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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21화 (21/139)



〈 21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21화

나는 에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에리의 얼굴이 조금씩 빨개지고 이를 바라보던 에드샤의 눈이 커다래졌다.

책에 적힌 어린 키벨레를 돕는 방법 중에는 부부가 함께하는 운용법이 있다. 아이에게뿐만 아니라, 시전하는 부부 서로에게도 영향을 끼치는 운용법이다.
에드샤가 이를 알고 있다면 에드샤에게 영향을 끼치려고 하는 나의 의도가 그대로 파악 당하겠지만, 에드샤가 이를 모른다면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에드샤의 반응을 보면 내가 본 책을 에드샤도 봤는지 추측할 수 있다.

에리를 부드럽게 품속으로 이끌었다.

에리의 곁옷이 하나둘 벗겨졌다. 단순한 방한 방풍뿐만 아니라 공격을 빗겨내기 위해 가죽을 덧된 옷은 묵직한 덩어리가 되어 옆으로 치워졌다.
스무 해 이상을 지냈던 그녀의 정신처럼, 처음에 봤을 때 마냥 앙상한 소녀 같았던 에리의 몸도 이제 제 나이를 찾았다.

나는 알아냈다. 에드샤는 내가 본 책을 보지 못했다.

* * *
* * *

에리는 입술을 오물거렸다.

"저···."

에리는 얇은 거부를 내비치려다가 그냥 고개를 숙였다.
살짝 부끄러웠다. 타인이 있을 때 신체 접촉을 하는 것은 처음이 아니지만, 카이바린 일당과 싸울 때는 전투의 긴장감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작업 인원을 나눌 정도로 위기가 줄어든 상태, 에리라도 자신과 자극을 주는 준영에게 감각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빠른 성장이 필요해."

귓가에 속삭이듯 건네어졌다.
왜일까. 살짝 속상했다.
의지하기 시작한 이후로 그의 말이 닿는 것이 좋았다.
등을 간지럽히는 그의 손길이 좋았다. 전투 중에 그녀에게 지시를 내리기 위해 마법의 손가락 끝으로 등을 간지럽히는 자극은 그녀에게는 온기였다.
하지만, 지금 그가 하는 말.
에리, 자신의 귓가에 속삭이는 말이지만, 에드샤가 충분히 들을 수 있는 말. 자신이 아닌 에드샤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말.
에리는 무의식중에 준영의 가슴에 머리를 비볐다.

* * *
* * *

준영은 에리의 손을 쥐고 손등을 에드샤를 향해 내밀었다.
명백히 참가를 권하는 태도. 에드샤는 이때까지 보여줬던 모습 중에 가장 조심스러운 모습으로 천천히 손을 내밀어 호응했다.
에드샤의 흐름이 준영의 손을 타고 흘러 에리의 손을 감쌌다.
다른 적이 더 있는 전투가 아니기에 모든 의지를 집중한 흐름이 에리의 손을 넘어 팔뚝을 타고팔로 스며들었다.

조심스러운 접근에 거부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다. 느린 것은 에리의 내부가 너무나 오랫동안 굳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며시 다가서는 에드샤의 흐름에 준영이 엉겨들었다.
준영은 키벨레 종족이 아니었다. 하지만, 에드샤와 만나기 전까지 흐름으로 에리를 건드리고 그 반응을 정보로써 쌓아왔다. 지식이 된 경험은 에드샤의 흐름을 이끌 자격이 되었다.

"흐으."

토해진 에리의 신음은 한 단계 더 높은 운용으로 나아간다는 신호였다.
에드샤는 준영에 대한 경계마저도 버리고 에리의 기운을 다독거리고 퇴적화된 특성을 녹이는  집중했다.
이 순간이 에리의 성장한계를 돌파해내는 찰나임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은근슬쩍 역류하듯 자신에게 파고드는 준영의 기운은 무시했다.
위험이라고 부르기도 미세한 요소였다. 키벨레 종족의 특성이 몸속에 가득하고 이미 완성된 에드샤에게 준영의 기운은 위험이 되지 못했다.
기껏해야 친숙해질 뿐이었다.

에드샤는 준영의 의도가 그 친밀감에 있음을 알지 못했다.
더 나아가 준영이 에리는 물론 에드샤의 어깨도 한쪽 팔로 감싸고 있음을 알고도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했다.
에리와 함께 준영에게 안기니 에리의 몸과 더  면적으로 접촉할 수 있어 오히려 양보처럼 느꼈다.

기운이 흐르고, 열기가 맺혔다.
온기의 나눔은 함께한다는 감각을 이어냈다.

*

"어, 어라."

작업을 끝내고 준영을 찾아온 헤스티가 눈썹 끝을 바싹 올렸다.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준영의 얼굴에 서린 미세한 미소를 보고 나서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아아, 분위기 좋네요. 우리는 힘들게 땀 빼고 왔는데."
"그러게."

나른하게 늘어져 호흡을 가다듬는 에리와 에드샤를 보고, 바리스도 웃으면서 투덜거렸다.

* * *
* * *
* * *

넓은 대지에 견고하게 치솟은 벽은 성을 연상시켰다. 그러면서도 뾰족한 첨탑은 유연한 곡선을 그려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무력과 종교적 감성의 조합, 건축에 일가견이 없는 사람도 느낄 수 있는 이질감은 이곳의 주인이 누구인지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게 했다.

어버스나이트 교단은 수희가 카이바린 마법사의 지팡이를 들고 복귀한 날, 반나절이 지나기 전에 회의를 소집했다.
많은 인원이 모이진 않았다. 회의의 주된 참가자인 사제급의 어버스나이트는 교단의 실질적인 무력을 담당했다. 그렇기에 교단보다 작전 지역에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교단의 대회의실, 말석에 위치한 수희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회의 참가 인원이 적어서 불만을 표하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사제의 권위를 모아도  한 사람만의 권위만 못했다. 유일하고 가장 높은 권위자, 신탁이라는 이름으로 신의 물결을 느끼는 자.
사도가 참가하는 회의이기에 권위는 차고 넘쳤다.

사도 요르네스의 건조한 미소 아래 중년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안드레드 수희, 예의를 지켜라."
"네.네. 알았어요. 근데  나만 보고 그래요?"

이전 회의에서 보였던 태도와 달랐다. 예전과 다른 모습에 수희를 타박하던 중년의 남자는 말문이 막혀 했다.
수희가 치기만으로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일종의 도박을 담은 주장, 배팅이었다. 강하게 나가지 않으면 준영과 연관된 이번 건은 은신과 소규모 전투에 능한 수희 대신 압도적인 힘으로 격멸하는 것을 즐기는 중년 남자, 가랑트런트에게 맡겨질 가능성이 컸다.
이미 그런 경험이 있었고, 이번에도 그럴 수 없었다.

"허허. 거기까지 하시게."

홀의 상석에 앉아있던 남자의 말에 중년 남자 가랑트런트는 물론 수희도 입을 다물었다.

건조한 미소에 노인 같은 말투. 하지만, 치기마저 비칠 정도로 어려 보이는 외모,
혼란스러운 사도 요르네스의 외적 특징은 다른 교단에서는 몰라도 '혼돈'을 따르는 어버스나이트 교단에서는 권위를 추락시키는 요소가 되지 못했다.

그런 사도 요르네스가 중재를 밝혔다. 원래 발언권이 없다시피 한 수희였기에 중재란 수희의 손을 들어준 것과 같았다.
수희의 삐쭉거리는 입은 들어갔지만, 얼굴에 얄미운 미소가 걸렸다.
단순한 감정충돌이 아니었다. 수희는 자신의 위치가 마냥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할 위치가 아님을 주장했고, 가랑트런트에게 자신의 취급이 앞으로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해먹혀들었다.

"하오나···, 그 준영이라는 자는."

가랑트런트는 고소하다는 듯 얄미운 미소를 짓는 수희를 노려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자는 어버스나이트를 이용했고 이용하려는 자입니다."

가랑트런트는 사도 요르네스의 중재를 무시하는 대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수희의 업적은 준영과 관련되어 있었다.
사도가 함께하는 회의 시간은 귀중했다. 결과인 수희의 태도에 시간을 버리는 것보다 그 원인인 준영에 대해 논하는 것이 나았다.
수희 역시 즉시 표정을 단정히 했다.

"그리고 어버스나이트를 아는 자지요.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도 알고 있는."

사도 요르네스가 가랑트런트의 말을 받아 이어 말했다.

"제압해 심문하자는 가랑트런트님의 의견도 일리가 있습니다. 불확정 요소를 제거하면 안전한 성장을 이루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혼돈의 어버스나이트입니다."

사도 요르네스는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정중하고 나이 들어 보이는 말투와 다르게 그를 더 어려 보이게 하는 미소.
외모와 다르게 나이트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었다.

"안드레드 수희."
"네. 사도님."

가랑트런트와 대화할 때와는 다르게 사도에게 불린 수희의 얼굴에는 긴장이 가득 찼다.

"그가 7층 헤스토의 무기고로 가려 한다고요? 함께하세요. 아, 그전에 카이바린 지팡이의 공양식에 참가하시고요. 공양 후에 내려올 은혜를 같이 누리셔야지요."

한없이 자상한 어투와 내용이었지만 수희는 추위를 느꼈다. 지켜보는 자가 없다면 자신의 팔을 쓸었을지도 몰랐다.

요르네스의 시선이 한 명  명 회의하던 이를 훑었다. 느리게 움직이던 시선이 침묵을 지키고 있던 한 남자에게 멈췄다.

라후카트 타라만. 준영이 고블린 던전에서 제물이 뻔한 아이들의 등에 글을 새기면서찾아가라고 한 남자.
어버스나이트지만 평범한 외형에, 그 자신도 미궁 심층 탐험에 몰두하는 태도를 고수했다.
그래서 특이한 능력을 가진 자가 아닌 일반적인 베테랑 모험가로 평가받았다.

* * *

요르네스는 생각했다.
강력한 힘은 특별한 특징을동반했다. 그리고 어버스나이트는 이 특징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의지가 형식을 극복하는 단계에 도달하면, 평범한 모습이 가장 혼돈스러운 것이 아닐까.

요르네스는 신탁을 받았었다.
다른 교단의 사도들이 각자의 신에게 신탁을 받아 알고 있을지언정, 사제들에게는 알리지 못하고 알려서도 안 되는 신탁.

[ 판테온, 만신전을 접하는 사도는 그 영광을신에게 돌리리라. 영광을 얻지 못하는 신은 종말을 피하지 못하리라.]

무려 신의 멸망을 언급하는, 그렇기에 입 밖으로 흘리는 순간 신벌을 받을 신탁. 신벌 이전에 믿음이 무너져버릴 신탁.

'우리 어버스나이트 교단은 신전을 찾지 못했지.'

세계에는 여러 신이 있었다. 그 신들은  가지로 나누어졌다.
신전이 발견된 신과 신전이 발견되지 않은 신.
신전을 발견하지 못한 신을 믿는 자들은 미궁 더 깊은 곳에 그들의 신전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찾지 못한 이유가 단순히 미궁 깊은 곳이 아니라, 만신전에, 판테온에 어버스나이트 신전이 있기 때문이라면.'

사도인 자신이 만신전에 도달한 순간 신탁이 이루어질 것이다. 신과 자신에게 영광이 쏟아지고, 다른 신들은 멸망하리라.
요르네스는 법열을 느꼈다. 마음에서 피어오르려는 황홀경에 두 눈을 감았다.

하지만 지금은 숨길 때였다.
외부를 통제하며 몸을 돌렸다. 요르네스는 퇴장에 고개 숙여 예를 표하는 사제들을 뒤로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 *
* * *
* * *

나는 손가락 끝으로 검신을 톡톡 건드렸다.
한쪽 편에서는 헤스티가 명상을 하고 살짝 떨어진 곳에서는 바리스와 에리가 대화를 나누었다.
그보다 더 떨어진 곳에서는 에드샤 역시 홀로 집중했다. 기파를 방사해 침입자를 경계했다.
나는 내적 변화에 집중했다.

예상보다 빠르게, [미궁 이해] 스킬 렙업 조건이 달성되어 경험치를 투자해 익혔다.
예전 회귀에서는 더 깊은 층으로 내려가서 새로운 지역과 몬스터를 경험하고 나서야 미궁 이해를 올릴 수 있었다.
에드샤와의 경험이 그만큼 특별하다는 의미였다. 전투 중에 제압을 목적으로 몬스터와 기운을 섞은 적 있지만 적대적이지 않은 상황은 처음이었다.

덕분에 [컨트롤러] 직업 스킬도 하나 활성화되었다.
[그랩 핸드]
'통제하고 있는 대상에 주먹으로 쥐는 힘을 가한다. '
에리나 장악한 사물에 주먹으로 쥐고 흔들 정도의 힘을 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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