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부]
사전에 어느정도 예상했던 일이라고는 해도, 그 후유증이 심각한 것임엔 틀림없어 보였다.
사장을 찾아가서 얘기들 듣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에게도 지금은 시간이 필요할 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을 접기로 했다.
첫 파일에 있던 서류들은, 생산,구매와 관련된 내용들이었다.
특히 생산기술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한부장에게 물어 보라는 당부도 함께 있었다.
시무식은 예년과 달리,
대회의실이 아니라 사장실 옆에 있던 임원진 회의실에서 진행 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참석인원도 과장급 이상이 아니라, 부장 이상으로 축소 되었고,
예상외로 문이사와 사장까지 참석을 하고 있었다.
사장은 이 자리에서 형식적인 인사말과 올해도 잘 부탁 한다는 당부외엔,
특별한 이야기도 없었고, 나하고는 악수를 하며 눈 인사만 나누었을뿐,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부장님! 뭔일 있으셨어요?"
"글쎄...왜?"
"시무식 끝나고 따로 보자시네요!"
"그럼 뵙고나서 나랑 식사라도 좀 하지? 할 얘기도 있고..."
"그러시죠!"
우리회사 제2공장 생산 총괄 책임자인 한동일 부장이다.
나하고는 5살차이고,
10년전 사업을 확대하면서 특수 플라스틱 전문가로 영입된 친구였다.
기술도 기술이거니와 사람들을 잘 다루는 능력이 있는터라,
5년 전부터는 생산의 총괄 책임을 맡고 있다.
부서장급 이상의 중요한 회의가 아니면,
좀처럼 본사의 방문이 없다보니,
일부러 찾지 않으면 1년에 한 두번 정도 얼굴을 볼까 말까 한 그런 친구다.
지난 창립 행사장에서 만난것이 가장 최근이지만,
그마저도 대화는 나눠보지 못했었다.
"아! 진짜...짜증 이빠이네...뭐 저런게 다 있어?"
"야! 김과장! 왜 새해 첫 날 부터 짜증을 내고 난리야?"
"부장님! 그게 아니구요. 지난12월에 올린 결재서류들이 하나도 안내려 왔길래,
제가 가지러 갔었거든요."
"어디를?"
"어디긴 어디예요? 문이사 방이죠!"
"근데?"
"아니 씨...죄송합니다!...지가 되레 승질을 내잖아요? 아직 검토도 안했는데, 왜 가지러 왔냐면서?
부장님도 아시잖아요? 그게 올라 간지가 언젠데...아...진짜..."
김과장은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런것이 그 결재안은 지난달에 이미 내려와 있어야 했다.
그래야 그것을 토대로, 좀 더 디테일한 추가 계획을 세워야 했는데,
특별한 이유도 없이 보류상태로 있다보니 김과장이 화를 낼 만도 했다.
"정신 사나우니까 좀 진정 좀 하고 있어라! 내가 다녀 올테니까..."
"그렇다고 부장님이 직접 가시는 건..."
"왜? 나는 가면 안 되냐?"
"그게 아니라~ 그런 싸가지를 뭐하러..."
"아하~ 참! 이 사람 또 저런다~~"
얘기는 그렇게 했어도, 문이사의 방으로 가는 발걸음이 무겁게만 느껴진다.
서이사와도 그렇게 많이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지만,
문이사와는 한 두번쯤 될까? 싶을 만큼,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형수와의 관계를 알고나서 부터는,
그에 대한 내 감정도 예전 같지는 않았다.
"오셨습니까?"
"아~ 네...회사에 있어도 자주 뵙질 못하네요~"
"그야 뭐! 부장님이 저를 피하시니까 그런거 아닌가요?"
내 딴에는 나름대로 예의를 갖춰 한다고 한건데,
김과장 말마따나 싸가지가 없는건지,
농조도 아니고, 퉁명스럽게 말을 해댄다.
"제가 뭐...그럴거 까지야..."
"서류 때문에 오신 거라면, 내일 오시죠!"
"......"
"아니...내일 보내 드릴테니까, 일부러 오실 필요는 없을 거 같습니다!"
순간 주먹에 힘이 들어가며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겨우 참았다.
"휴~우"
"왜요? 더 볼일이라도...있으세요?"
"아뇨! 그럼..."
돌아서 나오는데, 왠지 나를 향해 웃어대는 그의 비웃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것이,
기분이 나쁜 정도가 아니라, 확 뒤집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저걸......그래. 한번 보자!'
"박영식 입니다"
"네..."
"한번 뵜으면 하는데요~"
"..."
"문이사 얘긴데...불편하시면...됐구요"
옥상에서 담배를 피워 물고는 문이사 아내에게 전화를 넣은 것이다.
내 집을 나갈때 만큼이나 대답에 성의도 없고,
피하려고만 하는 것 같았던 그녀가,
남편 얘기라는 말에서야 반응을 보이더니, 약속에 응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섣불리 공개하진 않겠지만,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 봐야지만,
남은 퍼즐의 조각을 맞출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한 명씩, 한 명씩 직접 부딪쳐 보기로 했다.
임실장을 찾아간건 점심식사가 막 끝나고 나서였다.
"자넨 당연히 사실을 알고 있었겠지?"
"네~~"
나는 자리에 앉으며 곧바로 물었고, 예상했던 대로 그녀 역시 망설이지 않았다.
"시작이 어떻게 된 건지는 설명해 줄 수 있나?"
"......"
커피를 준비하던 그녀는, 등을 보인채 대답이 없었다.
나는 잠시 기다렸다.
"다 보시지 않았나요? 사진들하고 행적에 대해서...?"
"거기엔 시작이 어찌 되어 있는지는 나와 있지 않아서 말야..."
"어떻게 시작된 건가가 중요한가요?"
물론 나역시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단순히 남자에게 끌려 그렇게 됐다고는 보기 어려웠고,
문이사 역시 새로 입사한 오너의 아내를 유혹 했다는 것도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래도 시작을 알아야, 풀어 가기 쉬울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저는 현재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기 위..."
"말씀 끊어 죄송한데, 이 문제는 풀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그럼...현재 상황만 보고, 마무리를 하자? 이건가?"
"그렇습니다.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 의미 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 합니다만..."
회사 직원들이 그녀를 부르던 별명은 그림자마녀 였다.
사장이 있는 곳엔 언제나 그녀가 있었고,
사장이 없는 곳에서는 그녀가 사장을 대신 했었다.
그래서 직원들은 그녀를 그림자라 불렀는데,
여기에 공과 사가 분명 한데다,
단 한번의 잘못된 판단도 용납이 안될 만큼,'
냉정하리 만큼 철두철미 하다보니, 마녀란 별명이 추가된 것이었다.
"자네 답군..."
"......"
"근데 말야! 너무 결과에만 집착하다 보면, 중요한 것을 놓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예를 들면 어떤걸 말씀하시죠?"
"이번 일은 어쨌거나 극히 개인적인 것 아닌가?
더구나 두 가정이 동시에 파괴될 수도 있고..."
"개인 보다는 회사와의 관련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관련자들 모두 회사의 중요한 사람들이구요!
더구나 가정을 생각했다면, 어느쪽이든 하지 말았어야 되는 일 아닌가요?"
그녀의 목소리엔 왠지 모를 불쾌감이나 증오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지나치리 만큼 차가웠고, 목소리도 높아졌기 때문이다.
"자네가 말하는 증거라는게 간통죄에 대한 증거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어째서?"
"어째서라뇨? 자세히 보시지 않으신건 가요?"
"허허...이사람! 임실장? 자네 답지 않게 왜 그래?"
"..."
그녀의 눈에선 금방이라도 광선이 나올것만 같았다.
"불륜이 성립되려면 그 정도로 모텔에서 키스하는 정도의 사진으로 될 거 같냐고?"
"..."
"아니다! 내가 말을 잘못했네! 그 정도 사진이면 불륜이 맞겠지! 도덕적으로는 말야.
하지만 간통이 성립되려면 그 정도론 어림 없는 걸로 아는데? 아닌가?"
임실장의 얼굴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고개를 숙이곤 입술을 깨무는 그녀다.
"이미 사장님도 다 아셨고, 불륜이던 간통이던 간에,
이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더 중요한거 아닌가요?"
"그건 자네 생각인가? 아님 사장님?"
"사장님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씀도 하셨고..."
"훗! 그래? 그럼 하나만 더 묻지!
이 조사는 자네가 진행했나?"
"당연히...네!"
"사장님의 지시로? 아니면..."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죠?"
"아니야! 그럼 됐어...수고하게..."
순간 그녀의 입술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난 비서실을 나오며, 뭔가 석연치 않은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지금은 그것이 무엇이라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결재 서류 때문인지 문이사의 방에 불이 켜져있는 걸 보면서,
나는 서둘러 집으로 행했다.
집엔 그의 아내가 와 있을 것이었다.
"제가 좀 늦었네요...죄송합니다!"
"아뇨..."
그녀는 이미 외투를 벗어 걸어 놓고는 쇼파에 앉아 있었다.
폭이 좁아지는 발목까지 오는 긴 회색의 모직 치마에, 흰색 블라우스에 기모로 된 스웨터를 입고 있었는데,
얼굴은 이전보다 더 수척해진 모습이었고, 여전히 경직된 모습 그대로 였다.
"몇 가지만 여쭤 보겠습니다!"
"네"
"연말에 문이사가 집에 들어오긴 했나요?"
"아뇨..."
"그럼 그 이후로 한번도 안 들어 왔단 말씀인가요?"
"아니...그건 아니고, 지난번 부장님 댁에 왔다 가고 나서, 한 번 왔었어요!"
"한 번?"
"네...그런데 그날 저와 심하게 말다툼을 하곤, 곧바로 나가 버리곤...지금까지..."
"오늘 출근은 했던데...집에서 출근한건 아니란 얘기네요?"
"네..."
"음..."
"혹시 아시는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렇다고 지금 얘기를 할 시점은 아니란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보다 들어왔던 날! 혹시 무슨 얘기나 뭐...내용을 알만한 것은 없었나요?"
"당시엔 듣고 말고할 상황이 아니었어요! 제가 워낙 흥분을 하는 바람에..."
아마도 얼굴을 맞대자 마자, 울분을 토했을 테고, 그는 그대로 자리를 피해 버렸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문이사 아내로 부터는 어떠한 얘기도 들을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제가 너무 성급했던 거 같아요. 이야기를 할 때까지 기다렸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아마 누구라도 그랬을 텐데요 뭐..."
고개를 숙인채 목소리는 점점 기어 들어가고 있었고,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이는 걸 바라보다 보니, 안쓰럽기 까지 하다.
"참! 지난번에 아이들 유학 보내셨다고 했는데...그게 언제죠?"
"해가 바뀌었으니까...작년 초에요. 1월에..."
"아~~ 그 때 부터 문이사가 잠자리를 피했다고 하셨었나요?"
"아뇨...두 세달 후니까...4월 경쯤?"
"잠시만요"
나는 방으로 들어가 파일을 꺼내서는 행적표와 함께 사진의 날짜를 확인해 보았다.
'보자~~ 4월이면...모텔앞에서 찍힌 사진이...? 4월 12일! 그리고? 음...'
사진속의 날짜에선 4월 12일에 처음으로 모텔안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의 사진이 있었다.
그리고 행적표에도 동일한 날짜가 표기되어 있고,
그 이틀전인 4월 10일에는 두 사람이 시내의 커피숍에서 만났다는 내용과 사진 역시 일치 했다.
"알고 계신게 있으면 말씀해 주시면 안될까요?"
"아직은...특별하게 뭐 이렇다 할만 한게 없네요...죄송합니다"
"......"
"일단 식사 부터 좀 하시죠! 이러다 쓰러지시겠어요!"
집앞 가까운 한식당에 갔는데도, 입맛이 없다며 굳이 사양하는 것을,
겨우 설득해 가며 식사를 하게끔 했다.
"그리고 사모님?"
"네?"
"제가 한번 댁에 가봐도 될까요? 혹시 허락하신다면?"
"그러세요~ 언제든 연락 주시면..."
"고맙습니다!"
"제가 고맙죠! 신경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까지는 문이사 아내 만큼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집에 돌아와 앉자 마자, 아무래도 형수를 만나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실적 작은 오빠라 부르며, 꽤나 잘 따랐던 그녀였다.
"훗!"
옛 추억을 더듬다 보니 헛 웃음이 나온다.
난 휴대폰에서 전화목록을 뒤지기 시작했다.
'분명 있을 텐데?...임...수...없네... 그럼 사...장...모야? 없어졌나?'
유사 검색어로 아무리 검색을 해도 나오질 않는다.
통화를 한 지도 너무 오래됐고, 그 동안 전화기를 두 번이나 바꿨으니,
아마도 삭제 되었거나, 옮기던중 없어진 모양이었다.
휴대폰을 툭 툭 치며, 알 만한 사람이 있을까 머리를 짜내고 있었다.
물론 임실장은 외우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제외 하기로 했다.
'아! 그래~'
"안녕하세요? 이 시간에 왠 일로...?"
"다 저녁에 죄송합니다. 통화 괜찮으시면, 뭐 하나 여쭤 보려구요? "
"네! 말씀하세요!"
"혹시 사장님 사모님 연락처 알고 계시나요?"
"사모님요?...네 알고 있어요!"
"아!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서이사의 아내였다.
지난해, 아니 이젠 해가 바뀌었으니까 지지난해에,
혼자 지내는 직원들을 위한 김장 행사를 형수가 주관해서 연 적이 있었다.
그때 회사 임직원들 아내들이 대대수 참석 했었는데,
내 아내와 문이사 아내만이 참석하지 못했었던 기억이 난 것이었다.
서이사 아내는 곧바로 형수의 전화번호를 문자로 알려주었다.
"무슨...일 있으신건 아니죠?"
"그럼요!...새해 인사 좀 드리려고 했는데, 번호를 모르겠더라구요."
"아~?"
"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건강하시고?"
"부장님도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그럼..."
"부장님?"
"네?"
"조만간 한번 가 뵈도 될까요?"
"그...렇게 하시죠"
대답이 너무 빨리 나온 듯 싶어,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름 때문인지?
하여간 서이사 와이프 만큼은 이상하게 친근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번호를 받고도, 한 참을 망설이는 나였다.
하는 것이 나은 것인지? 아닌지를 두고, 좀처럼 판단이 서질 않은데다,
통화를 해 본적이 너무 오래되서, 사실 조금 낯설기도 했던 것이다.
더구나 형수 역시 사장이 알고 있을 거라는 걸 눈치 채고 있을 터이고,
그랬다면 나에게 이야기 했을 거라는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었다.
"부장님?"
"어? 네~ 형수님! 잘 지내시죠?"
"덕분에요~"
나와는 달리 형수는 내 전화번호를 저장해 놓은 모양이었다.
더구나 생각과는 달리 목소리가 밝은 것이 오히려 이상 할 정도였다.
"자주 연락 드린다는 것이...죄송합니다!"
"뭘요? 바쁘실덴데... "
일단 새해 인사를 전하고, 가족의 안부를 묻는 정도로 인사 치례를 한 다음,
형수의 의중을 떠보기 시작했다.
"형님 한테 요즘 무슨일 있나요?"
"왜요?"
"아니 통 얘기도 않하려고 들고, 회사일 처리하는 것도 예전 같지 않고 해서요!"
"..."
"직접 물어보려 해도, 일부러 피하는 건지 원...그래서 혹시나 하구요?"
"글쎄...뭐...특별히...부장님이 모르시면 저는 더 모르죠?"
너무 오랬만의 통화이기긴 하지만, 형수의 반응이 예상과 다름을 느끼게 된다.
"그럼 뭐....별일 아니네요...하하"
억지 웃음까지 지으면서 눈치를 살피긴 하는데,
사건의 당사자 치고는 뭔가 좀 어설프단 느낌이 들었다.
"그럼 형님은 지금 계시죠?"
"아뇨...어디 며칠 다녀와야 된다고 하시던데..."
"어디요? 회사에서 일찍 나가시길래 계신 줄 알았는데?"
"그럼 부장님도 모르세요? 이 양반이 어딜 가신거지 그럼?"
너무도 태연히 걱정하는 그녀의 목소리다.
"다른 일이 있으신가 보죠 뭐! 회사 일이라고 해도, 요즘은 저도 다 몰라요.."
"......"
"그럼 잘 지내시고? 다음에 다시 연락 드릴께요~"
형수와의 통화에선 뭔가를 얻어 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사장의 이야기에도 별 반응이 없는 것을 보자,
풀릴 것 같던 실타래가 다시 꼬여지 듯 오히려 더 답답한 마음이 되어 버렸다.
난 사진들과 행적표를 들고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예전 은지가 쓰던 화이트 보드를 꺼내 벽에 걸고는,
시간대 별로 분리해 놓은 사진들 중에서, 상황을 알 수 있는 대표 사진을 골라,
순서대로 하나씩 붙이기 시작했다.
범죄를 소재로한 드라마나 영화의 장면을 따라한 것인데,
해 놓고 보니 , 흐름이 한 눈에 보이는 것이 한결 보기가 좋았다.
그런데, 날짜가 찍혀 있지 않은 사진이 서너장 섞여 있는 것이었다.
이전에 사진을 볼때는 모아놓고 한장씩 넘겨 가며 보았던 터라,
이어지는 한 장면의 앞 부분이나 뒷 부분으로 생각하고 지나 쳤는데,
오늘 자세히 보니, 옷차림이나 배경이 날짜가 찍혀있는 사진들과는,
매칭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건 모지?'
두 사람이 분명 같은 장소의 배경을 두고 찍은 사진은 맞는데,
함께 찍힌 것도 아니고, 각자 찍혀있는 사진이었다.
행적표의 내용과 날짜가 찍힌 사진을 일일히 비교하며,
형광펜을 이용해 하나하나 칠해 나가 보기로 했다.
그렇게 하다보니,
사진없슴으로 표기된 내용이 하나 있고,
누락 내용이라 하여 날짜별로 된 것의 중간쯤에 실제 날짜보다 늦게 표기된 내용이 하나 더 있었다.
내용은
0000년 12월 31일 서울의 OO호텔 1825호 사모님 예약.
사모님 도착시간 22시 30분.
문이사 도착시간 23시 15분.
함께 투숙
체크아웃 1월 1일 오전 10시 18분 이라고 되어 있었다.
'재작년 12월 말일이라...그럼 종무식날인데? 그날 무슨일이 있었던 거지?'
난 서둘러 재작년 다이어리를 찾게 된다.
머릿속에선 기차 건널목의 차단 경고음 같은 종소리가 울려대는 듯하고,
손놀림만 빨리지고 있을 뿐, 다이어리가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이런 제기랄...도대체 어디다 둔거야?'
작은방의 이곳 저곳을 한참을 뒤적거리다가는 결국 못찾고 거실로 나와버렸다.
"후~~~우"
담배를 꺼내 불자마자 천천히 연기를 내뿜었다.
지난 겨울에 마무리 짐정리를 한 것이 떠오르며,
나름대로 잘 치워 놓는 다고 한 것이,
어디다 놨는지 도대체 기억이 나질 않는다.
"거참! 이상하네...다이어리는 한 곳에 놨을텐데..."
혼자 중얼거리곤, 담배를 피우며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작은방 다이어리 박스안에는 없다? 그러면...어?...작년 다이어리에 옮겨 적으려고...아?'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던지듯 하고는, 거실 책장으로 달려갔다.
"그렇지? 여기 있네...어디 보자...12월이라..."
"띠리리...띠리리...띠리리~"
12월 월간계획표를 찾아 넘기려는 것과 동시에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한다.
난 전화기와 다이어리를 번갈아 바라보다,
다이어리를 든 채로 덥석 전화기를 받아 어깨에 올렸다.
"여보세요~?"
"저예요! 은희!"
"네?"
"문이사..."
"아! 아~ 죄송합니다..."
계획표에 써놓은 글씨가 작은터라, 뭐라고 쓴건지 눈에 쉽게 들어 오질 않는 것이었다.
그걸 보느라 집중하다보니 누가 건 전화인지도 모른체 무작정 받은 것인데...
공교롭게 문이사의 아내였다.
목소리가 얼마나 힘이 없고 작은지, 목소리 만으론 누군지 모를 정도였다.
"저 지금 올라 가고 있어요!"
"네? 어...딜?"
"부장님 댁에요!"
"네?"
전화를 끊으며,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니 12시 35분이다.
서둘러 작은방으로 가서는 벽에 걸려있는 보드를 내려,
짐박스 뒤쪽 벽을 향해 돌려 놓고는, 불을 끄고 나와 거실의 TV를 켜놓았다.
"똑! 똑!"
난 천천히 호흡을 하면서 거실 쇼파쪽을 휙 둘러보곤, 문을 열어주었다.
"저기...이 시간에..."
그녀는 고개를 숙인체로 아무말도 하지 않고는,
비틀대듯 걸으며 나를 지나치더니 이내 멈춰섰다.
"저기...무슨 일이라도?"
열어놓은 문을 닫고 돌어서 그녀의 뒷모습을 막 지나치려는 순간,
그녀의 어깨가 심하게 흔들리나 싶더니,
몸을 돌림과 동시에 내 품에 안기며 울음을 터뜨린다.
"흑! 흑! 어떻게 이런일이...흑...흑!"
그녀는 두 팔을 접어 손바닥을 내 가슴에 대곤,
얼굴을 묻은채 울먹거리며 이야기를 한다.
난 그녀가 떠난 후 누구에게 무슨 얘기를 듣고 왔는지가 궁금했지만,
마네킹마냥 선 채로 잠시동안 그대로 있었다.
더 이상은 아무말도 하지 않은체로 한 동안 울먹거리던 그녀가,
나에게서 떨어지고는 천천히 쇼파로 가서 앉는다.
쇼파에 앉아 감정을 추스르며, 그녀가 눈물을 닦아 낼 때까지,
또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죄송해요 부장님!"
"......"
"실은 오늘 밤에 선약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부장님하고 식사 하자마자 가서 만났는데..."
"..."
"부장님도 알고 계셨던 거죠?"
이윽고 고개를 들고는, 눈가가 잔뜩 젖은체로 나에게 묻는다.
그녀가 만난 사람이 누구일지? 예상이 되고 있었다.
"..."
"임실장한테 얘기 다 들었어요!"
"..."
"어떻게 사모님이 그러실 수가 있죠? 이건 정말..."
"..."
그녀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나 역시도 사모님이란 얘기에 적잖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휴~우..."
"사모님이 그랬다고 임실장이 그러던가요?"
"네! 처음부터 다 얘기해 줬거든요..."
"......"
처음부터라는 얘기와 사모님이 발단이 됐다는 애기를 듣는 순간,
임실장이 떠올랐다.
분명 나에겐 시작이 어찌 된 것인지에 대해선 얘기하지 않았던 그녀였다.
불분명했던 퍼즐이 조각이 비로서 윤곽을 드러낼지도 모른다고 난 생각했다.
"그럼 부장님은 어디까지 알고 계신거죠?"
"그것보다, 혹시 저를 만났다고 임실장 한테 얘기 하셨나요?"
"아뇨...얘기하진 않았어요!"
"혹 묻지도 않던가요?"
"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혹여라도 저를 만난것은, 나중에라도 꼭 비밀로 해주셔야 합니다!"
"그건 왜요?"
"지금 사모님이 들으신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닐 수도 있거든요"
"그게 무슨...?"
"어차피 알게 되셨으니까 얘긴데,
나름대로 확인 작업을 하고 있다고만 알고 계셔 주세요!"
"그럼 이 모든게 거짓이란 얘기인가요?"
"아뇨...그렇지는 않겠지만...그게 다는 아닐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 이신건지?"
"지금은 저도 섣불리 뭐라 말씀은 못 드리지만,
분명히 약속 드립니다만, 확인 내용이 있다면, 제일 먼저 알려드리겠습니다!
대신 지금은 너무 흥분하시거나 하시지 말고,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지요!"
"그럼 부장님을 믿고 기다리란 말씀이신가요?"
믿고 기다린 다는 말에 뭔지 모를 중압감과 책임감을 느꼈지만,
이미 총대를 메고 있었기에 도리가 없었다.
"결과가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그래 주시면...좋을 거 같습니다"
그녀는 크게 숨을 쉬고는, 충혈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장님! 저 정말 너무 힘들어요"
"아무래도 그러시겠죠! 저도 이해는 갑니다"
"정말 하루하루가 지옥 같아요.
밤엔 잠을 잘 수도 없고, 또 낯이 되면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터질것 같고..."
"......"
"누굴 만날수도, 뭘 할 수도 없어요..."
"그렇더라도 뭐라도 다른일을 해서라도 생각을 좀 떨치시는 것이..."
"그나마 부장님 뵙고 얘기 할 때가 제일 편한거 같아요..."
"다행이네요...조금이나마 도움이 됐다면..."
그녀는 베란다 쪽을 향해 고개를 조금 돌리곤,
지긋이 눈을 감은체 억지 미소를 지으려 노력하는 것 같다.
그러나 억누르기 어려운지, 감은 눈을 비집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내린다.
"훗! 참...얼마 살지도 않았지만...사는게 힘드네요...휴~"
"......"
그녀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떨리는 손으로 손수건을 쥐어 짜듯 하며, 어렵게 말을 이었다.
"부장님! 저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저... 한 번만 더 안아주시면 안돼요?"
그녀는 내 눈치를 살피듯, 잠깐 고개를 드는듯 싶더니, 수줍은듯 이야기한다.
나는 대답대신 조용히 일어나 그녀 곁에 앉자마자,
어깨를 감싸 내 품으로 이끌었다.
"고마워요~ 부장님!"
그저 기대듯 안고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듯 두드려 주었다.
그녀는 내 가슴에 얼굴을 기대곤, 쭈뼛거리듯 두 팔을 벌려서는,
조심스레 내 허리에 두 팔을 감는다.
우린 아무말도 없이 한참동안 그대로 있었다.
"부장님은 참 따뜻한 분이세요. 아빠처럼..."
"......"
아빠처럼 따뜻하단 말은 지난번에도 들었지만,
들을수록 내 딸 은지에 대한 미안함이 교차하며,
어떤 부탁이던 들어주지 않을 수 없게 됨을 느끼게 된다.
"지난번 처럼 저 좀 재워 주시면 안될까요?"
얼굴을 묻은 채로 나즈막히 이야기 하는 그녀다.
차마 않되겠노라고 얘기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소영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 건 사실이지만,
늦은 시각 방문한 그녀를 봤을때,
이미 이렇게 될 것임을 짐작하기도 했던 나였다.
배우자의 부정을 알았을때 과연 어떤 느낌이 들까?
경험하지 않았을 때는 간접 경험을 통해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쏟아 내곤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 되어 눈 앞에 펼쳐졌을 때는, 분명 남의 이야기와는 비교도 안 될 것이었다.
나 역시 사랑하는 딸의 입을 통해 전달되었기에,
어쩌면 나의 생각이나 느낌보단 딸의 고통을 더 걱정했을 것이었다.
더구나 사전에 그걸 눈치 채지도, 직접 목격도 하지 않았기에 아내에 대한 증오가 반감되었을 지도 모른다.
또한 우리는 2년이란 세월을 함께 지내지 못한것도, 충격이 완화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것을 내 눈앞에서 맞이하게 됐다면, 과연 어땠을까?
분명한 것은 부정을 저지른 당사자 보다는,
예상치 못한 신뢰의 붕괴와 좌절을 받아 들여야 하는 상대가 몇 곱절은 더 힘들것이었다.
나는 그리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재워 드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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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천류향입니다.
장편의 연재는 확실히 어렵네요...ㅠ
장편을 쓰시는 작가님들에게 경의를 표하게 됩니다.
글이 다소 늦어져 다시한번 양해의 말씀 드립니다.
부족하긴 하지만, 조금이라도 덜 허접하게 스토리를 이어가려다 보니,
필력의 한계인가 봅니다.
성원에 대한 보답으로 라도 좀 더 속도를 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재워 드릴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