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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27화 (27/139)



〈 27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27화

성벽 아래로 내려왔다.
병사들의 죽음이 보이지 않으니 바리스가 받는 충격이 낮아지고, 빠르게 안정되었다.
심리적인 탈진은 걱정하지 않았다.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다.
긴장의 끈을 놓을 순간이 아니었다.
일행이 물러날 때 키메라역시 따라 들이닥쳤고, 생존을 향한 투쟁 본능은 적에게 반응했다.

성벽과 성벽 사이는 미궁 통로를 연상시켰다. 막힌 환경이지만, 오히려 일행의 심리를 안정시켰다.
평정심이 회복되면서, 몬스터의 공격을 더 정확하게 보고공격의 호흡을 더 잘게 나눠 대응했다.

"다시 후퇴."

나는 지시를 내렸다.
적 주력은 레오나드 영주 쪽을 노렸다. 일행이 있는 곳은 구석이라 주력이 여기까지 오진 않았다.
하지만, 성벽 위가 넘어간 만큼 주변 적들이 기세를 올리기 위해 모여들었다.

일행은 미리 정해두었던 마지막 구역까지 빠졌다.
성벽을 넘어온 적이 고민할, 안쪽 성벽을 공략할 지, 패배해 물러나는 병사로 보이는 우리를 추적할 지 정해야만 하는 위치까지 빠졌다.

"이제 시작하자."

나는 미리 [관리 대상 인지]를 통해 통제해낸 기둥을 통해 전장의 흐름을 파악했다. 적은 안쪽 성벽을 넘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하고, 병력의 머리를 안쪽 성벽으로 돌렸다.

우리가 치고 나가도 적 병력에 뒤덮일 위험이 줄어들었다.
적 병력이 공격 방향을 우리 일행에게 돌리려고 해도 이미 늦었다. 거대 집단의 운용은 서너 명의 진형과 달랐다.
공격하며 전진할 앞면을 다른 방향으로 트는데 시간이 걸렸다. 징조 없이 변경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징조는 미리 [인지]해둔 기둥으로  수 있다.

"헤스티, 파이어 계열은 쓰지 마라."

사이킥 쇼크는 개인의 투사 무기와 비슷한 취급을 받는다. 혼전 중에 써도 특별한 타겟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파이어볼은 달랐다. 밀집 대형을 처리할 수 있어 전장의 열쇠가 되는 만큼 적 역시 우선 처리하려 할 것이다.

[휠 크래쉬]
바리스가 거칠게 검을 휘둘러, 달려들던 키메라의 몸을 뻗어오던 촉수와 함께 베어냈다. 에리가 [핑거 푸쉬]로 받은 지시에 따라 바리스의 움직임에 생기는 틈을 메꾸었다.

거친 전투가 이어졌다. 살기와 살기가 충돌하고 동강 난 키메라의 살덩어리가 날아다녔다.

하지만, 이질감, 바리스의 감정.
바리스 내부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받아들이고 포용해 흐름이 잔잔해졌다.
나는 바리스의 흐름에서 차가운 분노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

'주력과 주력이 맞붙었다. 예기가 꺾였다. 레오나드 영주는 성벽 위를 빼앗겼다.'

나는 전투 상황을 읽었다.
물론 이를 일행에게 알리지 않았다. 수희를 비롯한 일행에게는 최고의 경험치 파밍의 순간이었다.
연전이 이어져도 성벽으로 내려오기 전에 몇 마리가 어디서 내려오는지 아는 만큼, 나의 지휘로 대처해냈다.

'병사 절반이 무너졌다. 난전이 시작되었어.'

일행과 함께 싸우며 경험치를 누적시키면서도 감각을 바깥쪽으로 열었다.

그르르릉-
땅이 울렸다. 폭발의 진동이 전해진 것이 아니다. 폭발의 진동이라고 하기에는 울림이 깊었다.

빠르게 기억을 뒤졌다. 비슷한 감각을 떠올렸다.
이내 답을 찾았다.

거대한 힘이 움직이기 전의 징조다. 이미 움직이며 일어난 울림일 수도 있지만, 움직임을 준비하는 꿈틀거림일 수도 있다.

"에리 이리와. 헤스티는 나와 에리를 엄호."

상대하던 적은 수희, 바리스에 맡기고 뒤로 빠졌다.
에리를 꽉 껴안았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에리에게 속삭였다.

"에리, 내가 도와줄 테니, 땅을 통해서 기파를 쏘아내는 거다. 5층에서 에드샤가 하던 것을 기억해."

5층에서 에드샤는 한 번씩 땅에 손을 대고 집중했었다. 눈으로 보이는 변화를 일으키지 않았지만, 나는 알아챘고 에리는 배웠다.
마치 빛이 없는 동굴을 날아다니는 박쥐와 같았다. 박쥐가 공기 중에 들리지 않는 소리를 쏘아내고 반사해 오는 반향으로 장애물을 파악하듯, 에드샤는 땅속으로 기파를 쏘아내고 침입자를 감지했다.

에리의 수준은 에드샤에 비교할 수 없었다.
에드샤는 넓은 영역에 적을 찾아냈다. 하지만 에리에게 원하는 건 생물 하나를 찾는 것이 아니었다.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려 한다."

에리는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재빨리 해야  일을 알렸다.

"기파를 방사해 진동이 시작된 지점을 찾는다. 불안해하지 마. 네가 분별해내지 못해도 내가 알아차릴 테니까."

나는 에리의 감각에 동조했다. 관리 대상으로 인지된 에리이기에, 에리가 느끼는 것이라면 나 역시 느낄 수 있다.
에리의 수준이 낮아 분별해내지 못하는 자극에서 정보를 끌어낼 수 있다.

*

바리스와 수희가 나를 감싸는 형태로 싸우는 가운데, 헤스티 역시 짧게 사이킥 쇼크로 달려드는 몬스터 움직임의 맥을 끊어냈다.

"간다. 모두 빠르게 이동한다. 일단 뒤로 빠진다."

진동의 시작점을 찾았다. 성 내부의 한곳에서 시작되었다.
이곳 전체에 대한 변화가 일어나려고 한다. 이는 당장 모든 것을 포기하고 빠져나가던지, 개입해야 한다는 뜻이다.
멍하니 전투만 이어가 경험치만 탐하다가는 그 변화에 당해버린다.

마음이 급했지만, 표를 내지 않았다.

'뭔가가 시작되려 한다.'

나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해보지 못한 경험은 환영이다. 모두 미궁 클리어의 토대가 될 것이다.

*

성 뒤쪽으로  돌았다. 변화가 일어나려는 위치로 직선거리로 가면 성안으로 들이닥치는 몬스터들을 뚫어야 했다.
성안으로 들어갔을 때 미리 살펴보지 않았다면 헷갈릴만한 쪽길.
길이 좁아 병력이 움직일엄두를 못 낼 만한 길을 지나 성안으로 향하는 통로로 들어섰다.
당연히 뒤쪽에는 지키는 이가 없었다. 영주인 레오나드가 성안에서 대기했다면 침입자를 대비했을 테지만, 아예 전방으로 나간 만큼 경비병 모두 전투에 동원되었다.

*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나의 신호에 모두 발소리를 죽였다.
급하게 달려왔기에 무력 수준이 낮은 헤스티는 은밀을 유지하지 못하니 에리와 함께 거리를 띄우고, 바리스와 내가 전열을 책임지는 가운데 수희가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수희가 자존감이 넘치는 표정을 지으며 바리스와 나를 스쳐 지나갔다.

심리가 엿보이는 행동, 수희가 일행을 알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그때는 수희가 자신의 특기를 내세울 일이 없었다. 그냥 탱킹이든공격력이든 이동 속도든 뭘 비교해도 일행 중에 최고였다.
하지만, 바리스가 빠르게 성장했다. 그것도 흔들림 없이 당연하다는  꾸준히 성장하니 따라잡히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거기다가 나 역시 그녀에게는 자극일 것이다. 일상적인 전투에서는 묵직한 전투의 바리스와 빠른 전투의 수희, 둘의 중간 스타일로 어울리듯 딜을 했지만, 나는 치명적인 순간에 한 번씩 경험을 되살려 오버 파워를 냈다.
그녀의 예측을 벗어나는 일격. 그녀의 우월감을 건드리기 충분했다.

그렇기에 은신이 필요한, 자신만이 할  있는 일에 미소를 보여주며 전진하는 거다.
꺼릴 일이 아니었다. 자존감은 생존에 중요한 요소였다. 타인에게 주는 영향만 아니면 성장의 거름이 된다.
애초에 강력한 아군에 질투할 바리스가 아니었고 질투 끼가 있는 헤스티는 나를 눈에 가득 담였다. 나의 행동이 아닌 수희의 능력에 감정이 움직일 틈이 없다.
미소를 남긴 수희가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 * *
* *
* * *

기도실, 납골당과 예배실의 분위기가 섞인 곳.
위패가 없기에 납골당은 아니고, 신이 아닌 선대의 조상을 기리는 곳이기에 예배실도 아니었다.
혼란한 시기임에도 유려한 가구와 벽면에 걸어놓은 유래 깊은 검은 레오나드 성주까지 이어지는 가문의 여력을 비추는 듯했다.

"레오나드님, 결정하셔야 합니다. 어차피 죽을 병사들입니다. 더욱이 백성을 지키는 것은 병사들의 의무, 그 의무를 다할  있도록 용인하심이 다스리는 이의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수희는 대화를 엿들었다.
리버밸런스 교단의 문장을 가진 남자가 일부가 부서진 판금 갑옷을 입은 남자를 설득하고 있었다.
입은 상처가 가볍지 않은  침음을 흘린 레오나드의 얼굴에 깊은 고뇌가 서렸다.

* * *
* * *
* * *

'어차피 죽을 병사들, 백성을 지키는 것이 병사들의 의무.'

수희가 은신해 근접해서, 훔쳐 듣고 전해준 말이다.
이에 떠오르는 사실이 있다. 지하 7층 무기고, 숨겨진 통로로 들어오기 전에 상대했던 반투명체들.
무기를 들고 덤비던 반투명체들. 그것들과 싸울  몬스터가 무기를 쓴다기보다 무기가 움직이기 위해 반투명체를 이용한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약점마저 그랬지.'

반투명체의 한 부분이 아닌, 무기의 손잡이가 약점이었다. 무기를 매개체로 반투명체가 얽매여졌다.

'성을 지키던 병사들은 반투명체가 되어버리고, 반투명체가 된 병사들은 미궁 탐험가들이 무기고라고 이름 지은 레오나드의 성을 지킨다.'

이미 일어났던 일이자 앞으로 일어날 일이다.
지금 이곳은 레오나드 성의 과거다.

새삼스럽지 않았다. 무한 회귀를 하는 내가 있는데, 과거의 일이 다시 진행될  없다고 못 박을 수 있을까. 그것도 미궁에서.

'개입해야 한다. 개입하지 않으면 우리도 무기에 딸린 반투명체가 되어버리겠지.'

해야 할 일에 집중하려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유혹을 느꼈다.
나는 죽고 되살아날 때마다 영혼이 갈려나가는 고통을 겪었다. 차라리 무기에 얽매여버리는 것이 행복하지 않을까.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내게 부여된 회귀의 저주는 '레오나드 성의 과거'와는 수준이 다른 저주다. 미궁 한 층이 아니라, 미궁 전체, 미궁 자체와 연관된 저주다.
지금 나의 상태가, 사악한 마법사에게 붙잡혀 유리관 속에 뇌만 남아 환상만 주입받는 지경이 아니라면 말이다.

빠르게 사고를 전개했다.
여기서 머뭇거리면 일행은 무기에 얽매인 반투명체가 되고, 나는 반투명체가 되는 순간 사망 처리되고 고통받으며 회귀할 것이다.
상념은 길지 않았다. 레오나드 성의 저주에서 벗어나야 한다.

"잠깐, 그럼 레리아나의 검은 어떻게 된 거지?"

 밖으로 소리내어 말했다.
에리는 당연히 모르고, 바리스와 헤스티도 레리아나의 검을 몰랐다. 레리아나에 관련된 정보는 초보자가 접근할  있는 정보가 아니었다.

"뭐, 후테른이었던가, 그  좋은 모험가가 잘 쓰고 있겠지. 경매장에 매물로 내놓았다는 말은 못 들었어."

수희는 영악했다. 고급 정보를 알고 있어서 영악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낸 목소리 크기에 맞춰서 비슷한 크기로 대답해왔다.
내 목소리 크기는 평상시와 달랐다. 레오나드가 대화하면서 접근하는 자가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지만, 대화 내용은 알아들을  없는 크기였다.
레오나드와 리버밸런스 사제에게 정보를 더 모을 필요가 있다.
기습하지 않을 생각인 이상, 소음을 내서 접근을 알리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후테른은 운이 좋은 모험가였다. 무려 ‘미궁 지하 7층 무기고’에서 15층 이상의 가치가 있는 무기를 구했다.
레리아나의 검. 무려 에고 소드였다.
심층의 심층에서 구한 것이 아니기에 전설에 등장하는 에고 소드처럼 온전하진 않았다.
대화는 불가능했고, 흐느끼며 검의 이름만 간신히 알아들을 한이 가득한 노래를 부르곤 했다.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은 현상을 일으키지만, 검집에 집어넣으면 조용해지기에 감당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장점이 컸다.
키메라와 마주하면 저절로 검신에 푸른 검기가 맺혔다. 외형뿐만 아니라 그에 어울리는 절삭력을 발휘했다.
후테른은 그 검을 든 이후로 키메라를 상대로 막기를 해본  없다고 했다. 힘을 실어 휘두르지 않고 검으로 마주 부딪혀도 역으로 공격해온 키메라의 몸이 검기에 분해되어 버렸다.

경매장에 나오는 순간 15층에서 나오는 물건과 같은 등급을 받을 물건이었다. 지하 20층을 넘어가면 일차원적인 검기가 통하지 않는 몬스터가 나오기 시작하기 때문에 유용성이 떨어지지만, 이전 층에서는 키메라를 상대로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이곳이 레오나드 성의 과거라면 이곳에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이는 레오나드와 싸우지 않고 대화를 할 이유를 더했다. 이곳에서 레리아나의 검을 구해서 나간다면, 미궁의 불가사의에 의해 후테른이 들고 있던 레리아나의 검은 사라지겠지만 내 알 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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