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10화
에리는 두려움에 떨었다.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움츠렸다.
움츠리면서도 자신의 앙상한 팔 너머 검을 든 사람들을 보았다.
차가운 검날, 검을 든 남자의 굵은 팔뚝.
에리는 이어 자신의 팔을 보았다.
'나는 왜 이렇게 약할까···.'
가늘고 길뿐인 팔. 잘록해서 중심이 되지 못하는 허리.
비틀거리기 일쑤인 다리.
'그저, 가녀린 아이로밖에 안 보이는 몸···.'
키만 큰 아이처럼 보일 뿐인 외형. 그래서, 아이 취급받고 다른 아이와 함께 노예로 팔려온 현실.
미궁 안도 무섭지만, 미궁 밖의 세상도 가혹했다.
같은 골목의 아이가 얼어 죽는 것을 몇 번이나 봤다.
약한 아이는 먼저 죽었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은 에리도 얼마 버티지 못할 거라고, 죽을 거라고 말했다.
그렇게, 경험한 겨울만 스무 번이 넘었다.
'한해 한해···. 이미 스무 해를 넘겼지만···.'
한해가 지날 때마다 기대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자라 어른이 될 거라고.
더러운 골목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은, 조금씩 자라 일을 할 수 있는 몸이 되어 골목을 떠났으니까.
그렇게 몇 년을.
구걸하면서 보았던 아이들이 가혹한 환경에서 죽거나 혹은 어른이 되어 떠나고, 새로운 아이들이 그 빈자리를 채울 때도,
그 변화 속에서 에리는 제외되었다.
그저, 살고 있을 뿐인 삶.
'이제 이것도 끝이겠지.'
에리를, 아이들을 끌고 온 전사의 살기는 진짜였으니까.
에리는 죽음을 예감했다.
*
다른 아이들보다 더 가늘고 긴 팔이 떨려왔다. 에리는 떨리는 팔을 꽉 잡았다.
어깨를 떨며 등 뒤에 선 사람들을 훔쳐보았다.
이들은 검을 꺼내든 채, 준비했다. 에리 자신을 포함한 노예들을 죽일 준비를.
던전에 끌려온 이는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여덟 명의 아직 아이 티가 남은 노예들, 공포에 질려 하면서도 도망칠 생각을 하지 못하는 아이들.
같이 끌려온 노예 하나가 맞아 죽는 것을 보았기에 반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다른 아이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미궁 내의 광산으로 끌려갈 거라고 했다. 몸이 작은 어린 노예는 작은 통로에도 들어갈 수 있어, 좁고 위험한 작업에 동원될 거라고 했다.
‘아니야.’
이들은 우리를 죽일 것이다. 에리는 진짜로 죽이려고 하는 살기를 경험해본 적 있었다.
지금보다 더 작을 때, 너무 어려 기억마저 가물가물한 그때,
그녀를 가둔 자가 죽던 그 날,
에리는 살기가 무엇인지 경험했다.
카오오오오-.
거대한 몬스터의 포효.
개의 머리를 가진 몬스터가 두 팔을 활짝 열어젖히며 내지른 포효가에리의 가녀린두 팔과 몸을 마구 흔들었다.
소리만으로도 느껴지는 강한 힘에 에리는 벌벌 떨며 귀를 막았다.
전투가 시작되었다.
코볼트 챔피언의 포효가 끝나기도 전에 준비하고 있던 사람들이 달려들었다.
인간들은 세 개의 무리를 이루었다.
코볼트 챔피언과 직접 싸우는 사람들, 그들을 보조하는 사람들, 그리고 에리와 함께 끌려온 노예들을 감시하는 이들.
코볼트 챔피언과 인간들이 부딪쳤다. 코볼트 챔피언과 함께 나온 코볼트들을 보조 전사들이 상대했다.
격렬한 접전이 이어졌다.
코볼트 챔피언의 공격은 매서웠지만, 맞닿은 전사들과 마법사에게 막혔다. 그리고 그동안 코볼트들의 숫자가 하나둘 줄어들기 시작했다.
코볼트 챔피언을 상대하던, 전체를 지휘하던 마법사가 뒤로 살짝 빠지며 외쳤다.
“준비해라. 명령을 내리면 바로 노예를 죽여라. 이 전투의 영광이 신성 카이바리님에게 닿도록.”
차갑고 냉정한, 그 속에 광기를 담은 자가 에리의 죽음을 이야기했다. 노예들의 죽음을 일컬었다.
노예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도망치려고 움찔거렸다. 하지만, 지키고 선 자의 반짝이는 칼날에 움직이지 못했다.
절망이 노예들을 장악했다. 에리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때였다.
“흥.”
앙칼진 여자 목소리가 미궁을 가로질렀다. 초췌하고 오래 입은 표가 나는 옷을 입은 여자가 몸을 바로 세웠다. 하지만, 남루함도 붉은색의 롤한 머리카락의 부드러운 움직임과 생기를 담은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누구 마음대로.”
인간들은 물론 몬스터의 시선도 한점에 모였다. 여자는 그 시선에 당당히 마주하며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타인의 목숨을, 타인의삶을 함부로 하겠다는 거야."
절규를 담은 외침이 화염과 함께 지팡이 위에서 떠올랐다.
“저년이? 순찰자는 뭐 하는 거냐? 헤그로, 저년을 잡아라. 잡아 죽여.”
침입자, 그것도 마법사 적에 혼란이 일어났다. 카이바린 일당은 흩어져서 각각 코볼트들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옆의 전사와 호응해 벽을 만들어 상대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화염 마법은 진형을 흩트릴 수 있는 위협이었다.
단순히 저지하는 것이 아니라, 쫓아가서 제거해야만 하는 위협이었다.
전체를 지휘하던 마법사의 외침에, 코볼트 챔피언에 딸린 코볼트들을 상대하던 전사들의 일부가 움직였다.
헤스티는 단순히 인원을 빼내게 만드는 것을 넘어 카이바린 일당의 집중력을, 레이드 진행의 집중력을 흩트렸다.
* * * * * * * * *
* * * * * * * * *
바리스는 돌출된 바위 위에서 소리 지르는 헤스티를 보았다.
마치 마녀처럼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바리스는 알 수 있었다.
헤스티는 무리하고 있다.
코볼트 챔피언의 포효에 떨었으면서 코볼트 챔피언을 제대로 상대하는 전사들과 마법사를 도발했다.
평상시의 그녀가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헤스티는 나를 위해 움직인 거야. 내가 노예들의 억울한 죽음에 가만있지 않을 것을 아니까.’
바리스는 양손검을 꽉 잡았다.
준영과 헤스티와 미리 약속한 대로 움직였다. 헤스티에게 시선이 끌린 틈을 타, 잡혀있는 노예들에게 접근했다.
검을 수평으로 유지한 채, 물 흐르듯 달려나갔다.
돌진과 이어진 공격으로 그대로 한 놈을 쓰러트렸다. 노예를 지키고 있던 전사들은 수준이 낮았다.
‘굳이 목숨을 끊을 필요 없다고 했지.’
“아이들아, 내 뒤로 움직여, 뒤쪽으로 빠져라.”
전사들을 처리하면서 노예들을 향해 외쳤다. 하지만, 살벌한 칼부림에 아이들은 더 움츠리기만 했다.
“어서.”
이어진 독촉에도 머뭇거렸다. 그때, 팔다리가 긴 아이가 속삭이듯 말했다.
“저분은 우리를 죽이지 않아. 살기가 느껴지지 않아.”
가녀린 아이가 움직였다. 다행히 그 아이 뒤를 다른 아이들이 따랐다.
바리스는 아이들을 막는 전사들과 전투를 이어갔다.
“네 년들 무슨 짓이냐.”
코볼트 챔피언을 상대하던 마법사가 분노를 터트렸다. 함께 하던 세 명의 전사에게 코볼트 챔피언을 전담시키고 마법을 외우기 시작했다.
헤스티는 먼저 마법을 날리고 빠졌기에 직접 노리지못했지만, 바리스는 아니었다. 바리스는 아이들이 도망칠 수 있도록 전사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파이어볼 ]
헤스티의 파이어 볼트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커다란 화염이 마법사의 지팡이 위에서 피어올랐다.
타오르는 불덩어리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뻗어 나갔다.
“아, 아니, 자로크님.”
비명이 아이들에게서뿐만 아니라, 바리스가 상대하던 전사들에게서도 터져 나왔다.
바리스는 날아오는 불덩어리를 보며 준영이 해줬던 말을 떠올렸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아군의 목숨도 가볍게 볼 거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어.’
바리스는 공포에 질려 제대로 도망 못 치는 아이들을 넘어, 더 앞으로 나갔다.
날아오는 불덩어리를 노려보았다. 양손검을 들어 올려 바닥을 향해 찍었다.
[어라운드 디펜스]
바닥으로부터 충격파가 둥글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검으로부터 시작된 빛이 둥글게 구를 만들었다. 바리스를 중심으로 아이들까지 감싸고 바리스의 의지를 투영하기 시작했다.
파이어볼과 바리스의 보호막이 충돌했다.
* * * * * * * * *
* * * * * * * * *
나는 단검을 살짝 쥐었다.
카이바린 교단의 마법사가 쏘아낸 파이어볼을 바리스가 제대로 막아내는 것을 보았다.
예상한 결과다.
바리스는 그동안 크게 성장했고, 새로운 스킬을 쓸 수 있음을 느꼈다. 내가 용사의 스킬을 직접 써본 건 아니지만, 용사 전용 스킬의 운용은 지겹도록 보았다.
바리스가 쓸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바리스는 아직 인지하지 못하지만, 어라운드 디펜스는 일반적인 전사의 스킬이 아니라, 용사 전용 스킬이다.
이는 현재의 체력과 집중력뿐만 아니라, 정신 상태가 스킬의 위력에 큰 영향을 준다는 뜻이다.
아이들을 구하기로 마음먹은, 신념으로 가득 찬 이 순간만큼은 마법사와 바리스의 수준 차이가 무의미해진다.
“네년!”
하지만, 저 마법사는 인정할 수 없는가 보다.
저놈은 2~3층에서 놀 수준이 아니었다. 더 아래에서 놀 놈이 ‘카이바린 교단의 축제’를 위해서 이곳에 있는 것이다.
교단의 마법사가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공기가 변할 정도로 힘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전사들과 싸우던 코볼트 챔피언마저 힐끔거리며 회피를 준비할 정도다.
‘파이어 익스플로젼인가.’
파이어 익스플로젼, 넓은 범위에 위력을 발휘하는 화염 마법.
바리스가 파이어볼을 막는 동안 아이들이 뒤로 빠졌기에 바리스 역시 빠질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아이들을 지키던 전사들도 마법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빠져버려 방해가 없어졌다.
다시 파이어 볼이 날아간다면 바리스는 피해낼 것이다.
하지만, 파이어 익스플로젼이라면 저 근처를 아예 쓸어버릴 수 있다.
‘적절한 마법이지만.’
‘파이어 볼트’보다 ‘파이어 볼’이 더 크고 강력했다. ‘파이어 익스플로젼’은 ‘파이어 볼’의 상위 마법답게 살상 범위가 확연하게 더 넓었다.
하지만, ‘파이어 익스플로젼’은 ‘파이어 볼트’ 이상의 집중력을 요구했다. 즉, 쉽게 깨어진다.
나는 단검 투척 스킬에 경험치를 투자했다.
스킬창에 ‘단검 투척 데미지 증가’와 ‘은밀한 단검 투척’이 익힐 수 있다고 활성화되었다.
“은밀한 단검 투척을 익힌다.”
입안으로 중얼거렸다. 바로 고블린 단검을 잡은 손을 뒤로 당겼다.
바리스와 바리스 주변을 휩쓸어 버리기 위해 눈이 벌게진 마법사를 향해 던졌다.
소리도 빛 반사도 없이 단검이 날아갔다.
지금 코볼트 챔피언을 상대하는 수준의 방어 전사가 투척을 경계하는 중이라면, ‘은밀한’ 스킬이라도 들킬 확률이 생기지만, 그들은 코볼트 챔피언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급했다.
마법사의 수준이 높다고 해도 헤스티가 일차로 신경을 건드리고 바리스에 대한 적개심으로 흥분한 상태다.
나는 단검을 날린 즉시 이동했다. 스킬 덕분에 날아가는 동안은 알아차리기 어렵지만, 강자는 맞는 순간 공격 방향을 특정해내기도 한다.
‘저놈들 중에 제일 강한 놈은 마법사야, 하지만, 이 전투의 토대는 3명의 방어 전사다.’
지금, 이 순간에도 코볼트 챔피언과 3명의 방어 전사는 공방을 나누고 있다.
최대 전력인 마법사가 다른 곳에 신경 쓸 수 있는 이유다.
*
“흐윽, 또, 또, 뭐냐?”
파이어 익스플로젼 스킬이 깨져버린 반동에 마법사가 피를 토했다. 피를 머금은 입으로 분노를 터트렸다.
나의 단검 투척에 마법사의 마법이 깨어졌다.
나는 마법사를 신경 쓰지 않고, 코볼트 챔피언과 방어 전사가 싸우는 곳으로 은밀하게 움직였다.
* * * * * * * * *
* * * * * * * * *
바리스는 아이들을보호하며 보스방 밖으로 급하게 달렸다.
“준영씨···.”
바리스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중얼거리면서도 걸음을 쉬지 않았다.
보스방에서 벗어나 꺾어진 통로를 넘었기에 마법사의 직사 공격 위험에서 벗어났다.
쫓아온 하급 전사들이 있었지만, 아이들을 감시하던 하급 전사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헤스티가 위험했다. 초반에 벌인 헤스티의 도발에 헤스티를 쫓아간 전사들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은 바리스를 쫓아온 전사들이 노예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
그들은 일반적인 전술-위험한 자를 우선 처치하는-에 따라 행동할 뿐이었지만, 덕분에 바리스는 시야를 넓게 가질 수 있었다.
이미 약속해두었던 도주로로 싸우면서 빠질 수 있었다.
“헤스티.”
바리스는 크게 외쳤다.
헤스티가 비틀거리면서도 전사가 내리치는 검을 힘겹게 막아내는 것이 보였다.
“아, 바리스.”
“그래, 왔어, 안심해.”
헤스티를 노리던 전사들이 맹렬하게 달려드는 바리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 바리스를 쫓던 전사들과 합류했다.
하지만, 바리스도 헤스티도 웃었다.
전사들은 오판했다. 시간만 조금 더 들이면 쉽게 처치할 수 있는 헤스티를 죽였다면 바리스 역시 평정심을 잃었을 것이다.
“잘했어. 잘 버텼어.”
“그게, 준영씨 덕분이야. 그동안 짐을 들고 다녔던 게 도움이 되었어.”
바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영씨가 헤스티에게 짐을 들게 하는 것, 전력의 낭비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기초 체력의 성장과, 바리스보단 못하지만 이때까지 해온 전투의 관찰이 어울려져 생존을 이끌어냈다.
그 덕분에 헤스티가 버텼다.
전사들이 포위망을 형성했다.
바리스와 헤스티는 의연하게 맞섰다. 둘 중 누구도 둘의 시너지가 전사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