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23화
미궁 7층.
나는 일행을 둘러봤다.
수희만 여느 때와 다름없는 표정을 지을 뿐 에리와 헤스티는 물론 바리스까지 긴장했다. 공략 가능하다는 말은 쉽다는 뜻이 아니었다. 변수가 적을 뿐이지, 바리스, 에리, 헤스티는 피격을 허용하면 치명상을 입을 것이다.
"이미 설명하고 훈련했지만, 다시 한번 말한다. 헤스토의 무기고에는 인간형 반투명체가 나와.
유령 같지만, 유령이 아니야. 마법은 물론이고 모든 물리 공격이 통해.
다만 심장 등의 급소에 대한 치명타는 적용되지 않아."
나는 수희를 슬쩍 봤다.
무력 수준을 제외한 내용만 보면, 검 두 개를 써서 치명상을 자주 노리는 수희에게 해당하는 사항이었다.
바리스는 양손검을 쓰기에 극소부위 치명타보다 넓은 면에 타격을 주는 공격을 주로 했다.
나의 시선을 느낀 듯 수희가 말을 이었다.
"급소는 있어. 무기와 반투명체가 연결되는 손잡이가 약점이야. 아. 주의해. 무기를 잡은 손이 아니라 무기의 손잡이야."
나의 염려가 가당찮다는 듯 수희는 추가 정보를 말했다.
나는 수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수희는 더 아래층까지 내려가는 공략자이자, 브리핑에 끼어들 수 있을 정도로 무기고에서 싸워본 경험이 있다.
일행은 진형을 유지한 채 걸음을 옮겼다.
*
"레이피어 세 개. 탱킹."
수희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외침이 끝나기도전에 레이피어의 날과 수희의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단음이 아니었다. 검이 나가고 회수하는 동작에 세 번의 충돌음이 터지고 인간 형태의 반투명한 것들이 들고 있던 레이피어가 팅겨졌다.
격돌이 끝나기도 전에 수희의 대각선 뒤에 있던 바리스가 움직였다. 틈을 파고들며 양손검을 횡으로 크게 휘둘렀다.
[휠 어라운드]
커다란 반원이 투명체 하나의 다리를. 다른 것의 팔을. 그리고 마지막 것의 레이피어의 손잡이에 격돌했다.
수희가 매우 짧게 바리스의 전투를 훑었다.
휘이익~. 탄성을 터트리는 대신 휘파람을 불었다.
‘공교롭군.’
바리스는 기대 이상 능력을 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리스는 에리나 내가 탱킹할 때보다 수희가 탱킹할 때 더 강한 딜을 냈다.
물론 기본적으로 수희의 탱킹이 뛰어났다.
탱킹이 좋을수록 딜러의 딜이 올라가는 법이었다. 탱커가 버텨주면 딜러는 동작이 커서, 빈틈이 생기지만 강력한 공격을 편하게 쑤셔 넣을 수 있다.
거기에는 심리적인 요소 또한 존재했다. 딜러가 탱커를 믿을수록 제대로 된 공격을 펼칠 수 있다.
딜러에게 생긴 틈을 탱커가 채워줄 거라고 믿는 만큼 강력한 공격을 할 수 있다.
'바리스는 반대야. 믿지않으니까, 더 강한 딜을 내는 거다.'
바리스에게 수희는 수상한 자였다. 물론 내 지시가 없는 한 경계를 할지언정 먼저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신뢰 관계면 딜러의 딜이 떨어져야 정상이었다. 무의식중에 사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바리스는 더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범위 공격인 휠 어라운드를 쓰면서도 무기 몬스터의 약점인 손잡이를 정확하게 타격해냈다.
'그동안 성장도 했지만, 제약이 풀렸어.'
감각과 능력의 오버밸런스.
바리스는 감각이 뛰어났다. 극초반의 얕은 수준으로도 나의 기술 깊이를 알아보았다.
성장해서는, 딜러로 참가하면서도 탱커의 위험을 느껴냈다. 자신의 공격이 일으킬 변화를 직감해냈다.
하지만, 후속 움직임으로 자신이 만들어낸 악영향을 배제해내지 못했다.
능력이 감각이 성장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능력 성장이 늦은 것이 아니라, 감각 성장이 워낙 빨랐다.
결국, 이는 최대한 오버 파워를 내야 할 때 힘을 예비하는 습관을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바리스에게 수희는 아군이 아니었다. 바리스의 전투 여파에 수희의 자세가 무너지든 말든 상관할 필요 없었다
전심을 투사한 일격이 수희가 휘파람을 불 정도로 제대로 된 위력을 뿜어냈다. 그리고 앞으로 저런 일격이 중첩될 때마다 나쁜 습관이 사라질 것이다.
*
물 흐르듯 전투가 이어졌다.
적 하나는 손잡이에 일격을 당해 전투 불능이 되었다. 다른 두 놈이 밀려난 자세를 회복했다.
에리가 내 지시에 앞으로 파고들었다.
끼리키익-.
찌르고 들어오는 레이피어 끝이 에리의 방패에 비켜나가며 불쾌한 소음을 만들었다.
에리 혼자라면 불가능한 일점 찌르기를 비껴내는 방패술.
하지만, 내가 [푸쉬 핑거]로 위치를 지시하고, [그랩 핸드]로 방패의 각을 잡아주니 정확한 각도는 물론 부족한 힘까지 채워졌다.
비껴내기로 끝나지 않았다. 에리는 연계 동작으로 발을 굴러 진각을 밟아냈다.
[얼스 스템프]
발아래 지면은 벽돌 타입 돌과 돌이 완전하게 이가 물려 억눌린 형태가 아니었다. 돌과 돌이 불규칙적으로 위치하고 사이사이에 흙이 꼈다.
바닥이 에리의 발아래에서 울컥거리며 물결을 만들어냈다.
적의 흔들리던 자세가 다시 한번 흔들렸다. 에드샤 덕분에 에리가 새롭게 쓸 수 있게 된 기술, [얼스 스템프].
객관적으로 보면 투자된 힘에 비해 효과는 크지 않았다.
효과가 작지만, 내가 명령했기에 자주 썼다. 힘을 예비하고 적절한 순간에 쓰기 위해 아끼는 것보다 마구 써서 익숙해지고 발전시키라고 명령했다.
에리는 파티 주력이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에리가 지쳐서 전투 불가 상태가 되어도 괜찮기에 미래를 위해 투자했다.
거친 접전이 이어졌다. 세 개의 레이피어 반투명체를 쓰러트렸다.
나는 단순한 무기로 변해버린 레이피어를 들어 올렸다.
호기심 가득한 바리스, 헤스티, 에리의 시선 아래에 천천히 휘둘렀다.
"역시, 밸런스가 좋아."
"좋은 무기지. 지하 7층 내에 보스 보상을 빼면 여기만큼 괜찮은 무기가 나오는 곳 없어."
나는 수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바리스에게 직접 느껴보라는 몸짓을 하며 레이피어를 건넸다.
바리스는 바로 신중한 표정으로 무게감을 느껴보고 사람이 없는 쪽을 향해 휘둘러봤다.
"한번 파훼하면 일반 무기처럼 쓸 수 있는 거네요?"
"그래, 그래서 무기 구하기 좋아."
수희가 뒤로 한발 물러섰다. 레이피어 계열을 선호하지 않는 만큼 전리품인 세 개의 레이피어에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
나는 나머지 두 개의 레이피어를 들어 헤스티와 에리에게 건넸다.
바리스나 헤스티, 에리 역시 레이피어를 쓰지 않았다. 그래도 기대로 눈을 반짝이며, 유심히 살폈다.
무기고로오기 전에 훈련하면서 레이피어 계열뿐만 아니라 양손검과 단검 계열 반투명체와 상대하는 훈련을 했었다.
나를 바라보는 바리스와 에리의 눈빛이 호감이 더해졌다.
“저희 무기도 구할 수 있겠군요.”
나는 자신들의 무기를 챙겨주기 위해 무기고로 왔다는 사실에 감탄을 보내는 바리스와 에리에게 웃음 지었다.
둘의 검과 나의 검을 구하기 위해 무기고로 온 것이 맞았다.
다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무기고에는 접근전 무기만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활과 석궁, 특히 개조 가능한 석궁 기계 장치가 나왔다.
컨트롤러 클래스의 [푸쉬 핑거]와 [그랩 핸드]라면 석궁 기계 장치를 써먹을 수 있다.
*
무기를 든 반투명체를 처리하면 해당 무기를 쓸 수 있다.
물론 다른 층의 몬스터, 코볼트나 고블린이 쓰던 무기 역시 주워서 쓸 수 있다. 하지만, 그 품질은 둘째치고 무게 중심 같은 특성이 어긋났다. 몬스터의 손가락과 손바닥, 팔에 어울리는 무기이지 인간에게 최적화된 무기가 아니었다.
무기고에서 나오는 무기는 달랐다. 인간이 사용하는 용도로 만들어진 고급품이었다.
품질은 지하 7층 이상 가치가 있었다. 8층 몬스터가 쓰는 무기는 7층 무기고에서 나오는 무기보다 품질이 떨어졌다.
무기 자체가 뛰어나다 보니 반투명체보다 무기 부분에 가치가 집중된 것이 아닌가, 무기가 본체이고 반투명체는 덤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나는 한손검을 챙겼다. 바리스는 양손검과 보조용 단검을, 에리는 단검을 얻었다.
전투는쉽지 않았다. 쉽지 않다고 해도 일행에게는 무난하게 넘길 능력이 있었다.
다들 버거워하면서도 표정이 밝았다. 수희를 제외한 모두에게 7층의 전투 경험은 확실한 성장을 이끌었다.
“와, 이대로면 따라잡히겠어.”
바리스와 에리가 내적인 성장에 외적인 장비까지 업그레이드하니 수희가 투덜거렸다.
농담이 섞인 평가. 그 이면에는 수희의 자신감이 있었다. 절대 따라잡히지 않을 거라고, 자신은 더 높은 곳으로 오를 거라고 생각하기에 할 수 있는 농담이었다.
*
*
*
구역화된 방.
"긴장해."
단창과 커다란 방패, 고대의 군인처럼 여덟의 반투명체가 어깨를 맞대고 방패를 내세웠다.
무릎에서 턱까지 몸을 가리는 방패가 벽처럼 밀려들었다.
"이거 까다로운데."
수희가 내게 그쪽에서 처리해봐라는 눈빛을 보냈다.
다수의 방패병 압박, 수희가 쌍검 방어 전사라서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방패 방어전사라도 다수의 방패병 압박은 상대하기 어렵다.
수희가 단순히 딜러라면 뭉친 방패의 압박을 스피드로 회피해낸 후 딜을 내면 된다.
하지만, 탱커는 파티의 축이었다. 행동반경이 고정될수록 안정감이 늘어났다.
그렇기에 다수의 방패병을 앞세운 압박 전술은 원 탱커 멀티 딜러 진형의 카운터였다.
어설프게 격돌했다가는 원 탱커가 다수의 방패병에게 포위당했다.
"뒤로."
나의 지시에 수희가 뒤로 물러섰다.
방패와 단창을 장비한 반투명체는 치명상을 내기에 까다로웠다.
처음부터 단창의 손잡이를 노릴 수 없었다. 방패병의 기본자세가 단창을 뒤로 빼고 방패를 앞세운 자세이기 때문이었다.
방패 손잡이를 노리는 건 방패를 뚫지 않는 한 불가능했다. 그리고 방패를 뚫는 공격을 한다면 단창이 튀어나올 것이다.
치명타를 주력으로 하는 딜탱커인 수희에게는 이리저리 역상성이었다.
"헤스티. 오른쪽으로 1/3 지점을 노려."
"네, 준영씨."
헤스티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그녀도 자신이 필요한 순간임을 아는 것이다.
가볍게 입술 끝을 올리면서, 하지만 진중한 움직임으로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파이어 볼]
파이어 볼, 주력으로 쓰는 파이어 볼트보다 강력한 마법.
쐐기를 연상시키는 원 탱커 멀티딜러 진형은 밀집 방어진형에 약했다. 그리고 밀집 방어진형은 폭발형 공격에 약했다.
활과 같은 원거리 공격은 방패병에게 치명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폭발형 공격은 달랐다.
데미지도 데미지지만 폭발 후폭풍으로 진형을 와해했다.
검붉은 불덩이가 적진에 떨어지기도 전에 나와 수희와 바리스는 돌진을 준비했다.
거기다가, 헤스티의 파이어볼, 지하 3층 때와는 달랐다. 바리스가 성장하는 동안 헤스티 역시 내적인 성장을 이루었기에 같은 파이어볼 마법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좋아, 좋아~."
"···."
수희는 중얼거리면서, 바리스는 묵묵히 파고들었다. 나 역시 에리를 헤스티 호위로 전담시키고, 수희와 바리스와 함께 파고들었다.
폭발의 여운이 사라지기 전에, 다시 밀집 대형을 형성하기 전에 승기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수희가 전선을 돌파해냈다.
"자, 여길 봐."
"어딜."
수희의 외침과 바리스의 포효가 이어졌다.
수희가 적진을 돌파한 채 화려한 움직임으로 뒤로 돌아 시선을 끌자, 방패병은 방패를 뒤로 돌려야만 했지만, 바리스가 이를 두고 보지 않았다.
양손검을 횡으로 크게 휘둘러 뒤로 돌리던 방패를 다시 앞쪽으로 돌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틈에 나는 단검을 투척했다.
감춰져 있던 방패 손잡이를 타격해 치명상을 입혔다.
*
전투가 끝나자 에리가 방패를 살폈다. 방패가 주력인 만큼 눈을 반짝이며 살폈다.
쌍검을 쓰는 수희도 방패를 훑었다. 보조 장비에 주는 관심 정도를 넘어 진지하게 살폈다.
"바리스와 헤스티도 방패를 골라봐. 주력 장비가 아니더라도 필요해. 통과를 위한 아이템이니까."
"거기까지 온 건가."
나 역시 동의하며 방패를 골랐다.
무기고의 끝엔 궁수와 석궁 기계 장치가 있다.
나는 모든 무기에 능숙하고 바리스는 에리를 가르칠 정도의 방패술을 보유하고 있다. 수희 역시 방패를 들면 예리함이 줄어들지언정 탱킹 능력 자체는 더 올라갈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