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8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28화 (28/139)



〈 28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28화

입가에 피를 묻힌 남자가 마치 동상처럼 칼끝을 바닥을 향하게 세워 잡고 있었다. 레오나드는 결의에 찬 눈빛을 일행에게 보냈다.

"아직 도망치지 않았던가?"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소리를 올려 호통쳤다.

"이것들, 도둑놈이었나. 그런데 너무 늦은 거 아닌가. 재물에 목숨을 내놓았구나."

가문을 기리기 위해 꾸며진 공간에서 끝을 각오하던 레오나드의 말이 마지막에는 감탄하는 어조로 변했다.
억지로 일어나자세를 잡고 있었다는 걸 증명이나 하듯 주저앉았다.

수희, 바리스를 비롯하여 헤스티, 에리가 잔뜩 긴장하는 가운데, 나는천천히 기도실의 한쪽 벽을 향했다.
벽에는 이전에 본  있는 검이 걸려 있었다.

"하긴, 우리 뒤프레 가문의 보물을 얻으려면 그 정도 용기가 있어야지. 좋아, 한 사람당 하나씩 들고 갈 수 있게 해주지."

벽을 살피는 나를 보물을 탐하는 '용기 있는' 도적으로 보곤 선심 쓴다는 듯이 말했다.
가문을 아끼는 귀족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반응이지만, 레오나드는 비정상과 싸워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이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가문의 물건이 도둑맞아 더러운 곳에서 장물로 거래되는 것이 모욕이었다.
하지만, 키메라에게 짓밟혀 부서지는 것보다 낫다고생각하는 것이다.
어쩌면 장물을 구입한 다른 귀족이 장물에 그려진 문장을 보고 자신의 가문을 떠올리는 장면을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그럼, 레리아나님은 어찌 되는 겁니까?"

나는 낚시를 던졌다.
레리아나라는 단어는 사람의 이름이고 레오나드와 연관된 이름이다.

"이 죽일 놈들이. 어찌  이름을 입에 담는 거냐."

주저앉았던 레오나드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살벌한 기세를 내뿜었다.

"가문의 멸절을 생각하는 겁니까. 레리아나님 역시 찢어지고 짓밟히게 되는 겁니까?"

나는 벽에 걸려 있던 검을 떼어내 아름다운 아가씨를 보듬듯 쓰다듬었다. 본 적 있는 검, 레리아나의 검과 똑같은 검이다.
귀족 아가씨의 영혼이 맺히기 전의 검이다.

"건방지다. 네놈들이 언급할 일이 아니다."

호성이 레오나드가 아닌 옆에 있던 리버밸런스 사제에게서 터져 나왔다.
불쾌함에 잔뜩 찌푸린 얼굴, 성의 마지막이라는 숭고한 순간을 방해받아 화가 난 것처럼 꾸미고 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분노가 아닐 것이다. 리버밸런스가 품은 음모가 방해받으니 살기를 세우는 것이다.

"오, 역천칭의 사제님 아니십니까?  밖에서 키메라를 지휘하셔야 할 분이 어울리지 않은 곳에 계시는군요."

나는 오히려 유들유들하게 맞섰다.  리버밸런스의 사제는 강할 것이다.
레오나드 성의 위기를 꾸미고, 땅을 울리게 했던 변화를 일으킨 사제라면 평범한 존재일 수 없다.
하지만 지금 나를 암습할 수 없다. 공격을 할 수 있지만, 순식간에 제압할 힘을 부릴 수 없다.

'레오나드 영주가 열쇠다.'

수희가 훔쳐 들은 대화는 리버밸런스 사제가 레오나드를 설득하고 있었다. 어차피죽을 병사들이니 백성을 지켜 의무를 다하게 하자고사제가 말했다.
이는 설득해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광대한 변화를 일으키려면 설득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영주가 제대로 서 있기 힘들 정도로 싸웠다.'

그런 상황에서 영주의 부하가 힘을 아꼈다? 나를 한순간에 제압할 정도로 힘을 예비했다?
레오나드가 바보가 아니라면 바로 사제를 불신할 것이다. 음모가 있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나는 레리아나의 검이 되는 뒤프레 가문의 검을 마치 내 것인  허리에 찼다.
왼손을 오른쪽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가 대각선 왼쪽 바깥으로 크게 내리면서 허리를 숙이는, 귀족의 인사를했다.

"다시 인사들이겠습니다. 카이바리님을 모시는 카이바린 교단의 사제, 자로크입니다."
"거짓말."

리버밸런스 사제가 호통쳤다.

"왜 그러십니까? 저를 아십니까?"

바리스와 헤스티가 얼굴에 억지로 힘을 줘 표정 변화를 참았다. 자로크는 둘과 함께 미궁 지하 3층 코볼트 던전에서 죽인 마법사의 이름이다.
미궁 세계와 미궁 지하 7층의 세계, 미궁에 존재하는 리버밸런스가 미궁 지하 7층의 세계에 존재했다. 그렇다면 다른 신성도 존재하지 말라는 법 없었다.

나의 추측이 맞아들어갔다. 최소한 리버밸런스 사제는 카이바린 교단을 알고 있다.

"카이바린 교단이라고, 그것이 어떻단 말인가."

내가 심상치 않아 보이는지 레오나드가 물어왔다.

"카이바린의 사제는 버프의 권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 역시 사제로서 권능을 가지고 있지요.
가치가 있는 것을 바쳐 가치가 있는 것을 빼돌리는 권능입니다."
"거 도둑놈이 가질만한 권능이구나."

레오나드는 귀족으로서 미덥지 않으니 모욕의 말을 했다. 하지만, 나는 어차피 거짓을 말하는 중이기에 아무렇지 않았다.
나는 내가 챙긴 레리아나의 원본 검을 살짝 내밀었다.

"이 검이라면  검과 연관된 혈육 하나는 빼돌릴 수 있겠지요. 아, 보상은 따로 주셔야 합니다. 마지막 계승자의 목걸이 정도면 되겠군요."
"어차피 죽을 몸, 짓밟힐 가보, 목걸이는 아깝지 않다. 정말로 레리아나를, 나의 딸을 구할 수 있겠는가?"

나는 비릿하게 웃었다.

"저를 믿지마시길. 이 위험한 곳에 남아 도둑질하는 사실을 믿으시길. 살아나갈 자신이 있으니 여기 있는 거지요."
"당장 저놈을 물리십시오. 저자는 거짓말로 레오나드님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리번 사제는 잠시 물러서게. 그대의 의견을 무르는 것이 아닐세. 비록 모계로나마 가문이 이어진다면 어찌 이를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리번 사제라고 불린 리버밸런스 사제가 입술을 깨물었다.
힘과 의지와 매개물.
이 세계에 일어나는 이적은 이 세 가지가 완비되어야 한다. 리버밸런스의 음모는 진행할 힘도 매개체가 될, 제물이 될 레오나드의 몸과 병사들도 갖추었다.
하지만 의지를 세우지 못했다. 레오나드의 허락을 얻지 못했다.

'자 어떡할 거냐? 리버밸런스. 이제 전부를 먹지 못한다. 일부를 내놓을 거냐?'

리버밸런스가 파투를 내는 건 쉽다. 지금 나와 레오나드를 공격하면 된다.
그럼 나는 일행을 잃고, 나 역시 죽어 다시 회귀할 가능성이 크다. 짜증이 나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리버밸런스는 완전한 실패를 하게 된다.
리버밸런스도 교단인 이상 신성한 행위가 있을 것이다. 카이바린 교단도 '연속 사망'이라는 신성한 행위로 신성을 얻으려 했었다.
병사들을 반투명체로 만들 정도로 변화를 일으킬 힘이면, 그냥 성을 함락하고 전멸시키는 것이  쉽다.
하지만 신성을 올릴 신성한 행위가 걸려 있으니 이렇게 복잡한 음모를 세우는 것이다.

'리버밸런스의 신성한 행위가 뭔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신성한 행위가 중요했다. 신성한 행위를 알면 해당 교단의 신성을 크게 올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교단을 방해할 때도 유용했다.
중요한 조건에 간섭해 성장을 무마시키고 쇠하게 할 수 있다. 어버스나이트 교단에서 수희를 보내 내게 투자하는 것도 내가 그들의 신성한 행위를 일컫는 문구를 언급했기 때문이다.

리번 사제가 이를 갈았다.

"그럼, 저는 제례를 준비하겠습니다."

그가 한발 물러섰다. 얻을 수 있겠지만, 그가 원래 얻고자 하는 바에 못 미칠 것이다.
레오나드가 일행이 도망치는 시간을 생각해 시작을 늦출 테니 때를 놓치게 된다. 귀공녀 레리아나를 놓치게 되니 모두를 제물로 삼지 못해 흠이 있게 된다.

그럼에도 리번 사제는 물러섰다. 분노에 판을 엎어버리기에는 투자한 힘이 너무 거대했겠지.

"레리아나."

레오나드가 천천히 뒤로 걸었다. 아름답게 장식된 네모난 석제 가구 앞에 멈췄다.

"관?"

헤스티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예상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다만아직 살아있었다.
레오나드가 무거운 덮개를 밀자, 크르릉 거리는 소음과 함께 안이 드러났다.

"아버님···."

이제  성인이 되었을까. 마지막을 기리듯 곱게 화장을 한 소녀가 아비를 부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보석으로 장식된 단검이 있었다. 단검의 끝이 기이한 색으로 물든 것이 자살을 위한 단검임을 알 수 있었다.

"아직 그 단검을 쓰지 않았구나."

레리아나는 겁먹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행했던 모르고 행했던, 병사들을 무기에 얽매인 존재가 되어버리게 한 성주에게도 딸을 사랑하는 마음은 컸던 걸까.
아니 딸이 곱게 죽을  있도록 관과 독을 준비한 것을 애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너는 저자를 따라가. 남편을 얻어 가문을 이어라."

목멘 목소리로 내뱉는 말에 부성애가 담겨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흐느끼는 울음을 흘리며, 레리아나는 관에서 나왔다.

에리가 레리아나 귀공녀를 등에 업었다.
일행은 몇 가지 가보를 더 챙긴 후에 리번 사제의 살기 어린 눈을 뒤로하고 빠져나왔다.

*
*
*

격전이 이어졌다.
리버밸런스 사제는일행을 죽이기 위해 거대한 힘을 이용하지 않았지만, 키메라의 지휘 역시 그의 능력이었다.
성 내부로 흩어진 병사들과 주민들을 학살하던 키메라들이 일행을 노리고 포위하려 했다.

"그나마 키메라에게 [기억 전송]이 안 되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가로막는 적을 쌍검 연격으로 쓰러트리고 수희는 이마에  피를 닦았다.

"그랬다면 위험했겠지. 그런데, [기억 전송]은 정말로 쉽게 쓸 수 있는 권능이 아니야.
전장 전체를 자신의 영역으로 귀속시킬  있는 지배자급이나 한 곳에서 수백 년 터를 잡은 마물, 혹은 개미 여왕같이 종속체 운용에 특화가 된 몬스터가 아니면 효율이 나오지 않아.
차라리 직접 움직이는 것이 나을 정도지."

헤스티가 귀를 쫑긋거리면서 토시 하나 놓치지않겠다는 듯 집중했다. 말이 끝나자 수희를 향해 이분이 이 정도로 대단하다는 식의, 과시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웃음이 나왔지만 참았다.
헤스티도 예전에 어디서 들은 것을 자신이 완전히 이해한 지식인 양 말하던 걸, 내가 수정해준 적 있다.

'제대로  정보가 중요해.'

어느 정도냐면 급히 이동해야 하는 도중임에도 말해두어야 할 정도다. 물론, 헤스티와 에리의 급해진 호흡을 다스릴 시간을 주는 의미도 있지만.

'정보가 없으면 인간은 눈앞의 고난을 과장한다. 공포로 몸이 굳고, 직시하면 볼 수 있는 틈을 보지 못한다.'

지금 역시 그럴 위험이 존재했다.
리버밸런스 사제가 [기억 전송]이 가능하다면 키메라들이 성안의 구조를 제대로 알고 있다 생각하고 움직여야 했다.
더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필연적으로 속도가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속도가 떨어지면 포위당할 위험이 더 커진다.

리버밸런스 사제가 내린 명령은 성안에서 도망치는 용병과 귀공녀를 잡아라 정도인듯했다.

지형은 일행에게 유리했다.
에리에게 업혀서 전투에 벌벌 떨며 피가  때마다 기겁하는 레리아나지만, 성의 구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지금 울음을 터트려도 될 때인지, 알고 있는 바를 말해야 할 때인지를 구분했다.

전투를 염두에 둔 성은 많은 사람이 오가는 교단의 예배당과 달랐다. 일부러 통로를 헷갈리도록 지었다.
특히 탈출로와 연관된 구역은 기술과 자본을 투자해 착각하도록 만들었다.
레오나드와 만났던 조상을 기리는 기도실도 자주오가는 주요시설이라 내가 위치를 추측하고 찾을 수 있던 거지, 탈출이나 반격 시설이었으면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레리아나는 뒤프레 가문을 이을 자였다.
성의 병력 사항은 몰라도 탈출로는 반복해서 교육받았다.

*

성 밖 수풀로 들어섰다.

"레리아나 이제 눈을 감아도 돼. 보이는 걸 외면해도 돼."

바리스가 에리에게 업힌 레리아나 어깨에 손을 올려 부드럽게 다독거렸다.
일행은 몰려드는 키메라 때문에 들어간 통로로 나올 수 없었고, 빠르게 이동해야 했기에 성의 구조를 아는 레리아나는 잔혹한 광경에 눈을 돌릴 수 없었다.

"몬스터들의 배치가···. 적은 우리가 숨겨진 통로로 들어왔다는 걸 모르는군요."

나는 수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몬스터는 이제 성의 뒤쪽까지 포위했고 사제의 지시 때문인지 밖으로 벗어나는 길을 중첩 경계했다.
하지만, 일행이 왔던 통로로 향하는 길은 경계가 적었다.

이는 미궁 밖의 세계를 모른다는 뜻이었다. 성에 선 인간 모두를 변화시킬 힘을 가진 리버밸런스도 일행이 나왔던 통로를 모른다는 뜻이었다.
키메라나 병사들은 그림자가 없었다. 레오나드나 강대한 힘을 가진 리버밸런스 사제도 마찬가지였다.
미궁 7층에 속하는 자는 그림자가 없었다. 리버밸런스 사제는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미궁 7층에 속하기에 통로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레리아나에게도 그림자가 없었다.

'죄를 짓는군.'

입맛이 썼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레오나드를 속이는 건 무감각했다. 리버밸런스 사제를 속이는 건 오히려 쾌감이었다.
하지만 인성이 마모한 나라도 나를 마지막 동아줄로 믿는 소녀의 눈을 마주하는 건 고통이었다.
나는 구해준다고 말했고, 레리아나는 구해줄 거라고 믿고 있다.

*

일행은 처음의 통로로 빠르게 움직였다. 레리아나가 알고 있는 다른 성으로 이어지는 길로 갈 수 없었다.
키메라가 잔뜩 지키고 있다는  둘째치고, 곧 리버밸런스 사제가 레오나드의 승인을 받아 이곳의 모든 인간을 무기에 얽매인 반투명체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다 왔어요."

밝은 표정으로 흘리는 헤스티의 감탄사에 나는 침묵했다.
나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에리에게 업혀있던 레리아나에게 다가갔다.
임무의 끝이 다가왔음에 편한 표정을짓던 바리스도 천천히 굳어졌다. 내가 예측한 사실을 그녀도 추측하고, 딱딱하게 굳은 나의 표정에 확증을 얻었다.

"이 레리아나는···."

바리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흐음, 짜증이 나는군."

나는 아무도 듣지 못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한 회귀가 짜증 났다. 고통도 고통이지만, 죽어가고 끝을 맞이하는 아군의 모습도 그 회귀한 숫자만큼 봐왔다.
몇 번을, 몇백 번을 봐도 보기 싫은 모습, 동료가 죽어가도 전투 컨디션을 유지할 정도로 정신은 단련되고 마모되었지만, 이 짜증은 바뀌지 않았다.
바뀔 수가 없었다. 내 마음이 괴롭기 싫어서 짜증으로 감정을 몰아버리는 거니까.

'약을 쳐야 하는 순간인가.'

감정과 별개로 생각을 계속했다. 나의 이득과 생명을 사랑하는 바리스의 마음을 위해 움직여야 한다.

나는 매고 있던 레리아나의 원본 검을 떼어내 에리의 등에서 벗어나 홀로 선 레리아나에게 건넸다.
둥그렇게 뜬 소녀의 어린 두 눈과 마주했다. 마음을 울리는 양심의 가책을 무시했다.

"네게 힘든 시기가  거야. 하지만 당장 구할 힘이 우리에겐 없다."

무슨 말인지 몰라, 의문만 떠올리는 소녀에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구할 방법을 알아. 나는  리 없는 것도 아는 자다. 너와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는데 너를 아는 것처럼."

믿음을 주어야 했다.
사실을 말하면서도 거짓을 말했다.
사물에 얽매여 버린 영혼을 푸는 방법은 존재할 것이다. 이에 대한 힌트를 예전 회차에 얻었었다.
이는 사실이다.
하지만, 힌트뿐이었다. 나부터 확신하지 못했다.

나는 기사처럼 레리아나의 앞에 무릎 꿇었다. 무슨 말인지 몰라 머뭇거리기만 하는 레리아나의 손을 들어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났다.
매정하게 등을 돌리고 앞장서서 걸었다.

일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나를 따랐다. 레리아나는 흠칫하고 종종걸음으로 일행의 뒤를 따랐다.

미궁 지하 7층의 레리아나의 원본 검과 달리, 원래 미궁의 레리아나의 검은키메라에 대한 원한이 서린 검이다.
키메라에 대해 탁월한 위력을 발휘하는 에고 소드다.
우리가 개입하지 않았을  일어날 비극을 추측할 수 있었다. 레리아나는 기도실의 석관 안에 숨어 레오나드가 키메라와 싸우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조용히 자살하지 못하고 석관 안에서 끄집어내져서 레오나드와 함께 비극을 경험했을 가능성이 컸다. 리버밸런스 사제도 레리아나가 석관 안에 있다는 걸 아니까.

어쩌면, 레오나드를 설득하는마지막 재료로 쓰였을 것이다.
레오나드는 자신의 딸이 눈앞에서 무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보고 생명이 무기에 얽매여지는 저주에 굴복했겠지.
그의 딸 역시 무기에 얽매이는 결과를 만들어 버렸겠지.

그냥 레오나드  영역을 벗어날 순 없었다.
비정할지라도 이득을 키워야 했다.
이대로는 레리아나가 가진 한이 얕았다. 검에 얽매여 미궁 지하 15층 이상 가치가 있는 검으로 될 만큼 특이한 재능이 있다고 해도, 이대로는 ‘레리아나의 검’이아닌 자살하려고 가진 독단검에 빙의될 뿐이다.
그냥 질 좋은 독단검이 될 뿐이다.

그래서 레리아나를 자극했다. 희망을 품도록. 미련을 가지도록.

조용히 걸었다. 침묵 속에서 걸었다.

크청- 청-
두 개의 금속이 딱딱한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레리아나의 검과 레리아나가 들고 있던 자살용 독단검.

"아, 레리아나···."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헤스티가 감정을 억제하는 목소리로 불렀다.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나는 천천히 뒤로 가 검을 들어 올렸다.

"죽은  아니야. 이 검에 맺혀있다."

독단검은 그대로의 평범한 독단검이 되었다. 레리아나의 검은 '남편을 찾는, 기다리는' 검이 되었다.
바리스가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슬프면서도 납득하는, 그럼에도 미련이 가득한 표정.

"정말···. 아버지의 유언과 준영씨가  말을 기억한 건가요. 순수한 아이···."

바리스가 선을 추구한다고 해서 악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 얼마나 악한지 알고 있다.
그렇기에 진심으로 레리아나에게 탄복했다.

"준영씨, 거짓이 아니지요? 이 아이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 내가, 내가 더 강해진다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할  있다고 말한  레리아나 때문이기도 했지만, 바리스의 이런 반응을 얻기 위함이기도 했다.

일행은 미궁 7층 모험을 끝냈다. 미궁 5층 에드샤가 있는 거점으로 이동했다.
바리스는 양손검을, 에리는 방패와 검을, 헤스티는 장비를 얻지 못했지만 경험치를 함께 받았다.
수희 역시 상당한 경험치를 얻었다. 또한, 리버밸런스에 대한 정보는 교단에서의 그녀의 위치를 상승하는 재료가 될 것이다.
나는 경험치와 더불어 독단검과 레리아나의 검을 얻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