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03부 > -희망- (8/24)

< 03부 > -희망-

다음날 저녁, 일을 마친 인혜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을 돌보느라 땀범벅이 된 옷과 속옷을 아무렇게나 던지고 샤워를 했다. 

그리곤 꼼꼼히 공을 들여 화장을 했다. 너무 화려하지 않게. 착실한 엄마로 보이도록, 그래서 그 아들도 결코 나쁜 사람일리 없다고 느껴지도록. 

그리고 미리 결정해놓은 옷을 입는다. 검은 정장 바지와 재킷안에 하늘색 블라우스를 입었다. 

다소 어두워 보이지 않을까 했지만 지금은 그게 더 나을것 같았다.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하며 운전대는 잡은 남자는 잠시 말을 끊는다.

박지용 사무장. 그녀가 찾아갔던 한 변호사 사무실의 사무장이다. 

그 변호사와 수임료가 맞지 않아 결국 걸어나오던 인혜를 멈춰세우고 그는 솔깃한 얘기를 했었다. 

지금 인혜는 그가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아 함께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이분이 굉장히 큰 로펌에 계신 분이고 부장 판사까지 지내신 분이고 한데 

 어머님 같은 처지에 있는 분들을 저렴한 비용으로 돕는 일을 자주 하시긴 하지만...이분도 땅파서 장사하시는 분은 아니니까요. 

 모든 일을 다 맡으시는건 아니에요. 나름대로 엄격한 기준을 갖고 계세요. 

 물론 어머님은 그 기준에 부합한다고 전 생각했기에 이렇게 소개시켜드리는거지만서도..''

''어떤 기준인가요?"

"진짜로 억울하신 분. 그냥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 돕는게 아니에요. 진짜 죄가 없는데 당하게 생기신 분들. 

 그래서 변호사가 제대로만 해주면 무죄받을 수 있는 사람들 말이죠...''

''저희 아들은 무죄까지는 사실 좀...''

''아, 무죄가 꼭 아니더라도요, 어쨌든 검찰이나 경찰에서 하는 말이 사실이 아니다 이런거죠? 혐의가 너무 지나치다.''

''네, 맞아요.''

''그래서 꼭 그점을 강조하셔야 하는거에요. 어머님과 아드님이 얼마나 억울한지. 

 죄를 진짜로 지은 사람들이야, 물론 다들 좀더 적은 처벌을 원하긴 하지만서도 사실 억울할 건 별로 없잖아요. 

 하지만 실제보다 큰죄로 처벌받는건 억울하죠, 그쵸?''

''네, 그렇죠.''

''그리고 그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다. 

 그런 모습을 보여야 이분이 '아, 이 사람은 진짜 억울한게 맞구나. 믿어도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실거란 말이죠. 

 자, 여기에요. 다 왔네요. 제 말 명심하세요.''

거대한 고층빌딩의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둘은 엘리베이터를 탄다. 박사무장은 23층  버튼을 누른다. 

버튼 옆에는 xx법무법인이라고 적혀있었다. 인혜가 알아본 바로는 우리 나라에서 10위 안에 든다는 로펌이었다.

''유기훈 변호사님, 뵈러 왔습니다.''

''약속하셨나요?"

''네, 박지용 사무장입니다.''

둘은 프론트 여직원이 안내해준 곳으로 향했다. 유기훈이라는 이름이 적혀있는 사무실에 노크를 하자 굵직한 목소리의 대답이 들려왔다.

''합의를 하셔야 합니다.''

''합의요...?''

''네. 저도 도와드리고 싶지만 이건 제가 아니라 대통령이 와도 피해자와 합의없이는 힘듭니다.   

 하지만 합의를 해서 피해자들이 처벌을 원치 않는다 하면 제가 어떻게든 해볼수 있을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럼 피해자들이 한 말을 인정한다는 거잖아요. 강간도 인정해야 하고, 그 아이들이 아들 여자친구한테 몹쓸 짓을 한것도 그냥...''

''어머님,''

인혜가 축축해진 눈으로 유변호사를 쳐다본다. 나이는 60대 중반쯤? 하지만 머리가 온통 백발이라 얼핏 보기엔 훨씬 더 들어보였다.

''살인미수에 강간에 피해자가 여러명이라 아마 징역 10년은 나올겁니다. 초범이고 대학생인걸 감안해도요. 

 대한민국에서 형사 사건 변호사는 저보다 좋은 판결 받아낼 사람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맡아도 그렇게 됩니다. 

 한마디로 어머님이 무슨 짓을 하셔도 그건 안바뀐다는 겁니다. 지금 그런 거 따질 때가 아닙니다.

 내용은 좀 억울하게 되더라도, 일단 처벌 수위를 낮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흑....." 인혜는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어 고개를 숙이고 손을 입으로 막았다. 

"하지만 일단 피해자와 어떻게든 합의를 보시면,'' 변호사가 말을 잇는다. 

''제가 어떻게든 공소장을 살인미수에서 특수상해로 바꿔보겠습니다. 같은 행위라도 죄목이 바뀌면 형량이 다르지요. 

 죽이려고 달려들었는데 못 죽인게 살인미수고, 죽이려는 뜻은 없이 그냥 흉기를 이용해서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한게 특수상해입니다. 

 합의가 되서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해주면 제가 검찰쪽 인맥 동원해서 어떻게 해볼수 있습니다.''

살인미수를 상해로...인혜의 머릿속에 지난 한달간 한번도 가져본적 없던 희망이 비치기 시작했다.

''상해라면 초범이고 하니 집행유예 가능성도 있습니다. 재판 끝나자마자 바로 구치소에서 나오는거죠.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요.

 그리고 강간 부분이 남는데....아드님의 진술이 사실이라면..... 

 이 강민석이라는 아이가 합의를 해주면 강간 피해자인 오시은도 아마 합의에 동의할 것 같습니다. 추측이긴 하지만...''

뒷부분은 인혜의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그녀의 귀에 들린 것은 오직 집행유예라는 단어....재판이 끝나자마자 아들이 나올수 있다고?

''어쨌든 제가 그런 거라도 해보려면 일단 합의는 어머님이 해주셔야 합니다. 제가 거기까지 하기는....저도 자선사업을 하는건 아니니까요. 

 다만 합의를 해오신다면 제가 인맥을 동원하는거야 전화 몇통 돌리면 끝나는 일이니 돈 안받고 해드리겠습니다. 

 어차피 합의금이 적지 않게 깨지실거구요.''

무료로....합의가 된 후의 일도 사실 아무 변호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닐것이다. 

전관예우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는 인혜도 알고 있었다. 그런 전관변호사를 무료로....

''합의나 기타 절차까지 다 진행해주길 원하시면 수임료를 시가대로 주셔야 하는데... 아마 감당할 수 없는 액수일겁니다.''

그날의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인혜의 목표는 하나로 정해졌다. 

어떻게든 피해자들, 특히 가장 중요한 피해자인 강민석과 합의하는것. 

아들을 위해선 해내야만 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7동 3층이 운동을 하는 시간. 좁은 운동장에 60명이 넘는 인원이 모여 와글와글대고 있었다.

단연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은 황인문의 주변이었다. 형진은 홀로 조금 떨어진 곳에 쭈그리고 앉아 햇빛을 쬐고 있었다.

오늘은 10번방의 서열 5위인 윤사장이 퇴실하는 날이다. 그는 형이 확정되어 교도소로 이감되게 되었다.

그리고 오후에는 신입이 들어올것이다. 그러면 현재 막내인 한냐와 그 신입이 잡일을 하고,

형진은 드디어 해방될수 있을 것이다.

한냐는 어디있지? 두리번 거리는 형진의 눈에 꿈틀거리는 한냐 문신이 들어왔다.

형진과 동갑이지만 머리 하나는 큰 키, 멋지게 붙어있는 근육, 그리고 온 몸 가득한 문신.

그는 웃통을 벗고 황인문의 옆에서 걷고 있었다.

둘은 무엇이 즐거운지 계속 웃고 있었는데, 가끔씩 둘의 시선이 동시에 형진을 향했다.

신입의 이름은 정병호. 나이는 26. 영업사원으로 일하고 있는데, 공무집행방해로 들어왔다고 한다.

술집에서 만취해 난동을 부리다가 말리러 온 경찰을 두드려 팬것이다.

깔끔하고 호감가는 인상에 말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었다.

정병호의 소개 뒤에 이어진 큰형님의 말은...

"앞으로 한냐가 하던 일은 전부 병호가 하도록 하고, 한냐는 병호한테 뭐 하면 되는지 잘 가르쳐줘라.

 형진이는 병호랑 같이 계속 하던대로 하면 되고."

어째서? 한냐가 막내인데 어째서 내가 아니라 한냐가 해방되는거지?

형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뭐라 말을 하려 할때,

"형진 형님, 뭐 불만 있어요?"

한냐가 일어서며 형진 쪽으로 걸어온다.

순간 형진의 심장이 터질듯 뛰기 시작한다. 형진은 일어서지도 못하고 앉은채로 고개를 두리번거린다.

"아니...불만이 아니라..."

"불만 있어요?"

형진의 입이 얼어붙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진 후에,

"그만해라 한냐야."

큰형님의 말이 이어졌다.

"형진아, 그냥 어떻게 그래 됐다. 좀만 더 수고해줘. 괜찮지?"

형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끝이었다. 형진의 서열은 결국 한냐에게 추월당한 것이다.

원래 처음에 형진은 이렇게 무시당하지 않았다. 죄명이 살벌하기 때문이었다.

건드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저놈은 잃을게 없다...그런 평판은 구치소에서 매우 유용했다.

하지만 24시간 붙어있는 상황에서 서로의 성격은 결국 쉽게 들통난다.

형진이 어쩌다가 육식동물들 틈에 들어와 있는 초식동물에 불과하다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했던 것이다.

"한냐 형님은 출소하면 큰형님 밑에서 일할 가능성이 크지 않겠습니까? 말이 사업가지 사실 큰형님은 조폭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이고...

 반면에 형진 형님은 결국 남이고....누구를 먼저 챙기겠어요?"

며칠이 지난 후 운동장에서 정병호가 형진에게 그렇게 말했다. 완전히 납득이 가는 말은 아니었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난 저들과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니까....

"나야 뭐 죄가 별거 아니라서 대충 집행유예나 뭐 그런걸로 나가지 않겠어요? 실형 살아도 길어야 1, 2년이지...

근데 형진형님은 진짜 걱정이네요."

형진도 그게 걱정이었다.

"큰형님, 병호 이자식 여자친구 좀 보십시오. ㅋㅋ"

조용하던 10번방이 방금 전부터 왁자지껄해진 것은 정병호가 받은 편지때문이었다.

사진은 그의 여자친구로부터 온것인데 그 안에는 몇장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문제는 그 여자친구가 꽤나 미인이었고, 다리가 드러난 미니스커트나 스키니진처럼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은 사진들이 꽤 있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맥x같은 남성잡지도 꽤 볼 수 있는 구치소였지만, 그래도 그런 인위적인 사진들이 아닌 자연스러운 여자를 볼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는 곳이었다.

"어디 한번 보자. 야, 상당히 미인인데?"

"아닙니다, 그냥 사진빨이에요."

정병호는 손사래를 치면서도 기분은 나쁘지 않은듯 했다.

"몇살이나 먹은 처자인가?"

평소에 말도 없던 서열 4위 윤사장도 사진을 보고 흥분한듯 눈을 굴리며 물었다.

"21살이에요."

"캬! 좋구나."

방안은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빠따는 처음에 사진을 힐끔 보고 나서부터 전혀 흥미가 없다는 듯 혼자서 신문을 보고 있었다.

그의 리스트에 오르기에는 21살은 유치원생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사귄지 얼마나 됐어요?"

최근에는 아예 큰형님, 둘째형님 옆에 딱 달라붙어서 마치 서열3위처럼 행세하고 있는 한냐가 물었다.

"3년 됐어요. ㅎㅎ"

"그럼 고딩때부터 사귄거에요?"

"그렇죠."

"뭐야, 이 분도 나랑 별로 다른거 없네 ㅋㅋㅋㅋ"

"한냐야, 고딩을 사귄거랑 가출고딩을 감금해놓고 성매매를 시킨 거랑은 다르단다."

사채업자이자 강간범인 둘째형님 이경준이 세상에서 제일 착한 척 그런 말을 한다.

"해봤어요?"

한냐의 그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다시 정병호를 향한다.

"해봤죠, 3년이나 사귀었는데."

"처음에 한게 언제에요?"

"사귀고.....두달인가 됐을때니까 걔가 2학년일때죠."

"와...이분 능력자시네."

한냐의 주도로 사람들은 계속 병호에게 질문을 이어갔다.

교복 입히고 해봤냐, 사까시는, 후장은, 이거는 해봤냐, 저거는 해봤냐.

점점 대화의 수위가 올라갈수록, 남자들은 흥분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병호는 곤란해했다.

"그만해라, 이제. 아무리 어려도 남의 여자친구인데 예의는 지켜야지."

큰형님의 그 말과 동시에 사진들은 다시 병호의 손으로 돌아갔고 대화는 중단되었다. 그때였다.

"형진 형님, 여자친구가 몇살이었다고 했죠?"

순간 형진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여자친구? 박보연? 걔는 내 여자가 아니야. 걔는 배신자야.

"한냐야."

큰형님의 낮은 목소리로 대화는 끊겼다. 다들 형진의 사연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첫 데이트에서 남자 세명이 여자친구를 윤간해버렸고,

그 여자친구는 왜인지 경찰에서 형진에게 불리한 거짓 진술까지 했다는 것을.

구치소에서는 취침시간에도 불을 끄지 않는다. 어둠속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침구를 깔고 누워서도 사람들은 몰래 장기나 바둑을 두거나, 속닥거리며 수다를 떨거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모두가 잠이 들 시간쯤이 되면 한두명은 화장실로 들어가 딸딸이를 쳤다.

때로는 대낮에도 당당하게 하는 경우가 있지만, 10번방에서는 그런 일은 없었다.

주로 맥x을 들고 들어가기 때문에 맥x에서 특히 인기 있는 사진은 온통 허연 얼룩 투성이였다.

그날 밤도 예외는 아니어서 열두시쯤이 되었을때 형진은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그는 이상하게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화장실이 아니라 관물대 쪽을 향했다.

이상하게 여긴 형진은 실눈을 뜨고 그를 보았다. 둘째형님 이경준이었다.

관물대에도 서열이 있었다. 그중 맨끝 자리, 막내 정병호의 관물대에서 이경준은 뭔가를 집어들었다.

정병호의 여자친구의 사진이었다. 그것을 집어든 이경준은 누가 보나 싶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정병호와 시선이 마주쳤다.

정병호의 자리는 형진의 바로 옆자리였기 때문에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는 것을 형진은 알 수 있었다.

경준은 뻔뻔스럽게도 사진을 들어올리면서 화장실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것 좀 써도 괜찮지?'라는 의미였다.

병호는 한참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의 고개가 끄덕였고, 경준은 씩 웃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화장실에서는 한동안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왔고, 잠시후 경준이 나오자 한냐가 일어서서 그 사진을 받아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형진말고도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날 이후로 병호의 여자친구 사진은 형진과 빠따를 제외한 10번방 모두의 딸감이 되었다. 이름은 미경. 강미경이라고 했다.

서울 소재의 어느 명문 여대 영문과 2학년에 다니고 있는, 평범한 집안의 평범한 딸이라는 미경이는,

xx구치소 10번방 수용자들의 공용 딸감이 된 것이다. 그들은 화장실에 들어가면 미경이의 이름까지 불러대며 딸을 쳤다.

그리고 며칠후 큰형님은 앞으로 정병호는 더이상 화장실 청소나 설거지같은 잡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형진 혼자서 모든 것을 해야했다. 형진의 서열은 이제 막내 수준이 아니라 노예나 다름없게 되었다.

병호는 여자친구의 사진과, 그녀의 주소나 전화번호 등 신상정보를 그 범죄자들에게 선물로 주고,

자기는 그 여자를 어차피 버릴거니까 출소 이후에 마음껏 그녀에게 접근해서 무슨 짓이든 해도 된다는 권리를 주고, 막내에서 한단계 진급한 것이다.

인혜가 민석의 연락처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유명인이었다.  

형진의 중학교나 고등학교 동창 중 아무에게나 물어봐도 민석의 연락처는 쉽게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민석을 만나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민석이 입원한 병원은 어디인지 알 수 없었고,

설령 안다고 해도 집이나 병원으로 막무가내로 찾아가는 것은 오히려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를 할수도 있다고 했다.

민석은 인혜의 전화를 받지 않았고, 문자는 무시했다.

결국 인혜는 형진의 모교를 찾아가 담임 선생님에게 사정을 말하고 애원을 한 끝에 민석의 아버지의 연락처를 얻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민석의 아버지는 단호했다.

수차례의 통화와 문자를 통해 인혜가 애원을 했지만 그는 만나주지도 않았고 나중에는 답변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 인혜의 이어지는 애원 끝에 그가 만남을 허락한 장소는 민석이 입원해있는 병원이었다.

"당신이 아들 위하는 마음, 나도 자식 가진 애비로서 이해 못하는 거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도 눈이 있으면 보시오. 내 아들 꼴이 어떤지. 한쪽 눈이 멀게 되버린 이 녀석 꼴이 어떤지.

 거꾸로 당신은 자식 가진 어미로서 내 마음 이해가 안된단 말입니까? 이게 합의로 될 일이요?"

인혜는 그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울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인혜를 민석은 하나만 남은 눈으로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형진의 첫 재판일이 잡혔다. 사건일로부터 두달이 되는 날이었다.

인혜는 여전히 민석과의 합의에는 전혀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보연과는 연락이 되지 않았고,

다른 피해자들과는 합의를 해봐야 형량이 가장 큰 살인미수가 그대로 남아있는 한 의미가 없었기에,

인혜는 민석과의 합의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지만 그 날 이후 민석의 아버지는 그녀를 만나주지 않았다.

결국 형진은 아무 변화가 없는 상태로 첫 재판을 받게 되었다. 재판은 형식적이었고 1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판사는 형진의 인적사항을 확인하고, 공판검사는 공소장에 적힌 사실을 줄줄 읽었고,

국선 변호사는 선처를 부탁드린다고 했다.

판사는 형진에게 공소사실을 인정하는지 물었고, 형진은 이미 경찰에서 진술했던 내용을 그대로 말했다.

판사는 형진에게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수 있느냐고 물었고, 형진은 박보연이 윤간을 당하는 것을 자기 눈으로 분명히 봤다고 대답했다.

판사는 형진에게 민석을 죽이려는 의도가 있었느냐고 물었고, 형진은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다시 판사가 형진이 민석에게 칼을 휘두른 것은 인정하느냐고 묻자,

형진은 그 사실은 인정하지만 민석 일행이 보연을 윤간한것도 사실이므로 그들 역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판사는 그것은 이 형진의 범행과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판사와 검사, 변호사는 서로 몇마디 지껄이다가 한달후로 심리를 속행했다.

형진이 보기에는 판사와 검사는 한편이었다. 국선 변호사 역시 한편이었다.

재판이라는 것은 그냥 결론을 정해놓고 형식적으로 하는 공연에 불과했다.

이곳에 자기편이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10번방에 자기 편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박보연 역시 자기 편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그의 편은 엄마 뿐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형진을 도와줄수 없었다. 너무 멀리 있었기 때문이다.

구치소의 안과 밖은 다른 세상이다. 그 정도로 멀다.

엄마가 10번방으로 와서 형진을 도와줄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는 형진을 여러가지로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여러가지로. 형진은 알고 있었다. 자신은 약자이지만, 엄마는 강자라는 것을.

엄마는 너무 착해서, 자신이 강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그 힘을 사용하지 않는다.

엄마는 똑똑하고, 눈에 띄게 예뻤다. 예쁜 여자가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지 형진은 알고 있었다.

타인에 대한 그런 영향력을 형진은 한번도 가져본적이 없었다.

어디엘 가나 엄마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하면 남자들은 친절해졌다.

시장의 아저씨들은 엄마에게 물건값을 깎아주었고, 심지어 과일 하나라도 더 넣어주려고 했다.

엄마랑 같이 손을 잡고 걸을 때 사람들의 시선은 거의 언제나 느낄수 있었다.

심지어 엄마보다 키가 커지고 더이상 손을 잡고 다니지 않게 된 이후에도

형진은 중년이 된 엄마를 바라보는 자기 또래의 젊은 남자들의 시선도 느낄 수 있었다.

민석이 가지고 있는 힘과 비슷했다. 민석이 앞에서 아양을 떠는 여자들에 대해 민석이가 가지고 있는 힘.

바로 그 힘을 엄마는 가지고 있는 것이다. 형진이 볼땐 세상에서 가장 막강한 힘이 그것이었다.  

어쩌면 그런 엄마를 가졌다는 것이 형진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힘일지도 모른다. 

'자식이 부모 덕을 좀 보는건 이상한 일도 아니잖아...'

그날 법정에서 돌아오는 버스 안, 수형자들은 수갑을 차고 포승줄에 묶인 채

두명 혹은 세명씩 연승(도망치지 못하도록 여러사람을 함께 묶음)되어 호송 버스에 타고 구치소로 오고 있었다.

그때 형진의 옆에 앉아있던 덩치 큰 남자가 형진에게 말을 걸었다.

"재판 잘 됐어요?"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한달 전 엄마가 면회왔을때 면회실 안에서 엄마를 쳐다보던 그 남자였다.

"아뇨...잘..."

"뭘로 들어왔는지 물어봐도 돼요?"

".....살인미수요."

"어이쿠...그렇게 안보이는데 살벌한 일로 오셨네."

"....."

"부모님은 살아계세요?"

이 남자는 내가 자기를 기억 못한다고 생각하는건가.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엄마만 계세요."

"형제는요?"

"없어요."

"하아....어머님이 많이 힘들어하시겠네."

"네..."

"전에 면회실에서 저 봤던거 혹시 기억 안나요? 그때 면회왔던 분이 설마 어머님?"

"네...맞아요."

"너무 젊어보이셔서 그땐 뭐 누님이나 그런줄 알았는데."

"....."

"굉장히 미인이시던데."

"....."

"뭐...난 공집방(공무집행방해)인데...그냥 툭건드린거라 원래 구속깜도 아닌데 이력이 하도 화려해서 이렇게 구치소까지 왔네요."

"....."

그는 내 상의에 붙은 방표를 보더니

"7상10이면(상중하는 각각 3,2,1층) 혹시 인문이 형님 계신 방 아니에요?

"맞아요."

"아이쿠...하여간 구치소 좀 있다보면 다 이래저래 아는 분들이 되서...그래도 좋은 분이랑 같은 방 쓰시네.

 난 지금 8하7에 있어요. 윤태준이라고 하는데 인문 형님한테 안부나 전해줘요."

"네..."

그 이후로 구치소에 도착할 때까지 둘은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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