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부]
"Merry X-mas~~"
"으...음"
"오라버니? 오라버니? 헤이? 헬~로우? 어~어?"
"......"
"일어나요~? 나 진짜 가야 된단 말예요...얼른요~~"
꿈속인지 아닌지 비몽사몽 하다가는 간다는 말에 눈이 떠지긴 했는데, 쉬 일어나고 싶지 않을 만큼 너무 편안하다고 느끼게 된다.
"아~~가야된다고 했지?....지금 몇 시야?"
"시간 다 됐어요...얼마나 깨웠는데..."
어떻게 이렇듯 편안하면서도 깊은 잠을 잘 수 있었을까? 스스로도 의아해 하게 된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어제의 충격적인 일이 있었슴에도, 아무 일도 없었던양 이렇게 태연할 수 있는지,
아마도 혼자였다면 끝도 없는 궁금증과 해답을 찾기 위해 밤을 꼬빡 새웠거나, 내 자신이나 아내를 비난하며 한 잠도 못 잤을 것이다.
소영의 등장이 이리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는 나 자신도 미쳐 알지 못했다.
"아...쏘리쏘리...일찍 가야 된다고 했지?...아~~흠...잘 잤다"
"기차시간 30분전예요...나 어떡해...잉..."
"다음거 타면 되지 뭐...아니면 가지 말던가..."
"나 먹여 살릴래요? 아니다...나 진짜 가야돼요!"
"그냥 먹여 살릴께...가지 마라!...이리와..."
가야 된다고 칭얼대는 소영의 허리를 잡아 침대로 끌어 당겼다.
"이것 봐요 아저씨? 나 진짜 가야 된다구요...네?"
당겨와도 끌려오지 않으려 침대에 무릎을 붙이고는 몸을 꽂꽂히 세우고는 내 팔을 잡고 버틴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소영의 두 손을 잡고 벌떡 일어났다.
"그래도 한번만 안아보자...잠깐이면 돼!"
못이기는 척 하고는 그대로 잠시 안기는 소영이다.
안고 있자니 계속 안은체로 있고 싶어진다.
"아냐아냐...이젠 안돼! 그럼 오라버니 나 그냥 혼자 갈께요! 더 주무세요~~"
품을 뿌리치곤 정말 쏜살같이 현관으로 향한다.
오늘같은 성탄절에 더구나 지금 시간이라면 차가 더 빠를 것이었다.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대충 츄리닝에 소영이 사준 점퍼만 걸치곤 손을 잡은채 서둘러 아래로 내려갔다.
"마음 편해지면 한번 내려오세요~ 빨리 오면 더 좋고..."
"그래...그렇게 해볼께...그리고 올라와 줘서 너무 고마어"
"후후...네~~"
"근데 오라버니...나 아파요!"
"아파?...어디?...어디가 아파?"
소영은 조수석에 앉은채로 자신의 엉덩이를 가리킨다.
"뭐? 어디~?"
"으이그...나 똥꼬 아프다구!"
"똥...꼬? 그런말도 할 줄 아네..."
"딴소리는...아침에 일어 나니까 잔뜩 부었더라구...앉으면 자꾸 쓸려서 아퍼..."
"이런...그러게 처음인데 그렇게 심하게 하면 어떡해?"
"참내! 거기다 한게 누군데 그래요?...칫!"
"약 사서 바르고 가라~"
"됐어요...시간도 없고...견딜만 해요..."
"그럼! 도착 하자마자 약 부터 사서 발라! 알았지? 늦겠다...얼른 들어가..."
"그럼...오라버니...갈께요...안녕..."
이른 새벽 캄캄하긴 했지만 성탄절이라 그런지, 차가 별로 없다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도착했다.
10분 남짓 남아 있던 터라 역앞 차도에 잠시 차를 세우곤 아쉬운 이별을 하고 있었다.
소영은 서둘러 계단을 오르면서 몇 번이고 뒤돌아 보며 손을 흔들고 나서야 역 안으로 사라져 갔다.
집에 돌아와 보니 식탁엔 아침상이 차려져 있고, 수저가 두 벌이 놓인걸 보니 함께 먹으려다가 내가 늦잠을 자는 통에 못 먹고 간 모양이다.
"이런!..."
오랬동안 혼자 살아온 집임데도, 단 하룻동안 머물렀던 소영의 빈자리는 크게만 느껴진다.
어제의 답답했던 생각이 다시금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머리를 흔들게 된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커피물을 끓이려는데 커피잔에 믹스가 넣어진채 작은 카드가 꽂혀있다.
「Merry X-mas!!!^^
함께 있어주지 못해 죄송해요.ㅠㅠ
식사는 맛있게 하셨죠? 차 한잔 하시면서 좋은 일만 생각하세요.
내 생각 하면 더 좋고...ㅎㅎ
복잡 할 수록 단순하게 생각 하라는 말도 있잖아요.
답이 없으면 찾지 마요. 답이 저절로 찾아 올때까지...
오라버니가 저한테 오셨듯...ㅎㅎ
오라버니! 힘내요...화이팅^^
힘이 되고픈 소영이가」
'훗! 나한텐 과하고도 남아...고맙다...'
카드 글귀 하나 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이 편해짐을 느끼며, 쇼파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며,소영이 타 놓은 커피를 마시다 보니 어제의 데이트가 떠오른다.
"누군데 이 밤중에 전화를 해요? 회사사장?"
"아니...아는 사람..."
"매너 꽝이다 진짜! 이런날 전활 하냐..."
통화를 하고 들어가니, 따뜻하게 데워놓은 사케 한 병과 잘 구워진 꼬치, 그리고 샐러드가 이미 나와 있었다.
이곳에 와보기는 처음이긴 한데,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내부의 모든 가구며 장식들이 모두 나무로 되어있고,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엔 사각 기둥으로만 된 나무 칸막이로 되어 있지만,
커다란 발이 의자 뒤까지 닿게끔 천장에서 부터 내려와 있어 테이블의 사이를 가리게 만들어져 있었다.
더구나 발에는 누가봐도 일본을 연상할 만한 그림이 서로 다르게 그려져 있어, 이국적인 기분 마져 느끼게 해 준다.
여기에 주방장이며 종업원의 옷차림도 일본식이다 보니, 일본에 와 있는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 일으킬 만 했고,
가게 내부엔 아기자기 하게 만들어진 크리스 마스 장식이 인테리어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더구나 각종 양념을 한 꼬치를 굽는 냄새가 지나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했다.
"근데...소영이 무슨 장사해? 진작에 물어본다는게...이제서야 묻게 되네..."
"뭐 할 거 같아요? 제가?"
"글쎄...옷 장사? 악세사리?...아니면 매장관리?"
"장사꾼으로 보이는 구나... 왜 그렇게 보이지?"
자신의 몸을 살피듯 이리저리 둘러 보더니 휴대폰을 꺼내 자신의 얼굴을 비춰본다.
"다 아닌데..."
"그래? 장사 한다고 하지 않았었나?"
"내가 언제요? 그냥 해운대 쪽에서 일한다고만 했지..."
"그랬나? 그럼 거기서 뭘 하지? 장사말고 먹고 살게 있나?"
어쩌다가 지방에서 수도권쪽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대부분이 사업이나 장사를 하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잠시 파견을 나왔거나 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렇다 보니 당연히 소영이도 장사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소영이 벡스코에서 일하고 있다는 얘기는 사실 좀 의외였다.
이미 그 곳에서 일한지가 10년이나 됐으며, 마케팅 팀장이 된지도 4년이 넘었다고 한다.
"근데 왜 내일 내려가야해? 거긴 안 쉬어?"
"훗...오라버니...벡스코가 일반 회사예요?"
부산 특히 해운대 쪽에서는 랜드마크가 된지 오래이긴 하지만, 사실 출장을 가거나 하게 되면 이정표에 나와 있는걸 대수롭지 않게 보거나,
설사 근처를 지난다 해도 건물이나 대충 보고 지나칠 뿐이었지 관심이 없었다.
더군다나 벡스코는 한번도 방문한 적이 없다 보니 더더욱 그랬다.
"서울 코엑스랑 똑같다고 보시면 되요! 전시회를 하기도 하구요. 특히 여긴 국내외 회의가 많이 열리거든요. 연말에 유치한 국제회의 때문에 점검차 가야되요..."
"아~~그렇구나...그런데를 가봤어야 알지...하하"
그녀에 대해 궁금하다 보니,이런 저런 주변 얘기를 하다가 결국 그녀의 아픈 과거도 듣게 되었다.
아픔이란 것이 수치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보니, 비교를 할 수는 없겠지만, 그녀가 겪은 아픔은 스스로 감당 하기에는 너무도 벅찼을 거란 것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사랑을 하게되고, 그로인해 엄청난 반대와 미움의 대상이 되고,다시 극복을 위해 서로 노력했지만, 결국 유산의 아픔과 이별을 함께 맞이했다고 한다.
나에게 벌어진 일도 그렇고, 어찌 보면 드라마틱 하게 보일런지 모르지만 아쉽게도 이것은 현실인 것이다.
우리가 드라마를 보면서 빠져들게 되는 이유도,어찌보면 우리 주변에서 일어 나거나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이라 그럴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소영을 처음 만났던날, 그녀의 배꼽 아래에서 만져졌던 수술자국의 흔적은 단순히 유산으로 인한 것만이 아니었다.
이별 조차도 감당이 안될때 유산이 이어졌고, 유산의 아픔을 느낌과 동시에 끔찍한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다시는 자신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많이 힘들었겠다...내 일은 아무것도 아니네..."
비록 미소를 잃지 않고 이야기를 하고는 있었지만, 이야기 내내 그녀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그 때의 아픔을 대변하는 듯 싶어 마음이 편칠 않았다.
"흠!...이젠 괜찮아요...아무한테도 얘기 않했는데...오라버니 앞이라 그런지 쓸데없이 눈물이 자꾸 나네? 죄송해요! 흠!흠!"
눈물을 참으려는 듯 고개를 들어 눈을 크게 뜨고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고 있긴 하지만, 좀처럼 멈추지를 않는다.
"울고 싶으면 울어. 참지 말고..."
"아~뇨...왜 울어요...이젠 아무것도 아닌 얘긴데..."
난 소영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한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한 손으론 눈물에 얼룩진 그녀의 볼을 감싸 내 어깨에 기대게 했다.
눈물을 끝내 참아내고는 목이 메이는지 헛기침을 여러번 하고서야, 남은 눈물을 닦고는 괜찮다며 내 팔을 거두어 준다.
"이제 괜찮아?"
"네..."
"그런 일이 있었구나~...참! 사람은 모르는거야...그치? 겉으로만 보면 잘난체만 하고 이쁜척만 하면서 살거 같은데..."
"제가 그렇게 보여요?"
"그냥 보기엔 그렇다구...잘나 보이잖아...아냐?"
"잘나긴 개뿔이...큭큭"
"어라? 하하...울다가 웃으면 거기 털난다...하하하"
소영이를 보면서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자자...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거야...그리고 우리의 재회도 축하하며 한 잔 하자!"
"저도요! 그리고...음...오라버니의 근심이 다 날아가길 바라며...건배!!!"
어찌 극복했는지? 그래서 어떻게 살고 있었던 건지는 묻지 않았다.
더이상 그 아픔에 대한 기억을 들춰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다소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커피잔을 다 비울 무렵, 연속해서 각기 다른 알림음이 두번 울린다.
'도착 했나 보네...'
[한소영]
오라버니 지금 도착요~~
타자마자 잠들어서 이제 연락해요 ㅋㅋ
보고 싶죠? ㅎㅎ 이따 시간되면 저녁에 전화 주세요.
9시 넘어서...
아랐쬬? ♥
[박영식]
그래!
그리고 너무 너무 고마워~~
[한소영]
보고 싶진 않고???
[박영식]
아냐...보고싶지...
전화 할께...
참! 약 샀어?
[한소영]
ㅋㅋ 아뇨 아직...
[박영식]
얼른 사서 발라~~
[한소영]
네~~오라버니...
이따 통화 해요 그럼...
바이~^^
이제 두번 봤을 뿐인데, 아주 오랬동안 알고 지냈던 사이 보다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이, 의아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게 한다.
소영과 톡을 마치고 나니, 메세지 알림음이 하나 더 있었던게 생각난다.
은지가 보내는 시간은 아니었기에 예감이 맞지 않기를 바라며,메세지를 확인하니...아니나 다를까...
- 어제도 그렇고 자꾸 연락드려 죄송해요~
너무 답답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요.
편하실 때 연락 한번 주세요...
죄송합니다.
문이사 아내다.
모르는척 할 수도 없고, 난감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띵 동"
"들어오세요~"
불과 일주일이 채 안된 재회다.
밖에서 만나기도 귀찮을 뿐 아니라 남의 눈도 그렇고, 어차피 한 번 왔었던 곳이니 그리 낯설거 같지도 않고 해서 집에서 보자고 전화를 했었다.
문을 열어 주는데 순간 아내가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 일으킬 만큼, 지난번과는 전혀 다른 아줌마 한 명이 들어온다.
"너무 죄송해요..."
"아뇨...들어오세요..."
왠만하면 다른 분에게 의견을 묻는게 좋지 않겠냐는 말이 목구멍에서 맴돌았지만, 몰골을 보니 차마 할 수가 없었다.
"23일에 출근하고 나서 부터 지금까지 집에도 안오고, 연락도 없어요.물론 받지도 않고..."
"뭔가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러지 않을까요?"
"제가 모르는 급한 일이라면 회사 일 밖에 없는데..."
내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채 대답을 재촉하는 것처럼 보인다.
"회사야...뭐...별일 없는 걸로 알고 있긴 한데...문이사 업무를 제가 다 아는 건 아니거든요"
"아무리 그래도 크리스마스 연휴에 일을 할 정도로 급한 일이 있는건 아니잖아요..."
고개를 떨군체 있는데,지난번 봤을때 보다 많이 수척해진 모습이다.
문이사와 연락이 안돼면서 잠도 제대로 못 잔 모양이다.
고와 보였던 얼굴은 볼과 눈이 쑥 들어 간것이 피곤 그 자체이고, 화장할 겨를도 없었는지 거의 맨얼굴 이었는데, 매끈함은 사라지고 거칠게 까지 느껴진다.
더구나 동네 슈퍼에 갈 때나 입지 않았을까 싶은, 발목까지 내려오는 흐늘흐늘한 면 원피스가 그녀에겐 어울리지 않는 듯 하지만, 나에게는 익숙해 보이는 옷이다.
들어올때 잠시 헤깔렸던 것이 색상은 다르지만 집사람도 저것과 비슷한 옷이 있는데, 꼭 집에오면 저 옷으로 갈아 입곤 했었다.
"회사에 한번 확인해 보시지 그랬어요?"
"어제 확인 했어요...회사 앞에서 전화하고 못 믿겠기에 염치 불구하고 직접 들어가 봤거든요..."
"아..."
"오팀장님 말씀으론 일이 있다고만 연락이 왔었대요. 출근 못한다고..."
공교롭게 어제는 나도 출근을 못한터라, 어제 회사에서 무슨일이 있었는지는 나역시도 모르고 있다보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특이 사항이 있었다면 김과장이 문자라도 남겼을 터인데, 성탄인사 외엔 다른 말도 없었다.
"부장님도 안나오셨던데..."
"아...예! 제 사무실도 들르셨어요?"
"아뇨 간 김에 물어 봤죠. 근데 일이 있으셔서 못 나오셨다고...그래서 하면 안되는건 알면서도 저녁에 전화를 드렸네요..."
"아...일이 좀 있었습니다...만날 사람도 있었고..."
굳이 내 얘기를 할 필요는 없었기에, 대충 얼버무리긴 했는데...여전히 해 줄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쫌 기다려 보시는게...이제 이틀인데...어차피 연휴 후엔 출근하지 않겠어요?"
"휴~~. 오늘이 금요일이 잖아요..."
그랬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금요일. 그러면 앞으로도 이틀을 더 쉬고 나서야 출근을 한단 얘기가 된다.
지금 그녀의 표정은 그 이틀이라는 시간을 견뎌낼 자신이 없슴을 보여주는 듯 했다.
"그래도 좀 마음을 편히 가지시고, 집에서 기다리셔야 하지 않을까요? 언제 들어올지도 모르고..."
"......"
기껏 생각해낸 말이 이거였지만, 말을 뱉어 내자 마자 괜한 말을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지금같은 상황에서 판에 박힌 듯한 이런 얘기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뭔가 다른 말을 해야겠기에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데, 문득 소영이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잘 안된다는 건 나도 알지만, 괜한 상상하지 말고 그냥 편해 지려고 노력해 보세요!
어차피 들어오던 통화를 하던 해야 무슨일인지 알지 않을까요? 안절 부절 한다고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고...
오히려 그러다가 건강만 해치게 되요. 어차피 며칠 지나면 저절로 알게 될 일이기도 하구요."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일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선 그나마 적당한 말이라고 생각해서 한 말인데, 문이사 와이프로 이해가 되는지 끄덕 거리며 반응을 해 온다.
"휴~우...고마워요...부장님...혼자 있다 보니 너무 답답해서...흑...흑..."
고개를 떨군채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내내 울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젠 더이상 참을 수 없는지 어깨까지 흔들리며 소리까지 새어 나온다.
"으...흑...허...흑..."
"울고 싶으면 그냥 소리내서 우세요...맘놓고 울고 나면 시원해 지기도 하더라구요...우세요...그냥"
울음섞인 목소리로 뭐라 하는 것 같더니만 정말로 엉엉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한다.
이웃집에 살짝 신경이 쓰이는 것이,방에 가서 울라고 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찌 감정을 자리 봐가며 할까 싶어 그냥 두었다.
나를 봐도 그렇듯 혼자 별의별 상상을 다 하지 않았을까, 그러한 근심의 골이 깊었는지 울음이 쉬 멈추지 않는다.
그냥 멍하니 바라보고 있기도 뭐 하고 해서 화장실로 가 부드러운 수건 하나를 가져다 건네 주고는, 난 베란다로 나가 담배 하나를 베어 물었다.
그녀는 수건을 얼굴에 댄체 한 참을 소리내어 더 울었고, 멍하니 담배 두가치를 피우고 들어올 때쯤에서야 비로소 울음을 그치고는 얼굴을 가린채 화장실로 향하였다.
눈 주위가 벌겋고 특히 코 끝이 빨개져서는 세수를 했는지 머리에 묻은 물기를 닦으면서 나오는데, 처음 들어설 때 보다는 화색이 도는게 오히려 더 나아 보였다.
"이제 시원하세요~?"
"훗...덕분에요..."
수건을 머리결에 따라 내려 닦으면서 고개를 기울인채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답한다.
"한결 좋아져 보이네요...차 드세요"
지난번에 느낀거지만 원래 성격은 좋은 여자임에 틀림없을 거 같았다.
예의도 바른것 같고, 조금 기분이 좋아지면 살짝 덤벙대는것 같은 모습도 보이는 것이, 다만 스스로를 많이 억압하며 지내지 않나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왜냐하면 나 같은 사람에게서 마음의 위안을 받을 정도면, 주변에 맘 편히 얘기 할 대상도 그리 많지 않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까 오늘 같은날 부장님도 혼자시네요...?"
"네? 저야 뭐...항상...하하"
예의상 한 말인줄 알면서도, 새벽까지 소영과 함게 있었 다는 사실을 숨긴게 살짝 미안한 생각이 들어 멋쩍은 웃음을 보이게 된다.
"그럼 혼자인 사람끼리라도 함께 즐길까요?"
"네?...아니...뭐...어...하하..."
즐긴다는 얘기에 잠시 머쓱해 져서는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나온다.
"큭큭...부장님!...큭큭큭...아...큭큭큭큭"
한 손은 입을 가리곤, 다른 한 손으론 손가락을 펼쳐 나를 가리키는 듯 하덧이 쇼파에 기댄채 크게 웃기 시작한다.
"왜 그렇게 웃으~세요?"
"큭큭...부장님...생각보다 되게 순진한 면이 있으세요...큭큭큭"
"......"
"어쩜 그렇게 얼굴이 빨개지세요? 뭐...다른거 상상하신거 아녜요?"
"아닌데요...전 그냥..."
그녀는 다시 얼굴이 빨갛게 상기될 만큼 실컷 웃고는, 미안한지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자세를 고쳐 앉는다.
"하아~ 죄송해요 너무 웃어서...예전에 부장님 처음 뵜을때 글쎄 뭐랄까요? 경륜 이랄까? 어떤 무게감? 뭐 이런 느낌 때문에 사실 말을 붙이기도 쉽지 않았거든요"
"그랬나요?"
"근데 몇 번 안 뵈었는데도, 너무 편하고 좋으신거 같아요"
"그렇게 봐 주시니 다행입니다"
"애 아빠가 부장님 부하 직원이었으면, 부장님이 더 편하게 대해 주실텐데 그쵸?"
"혹시 뭐...불편하게 해 드렸나요?"
"아뇨...그런말이 아니고..."
그녀는 뭔가 더 얘길 하려다 말고는 점심 준비를 하겠다고 한다.
사실 오늘 만큼은 기존처럼 편하게 혼자 있으면서, 아내와 은지에 대한 생각도 해 보려고 했는데, 의외의 복병이 나타났다.
얘기 끝났으면 이만 가시죠? 하고 싶구만, 갈 생각이 없는건지, 아니면 정말 오늘 같이 놀자는 건지, 어쨌든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썩 내키지는 않았다.
"우리...식사하고 영화 보러 갈까요?"
내가 극장에서 영화를 본 건 결혼 초기가 마지막이 아니었나 싶다.
연애때와 달리 결혼을 하고 나자 집사람이 나서서 극장에 가지 말자고 했었다.
표값도 비싸고, 그냥 집에서 보자고 하는 통에, 흔히 어둠의 경로를 통해 다운받은 영화를 빌리거나 하는 식으로 해서 집에서 보곤 했던 것이다.
"영...화요?"
"네...제가 보고싶은 영화가 있거든요. 같이 보러 가요...영화 좋아 하시죠?"
얼떨결에 대답아닌 대답을 하고 말았지만, 아예 이 편이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특히 할 말도 없는데 얼굴을 맞대고 있기도 그렇고, 영화는 말이 필요 없는데다, 끝나고 나면 집으로 돌려 보내기도 훨씬 수월 할 거라 생각 됐기 때문이다.
식사를 마치고 혼자서 휴대폰을 가지고 씨름을 하던 그녀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채 뭐라뭐라 혼자 중얼 거리더니 한숨까지 쉬고는 고개를 푹 떨군다.
"왜요? 무슨일 있으세요? 혹시 연락이라도??"
"잉...망했어요..."
"왜요? 왜 그러시는 데요?"
"표가 없어용...에잉..."
난 또 좋지않은 문자라도 받은 줄 알고 잔뜩 긴장 했었구만, 영화 표 때문에 이 호들갑이다.
"아~ 그렇겠네요...날이 날이니 만큼..."
"그 생각을 못했네요...다른 영화를 보기도 그렇고...뭐야? 다 매진?...에이...어쩌지..."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며 그녀는 다시 손톱을 입에 문다.
"뭘 그렇게 걱정해요? 다음에 보면 되지...많이 피곤해 보이 시던데, 이 참에 집에 가서 좀 주무세요~"
"그건 싫어요...집에 가면 또..."
그야 나도 어제는 집에 있기 싫다는 마음이 들었었던 터라,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 곳이 자신의 집보다 편할 거라는 생각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혹시 그러면 친정이 서울 아니세요?"
"저희 부모님 대구에 계세요.제 고향도 대구고..."
이럴때 친정에나 가 보라고 할 참이었는데,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내 생각을 읽어서인지 그녀의 표정이 다시 굳어지기 시작한다.
"저 때문에 불편하시죠? 제 생각만 하고 있었네요...죄송해요"
"아뇨 뭐...불편하다기 보다...마땅히 할 것도 없고...아니...그것보다 다른 친구나 뭐...그런분과 함께 계시는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
"저는 그냥 부장님과 함께 있기만 해도 맘이 편해서...아뇨 이제 갈께요..."
"..."
"충분히 고마웠어요. 그럼..."
뭘 챙기고 말것도 없이 왔으니 벌떡 일어서선 인사를 꾸벅 하고는 가방과 휴대폰만 챙긴채 바로 나가려고 한다.
"아니...그런 뜻은 아니구요...불편하지 않으면 그럼 여기서라도 좀 쉬고 가시던지..."
어떻게 하면 보낼까를 연구하고 있었는데, 간다는 말에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인지, 마음에 없던 말을 해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고맙다는 말과 함께 다시 자리에 앉는다.
미안한 마음에 예의상 던진 말이었고,그래도 당연히 그냥 간다고 하면 못 이기는척 하고 보낼 생각 이었는데, 아직은 그녀를 잘 모르고 있긴 한가보다.
난 방으로 들어가 소영이의 체취가 남아있는 시트며,이불, 베게를 곱게 개어 장에 넣고, 다른 것으로 교체를 하곤 커텐까지 다 닫아 쉴 수 있도록 하곤 거실로 나왔다.
"죄송해요...조금만 쉬고 진짜로 갈께요,..."
강조까지 하는걸 보니 자고 나면 진짜 갈 모양이다.
나도 이젠 더이상 머리 굴리고 싶지도 않고, 그나마 잠이 들면, 혼자 생각하기도 좋을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녀는 샤워까지 하고는 안방으로 들어갔고,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조용한 걸 보니 벌써 잠에 빠져든 모양이다.
'오후 3시면...지금쯤 하면 되겠다'
문이사 아내와 얘기를 하다 시간을 다소 놓치긴 했지만, 이제 미국도 크리스마스로 날이 바뀌었다.
난 은지에게 성탄 축하 메세지를 보냈다.
일어나면 제일 먼저 내 메세지를 보게될 것이라는 생각에, 스스로 흐믓해 하고는 커피 한 잔을 들고 거실 창가로 가서 앉았다.
은지에게서 들은 아내의 이야기는 이랬다.
우리가 은지를 미국으로 유학보내기 위해 몇 가지 체크한 것이 있었는데,
공부여건, 치안, 물가, 체류비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많지 않은 한국인 거주지역이었다.
나름대로 알아보고 결정한 것이 북서부에 위치한 오리건주 포틀랜드였다.
오리건주에서는 가장 큰 도시이긴 하지만, 주변 대도시에 비해선 그렇게 복잡하지도 않을 뿐더러 환경이나 치안도 좋은 편에 속했었다.
더구나 고등학교로 편입이 되는 은지인 경우는 거기서 공부를 하고 어디로든 원하는 대학을 가면 된다고 판단했고,
LA만큼 많지는 않아도 한국인이 제법 살고 있을 뿐 아니라, 한국 식당이나 가게들도 꽤 있는 곳이라 그리 불편함도 없어 보였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2학년 1학기를 마친 은지는 현지 적을 코스를 마치고 고등학교 1학년 2학기에 편입이 되었었다.
그런데 이듬해, 현지 한국인 3세인 한 사업가를 우연하게 알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아내는 은지와 달리 현지 적응에 더 어려움을 겪었었던 것 같고, 그러다 보니 주변의 한국 상인들과 친분을 갖게 된 모양이었다.
이 남자는 물심양면으로 여러가지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은지는 알고 있었다.
특히 낯선 곳에서의 이러한 도움은 아내에겐 천군만마격이나 다름없었던 건 두말할 나위도 없었을 테고.
어느날 은지가 예상보다 일찍 수업을 마치고 귀가를 했다가 그만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만 것이다.
그 남자와 아내의 정사 장면 이었던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 은지와 아내의 사이는 극도로 나빠졌고, 그 남자의 관계를 정리하길 바랬던 은지의 요구를 결국 아내도 받아 들였다고 한다.
물론 나는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남자의 존재 조차도 알지 못했다.
사실 이 때부터가 아내나 은지에게서 연락이 뜸해지기 시작한 시점이었던 같았다.
은지는 이 일 이후 엄마와의 관계도 예전같지 않았고, 미안함에 아빠인 나에게는 연락하기도 두려웠다고 한다.
하지만 엄마와는 다투면서까지 만나지 말것을 얘기했고, 그 이후 관계를 정리한 걸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집에서의 만남을 피했을 뿐, 그 둘은 그 남자의 집이나 일터, 제3의 장소에서 꾸준하게 밀애를 즐겼을 거라는게 은지의 얘기였다.
그 이유는 불과 얼마전 은지가 사회봉사 차 인근 아동병원을 방문했을때, 그만 병원 입구 근처 공원에서 아내와 그 남자의 키스 장면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은지는 집에 돌아오자 마자, 약속을 어긴 아내와 크게 다퉜다고 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내는 은지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은지야! 이젠 엄마도 엄마 인생을 살고 싶어...그 동안 정말 지긋지긋 했다고,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니? 엄마도 이제 자유롭게 살고 싶단 말이야~
엄마도 은지 엄마이기도 하지만 여자라구...나도 여자로 살고 싶어!"
그 말로 은지는 집을 뛰쳐 나와서 곧바로 셜리라는 친구 집으로 갔다고 한다.
하룻밤을 거의 뜬 눈으로 지새다 시피 하고는 다음날 일찍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내는 집에 없었다고 한다.
은지의 책상위에 한 장의 쪽지 만을 남긴채...
「은지야! 미안해...
엄마도 어쩔 수 없구나. 아니 엄마는 엄마 자격도 없는거 알아...
하지만 엄마도 이렇게 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어.
우리 은지 어떻게든 학업 마칠 때 까지는 함께 잘 보살펴 주고 싶었는데...
은지가 다 알고 있는 이상, 더 이상은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구나.
아빠에게 사실 대로 말하고, 아빠 말씀 듣도록 해.
이 못난 엄마 많이 욕하렴...
은지야 사랑한다.
미안해...」
이 한장의 쪽지와 함게 통장과 카드, 은지의 여권 그리고 학업과 체류에 필요했던 각종 서류등을 가지런히 놓은채 아내는 떠나 버린 것이다.
타국에서 엄마와 단 둘이 생활하다 이 모습을 본 은지의 충격은 나 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은지는 엄마를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느정도는 엄마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나에게 얘기했었다.
그래서 일단은 이 현실을 받아 들일 수 있었다고...
난 은지가 이해할 수 있다라고 한 부분에 대한 의문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가 없었다.
은지까지도 그렇게 생각할 만큼, 무엇이 아내를 그토록 힘들게 했었을까? 나의 무관심 이었을까? 아니면 홀로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며 받은 스트레스?
보통의 아내들이 겪는 일들이라고 치부했던 나였고, 사실 모든 한국의 엄마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아내의 셩격은 나에게 먼저 프로포즈를 했을 만큼 내성적인 성격도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이러한 아내이기에 딸까지 버려가며, 떠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나보다도 더 은지를 사랑했던 아내다.
아무리 남자가 좋다고 하더라도, 더군다나 저 머나먼 타국에서 딸을 혼자 버려둔채 남자를 따라갔다는 것 자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일부러 답을 찾으려고 하지 말라던 소영의 충고도 이러한 나의 답답함을 풀기에는 역부족이었는지, 나의 이러한 의문에 대한 궁금증은 더해만 갔다.
20년 가까이를 살면서 아내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진정 나만의 착각이었단 말인가?
그러나 아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도 순간순간 울화가 치밀는걸 참을 수가 없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면서 나 역시 남자가 아니었다.
친구나 동료와의 술자리도 이 핑계 저 핑계로 피한적인 더 많았고, 모임이나 동호회엔 거의 참석 조차 하지 않았었다.
어렵게 살림하는 아내를 위해 적은 용돈을 쪼개쓰느라, 이 정도는 충분히 감내 할 수 있었다.
내가 좀 더 뛰면 좋아지려니 하는 마음에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이다.
은지에게도 아빠 얼굴 잊어 버릴까 싶어, 휴일이면 힘 닿는데까지 놀아 주던 내가 아닌가...
그런데 이제와서 자유롭고 싶고, 여자답게 살고 싶다니? 그럼 난?
이런 생각 하면 안된다 하면서도 자꾸만 울화가 치미는걸 나도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휴~~우...아니다 아냐...쓸데없는 생각이다..."
긴 한숨과 함게 도리질을 치며, 이 끝없는 생각으로 부터 벗어 나고 싶지만 좀처럼 머리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겨울의 짧은 태양은 서쪽하늘에 엷은빛의 노을 만을 남긴채 저 끝없는 어둠속으로 서서히 사라져만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