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22화
"바리스, 에리 이리로. 둘이 대련해봐. 바리스도 내가 에리에게 영향을 끼칠 테니까 방심하지 말고."
내 말에 바리스와 에리는 마주해 무기를 들었다.
에리는 바리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경험과 기술은 물론, 키벨레 종족 특성이 완전히 개화하지 않았기에 힘도 부족했다.
처음은 바리스가 압도했다. 내가 푸쉬 핑거를 쓰기 시작하자, 살짝 흔들리더니 다시전장을 장악했다.
[그랩 핸드]
바리스에게 밀리는 와중에도 반격을 시도하는 에리에게 [그랩 핸드]를 썼다.
"헛."
바리스가 에리의 일격을 급하게 맞받아치며 뒤로 물러섰다.
이어 반발 거리를 더 띄우면서 자세를 회복했다. 에리를 주의하면서 내게 시선을 주었다.
"이거 기술만 변한 게 아니죠?"
나는 바리스에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대련의 초반에 내가 [푸쉬 피거]로 지시를 내린다고 해도 근육은 에리의 근육이었다. 에리 스스로 파악하고 또 상대에게 파악 당하는 만큼의 힘을 낼 수밖에 없었다.
바리스는 이를 감지해낼 만큼 뛰어났다. 영악하게 에리의 육체에서 나오는 힘의 총량을 파악하고, 내가 일으키는 에리의 변주를 상대해냈다.
하지만, 내가 상위 스킬 [그랩 핸드]를 쓴 순간 바리스의 대처법이 파해되었다.
힘이 추가되었다. 그랩 핸드는 물리적 규칙에 어긋나는 궤도를 그릴 수 있게 했다.
과격하게 에리를 운용할 수 있게 되니, 전투수준이 즉시 한 단계 올랐다.
"이거 으흠."
바리스가 난색을 비췄다. 하지만, 천천히 표정이 밝아졌다.
나를 한번 바라보고 에리를 향해 미소지었다.
"이거 너만을 위한 훈련이 아니야."
바리스 눈 속에 기이한 열망이 비쳤다.
성장을 갈구하는 전투 본능이 미소를 만들었다. 아무리 심성이 고운 바리스라고 해도 무력에 대한 열망은 지극했다. 다양한 경험을 갈구했다.
에리와 대련은 바리스에게 도움이 안 되지만, 내가 통제하는 에리는 도움이 되었다. 다만, 그마저도 한계가 있었다. 푸쉬 핑거로 변주를 준다고 해도 더 강한 자극을 원했다.
바리스의 욕구는 만족될 것이다.
내가 그랩 핸드를 쓰는 순간 바리스라도 역량을 다해 대련해야만 한다.
장시간 최선을 다하는 전투 훈련. 성장을 위한 정석이자 지름길이었다. 거기다가 내가 힘을 추가해 운용하는 기술의 근간은 미궁 더 깊은 곳에서 만났던 인간형 몬스터에 기인했다.
바리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더 깊은 곳의 몬스터 대처법을 익히는 셈이었다.
*
바리스와 에리, 특히 에리가 지쳐 나가떨어진 후에 헤스티와 에드샤의 성장을 봐줬다.
바리스와 에리가 미래를 위한 대비라면, 헤스티와 에드샤는 현재를 위한 대비였다.
물론 에드샤는 홀로 지형을 이용해 웬만한 적은 격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교단에는 웬만한 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최악의 경우에 에드샤를 버리고 도망치는 방법도 있지만, 변수를 마련해두는 것이 좋았다.
‘에드샤의 정보는 어느 정도 알려졌어. 알려진 상대인 만큼 변수를 더한 효과가 커.’
헤스티라는 변수로 의외성을 더했다. 거기다가 이 준비 자체가 헤스티에게는 귀중한 경험이었다.
카이바린뿐만 아니라 어버스나이트 쪽에서 올 만한 강자도 추측해서 시뮬레이션했다.
헤스티의 파이어볼과 에드샤의 대지 마법은 조합하면 할수록 위력이 올라갔다.
파이어볼은 범위가 넓어 세밀한 콘트롤이 힘들었다. 이 단점을 대지 마법으로 극복해냈다.
대지마법으로 깔때기 형태의 벽을 세움으로써 아군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은 물론. 출력을 유도해 위력을 증가시켰다.
또한, 조합하니 대지 마법의 단점 역시 사라졌다.
대지 마법은 직접적인 공격력이 약했다. 특히 소규모로 운용하면 더 약했다. 대규모로 흙벽을 쌓아 올리거나 구역 내에 지진급으로 운용을 해야 데미지를 줄 수 있었다.
에드샤는 혼란을 일으키고 난 후에 접근해서 난전을 치르는 방식으로 이를 극복했지만, 헤스티의 파이어볼과 함께하면 한 번 더 타격을 강하게 준 후에 접근할 수 있었다.
*
일과를 끝내고 불침번을정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헤스티가 물었다.
"에드샤님과 저의 조합, 다른 층에서도 통하겠죠? 물론 환경에 맞게 손봐야겠지만요."
마법을 조합해보면서 인정하게 된 걸까. 헤스티의 말을 에드샤가 받았다.
"다른 곳? 난 가고 싶지 않아."
헤스티의 시선이 저절로 에리를 향했다. 협박하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다만 일행이 에리를 포기하지 않는 한, 에리는 이곳에서 나가게 된다.
헤스티의 에리에 닿았다가 되돌아오는 시선에도 에드샤가 다시 고개를 젓는 것을 보니 생각이 확고해 보였다.
헤스티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가 닫혔다. 설득하려다가 말았다.
키벨레 종족에게 '굳은 땅의 은신처'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짙은 종족애를 보이면서도 왜 함께 나가지 않는지 알 수 없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일은 참견할 수 없는 법이다.
"기다릴게."
에드샤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따뜻한 시선이 에리에 닿고 그 온기를 줄이지 않은 채, 종족 아이의 보호자를 보는 시선으로 일행을 훑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칼등을 톡톡 두드렸다.
에드샤는 이곳을 떠나지 못하게 제약받고 있다.
'만일 그 제약이 미궁의 시스템적인 거라면···.'
당장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에리를 통제해내는 정도로 에드샤를 내게 종속시킨다면, 속박을 풀어내고 데리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
굳은 땅의 은신처는 외부와 내부가 구분되어있다. 대체로 미궁층에 중요구역이 있으면 구분되는 경우가 많았다.
랜덤으로 생성되는 계단은 구분되는 구역 중 외부에서만 생성되었다. 내려오자마자 보스와 마주칠 위험이 있으면 공략 난이도가 너무 높아졌다.
내부에도 생성된다면, 보스를 상대할 수 있다고 해도 다른 모험가 파티가 뒤에서 갑자기 등장할 것이다. 다른 모험가의 뒤치기까지 대비하려면 요구되는 전력이 과해졌다.
던전에서 약속은 쉽지 않았다.
만날 장소도 애매하지만, 미궁 안에서는 날짜 감각도 비틀렸다.
일행은 에드샤 덕분에 합류하러 온 수희와 빠르게 만날 수 있었다.
에드샤는 주기적으로 5층 외부 지역에 기파를 방사해 침입자가 있는지, 리크가 설치지 않는지 점검했고, 내가 수희를 기다리는 기색을 내비치자 경계를 강화했다.
"잘 있었어? 으흠. 좋았나 봐. 이 선물은 필요 없을 뻔했나."
수희가 고개를 기웃거리면서 인사했다. 일행은 미궁 속에서 장시간 헤맨 사람으로보이지 않았다. 제대로 쉬고, 먹고 씻어서 갓 입장한 모험가처럼 보였다.
수희가 살짝 내비친 주머니에는 아직 신선한 과일이 있었다.
보자마자 입속에 침이 고였다. 내가 이럴 정도인데, 바리스, 특히 헤스티는 흔들림을 바로 드러냈다. 다만, 에리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거, 내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간 보기도 흥정도 하지 않았다. 수희가 일부러 흔드는 것인지는 몰라도, 과일은 일행에게 너무 치명적이었다.
미궁에서 지상의 과일은 극히 귀했다. 특히 오랜 기간 탐험하는 심층에서는 같은 부피의 금과 비교할 정도였다. 그래서 급히 오가는 자 중에 여유가 되는 이는 과일을 꼭 챙겼다.
일행은미궁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나는 원래 불가능하고 바리스와 헤스티는 범죄자가 되었다.
과일은 그 자체의 향과 맛을 넘어 얼기설기 지탱하고 있는 심리를 붕괴시킬 불씨였다.
손을 내밀 뿐만 아니라 진형과 자세로도 수희를 압박했다. 수희와 감정 상하는 것을 각오했다.
내부가 무너지는 것보다 외부를 공격하는 것이 낫다.
"뭐야, 급하기는. 주머니는 돌려줘야 해."
수희는 일행을 심리적으로 괴롭힐 생각이 없는지 바로 주머니를 던졌다.
주머니 반납은 당연했다. 마법적 처리가 된 주머니가 아니면 미궁 안으로 과일을 들고 들어올 수 없다.
나는 바로 과일을 하나씩 바리스, 헤스티, 에리, 에드샤에게 던졌다. 의식적으로 남은 과일이 없다는 걸 보인 후에 주머니를 수희에게 다시 던졌다.
*
일행은 때아닌 각자의 시간을 가졌다.
수희는 기다려줬다. 그저 기다리며 장난치듯 단검을 위로 던졌다가 받기를 반복했다.
단검을 주시하는 나의 시선을 느끼고 말했다.
"이거 골드를 주고 사 온 거야. 헤스토의 무기고에서 나온 물건이지. 일단 신용이 확실한 자에게 구했으니까 오류 가능성은 적어."
싱긋 웃으면서 단검을 내게 던졌다. 나는 가볍게 받아내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수희 역시 길잡이였다. 단순 사냥이 아니라 미궁 내에서 단독으로 작전을 펼치는 공략자는 대부분 길잡이 스킬이 있었다.
다만 가본 곳만 갈 수 있는가, 가본 적 없지만 가야 할 곳의 물건이 있으면 갈 수 있는가, 여러 층을 건너뛸 수 있는가가 달랐다.
'수희는 물건만 있으면 갈 수 있는 길잡이야. 그리고 이미 헤스토의 무기고에 가본 적 있어.'
길잡이질은 타인에게 맡기는 것보다 자신이 직접 하는 것이 유리하고 안전했다.
'그럼에도 내게 단검을 맡긴다는 건···.'
혼선의 가능성.
나는 한가지 이유를 떠올렸다. 인간의 잡념은 의외로 강해서 통제하기 어렵다.
길잡이의 이정표가 될 수 있는 건 손에 든 물건뿐만이 아니었다. 투구나 방패, 공략자가 들고 있는 장비는 미궁에서 구한 것이 대부분이니 이정표가 될 수 있었다.
새로 구한 물건과 오랫동안 써온 물건이 있을 때, 사고의 흐름은 오래 써왔던 장비로 흘러갈 가능성이 컸다.
이정표인 단검을 생각하며 계단을 내려가더라도,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주무기에 관한 생각이 떠올라 주무기를 구한 미궁층으로 연결될 수 있다.
다만, 그렇게 되더라도 복구 불가능하진 않았다. 올라가는 계단을 찾아 다시 가면 되었다.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원인이 될 주무기를 파티원에게 맞기고 시도하는 방법도 있다.
'결국, 수희는 혼선이 일어나는 게 싫다는 거다.'
원래 들고 있던 단검과 연관된 장소를 공개하기 싫다는 뜻이다.
'7층에는, 수희와 개인적으로 연관된 미궁층이 있다.'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추측하며 수희를 일행에 합류시켰다.
지하 6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찾았다.
"6층은 무난할거야. 그래도 수희를 탱커로 한 파티플레이는 처음이니, 조심스럽게 진행하면서 지하 7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찾자."
내 말에 일행은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
6층은 고블린 습격자와 고블린 주술사가 나오는 미궁층이 걸렸다. 원래라면 괴로운 층이었다.
종잡기 힘든 기습이 주술사의 괴이한 주술과 어우러져 집중력을 방전하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완전히 파악하는 자가 있으면 난이도가 급락하는 층이기도 했다.
웬만한 건 내가 직접, 거리가 있으면 헤스티에게 지시해서 파훼하니 무난하게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찾을 수 있었다.
“하아, 이렇게 쉬운 층이 아닌데.”
수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수희에게 받은 단검에 집중하며 일행을 계단 아래로 이끌었다.
*
닫힌 천장이었다. 개방형인 5층 '굳은 땅의 은둔자' 지역과 다르게 위로 천장이 보였다.
지하 7층에도착했다.
폭으로 6m, 높이 4m 정도인 복도 형태의 미궁층. 같은 난이도일 때, 폐쇄 지역은 개방형 지형보다 감당하기 쉬웠다. 징조도 없이 벽 뒤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오지 않는 한, 경계 면적이 줄었다.
경계 면적이 줄어들 뿐만 아니라, 무기고 몬스터는 복합적인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전투 중에 도망쳐서 다른 적을 불러오는 등의 행동을 하지 않았다.
변수가 적은 대신 탱커에게 가해지는 압박이 강했다. 내가 다른 6층을 더 탐험해 성장하지 않고 7층 무기고로 온 이유였다.
무기고의 적은 그저 주입된 명령을 수행하는 것처럼 전투가 시작되면 전멸할 때까지 공격을 지속했다.
즉, 요구되는 방어진형의 수준은 높지만, 그 수준을 만족한다면 안정적인 운영이 가능했다.
미궁 7층 탐험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