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35화
"여전히 성격이 안 좋네."
헤크론의 표정이 무너졌다. 나타난 자가 같은 카이바린 교단의 마법사라고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급히 호흡을 가다듬고 마력을 돌려 마력 영역을 정리하며 전투를 준비했다.
"크흘-."
양손검과 쌍검으로 무장한 두 여자, 한손검으로 무장한 자, 단검과 방패를 든 여자와 지팡이를 든 여마법사.
냉혹한 표정의 일행과 차분한 자세지만 분노가 가득한 바리스의 표정을 보고 헤크론은 상황을 깨달았다.
"그래, 좋아. 페로 잘 유인해왔네. 우리가 얻을 '연속 사망'의 영광에 눈이 멀 지경인걸."
헤크론에게 교단의 신성한 어구를 숨길 여유 따윈 없었다.
오히려 유혹하듯 신성한 어구를 내뱉으며 이간질을 시도했다.
헤크론은 이때까지 본 적 없었던, 쌓아두었던 악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페로의 얼굴을 보았다.
* * *
* * *
나는 적을 주시했다.
”좋군.“
내가 아는헤크론은 경험이 많은 자였다. 페로 혼자서는 감당이 안 돼 일행을 끌어드린 것이 이해가 갔다.
그는 연기에도 일행이 흔들리지 않자, 바로 태도를 바꾸었다.
그가 빠르게 윈드 스피어를 날렸다. 캐스팅 시간이 걸리는 마법이지만 헤크론은 시간을 단축해내는 단계, 헤스티가 사이킥 쇼크를 쓰듯 쏘아냈다.
먼저 견제를 해왔다. 헤크론도 일행도 피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는 공격.
방패를 든 에리도 양손검을 든 바리스도 끼어들어 막지 않았다. 페로가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공격이었다.
헤크론이 비릿하게 웃었다.
”자네나 나나 사냥개잖아. 사냥이 끝나면 잡아먹힐 거야.“
노회한 헤크론은 견제 공격으로 일행과 페로의 관계가 튼튼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나게 하고 자극했다.
헤크론이 헤스티를 노려 마법을 날렸으면, 에리가 막아서고 바리스가 끼어들었을 것이다. 헤스티가피할 수 있다고 해도 막았을 것이다.
일차적인 마법사끼리의 전투는 턴과 캐스팅 시간의 싸움이었다.
서로 상대를 확인하고 마법을 시전할 때, 상대의 마법을 피한 자는 시전하고 있던 캐스팅이 끊어졌다.
그래서, 마법 공격을 한 자나 피한 자나 같은 턴에서 다시 시작했다.
피한후에 마법을 쓰는 것이, 마법을 이어 쓰는 것보다 가벼운가 무거운가가 승부를 결정하는 요소가 되었다.
하지만 탱커가 있어 마법을 막아준다면, 바로 마법 공격당한 자의 턴이 되었다. 확연하게 유리해졌다.
헤크론과 헤스티의 싸움이었다면 바리스와 에리는 바로 끼어들었을 것이다.
만일 탱커가 끼어들지 않는다면, 탱커가 아군 마법사를 믿지 않는다는 뜻이다.
헤크론에게 페로와 일행이 얼마나 결속되어 있는지 탐색 당했다.
페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방긋 미소지었다.
"사냥개라, 뭐, 그거 인정하지. 하지만 아직 마지막 사냥이 아니야. 사냥감이 널려있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사냥이지. 헤크론, 나의 특기가 뭔지 잊었나?"
"너, 너 배신을 했구나."
헤크론도 페로의 특성이 성물 추적임을 알고 있었다. 헤크론은 페로가 그린 그림을 알아차렸다.
"더이상 나눌 말이 없습니다."
페로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은 헤크론을 향한 말이 아니었다. 일행의 참전을 요청하는 말이었다.
[더스트 붐]
헤크론이 소리도 없이 주문을 외웠다. 그의 지팡이에서 바람이 일어나 압축되고 지면의 흙이 상공으로 끌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끌려 올라간 흙이 작게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
가루가 지팡이를, 헤크론의 모습을 가렸다.
"도망칠 생각인 겁니다. [더스트 익스플루션]이 아닙니다. 분진 폭발이 아닙니다. 위험해 보이지만 단순한 연막 마법입니다."
나는 바로 반응했다.
나의 지시가 떨어지자 일행은 빠르게 움직였다. 처음 보는 마법이기에 공격반경을 넉넉히 잡고, 대신 어느 방향으로도 숨어들려 해도 알아차릴 수 있게 시야를 확보했다.
[그라비티 디스럽트]
헤크론은 페로와 상성이 나빴다. 페로 역시 이를 고려해서 첫 번째 타겟으로 선정했을 것이다.
어떤 현상을 일으킬지 몰라 경계할 수밖에 없었던 [더스트 붐]의 흙가루가 페로의 중력 마법에 바닥으로 당겨내려 갔다.
흙가루로 이루어진 연막 뒤에서 도망치기 위해 자신에게 육체 강화마법을 부여하려던 헤크론이 보였다.
단검을 던져 방해해냈다.
헤크론은 일행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바리스가 용사 전용 스킬, [어라운드 디펜스]로 보호막을 얇고 넓게 쳐버리자, 페로가 헤크론의 스킬을 오판했을 때 일어날 피해까지 차단되었다.
*
전투는 길지 않았다.
이미 지팡이는 땅에 떨어진 지 오래고 두 팔은 뼈까지 얼핏 보이는 상처에 너덜거렸다.
거기다가 폐가 피로 가득 찼는지 연신 피를 토해내면서도 헤크론은 눈을 감지 않았다.
마무리를 위해 한발 한발 다가오는 페로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나는 뒤로 물러섰고 바리스 역시 나를 따랐다.
일행은 헤크론과 충분히 싸웠다. 페로가 마지막으로 헤크론을 죽여 카이바린 교단의 '연속 사망'의 대가를 얻는다고 해도 일행의 경험치 손해는 적었다.
그때,
"혼돈의 이름으로."
수희의 단검이 움직였다. 어버스나이트의 신성을 머금은 단검으로 헤크론의 머리를 베어냈다.
베어낸 머리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마치 돼지 오줌보로 만든 공 같았다.
구르던 머리가 멈추었다.
잘린 머리의 헤크론 눈과 페로의 눈이 마주쳤다. 헤크론은 웃으면서 죽었다.
특별한 광경은 아니었다. 주변에 용병단의 시체가 널려져 있으니까.
"큭, 크."
페로가 비명을 토해냈다.
신도들을 희생해 신성을 쌓는 카이바린 교단도 사제급은 취급이 달랐다. 사제를 희생시켜 만들어낼 신성이 그 사제를 만들고 유지시켜서 얻을 이득을 넘어야만 했다.
그나마 카이바린교단이 유지될 수 있게 하는, 전사 계파와 마법사 계파가 쉽게 전면전을 일으키지 못하는 이유였다.
갈등이 극단에 치달아도 신성의 저울질을 인간이 가늠할 수 없기에 극단적인 내전이 일어나지 않았다.
페로도 목숨이 위험하지 않다면 배신을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순히 카이바린의 영광을 노린 것이 아니었다.
페로는 교단 내의 권위가 나날이 떨어져 나감에 따라 불안감을 느꼈다.
카이바린 교단은 다른 교단과 달랐다. 신도들의희생을 토대로 하는 만큼 사제의 몰락은 단순히 뒷방으로 물러나 식량만 축내는 평화로운 그림이 아니었다.
하루하루, 교단에서 어떤 큰 그림을 그리지 않을까 불안했다.
교단 내에 사제급을 희생해서 확실한 신성을 터트리는 계획, 페로를 제물로 삼자는 주장이 생겼을 때, 동의할 이는 많아도 막아줄 이는 없었다.
그래서, 페로는 헤크론 혼자 있을 때를 기다리지 않고 그가 신성한 행위를 일으키길 기다렸다.
헤크론만 죽이면 단순 배신으로 신벌을 받을 수 있지만, 신성한 행위의 연장선으로 헤크론까지 죽이면, 카이바리 신성은 올라오는 신성에 신벌을 내리지 않고 '냉대' 수준에 거칠 가능성이 컸다.
혹 카이바리 신성의 저울이 이득이 더 크다고 판단해주면 그만큼 좋은 일이 될 테고.
위태로운 줄타기지만, 깔끔하게 이어져 왔다.
페로는 준영을 믿을 수 없지만, 준영이 페로 자신의 유용성을 높게 평가한 것을 믿었다.
하지만,
배신당했다.
수희년의 돌발행동일 뿐, 준영의 의도가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의미 없었다.
신성의 ‘짜증’이 내리기 시작했다.
페로는 엎드려 벌벌 떨었다.
신벌보다 신의 ‘짜증’은 낮은 단계였다. 하지만, 신성을 이어받은 사제는 짜증만으로도 죽을 수 있다.
신성은 현상에 쉽게 개입할 수 없다. 힘의 발휘가 아니고 인과도 아니라면, 일반인 하나 죽이는데도 신성은 인과율을 소모했다.
하지만, 신성과 인과가연결된 사제는 짜증만으로도 핏덩이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어버스나이트에서 준영씨를 도울 거에요. 네르본 크리스탈을 빌려올 순 없지만, 사도님이 직접 약속하셨어요."
사제를 통해전해온 사도의 약속.
결코, 가볍지 않았다. 말에는 힘이 담겼다. 의지를 이용해 힘을 발휘하는 자일수록 의지를 조율할 수 있는 말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
'너무 쉽게 가려 했어.'
나는 반성했다.
내가 어버스나이트를 이용하고 있다고 느낀 것은 착각이었다. 강한 그들이 나의 줄다리기에 어울려줄 뿐이었다.
그 결과가 수희의 돌출된 행동이었다.
'불쌍한 년.'
그녀가 가진 정보만으로는 내가 이대로 물러설 거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카이바린과 나는 이제 적극적인 적대관계가 되었다.
이때까지는 카이바린도 여유가 있었다. 그들이 나를 공격할려할 때 이득보다 손해가 크면 우선순위를 늦췄다.
하지만, 내가 사제를 사냥하기 시작한 이상, 이제 그들의 권위를 위해서도 나를 먼저 처단해야만 했다.
'수희가 생각하는' 나는, 어버스나이트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오는데도 수희의 도움이 컸지만, 이제 어버스나이트가 없으면 생존이불가능해졌다.
‘수희가 생각하는’ 나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수희의 무례도, 나의 지휘에 어긋나는 행동도 용납해야 했다.
‘매 회귀 때마다 불행한 끝을 맞이하는 년이지. 불쌍하고 불쌍하지. 하지만, 동정과 용서는 다르다.’
수희는 착각하고 있다.
어버스나이트 교단과 수희의 존재는 일치하지 않는다. 교단은 교단을 위해서 수희를 버릴 수 있다.
카이바린 교단만이 사제를 소모하는 냉혹한 교단인 것이 아니다. 악한 교단과 착한 척하는 교단은 있어도 미궁에서 착한 자는 ‘바리스’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