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42화
나는 일행과 함께 숨었다.
숨어서 마법사 계파의 수장, 게르다르프를 관찰했다.
우리 일행을 살폈다. 헤스티의 질린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페로의 얼굴은 로브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나는 헤스티에게 신호를 보냈다.
‘나의 행동, 관찰에 집중, 배울 것.’
게르다르프가마법 쓰는 모습을 보고 배우라는 뜻이 아니었다. 버닝 핸드 마법의 상성에 관해 배우라는 뜻이었다.
나는 일행이 숨은 반대쪽에 미리 보내놓았던 내게 [종속]된 석궁구를 움직였다.
석궁구로 화염을 뿜어내는 게르다르프에게 볼트를 쏘아냈다.
“큭.”
전방으로 쇄도하던 화염이 불규칙하게 날뛰었다. 게르다르프의 손바닥에 석궁 볼트가 박혔기 때문이다.
게르다르프는 신경질적으로 볼트를 뽑아내 내동댕이쳤다.
“데리나, 함정탐지 마법을 쓰라고 했잖아.”
“게르다르프님. 썼습니다. 분명 썼었는데···.”
어깨를 잔뜩 움츠린 마법사 하나가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석궁 볼트가 발사된 방향은 막다른 벽이 보이는 막힌 곳, 몬스터나 인간이 숨어서 쏠 수 없는 곳이었다.
날아온다면 함정이 발동된 것일 테니, 게르다르프는 이를 예측하고 지시했으나 마법사가 제대로 수행하지 않아 부상을 입었다고 여겼다.
데리나라고 불린 마법사는 잘못하지 않았다. 함정탐지 마법을 썼을 때는 내가 석궁구를 활성화시키기 전이었다.
미궁층 곳곳에 [종속]시킨 바위가 함정탐지에 걸리지 않았던 것처럼, ‘미궁의 공격성 오브젝트’을 검색하는 탐지 마법에 나의 종속물은 걸리지 않았다.
“네놈 돌아가면 보자.”
버닝 핸드는 주술사의 스웜 마법을 덮어버린다. 스웜 마법에 상성 우위를 가지는 버닝 핸드는 소형 투사 무기에 약했다.
목표지점에 도착해서 크게 폭발하는 파이어볼과 달리 버닝 핸드는 눈앞에서부터 시전자의 의지에 따라 넘실거렸다.
즉, 시야가 최악이었다.
게르다르프 정도 되면, 석궁구의 화살 정도는 마법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그냥 손에 마력을 둘러 쳐내버린다. 기습적으로 날아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버닝 핸드를 시전 중에는 달랐다. 시야가 나쁜 버닝 핸드는 가위바위보에서,바위를 감싸는 보지만 가위에 찢어진다.
버닝 핸드가 끊어졌다.
하지만 게르다르프는 다른 마법사를 야단칠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화를 내는 것도 자존심 때문일 것이다. 석궁 볼트에 당한 상처보다 공격을 허용했다는 사실이 짜증 나는 것이다.
끊어진 버닝 핸드 마법에 홉고블린 주술사가 다음 수를 준비했지만, 카이바린 본단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조금 늦어질 뿐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방심하고 있다. 방심이 오류를 만드는 법이지.’
홉고블린 주술사는 포위한 카이바린 무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저 주어진 상황에 맞게 움직였다.
케윽 커, 케윽 커.
거북한 소리를 내면서 토템을 꺼내 땅에 박았다. 마법 데미지 감소 토템. 퉁퉁하는 작은 울림과 함께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게르다르프의 눈썹 끝이 확 올라갔다.
마법사는 본능적으로 마법 데미지 감소 토템을 싫어했다.
저급 마법사는 감소 토템의 얽매임을 두려워할 테지만, 게르다르프에게는 그저 귀찮을 뿐이었다.
감소량을 초월할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헤스티, 너는 저러지 마라.”
후반의 마법사는 절대 상대하기 쉬운클래스가 아니었다. 초반의 마법사와 후반의 마법사는 완전히 다른 클래스라고 봐야 할 정도다.
전사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단점도, 캐스팅이 존재한다는 단점도 마법사의 성취가 오르면 오를수록 극복하기 시작한다.
다만, 그 단점이 극복되었을 때, 자신이 극복했다고 느낄 때 가장 큰 약점이 태동하기 시작한다.
‘마법사 계파 수장, 딱 자만하기 좋은 자리지.’
권위가 높을수록, 아래로 추종하는 자와 도움을 달라고 징징거리는 자밖에 없다. 반대 의견을 내려는 이인자도 전사 계파에 승리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명분으로 묻어버리기 좋았다.
“뭐, 헤스티는 내가 있어 그럴 일 없겠지만.”
내가 항상 헤스티 위에 있을 테니, 그녀는 자만할 틈이 없을 것이다.
“가자.”
나는몸을 드러냈다. 바리스와 수희가 나의 지시에 따라 돌진을 시작했다. 내게 시선이 모이는 틈을 타 헤스티는 게르다르프에게 사이킥 쇼크를 쏟아부었다.
게르다르프가 일행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우리를 향해 분노의 일갈도 마법도 쓰지 못했다. 게르다르프는 이미 홉고블린 주술사와 토템을 향해 캐스팅 중이었다.
“이 상황에서도 마법에 집중하는 것은 인정해주지. 하지만, 그것뿐이야.”
게르다르프는 내가 아니었다. 홉고블린을 상대하는 도중에 난입이 일어났음에도 마법에 집중하는 것이 그의 한계였다.
나와 달리 지휘까지 해내지 못했다.
자신의 지휘뿐만이라, 자신을 대행하는 지휘도 무너졌다. 게르다르프가 다른 마법사를 야단친 직후라 무리가 소극적으로 변했다.
다른 마법사들은 적극적으로 반응하지 못했다. 작은 텀이나마 지휘를 대행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이지 못했다.
그저, 눈앞으로 파고드는 바리스와 수희를 각자 대응했다.
“우선 마법사들을.”
아무리 짧은 텀이라도 내게는 길었다.
몰아에 이를 수 있을 정도로 분산 집중이 가능한 경지에 도달했기에, 부유시킨 3개의 석궁구로 부하 마법사의 뒤를 노렸다.
바리스를 향해 캐스팅하던 마법사의 등 뒤에 석궁 볼트가 발사되고, 집중력이 흩트려진 마법사는 바리스와 수희의 공격을 허용했다.
[파이어 익스플로젼]
게르다르프의 캐스팅이 완성되었다. 마법을 취소하거나 타겟을 변경하지 않았기에 거대한 화염이 홉고블린 주술사에게 몰아쳤다.
마법을 쓰고 나자, 바로 나를 향해 고개 돌렸다.
“네놈이냐. 우리를 괴롭힌 것이. 죽을 자리를 찾아왔구나.”
“말할 시간에 캐스팅이나 외우시지.”
“이것이.”
도발을 먹였다. 게르다르프도 캐스팅할 수 있는데, 입이 심심해 말한 것이 아니었다.
파이어 익스플로젼은 쓰고 난 다음 마력을 다스려야 할 만큼 강력한 마법이었고, 그 텀 동안 떠오르는 말을 하는 건 호흡을 가다듬는 데 나쁘지 않았다.
“크크.”
나의 비웃음에 게르다르프의 얼굴이 벌게졌다.
내가 캐스팅 외우라고 말한, 바로 그다음 호흡이 캐스팅을 외울 타이밍이다 보니, 말싸움에 밀린 형세가 되었다.
“네놈은 죽는다.”
[파이어 볼][시프팅 포지션][파이어 볼트] [파이어 볼]
그래도 마법사 계파 수장이라는 자릿값을 했다.
파이어 볼과 파이어 볼트에, 순간적으로 위치를 변경하는 시프팅 포지션까지 섞어서 몰아붙여 왔다.
피하고 따라잡고 다시 피했다.
레리아나의 검 반경 안에 게르다르프를 넣었다. 극초반의 게르다르프의 잘못된 판단은 마법사의 협공을 어긋나게 했고, 그동안 이룬 성장은 수많은 회귀 동안 쌓은 마법사와의 1대1 전투 경험을 풀어놓기 충분했다.
오히려 내가 다음 턴을 준비했다. 승부수를 던졌다.
“페로, 공격에 전념해. 특히 네가 마무리 일격을 날려.”
페로는 탈출 스킬 준비 상태였다. 에리도 전투에 전념하는 상황에서 힘을 예비하던 만큼 참전은전세를 흔들 충격이 될 수 있다.
“이들을 죽여. 카이바린의 이름으로.”
적도 아군도, 특히 수희는 눈에 띌 정도로 움찔거렸다. 수희는 어버스나이트의 이름으로 킬을 스틸하다가 나에게 처벌받은 만큼 전투 중임에도 혼란을 드러냈다.
묵묵히 나를 따르는 에리가 보조해, 수희가 흔들림을 바로 잡을 호흡을 벌었다.
괜히 카이바린의 이름을 거론한 것이 아니었다.
짐꾼처럼 따라온 전사들의 목에는 카이바린의 목걸이가 한 명도 빠짐없이 걸려있었다. 또한, 몇몇 수준이 낮은 마법사의 목에도 카이바린의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이는 ‘신성 폭열’을 쓸 수 있음을 의미했다.
목걸이를 찬 모든 신도를 바쳐 탁월한 버프를 얻는 스킬.
미궁 지하 3층 코볼트 던전에서 만났던 마법사와 게르다르프의 수준 차이만큼 게르다르프는 더 강력한 버프를 얻을 것이다.
이 ‘신성 폭열’은 강력하지만 큰 특징이 있었다. 카이바린 교단은 신성한 어구 ‘연속 사망’을 통해 신성에게 바칠 신성력을 얻었다.
신성 폭열은 신성에게 바쳐질 신성력을 소모해 버프를 형성하고 유지했다. 그래서 큰 이득을 얻지 못하면 신성의 미움을 받을 수 있는 스킬이었다.
평상시라면 신성의 그늘을 벗어난 자가 간섭할 수 없는 행위였다. 하지만 지금은 미궁 밖에서 사도가 위험에 처한 상황이었다.
투사할 여력이 있다면 사제가 아니라 본단으로 돌아간 사도에게 전념함이 옳았다.
신성의 입장에서,
다른 교단의 사제가 끼어들어 ‘연속 사망’이 깨어지는 상황이 아니라면, 연속 사망을 통해 얻은 신성을 가지고 ‘신성 폭열’이라는 망할 수 있는 도박보다 그냥 받아서 사도에게 전념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페로가 수희가 상대하던 적을 향해 윈드 스피어를 날렸다.
“카이바린의 이름으로.”
늙은이의 목소리로 신성의 이름을 불렀다. 페로도 수희도 신성과 멀어졌지만, 부르는 법까지 잊지는 않았다.
어버스나이트 신성을 부를 수 있는 수희가 상대하던 인간이었으나 페로의 부름에 확실히 카이바린의 신성한 어구, ‘연속 사망’이 이어졌다.
나의 수작은 교단이나 게르다르프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카이바린 신성에게 향한 거래 제안이었다.
일행이 지면 카이바린 신성은 당연히 ‘연속 사망’을 이루고 신성력을 얻을 수 있다.
일행이 이겼을 때, 수희에게 ‘어버스나이트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하고, 페로에게 ‘카이바린의 이름’을 부르게 하면,
게르다르프와 마법사들이 죽어도 ‘연속 사망’은 이룰 수 있게 된다.
요구 조건은 하나였다.
게르다르프가 ‘신성 폭열’을 쓰더라도 호응하지 말 것.
그 누구도 나의 한계를 확신할 수 없다. 카이바린 신성이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신성 폭열을 썼는데도 내가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면, 더 나아가 신성 폭열을 쓴 게르다르프까지 잡아낸다면,
미궁 밖에서 공격받는 사도는 사도대로 돕지 못하고, 미궁 안에 한 투자는 투자대로 날아가게 된다.
분명, 솔깃할 수밖에 없는 제안이다.
‘뒷통수가 일상인 신성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