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3화
"너 이 배낭을 들어라."
배낭 두 개를 새로 꾸렸다.
약초와 중요한 물건이 든 가벼운 배낭은 내가 메고, 식료품 등이 든 배낭을 헤스티에게 들게 시켰다.
그냥 메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배낭의 어깨에 메는 띠 아래쪽을 풀어헤스티에게 두 손으로 잡게 시켰다.
무슨 짓을 하려고 해도 손을 놓으면 배낭이 흔들리기에, 쉽게 딴짓을 못 할 것이다.
제대로 메는 것보다 힘들 테지만, 체력을 빼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따라와라."
"네?"
"그럼, 앞장 설려고? 말리지는 않겠다만."
둘은 머뭇거리다가 따라왔다.
함정이 있는 미궁이니, 인질이 되었을 때부터 자신들이 앞장설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함정에 당해 죽는 비참한 죽음을 생각했을 것이다.
"너희 둘을 앞장세울 줄 알았나?"
바리스를 제압했으니, 생존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죽을 생각이 없는 이상, 바리스를 살리는 방향으로 가야 했다. 물론 사실을 가르쳐주지는 않을 것이다.
*
미궁에는 함정이 존재했다.
시작 층인 지하 1층도 마찬가지였다. 바리스와 헤스티가 미덥지 않은 티릭을 파티로받아들인 이유이기도 했다.
다만, 일 층 함정은 수준이 낮았다. 수준 높은 전사라면 관련 스킬이 없어도 통과할 수 있을 정도였다. 수준이 낮은 자도 부상을 각오하면 통과 자체는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바리스와 헤스티는 도적이 죽어버린 이상, 자신들을 앞장세울 것이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나는 바리스를함정 탐지용으로 쓰지 않을 것이다.
바리스를 살리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함정을 몸으로 때우거나 회피하면 그것만으로도 경험치를 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함정 관련 기술은 내가 직접 익혀야 했다.
마법 계열의 함정 탐지 스킬도 있지만 지금 단계에서는 구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설령 구해서 헤스티에게 익히게 한다고 해도 나를 속일 가능성이 컸다.
나는 바리스에게 다가갔다. 겨드랑이 상처가 아닌, 카운터를 쓰면서 입힌 상처를 간단하게 응급조치했다.
약품은 주지 않았다. 겨드랑이 상처까지 치료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가자."
바리스와 헤스티의 시선이 내 등에 메인 그들의 무기, 양손검과 지팡이에 닿았다. 이내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내 뒤를 따랐다.
미궁은 회귀할 때마다 맵이 바뀌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컨셉이나 난이도는 비슷해서 작은 정보만으로 전반적인 정보를 추측할 수있었다.
이 둘을 이끌고 더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이 둘을 제대로 통제하려면 몬스터보다함정을 먼저 마주쳐야 한다. 몬스터와 만나더라도 함정을 지난 다음에 만나야 한다.
함정 없이 몬스터만 나오면, 내가 몬스터를 상대하는 동안, 둘은 도망칠 기회를 노릴 것이다.
도망치는 길에 함정이 있어야 망설일 것이다.
* * * * * * * * *
미궁 지하 1층, 벽을 이룬 벽돌, 바닥을 이룬 바닥돌. 습기가 머무는 구석에는 녹색의 퇴적이 묻었다.
세월을 겪은것처럼 낡고 뭉개진 벽돌 통로를 앞장서서 걸었다.
몬스터든 함정이든 내가 먼저 마주치는 배치, 감각을 극단적으로 일깨웠다. 올려둔 민첩 강화 3레벨이 감각을 전개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바리스와 헤스티에게 들키지 않게 무심한 얼굴로 바닥에 마물이 지나간 흔적이 있나 살폈다.
미궁 지하 1층의 마물은 수준이 낮은 만큼, 몸을 숨기거나 이동하면서 흔적을 지운다는 개념이 없었다.
일반인의 시력으로도 흔적을 분별할 수 있는 만큼, 그 흔적을 통해 마물이 언제 지나갔는지 알아내는 것은 지식에 달렸다.
'몬스터가 없는 쪽에는 함정이 있다.'
몬스터의 습성을 알면 파악할 수 있는 규칙이다.
일 층 몬스터는 숨긴 함정을 피하면서 인간을 공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를 역으로 이용하면 함정 지역을 찾을 수 있다.
'이쪽 길이 맞군.'
몬스터의 흔적이 줄어들다가 딱 끊겼다.
나는 뒤돌아보았다. 바리스와 헤스티는 경험이 없어 앞이 함정지대임을 예상하지 못했다.
"여기서 기다려라."
내게 함정 관련 능력이 있다고 속일 필요가 있었다. 마치 관련 스킬이 있는 것처럼 덤덤하게 말하고 앞으로 걸었다.
세세한 함정 위치와 종류는 회귀할 때마다 달라졌지만, 같은 층은 함정 수준이 비슷했다.
까닥-
무언가가 꺾이는 소리가 났다. 들릴 것을 알고 준비하고 있었기에 들었다.
수준이 낮은 기계식 함정.
틱-
바로 이어져서 들리는 소리, 충분했다.
벽에서 다섯 개의 짧은 화살이 발사되었다.
나는 그중에서 내가 맞을만한, 가슴 높이로 날아드는 짧은 화살만을 쳐냈다.
네 개의 화살이 나의 앞과 뒤를 지나 맞은편 벽에 닿아 떨어졌다.
[경험치 10을 취득했습니다.]
역시 경험치가 들어왔다.
일 층에서 함정을 돌파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경험치는 10~15 정도였다.
파티플레이였다면, 함정을 돌파하는 동안 경계를 해준 것도 도움을 준 것이기에 경험치가 나누어졌겠지만, 파티가 아니기에 나 혼자 온전히 먹었다.
나는 진입하던 속도로 더 걸어 들어갔다.
"내가 밟은 자리 기억하지? 그 자리만 밟고 이리로 와라."
나는 둘을 속였다. 함정은 이미 발동되었기에 어디를 밟든 작동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함정에 대한 지식이있다면 간파해낼 속임수이지만, 도적 클래스 중에 베풀기 좋아하는 이도 함정에 대한 지식은 나누지 않았다. 남은 음식을 나누는 것과 자신이 설 자리가 없어지는 지식을 나누는 것은 달랐다.
제대로 된 도적을 알지 못해 티릭과 파티를 꾸린, 바리스와 헤스티가 관련 지식을 배웠을 리 만무했다.
바리스와 헤스티에게서 고민의 빛이 비쳤다.
그녀들과 나는 함정지대를 사이에 둔 상태,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도망칠 기회다.
머뭇거리는 모습에 한마디 했다.
"그럼, 도망쳐보던가. 둘 중에 하나는 죽일 자신 있으니까."
헤스티가 바리스를 희생시킨다면, 바리스가 헤스티를 희생시킨다면, 본인은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둘 다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단 둘은 무기부터 없었다.
결국, 고개를 숙이고 함정지대를 넘어왔다.
나는 내 곁으로 온 둘을 두고 이미 발동된 함정으로 걸어갔다. 몸으로 바닥돌을 숨기고 무언가를 하는 척을 했다.
실제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는 행동이었지만, 바리스와 헤스티가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나의 행동으로 바리스와 헤스티는 함정이 해체되었다고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수작을 부려, 이미 밟은 자리를 밟아도 함정이 발동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다시 둘을 이끌고 걸었다.
또다시 함정지대를 지났다. 의외로 둘의 표정이 조금 가벼워졌다.
나는 가볍게 생각했지만, 함정 돌파를 위해 소모될지도 모른다는 둘의 불안은 내 예상보다 컸던 것이다.
[경험치 10을취득했습니다.]
경험치 10도 중요했지만, 익힐 수 있는 스킬이 생긴 것이 더 중요했다.
[하급 함정 유무 파악]
함정을 두 번 경험하고, 두 번 돌파했기에 익힐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직접적인 관찰도 유효했지만, 관찰은 과도한 집중을 요구했다. 바리스와 헤스티가 도망치는지 동시에 파악해야 하는 만큼 피로도가 높은 관찰은 부담스러웠다.
어차피 상위 스킬인 '함정 탐지'를 배우기 위해서도 익혀야 했다.
"여기 길을 아시는 건가요?"
상처의 아픔을 숨기고 덤덤한 척, 바리스가 물어왔다.
심경이 변한 것이 아니다. 대응을 바꾼 것이다. 대화 없이 물리적인 탈출을 고려하다가, 나에 대한 정보가 더 필요함을 느낀 것이다.
"처음 오는 길이야, 하지만,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알고 있다."
애매하게 말했다. 내 정체가 뭔지 고민해보라지.
고민이 많을수록 행동은 늦어지는 법이니까.
* * * * * * * * *
대화 없이 걸었다. 하지만 조용하지는 않았다. 두 여자의 거칠어진 숨소리가 낡은 벽돌로 이루어진 동공을 울렸다.
바리스는 겨드랑이 부상 때문에, 헤스티는 멘 배낭이 무거워 거칠게 호흡했다.
고블린의 흔적을 발견했다. 흔적을 보고 한 마리임을 알아차렸다.
'한 마리라 다행이군.'
바리스는 정상 체력일 때, 고블린 두 마리를 상대할 수 있다. 즉, 두 마리가 나왔을 때, 허둥대는 모습을 보이면, 바리스에게 얕보인다.
고블린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면, 힘들어도 덤벼볼 만하다는 판단을 내릴 것이다.
"고블린의···."
나보다 두 호흡 늦게 바리스와 헤스티도 흔적을 발견했다.
"제 검을 주세요. 준영씨, 당신에게 덤비지 않을 테니."
"아니, 나 혼자 상대한다."
지금 나는 바리스의 검과 헤스티의 지팡이를 등에 메고, 그 위에 배낭을 멨다.
전투를 시작하면 배낭은 바로 벗겠지만, 지팡이와 검은 등에 멘 채로 싸울 것이다.
[예비 무기 응용 스킬]은 없지만, 바리스와 헤스티에게 무기를 돌려줄 수 없다.
메고있는 무기가 방해되지 않게 움직이는 법이나 활용하는 법은 이미 몸으로 익혔다.
고블린은 인간보다 작은 몸에 재빠르게 움직이는 마물이다.
일 층에서 나오는 고블린의 능력치는 일반인과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싸울 줄 알고, 비슷한 수준의 적을 상대할 때,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은 미궁으로 들어온 신출내기 탐험가를 죽음으로 인도하곤 했다.
고블린 하나가 일행을 발견하고 달려들었다.
나는 고블린의 행동 패턴을 알고 있다. 거기에다가 현재 민첩 강화가 3레벨.
고블린의 단검이 도달하기도 전에 단검으로 받아냈다. 이어, 허점을 만들어내고 파고들어 죽였다.
여유로운모습을 보여줬다. 민첩이 높기에 이런 움직임이 가능했다.
마무리하고 바리스를 바라보는데, 바리스가 자신의 상황을 잊고 감탄하는 눈빛을 비춰왔다.
나의 속도는 민첩 강화 레벨 덕분이지만, 세부 기술은 나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역시 알아보는군. 자질이 있어.'
극초반인 지금, 바리스의 분별력은 낮을 수밖에 없다. 알아야 비교를 하는데 보고 익힌 것이 적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의 동작에 감탄한다는 것은 본능적인 파악력, 즉 자질이 있다는 뜻이다.
'스킬이 아닌 기술은 몬스터에게 한계가 있지만.'
이렇게 기술이 뛰어난 나라도, 약점이 선명한 인간이면 몰라도 몬스터에게는 한계가 있었다.
상위 몬스터를 상대할 때는 힘과 속도가 바탕이 되어야 했다. 껍질을 깨어 충격을 내부에 닿게 하지 못하면 기술은 무용했다.
[경험치 20을 취득했습니다.]
경험치가 쌓였다. 스킬을 올릴 수 있지만 바로 올리지 않았다.
몬스터와 싸우기 직전에 올리는 것이 나았다.
적응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힘 스킬의 각 단계를 이미 경험해봤기에 스텟을 올리면 바로 강화된 힘에 적응할 수 있다.
* * * * * * * * *
"두 마리···."
바리스가 다가오는 고블린들을 보고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어떻게 할 거냐는 듯이 시선을 보내왔다.
"뒤에서 기다려."
이번에도 혼자 나섰다.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중요했다.
바리스와 헤스티도 머릿속으로 상황을 그려볼 것이다.
자신들이 도망치면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생각할 것이다.
그렇기에 고블린을 등 뒤에 두고도, 손이 묶인 그녀들을 붙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보여야 한다. 바리스와 헤스티에게 나를 뿌리칠만한 기회가 없음을 인식시켜야 한다.
바로 힘 강화 스킬을 올리고 상대했다. 시간은 걸렸지만, 어렵지 않게 처치했다.
다시 걸었다.
헤스티가 불안해하며 물었다.
"너무 깊이 들어가는 거 아닌가요? 저희는 짐만 될 것 같은데 여기서 놓아주세요.여기서 있었던 일, 절대로 말하지 않을게요."
"2층으로 갈 거야."
풀어주는 것과 관련된 말은 아예 언급을 안 했다.
"네?"
바리스도 헤스티도 깜짝 놀랬다.
지하 1층에서 사냥하는 것과 지하 2층까지 가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층을 내려가는 계단은 일반적인 계단이 아니었다. 일종의 마법 장치였다.
내려가는 것은 같지만, 내려가면 계단이 사라졌다. 돌아오기 위해서는 그 층을 뒤져서 올라가는 계단을 찾아야만 했다.
그렇기에 단순히 지하 2층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는 능력만으로는 부족했다. 2층에서 장기간 전투할 능력이 되어야 2층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대신, 지하 2층으로 내려가면 상처를 치료하고 풀어주지."
"이 사악한 새끼."
고운 눈 끝이 파르르 떨렸다. 헤스티가 욕을 하고 이를 악물었다.
2층에서는 도망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풀어줘도 이 둘만으로 탐험하기에는 위험했다.
몬스터도 몬스터지만, 이 둘에게는 함정 탐지가 없었다.
지하 1층으로 가는 계단을 발견한다고 해도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이미 지나온 길이 아닌 새로운 지하 1층이 펼쳐졌다.
즉, 계단을 지나면 같은 층이라도 맵 구조 자체가 바뀌었다.
길이 바뀌지 않으면 기억에 의존해, 이미 함정을 파악한 왔던 길로 돌아가겠지만, 그렇게 할 수 없으니 함정 탐지가 없는 바리스와 헤스티만으로는 위험했다.
"뭘 원하시는 거죠?"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바리스의 생존을 원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내게 용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배짱을 부릴 테니까.
나는 바리스에게 다가갔다. 말을 돌렸다.
"상처를 확인하지."
바리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겨드랑이에 밧줄을 끼워 재생을 방해하는 데도 상처가 꽤 많이 아물었다.
나는 다시상처를 냈다.
바리스가 눈물 지었다. 이제, 강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지, 작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헤스티가 주저앉아 울먹이는 바리스의 어깨를 껴안았다. 내게 앙칼진 눈빛을 보내면서 바리스를 토닥거렸다.
"흠."
잘되고 있는 거다.
나를 미워하는 것은 괜찮다. 그보다, 이 둘의 사이가 좋아져야 한다.
이 둘 중의 하나의 무력을 이용하려면 나머지 하나는 짐이 되어야 한다.
그것도 버릴 수 없는 짐이 되어야 한다. 혼자서는 선뜻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 번이라도 더 고민하게, 고민하다가 그 기회를 놓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일 층에서 이 둘의 미움을 받아야 할 이유는 또 있었다.
경험치를 독점해야 했다. 이 층에서 주도적으로 움직이려면 급하게 능력을 올릴 필요가 있었다.
묵묵히 사냥을 이어가며 계단이 있을 만한 곳을 수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