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40화
카이바린 교단은 결국은 무너지는 교단이다.
이전 회차에서도 그 전회차에서도 내가 심층에 들어갈 때쯤 무너졌다.
물론 시기는 달랐다. 일행이 심층에 도전할 때까진 한참 남았다.
‘나의 행동이 큰 여파를 일으키는 이유지.’
교단이 무너지는 원인이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쌓아왔던 원인이 나로 인해 일찍 터지는 것이다.
‘사도와 싸우면 진다. 정면으로는 이길 수 없어. 이번은 이익만 생각한다.’
미궁밖에 나갈 수 없으니 교단 본단과 연관된 이익은 제외였다.미궁 안으로 들어온 사도와 싸우는 것은 무리였다.
애초에 카이바린 사도의 위치를 어버스나이트에게 알리는 이유부터가 사도가돌아간 후를 노리기 위해서였다.
‘뜯을 고기가 있겠어.’
사도가 미궁 안으로 들어오는데 아무리 정체를 숨기고 들어왔다고 해도 혼자, 몸만 오지 않았을 것이다.
급하게 빠지다 보면 분명 남기고 가는 것이 있을 것이다.
사도는 위치를 지켜야 했다. 사도간에 견제가 심했다.
하지만, 카이바린의 사도는 교단 본단으로 순간 이동할 수 있기에 미궁 출입이 가능했다.
사도는 카이바린 사제가 들고 있었던 스킬을 가지고 있다. 단순히 같은 것이 아닌 더 발전된 스킬을 가지고 있다.
이는 페로의 스킬 역시 포함되었다. 사제가 미궁층 탈출에 관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사도는 그 특성의 상위급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했다.
미궁 한 층이 아니라 여러 층, 아마도 미궁 밖까지 빠져나가는 스킬이 있을 것이다.
역으로 사도가 움직였다는 사실이 스킬의 존재를 확신시켰다.
빠른 복귀가 가능하지 않아서, 단순하게 걸어서 나가다가는 다른 교단에게 본단이 털린 후에 도착할 것이다.
‘미궁층을 한 번에 벗어나는 권능.’
미궁층은 차단성이 높았다. 레리아나의 검을 얻은 무기고는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까지 격리되었었다.
내가 이번에 얻은 컨트롤러 클래스의 [층간 감각 연동]이 대단한 것도 차단성을 극복하기 때문이었다.
미궁의 특징을 극복해내는 스킬은 결코 평범한 스킬일 수 없었다.
‘아무리 사도라고 하더라도, 대상이 늘어나면소모되는 힘 역시 늘어난다.’
자기 혼자만 빠져나가는 것과 동반한 일행 모두를 데리고 빠져나가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힘을 낭비할 상황이 아니었다. 더욱이 귀환하자마자 어떤 힘겨루기가 있을지 몰랐다.
미궁 지하 3층 마법사가 썼었던, 동반한 일행을 희생시켜 힘을 얻는 [신성 폭열] 역시 쓸 수 있겠지만, 사도를 옆에서 모실 정도의인물은 이동용 소모품으로 처분하기에는 귀한 자원이었다.
‘움직여라. 어버스나이트.’
어버스나이트 교단이 미궁 밖의 카이바린 본단을 노리면, 미궁 안에 들어왔던 사도가 돌아갈 것이다.
사도가 빠진 자리는 나와 일행을 배부르게 할 것이다.
* * *
* * *
회의실에서 기다리던 수희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회의실은 교단의 크고 작은 일이 논의되는 곳이었다. 중요하다면 중요한 곳이지만, 모든 신도가 똑같은 자격과 똑같은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회의실에서 이루어진 결정보다 사도의 의중이 더 중요했다.
“사도께선 이미 움직이셨네. 물러나서 기다리게.”
가랑트런트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듯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기다리라는 건 사도님께서 하신 말씀입니까?”
“사도께서 하시는 일을 어찌 사제가 가름할 수 있겠나. 하지만, 자네가 신경 쓸 상황이 아니라네. 자네가 들고 온 정보의 중요성은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믿고 기다리게나. 합당한 대가를 나누어주실 테니.”
수희는 안면가리개로 가려진 입술을 깨물었다.
물러나서 기다리는 말에 희망은 없었다. 사도가 벌이는 일에 참가하기 위해 기다리는 것이 아닌, 끝난 후에 보상을 얻기 위한 기다림은 물질적으로 풍족할 수 있지만, 교단 내에서 한 계단 위로 올라갈 권력을 얻지 못한다.
정보를 얻어온 자가 가만 기다리는 동안, 사도 측근은 업적을 계속 쌓을 것이다.
“일시를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접전이 일어나는 시간을요.”
이미 움직이고 있다고 해서 사도와 사도가 충돌 중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충돌에서 이기기 위해 세부 정보를 모으고 힘을 부릴 단계일 수도 있다.
원래는 먼저 물어보지 않았을 질문이었다. 함께 움직인다면 작전 명령에 포함되어 내려올 내용이었다.
교단과 함께 움직이지 못한다면 중요한 정보를 알아가야 했다. 어버스나이트 교단에 연관된 정보는 준영 일행 안에서 수희를 다른 여자와 차별화시킬 토대였다.
“미안하네. 상황에 따라 즉시 수정될 가능성이 높아, 확언을 해줄 수 없네.”
수희는 변명임이 분명한 대답에 입을 닫았다. 고개를 돌렸다.
의자에서 일어나 회의실 문을 열고 나갔다.
*
가랑트런트는 수희의 무례를 탓하지 않았다. 무례를 탓할 이유가 없었다.
보듬고 이끌어 갈 부하가 아닌 거래대상과의 관계에서 예의는 사소한 문제였다.
수희의 비키니 갑옷 특성은 유일한 특성이 아니었다. 그 특성을 가진 자가 특성을 잃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교단에 사례가 남아있었다.
사도와 가랑트런트 급의 고위 사제가 아니라면 접근할 수 없는 기록물로 남아있었다.
삶을 포기하거나 수동적인 전사가 되거나 배신을 했다.
수희가 어떻게 해서 힘을 잃었는지, 힘을 잃으면서 마음이 어디로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가랑트런트는 수희가 배신하지 않았음을 느꼈다. 하지만, 언제나, 대비는 모자란 것보다 넘치는 것이 나았다.
* * *
* * *
나는 바쁘게 움직였다.
본격적인 전투는 시작되지 않았지만, 수희를 제외한 일행과 함께 위험도가 높은 작전을 수행했다.
카이바린 교단 사도에게 컨트롤러 스킬로 부여한 종속물이 와해될수록, 정보의 양은 줄어들었다.
줄어든 정보는 상황을 오판하게 만들고 사도와의 접전에서 오판은 죽음과 같았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위험한 작전을 수행했다. 사도가 올 가능성이 높지만 지금은 없는 미궁층으로 들어가 요지의 바위 등 사물을 [종속]화 시켰다.
몬스터가 리젠되어 있으면 그나마 나았지만, 몬스터를 죽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어있으면 계단을 발견할 때까지 숨소리도 줄여야 했다.
*
상황이 전진되었다.
“올라가자.”
나는 조용히 말했다. 잔뜩 긴장한 헤스티가 숨죽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궁 밖 어버스나이트 교단으로 갔던 수희가 미궁 지하 3층에 도착했다. 지하 6층에 있었지만 알 수 있었다.
지하 3층에 바위 하나를종속화시켜놓았기에 수희가 3층에 도착해 바위에 손만 대는 것으로 알아차렸다. 미리 약속한 신호로 바위에 손대어 간략하게 내용을 전해왔고, 대략적인 대응을 결정할 수 있었다.
‘어버스나이트 사도가 움직인다. 격돌시기는 알 수 없다.’
일행에게 가장 중요한 사도와 사도의 격돌 타이밍을 어버스나이트 교단에서 숨겼다. 우리를 믿을 수 없는 만큼 당연했지만, 교섭자로 간 수희는 패배감을 느낀 듯했다.
내게는 카이바린 사도의 움직임을 알린 것만으로 의미가 있는데도 말이다.
나는 일행을 이끌고 미궁 지하 3층으로 마중 나갔다. 길잡이 스킬을 올렸기에 두 계층을 건너뛸 수 있었고, 몬스터를 정리해 계단을 찾는데도 이쪽이 더 빨랐다.
“수고했어.“
어두운 표정의 수희 손을 맞잡았다. 이어 로브를 걷어내고 고개를 가까이했다.
당연한 것처럼,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연인을 반기는 것처럼 부드럽게 껴안고 입을 맞췄다.
수희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수희뿐만 아니라 바리스와 헤스티도 당황했다.
내가 바리스, 헤스티, 에리, 수희와 성감을 나누는 건 모두 알지만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공공연하게 다른 이에게 보여주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필요한 순간이었다.
그녀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수희는 거부하지 않았다. 수희에게 노출 성욕이 있어 거부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키스를 보여주는 행위를 통해 충족되는 건 수희의 성욕이 아니라 우월감이었다. 수희는 권력을 탐하고 우월한 지위에서 자신을 찾는 타입이었다.
”흐으-. 흡.“
콧소리가 흘러나왔다.
깊고진한 키스는 수희에게 바리스나 헤스티에게 밀리지 않는다는 자존감을 채워주는 수단이었다.
그녀가 바라기 때문이 아니라. 바리스나 헤스티가 원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었다.
다른 이가 원하는 것을 홀로 채우는 순간은 쾌감이며 성적 쾌감과 엉켜지면, 굳은 어깨를 늘어트릴 만족이 될 수 있었다.
수희에게서 입을 뗐다.
내 얼굴이 멀어질수록 은은하게 몽롱해졌던 수희의 눈빛이 돌아왔다.
바리스와 헤스티에게는 악영향을 끼치겠지만,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다.
나를 포기하기에는 나와 쌓은 정이 깊었고, 수희를 마냥 미워하기에는 수희가 잃은 것이 컸다. 미움이 쌓일 마음에 동정심이 남아있었다.
바리스와 헤스티는 같은 공간에서 함께 애정을 나누는 것을 이미 허락했다. 이제 수희와의 애정을 보도록 강제되었다.
흥분과 당황이 식으면 뭔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떠오를 테지만, 그런 여유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미궁에서만큼은 무너지지 않을 원칙.
생존과 승리는 모든 것을 우선했다.
일행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전투가 눈앞이었고 살아남아 눈앞의 전리품을 볼 수 있을 때쯤이면 이미 지나가 버린 감정이 되어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