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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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헤스티를 마사지해도 아무런 메시지가 나오지 않았다.
빨갛게 물든 얼굴, 도도했던 그녀가 몸을 모로 돌렸다. 어중간한 자세, 나를 외면하는 모양새를 보이면서도 바라봐주기를 바라는, 그러면서도 흘깃 나의 표정을 살폈다.
“헤스티, 바리스와 교대해줘.”
예쁜 눈썹 끝이 올라갔다. 잔소리 같은 것을 내뱉으려고 하다가 아, 하는 멍한 표정을 보였다.
체온의 마력이었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상대의 체온은 서로를 이해한다는 착각을 주곤 한다. 내가 준 성감이 아직 남아있기에 헤스티는 내가 그의 특별한 사람이라고 순간적인 착각을 했다.
헤스티가 나에게 의존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지금 이 감정은 극히 순간적인 착각이다.
이 착각에 얽매이게 했다가는 성감이 식는 순간, 나를 다시 볼 것이다. 미궁이 깊고 긴 만큼 오래가고 튼튼한 감정이 필요했다.
“치이, 알았어요. 너무 엄한 짓 하지 마요.”
헤스티가 입술을 삐쭉 내밀고는 일어났다. 살짝 비틀거렸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성감의 여운이지, 이상 현상이 아니었다.
바리스는 담담하게 나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뛰어난 스승이 처음출전한 제자의 후유증을 다스려주는 치료로 인식했다.
나 역시 신체 접촉에 대한 테스트를 하는 동시에 과한 움직임에 놀란 근육을 풀어주는 데 집중했다.
*
가설을 세웠다.
이종족과 [미궁 이해]는 연관이 있다.
에리의 [순종]은 마사지 자체의 효과라기보다 에리가 노예였고, 내가 구해줬다는 것과 종족의 상위개체가 해야 할 일을 내가 대신해준 것이 영향을 끼쳤다.
마사지 자체의 효과보다는 신체 접촉이 메시지를 출력시킬 만한 상황을 만들었다.
*
코볼트 구역을 떠나기로 한 날, 성과를 얻었다.
다시 한번 에리가 내게 [순종]한다는 메시지가 떴고, 선택할 수 있는 직업과 기본이 되는 스킬이 나타났다.
[클래스: 컨트롤러]
[클래스 스킬: 관리 대상 인지]
이때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스킬과 클래스였다.
* * *
* * *
아이들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표정뿐만 아니라, 안색도 나쁘지 않았다.
옹기종기 모인 아이들은 바리스가 나누어준 비상식량을 먹으며 행복해했다.
"안 빼앗을 테니까, 천천히 먹어."
바리스가 미소지었다.
평상시 주어지던 식사량보다 훨씬 많았다. 아이들은 배가 불러옴에 따라 먹는 속도가 떨어지면서도, 혹시나 다시 빼앗아갈까 봐 먹는 속도를 올렸다.
그런 아이들을 바리스는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바리스는 내게 아이들을 잘 먹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태가 안 좋으면 어버스나이트 교단에 도착하기도 전에 쓰러질 수도 있다면서 허락을 구했다.
나는 가뿐하게 허락했다.
코볼트 던전을 본진으로 삼을 생각 없었다. 미궁 아래로 내려가야 했다.
본진으로 할 생각이라면 비상식량을 아껴야 하지만, 들고 갈 수 없는 식량에 미련을 가지지 않았다.
배부르게 먹이고 소화할 시간을 줬다.
*
“한 명씩 이리로 등을 대라.”
아이들은 두려워하면서 바리스의 눈치를 보았다. 바리스의 선함에 의존하는 것이다.
바리스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단검을 들어 올렸다.
아이들은 짧게 비명을 지르고 자신의 비명에 더 놀라 입을 가렸다.
에리를 제외한 아이들의 등에 글을 새겼다.
고통스러울 테지만, 손을 쭉쭉 움직였다.
카이바린 교단이 장악한 코볼트 던전 궤멸 사실과 어버스나이트 교단의 관심을 끌 만한, 어버스나이트 교단의 '신성한 행위'와 관련된 어구를 적었다.
글을 쭉 이어 새기지 않았다. 5명의 등에 새긴 글을 모두 모아야 의미가 정확해지도록, 단어 배열을 흩트렸다.
이로써 다섯 아이 중에 한 명이 내 말대로 하지 않고 도망친다고 해도 어버스나이트 교단에서 사람을 풀어 찾아낼 것이다.
내가 적어준 '혼돈이기에 순수를 갈구한다.'는 문장이 다른 교단에 알려지길 바라지 않을 테니까.
나를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들릴 예정인 장소에 대해서도 힌트를 남겼다.
'이로써 카이바린 교단과 어버스나이트 교단은 충돌한다.'
일부러 우리를 추적할 카이바린 교단과 나를 찾을 어버스나이트의 동선이 겹치도록 계획을 짰다.
바리스가 묵묵히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었다. 바리스 역시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는 아이들을 보면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바리스도 아이들도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음을 이해했다.
고통은있을지 몰라도 어버스나이트가 아이들을 죽이진 않을 것이다. 교단 내에서 '순수'는 아이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으니까.
미친놈은 어디에서나 있는 법이라, '순수'한 아이들에게 '순수'한 죽음을 부여해 인류 멸종을 추구해야 한다는 놈도 있긴 했다.
다만, 극소수라 어버스나이트 내부에서도 견제를 받고 있으니, 지금 보내는 아이들을 손대지 못할 것이다.
어버스나이트 교단의 신성한 어구 '혼돈이기에 순수를 갈구한다.'의 정확한 해석은 나도 모른다.
전체 회귀를 통틀어도 어버스나이트 신전은 발견하지 못했다.
* * *
* * *
올라가는 길, 나와 헤스티가 앞장서고 바리스는 아이들을 보호하며 뒤따랐다.
지하 2층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고, 지하 1층으로 가는 계단을 올랐다.
출구로 나갈 때까지 배웅하겠다는 바리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잘 가."
"조심하고."
우리와 함께 있을 때보다 미궁 밖으로 나가서 어버스나이트 교단에 도착할 때까지가 더 위험했다.
아이들을 노예로 판 이들은 아이들을 발견하면 죽일 것이다. 카이바린에 잡히면 죽는 것이 나은 처지가 되어버릴 것이다.
덤덤하게 아이에게 당부의 말을 하던 바리스와 헤스티도 출구로 달려가는 아이들을 보자, 눈가를 붉혔다.
그래도, 이를 악물 뿐 행동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에리는자신의 방패를 만질 뿐, 무덤덤한 모습을 보였다.
"가자."
내 말에 바리스와 헤스티는 몸을 돌렸다. 나는 일행을 지하 3층으로 이끌었다.
* * *
* * *
옆벽은 벽돌이 보이지 않았다. 암석으로 가려진 벽은 동굴을 연상시켰다. 벽면은 동굴 형태이면서 바닥은 바닥돌로 이루어졌다.
살짝 축축한 공기는 차갑지 않고 후덥지근했다.
도착한 지하 3층은 커다란 덩치와 네발로 빠르게 돌진하는 멧돼지 형 마물 피그노가 주축이었다.
"으, 먹을 수도 없는 놈들이 설치기는."
헤스티가 몬스터를 상대하면서 투정 부렸다. 전투 중 잡담은 집중을 흩트리는 요소였지만, 미궁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스트레스를 푸는 것임을 나도 헤스티도 알고 있었다.
"저놈 먹을 수 있다. 지금 수준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에엑, 마물을요?"
"다만, 독 저항과 저주 저항이 높아야 한다. 아, '상인의 요새'에서는 먹을 수 있게 가공해서 팔아. 으흠, 제대로 된 돼지고기도 팔지만."
"으, 돼지고기."
"상인의 요새에 도착하면 사주지. 엄청 비싸지만 그만큼 좋아."
"상인의 요새는 몇 층에 있는데요."
"지하 10층."
"치~"
헤스티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동시에 [사이킥 쇼크]로 피그노의 시야를 흩트렸다.
이어 바리스가 돌진력을 담은 일격으로 피그노의 중심을 어긋나게 만들었다.
에리가 방패를 양손으로 잡아 피그노의 머리에 밀어붙였다.
에리 혼자서는 피그노의 돌진을 막아낼 수 없었다. 아니, 돌진이 아닌 머리를 휘두르는 공격도 버거웠다.
하지만, 중심을 잃은 몬스터가 발버둥 치는 반격은 감당할 수 있다.
"10층까지 가려면, 좀 많이 분발해야겠군요."
바리스가 피그노에게 박아넣었던 검을 빼면서 농담을 더 했다.
"모두 뒤로."
짧게 외치는 헤스티의 지팡이 위에서 화염이 불타올랐다. 버둥거리면서 일어나는 피그노에게 파이어 볼이 떨어졌다.
그리고는 나의 표정을 살폈다. 잘했다고 고개를 끄덕여주자, 헤스티가 환하게 미소지었다.
*
에리의 참전, 그것도 보호 대상이 아닌 전력으로서의 참전은 변화를 일으켰다.
전열인 바리스의 전투력이 살짝 줄어들었다. 에리의 포지션이 전열과 후열 사이인 만큼 신경 쓰다 보니 적에게 날카롭게 파고들지 못했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에리가 바리스에게 탱커로서 믿음을 주면 사라질 문제였다.
헤스티는 크게 좋아졌다.
실력은 둘째치고 몬스터와 헤스티 사이에 방어 전담 탱커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캐스팅 안정성이 향상되었다.
그리고 배낭의 압박에서 벗어났다. 에리가 헤스티의 짐까지 일부 부담했다.
처음에 에리는 남의 몫은커녕 자신의 몫조차 짊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전투에 참가하면서 3층 몬스터의 경험치를 얻기 시작하자 힘과 체력이 빠르게 상승했다.
‘그 이유도 있지만.’
내가 키벨레 종족의 방식으로 성장을 도와주면서 특성이 독으로 작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에 따라 근력이 먼저 돌아오는 것이다.
*
나는 지하 1층에서 지하 3층으로 가는 동안 전열이 아닌 후열에서 전투를 조율했다.
에리에게 가는 경험치를 늘여주고 파티 플레이를 손봐주기 위함이었지만, 따로 파악해 두어야 할 것이 있었다.
"에리, 잘했어."
"든든한데."
바리스와 헤스티가 에리를 칭찬했다.
칭찬할 만했다. 아무리 종족빨이 있다고 해도 전투 경험이 없는 소녀가 3층에서, 몬스터의 기세에 질려 얼어붙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아니에요. 준영님 덕분이에요."
나는 감사의눈빛을 보내는 에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덕분이라는 에리의 말이 맞았다. 나는 매 순간마다, '빠져라, 들어가라. 어깨를 밀어라.'며 상세한 지시를 내렸다. 내 지시가 없었다면 전투 경험이 없는 이상, 자리를 지키는 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경험이 많으면 그렇게까지 몬스터의 행동을 예측해낼 수 있는 거예요?"
헤스티도 감탄의 눈길을 내게 보내왔다. 헤스티와 나는 같은 후열이었다. 후열에 있는 이상, 아무리 정신을 바싹 차린다고 해도 바리스와 에리에 의해 시야가 가렸다.
하지만, 나는 '눈앞에서 몬스터의 움직임을 보는 것처럼.' 에리를 지휘했다.
헤스티는 내가 경험이 많아 행동을 예측한다고 추측했다.
'보는 것과 다름없지.'
'컨트롤러' 클래스의 [관리 대상 인지].
나는 컨트롤러로 전직하고 경험치를 투자해 [관리 대상 인지]를 익혔다.
그리고, 관리 대상으로 에리를 지정했다.
그 순간부터 에리의 시야가 내게 인지되었다. 마치 내게 새로운 감각기관이 생긴 것처럼, 보고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미궁 중반 이후에 깨우치는 초감각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초감각이 원래 있는 감각을 수련해 한계를 넘긴 느낌이라면, 이 [관리 대상 인지]는 본능적인 감각과 닮았다.
다만, 에리와 나의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인지가 흐릿해졌다.
'이게 기본 스킬이라니.'
미궁에서는 직접적인 공격 스킬이나 데미지 증가 패시브만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본다는 것.
미궁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중요해졌다. 1층의 몬스터야, 1초 동안 눈을 감았다가 떠도 눈감기 전에 본 것을 바탕으로 행동을 예측하고 반응할 수 있다.
하지만, 아래층으로 내려갈수록 달라졌다. 더 짧은 순간, 사각에서 일어나는 움직임 하나가 생사를 갈랐다.
*
지하 3층까지 후열로 빠져서 에리에게 지시를 내리는 데에 전념했다.
더 많은 정보를 접하면서도 집중력을 유지하는 훈련이 필요했다. 더불어, [관리 대상 인지]를 유지함으로써 [인지] 스킬의 스킬 업 조건 충족과 다음 스킬 활성화 조건 충족을 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