수 있게 되었다.
“고기, 고기~. 독 없는 고기~.”
헤스티가 폴짝 뛰어 바리스에게 다가가 손을 맞잡았다. 시골 처녀가 춤추듯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마구 뿜어내는 흥겨움에 항상 굳은 표정이었던 수희마저도 표정을풀정도였다.
다만, 기괴했다.
아직 시체에서 흘러내린 피가 굳지 않는 전장에서 흥겹게 고음으로 고기를 찾는 미녀는 마녀라는 단어가 어울릴 것 같았다.
초반에는 헤스티는 지하 10층에 대해서 가끔 물었었다. 하지만 지하 7층 넘어가면서는 한 번도 입에 담지 않았다.
한 층 더 내려가는 것이 얼마나 더 힘든지 실감하고, 10층의 벽을 인식했다. 절대 못 넘을지도 모른다고 내심 포기했던 것이다.
9층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제 내가 언급하니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미래가 되었다.
‘뭐, ’흐르는 핏자국‘이 ’핏속에서 춤추는 마녀‘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미궁과 미궁 밖에는 마녀가 존재했다.
그리고 이 마녀는 온갖 사악한 것이 많은 이 세계에서도 꺼리는 존재였다.
이번 회차 초반에 일행에게 약탈당했던 초급 모험가들은 일행 앞에서 ‘흐르는 핏자국’이라고 쉽게 칭하면서도 바리스를 ‘포 뜨는 마녀’라고 부르는 데는 주저했다.
이는 신성과 연관이 있다. 신성은 인간에게 힘을 주고, 인간은 신성에게 신성력을 맺힐 토대가 되어주고 경배했다.
마녀는 이 당연한 신성을 따르지 않았다. 신성을 따르지 않고 온갖 괴이한 방법으로 힘을 얻고 존재했다.
’지하 11층, 마녀의 유원지.‘
예전의 일행에게는 인연이 없던 곳이었다.
가기 힘들어서 인연이 없는 곳이 아니었다. 상인의 요새에서 파는 카산드라의 유물을 구해 길잡이 스킬을 발동하면 갈 수 있었다.
’소녀가 여인이 되고, 새하얗게 변한 머리카락에 그늘이 드리울 때.‘
여러 회차를 반복하면서 얻은 키워드였다.
마녀와 관련 있다는 것 외에는 알아내지 못했다.
키워드에 시간의 경과를 의미하는 말이 있다 보니, 일반적인 모험가들, 미궁 안팎으로 출입을 반복하면서 모험하는 일행은 선뜻공략에 나서지 않았다.
헤스티부터 예전 회차에서는 마녀보다는 마법 계열 신성을 원했고, 모험 후반에 그쪽 신성을 따랐다.
조금 빠듯하게 짐을 챙기고 지하 5층 거점을 향해 움직였다.
*
*
*
헤스티의 머리카락이 살며시 흔들렸다. 부드럽게 롤한 머리카락은 은은한 빛을 흘려냈다.
세탁한 옷으로 갈아입고 제대로 씻으니 미궁 출입 전의 미모로 돌아왔다.
아니, 출입 전보다 더 나았다.
전사처럼 마법사의 성장 역시 신체의 골격과 근육과 피부의 건강을 상승시켰고, 마력의 흐름 역시 외모에 영향을 끼쳐 정순함을 더했다.
흐름은 각자의 개성에 기인한 분위기를 이끄는 법이라, 이번 회차의 헤스티는 은은하게 피어났다.
“준영씨.”
새빨개진 얼굴로 헤스티가 나를 불렀다.
이미 내가 그녀를 보고 있는데도 이름을 부르는 이유, 나를 재촉하기 위함이다.
미궁 5층의 정비 중에 내게는 작은 변화지만, 헤스티와 수희는 물론 바리스마저 즐거워하는 성과가 있었다.
거점으로 삼은 미궁 5층 폐허가 된 키벨레 종족 마을 근처에는 샘이 있었다.
마을의 개념으로 볼 때, 키벨레 종족이라고 해도 물을 마시는 만큼, 마을이 생길 때 수원 근처에 자리 잡았을 것이다.
미궁의 개념으로 생각해봐도 미궁층에는 샘이 있는 경우가 흔했다.
에드샤가 우리가 없는 동안, 이 샘에서 폐허가 된 마을까지 수로를 완성해 물을 저장했다. 인간과 혼혈인 에리를 위한 배려였다.
흙을 다루는 에드샤에게는 시간만이 필요한 작업이었고, 그녀에게는 시간이 많았다.
그 덕분에 깨끗해진 헤스티가 부끄러워하면서도 나와 눈을 마주치고, 눈을 마주하자 고개를 숙였다.
아직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다. 바리스와 에리는 물론 수희와 페로가 있는 공간이었다.
나는 흐 웃으며 헤스티에게 가볍게 키스했다. 어깨를 꼭 안아주었다.
헤스티의 얼굴이 완전히 빨개졌다. 노출의 욕망이 없는 만큼, 바리스와 셋이 있을 때와 달랐다.
그럼에도 키스해달라고 재촉하는 것은 수희를 의식하는 것이다. 나와 수희가 다른 이가 보는 곳에서 키스했던 것을 기억하고 낼름 따라잡는 것이다.
나는 웃으면서 수희의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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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하게 9층 탐험을 준비했다.
동시에 미궁 10층을 위한 기본을 가르쳤다.
10층 ’상인의 요새‘층도 미궁층이었다.
인간이 모여 거리를 이루지만, 미궁 밖 도시와는 달랐다.
미궁 밖의 도시에는 경비대가 있었다. 마냥 정의로운 집단은 아니지만, 최소한 눈앞에서만큼은 죽지 않도록 막아줬다.
하지만, 상인의 요새의 무력은 상인만을 위한 무력이었다. 다른 일행과 시비가 걸리면 알아서 해결해야만 했다.
또한, 몬스터와의 전투가 필수였다. 요새 밖에는 몬스터들이 돌아다녔다. 고블린, 코볼트, 운이 나쁘면 오크까지 만날 수 있었다.
다른 층으로 이동할 수 있는 ’계단‘은 한 그룹이 이동하고 나면 임의의 위치에 생성되기에 계단을 찾기 위해서라도 전투를 각오해야 했다.
방문자를 기다렸다.
높은 확률로 어버스나이트 교단에서, 아주 낮은 확률로 카이바린 교단에서 방문자가 올 것이다.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의 위치를 확인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