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누구셔?’
두 모녀는 각각 다른 상황에 황당해 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딸에게 나를 간단하게 소개하고 정황을 대충 얘기하는 것 같았다. 왠지 동정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이 곳을 찾아온 내 자신이 초라하고 원망스러웠다.
“이리로 오세요. 그러지 않아도 우리도 한잔 하고 있었는데, 같이 한잔 해요”
그녀는 딸의 이해를 얻었는지 나에게 자리를 마련해주고 술을 한잔 따라 주었다.
향기가 좋은 브랜디였다. 결례를 범할 수가 없어서 차츰 정신을 집중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려고 애를 많이 썼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그녀의 딸은 그녀가 21살에 낳아서 지금은 대학 4학년이라고 했고, 불문학을 전공한다고 했다. 그녀의 딸이자 친구 같은 존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엄마를 닮아서 키고 크고, 뽀얗고 예쁜 얼굴이었다.
“약주를 좀 하신 것 같은데…”
그녀 딸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대하니 괜스레 무안해졌다.
집안은 모녀만 사는 집치고는 상당히 크고 화려했지만, 뭔가 썰렁한 기운이 도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술을 마시면서 난 그녀보다도 그녀의 딸이 더 나에게 신경을 써서 배려를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상당히 사려 깊은 여자였다. 어짜피 밤늦게 찾아 온 내가 많이 무안하고 어색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가능한 배려일 것이다.
딸이 같이 있었던 관계로 업무 얘기를 꺼낼 수가 없었고, 그저 세상 돌아가는 얘기만을 주고 받으며 술잔을 기울였는데, 얘기를 하는 도중에 언뜻 언뜻 보여준 딸의 변별력과 논리력이 대단했다.
역시 대화는 딸과 내가 주도가 되어 이어졌고, 송 여사는 그저 옆에서 술만 홀짝거리며 가끔 가다 고개를 끄떡이는 정도였다. 어쩐 일인지, 딸과 대화를 하면서 내 초라했던 기분이 많이 회복되었고,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굳이 방이 많으니 자고 가라는 그녀 모녀의 손을 뿌리치고 새벽 3시가 넘어서야 거리로 나왔다. 새벽 공기가 시원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난 많이 포기하고 있었다. 그렇게 사는 게 인생인가 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휴가를 내고 집에서 쉬고 있는 데, 같이 일하는 지영이 한테서 전화가 왔다. 어떤 여자가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하는 데 알려줘도 되느냐고… 난 직감적으로 송 여사의 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영이의 전화를 끊자 마자 송 여사의 딸, 영미에게서 전화가 왔다.
“괜찮으세요? 어제 약주가 과하셔서 댁에 잘 들어갔나 하고 회사로 전화를 했더니, 오늘 출근을 안 하셨다고 해서…”
난 ‘괜찮다’ 고, ‘그냥 쉬고 싶어서 쉬는 거’ 라고, ‘걱정해줘서 고맙다’ 는 말로 전화를 끊으려고 했는데, 그녀가 먼저 괜찮으면 저녁이나 같이 하지 않겠냐고 얘기를 꺼냈다.
그러지 않아도 하루 종일 굶다시피 해서 허기가 심했다.
간편한 차림으로 대학로의 ‘시분초’로 향했다.
그녀는 학생답게 캐주얼한 차림이었지만, 어머니의 피를 받아서 그런지 아니면 내가 그렇게 선입관을 갖고 있어서 인지, 상당히 세련 되고 조금 과하게 말한다면, 요염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와 나와의 관계가 보통의 고객과 증권사 직원의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인지, 난 그녀를 대하면서 여간 어색하고 조심스러운 게 아니었으나, 그녀는 나와는 입장이 달랐던 거 같았다.
“성수씨라고 불러야 하나요, 아니면 성수 오빠라고 불러야 하나요?”
“편한 대로 불러요”
난 그녀를 대하면서도 그녀의 어머니의 영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마치 그녀가 매 순간 그녀의 딸과 함께 하는 것처럼…
어제,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날 새벽에 그녀의 집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나온 내 입장에서는 그녀가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남녀 상열지사를 엮어 내는 청춘의 남녀처럼 긴장이 감도는 그런 관계는 아니었다.
우리는 그저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그런 평범한 식사 이상을 하지 못했다.
“혹시 술 한잔 괜찮으시겠어요?”
그녀는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어봤지만, 난 오히려 그녀의 그런 조심스러움이 부담스러웠다.
그녀의 요청대로 우리는 자리를 옮겨 술자리를 가졌고, 그날 새벽과는 다르게 그녀는 상당한 주량을 과시했다.
얼마나 술을 마셨을까? 양주 한 병이 거의 바닥을 드러내었을 때 즈음에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 엄마랑 애인 사이신가요?”
참 난감한 질문이었다. 그 자리를 나오면서 그런 류의 질문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 예상을 안한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그녀에게 그런 질문을 받자 난처해 지고 말았다.
“글쎄… 난 영미 어머니를 많이 좋아하고 있지… 그런데, 어머니는 내가 별로 인가봐…”
궁색한 대답이었다.
“아니요… 엄마도 아저씨를 많이 좋아하세요”
“단지…”
난 그녀의 나머지 말을 듣고 싶었다. 그건 나에게 매우 중요한 말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말을 잇지 않았다.
난 그녀를 쳐다보며 말을 끝내라는 무언의 암시를 주었지만, 그녀의 닫혀진 입술은 그저 술을 마실 때만 조금씩 열릴 뿐이었다.
많은 말들이 그녀의 꼭 다문 입술을 헤집고 나올 것 같았다…
술은 흔히 사람을 조금은 흐트러지게 하고 또 조금은 감성적이 되게 하는 효력이 있음에 틀림이 없었다. 영미는 나를 부르면서도 ’씨’ 라고도 했다가, ‘오빠’ 라고도 했다가, ‘아저씨’ 라는 호칭을 쓰기도 했다. 그건 술 때문이었다.
“있잖아요... 우리 엄마 매력적이지요?”
입술 끝에 미소를 걸친 채 도전적인 눈빛으로 물어보는 영미의 얼굴에서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 엄마... 대단히 멋있는 여자예요... 그리고 똑똑하고...”
문득 그녀의 자조적인 표현 속에 어떤 갈등이 숨어있음을 놓치지 않았지만, 그게 어떤 것인지는 영미가 직접 얘기하기 전에 내가 어떻게 알아 낼 수가 없었다.
단지 느낀 것은 영미가 서둘러서 날 보자고 한데에는 뭔가 사연이 있기는 한데, 아직까지 그녀는 그것을 나에게 얘기할 자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궁금하고 답답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사실을 뒤늦게 앎으로 해서 갖게 되는 또 다른 슬픔을 느끼기도 싫었다.
술을 한 병 다 비울 때 즈음에는 영미도 많이 취했고 나도 많이 취했다.
‘謨事 在人이요 成事 在天이라’ 고 했다. 이제는 내가 처한 어려운 상황이 어떻게 되든 이미 내 손을 떠난 일이라는 생각을 하자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고 여유가 생기는 듯 했다.
“성수씨... 한 잔 더 하고 싶은데요...”
택시를 잡으려고 서있을 때 그녀가 불쑥 내뱉은 한마디였다. 그래 어짜피 나도 그 정도의 술은 오히려 더 정신이 맑아지니, 한잔 더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다.
둘은 젊은 사람들답게 호텔에 있는 나이트를 찾아 들었다, 그곳에는 술이 있었고, 음악과 춤이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호텔을 나서면서 시간이 2시를 넘었다는 것을 알았고, 난 서둘러 그녀를 집에까지 바래다 주었다. 송 여사... 아니 송 혜진이 있는 그 모녀의 집.
지점장은 내가 이틀씩 결근을 해도 아무런 질책이 없었다.
상황이 거의 확실해 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먼저 만나자고 했던 영미가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술만 마시다 헤어지고 나자 더욱 의구심이 일었고 문득 언젠가 송 여사와 함께 만난 적이 있던 송 여사의 친구 김 정림이라는 여자가 생각났다. 송 여사가 서울에 올라오자 마자, 사채 업을 할 때 만나서 10년이 넘게 친구처럼 지내는 사채 업자였다.
“김 여사님?”
어렵사리 그녀의 명함을 찾아 전화를 해서 통화가 되었다. 저녁때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나자 무엇 때문에 내가 그녀를 만나기로 했는지에 대한 의미가 아리송하기만 했다.
그녀에게 송 여사에 대한 주변 얘기들을 들으려고 했다는 것은 분명한데, 어떤 얘기를 어떻게 듣느냐 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또 왜 알려고 하느냐 하는 것도 불분명했다. 머리 속이 점점 복잡해졌다.
그녀가 잘 아는 식당인 듯 내가 조금 늦게 도착을 하자 입구에서 손님을 맞는 종업들이 날 확인하자 마자 그녀가 기다리고 있던 방으로 안내를 했고, 조명이 은은한 방안에 그녀는 조용하게 앉아서 담배를 피고 있었는데, 손가락 끝에 두드러지게 발라져 있는 보라색의 메니큐어와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 걸쳐있는 하얀 담배는 그녀의 짙은 보라색 투피스와 어울려 강한 자극으로 비추어졌다.
사람을 상대로 돈을 만지는 사람들의 특유의 부드러움과 현란함 속에 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김 정림 그녀는 그런 여자였다.
흔히들 저녁 식사로 사람들을 만나면, 밥 보다는 역시 술을 마시게 되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것 같았다. 송 여사보다 1살인가가 많은 그녀는 겉으로 보기에는 송 여사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 보이는 스타일이었다. 얼굴의 주름살도 제법 눈에 보였고, 몸도 전반적으로 중년의 살집이 있는 그런 몸매였다.
“송 여사가 돈을 많이 벌었다면서요?”
그녀는 내가 자기를 왜 만나자고 하는 지 이유도 모른 채 저녁 약속을 받아주었었다.
“네... 적지않게 벌었습니다”
얘기를 시작하기가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지만, 어짜피 자리를 만든 이유는 그 얘기를 하기 위해서 였다.
“송 여사, 대단한 여자지요”
그렇게 우리는 얘기를 시작했다. 난 그녀에게서 송 여사에 관한 많은 얘기를 들었고, 그녀의 재산 형성과정의 이야기도 상당히 상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많은 시련의 과정을 겪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김 대리님. 송 여사하고 좀 특별한 관계지요?”
그녀의 눈빛이 빛났다. 어떤 말을 준비하고 있는 눈빛이었다.
숨기고 싶다기 보다는 얘기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었으나, 왠지 그 이야기를 피해가면 어떤 사실에 접근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네... 몇 개월 됐습니다”
난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말을 하면서 조금씩 흥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송 여사가 다른 얘기 없었어요?......”
“사실은 내가 일찍 김 대리님한테 얘기를 해주려고 했는데...”
“송 여사와 김 대리님 같은 관계가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어요”
더 이상 들을 이유가 없었다.
가슴 한 켠에 ‘혹시나...’ 하는 의문으로만 남아 있던 사실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하하하하하......”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재밌고 어이가 없었다.
아니,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고 어이가 없어..., 정말 미칠 것 같았다.
눈물이 흐르려고 했지만, 울 수가 없었다. 자꾸 웃음이 나왔다.
내 어리석음에... 내 치기에... 내 멍청한 순진함에... 그저 웃음만 나왔다.
난 웃고 있었고, 그녀는 그런 나를 조용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렇군요... 세상이라는 게 그런 것이군요...”
그렇게 참았는데, 마지막으로 웃음을 멈추자 두 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김 대리님...”
“얼마나 술을 마셔야, 머리 속이 하얗게 되지요?”
그녀는 차마 내 모습을 보기가 민망했는지, 고개를 숙인 채로 암갈색의 위스키가 찰랑거리고 있는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난 천천히 이성을 찾아갔다.
이건 배신도 아니다. 서로 사랑하다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대접을 받고 가만히 있기에는 내 방자한 청춘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되었다.
“김 여사님... 오늘 저 좀 망가져도 되겠습니까?”
난 왠지 짐짓 가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이상한 것은 술을 먹으면서도 머리 속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고, 정신은 점점 맑아져 갔다.
“그런데요... 김 여사님, 난 송 여사... 아니 혜진씨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짐짓 떠보기 위해서라도 얘기를 해보자 생각했지만, 실상 말을 하고 보니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기는 그런 믿음없이 어찌 여행도 같이 다니고 밤을 새워가며 섹스를 하고 하겠는가...
“어떤 모습의 송 여사를 사랑하는 건가요?”
김 여사는 한참동안을 말없이 날 바라보다가 문득 뜬금없이 질문을 해왔다.
‘어떤 모습이라......’
“답니다. 다. 모든 면을 사랑합니다”
치기의 한계를 벗어나 오기였다. 사랑의 배반에 대한 강한 부정이었다.
그렇게 술을 마셨고, 꽤 거나하게 마셨다고 느껴질 때쯤이 되어서야 내 가슴에 있던 모든 생각을 그녀에게 토해내듯 얘기했고, 그녀는 조용히 내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 다음날 회사에서는 내부 감사가 이루어졌고, 그 정신 없는 와중에 어떻게 일주일이 갔는지 모르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영미에게서 다시 전화를 받은 것은 그 주의 토요일 오후였다.
거리에는 은행나무잎이 깔리듯 떨어져있어 마치 도로를 노란 물감으로 채색한 듯 보였고, 차가 달리면서 바람을 일으키기라도 하면 바람에 두둥실 떠올라 멀리 날라갔다 가라앉곤 했다.
“잘 지냈니?”
내가 담담하고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자, 영미는 다소 의외라는 듯 ‘네에’라고 말하면서 날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마도 내가 좌절의 풍랑 속에서 허덕이리라 생각했었나 보다.
“걱정 많이 했어요...”
영미는 그렇게 솔직하고 순진한 구석이 있는 애였다.
저녁을 먹으면서, 줄 곳 영미는 내 기색을 살펴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진짜로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난 괜찮아... 정말이야... 니가 염려해줄 정도로 망가지진 않았어”
왠지 영미의 눈은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흔들리고 있었기에 내가 오히려 더 머쓱해졌다.
갑자기 두 번째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술을 마시면서 영미는 내내 뭔가를 얘기하려고 했었고, 난 그 의미를 김 여사를 만나서 알았지만, 영미는 아직도 내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영미야, 너 내가 어머니한테 이용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구나?”
영미는 무척 놀라는 표정이었다.
기만을 한 것은 송 여사였지, 영미가 아니었다.
“영미야... 우리 오늘 한잔 하자”
난 영미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영미를 데리고 차를 미사리로 몰았다.
휘황한 불빛 속에 즐비한 카페들.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이미 무대에서 사라진 쟁쟁했던 그때 그 가수들의 노래를 즐기고 있었다. 거기에는 추억이 있었고, 낭만이 있었다.
영미는 많은 얘기를 했다.
“성수씨... 나 앞으로 성수씨라고 부를래요”
‘앞으로’라고 했다.
“영미... 난 니 어머니랑 실상이야 어쨌든 연인 사이였어. 지금은 아니겠지만...”
나도 영미에게 마음을 열고 있었다. 그 이후의 복잡한 상황은 이미 내 이성의 범주밖에 있었다.
“난 상관없어요. 성수씨만 날 용서해주고 이해해 주면...”
“어머니의 죄에 대한 사죄의 의미가 있는 거니?”
난 마지막으로 한번 더 확인 할 필요가 있었다.
영미는 대답할 의미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 자격은 있는 거지요?’ 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우린 그렇게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영미와 난 금방 서로에게 적응해 갔다. 난 영미의 문학에 대한 열정과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도 다 익숙했고, 영미도 내 삶의 많은 부분들을 쉽게 이해하는 것 같았다.
아니 이해한다고 하기보다는 이해하려고 많이 노력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내가 의원면직이라는 불명예로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백수로 지내는 동안에 우리는 더욱 자주 만나게 되었고, 서로에게 남자와 여자로서 각자의 빈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그녀의 어머니의 연인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망설임없이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대어 왔고, 내 손길을 피하지도 않았다.
“성수씨. 우리 서로에게 상처 주는 일은 하지 말아요”
내가 그녀에게 어떤 의도를 갖고 접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은 불안하고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영미야. 난 오히려 니가 나와 니 엄마와의 관계에 대해 염려를 하지 않기를 바래”
그건 사실이었다. 어짜피 우리네 정서에서는 영미랑 내가 가족을 이루고 살기 어려운 형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미는 여자로서 이미 내 가슴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불륜의 관계에서 강한 자극을 느끼는 것이 현실인가 보다.
난 영미와의 관계에서 영미가 가지는 묘한 경쟁의식의 촉각이 자기의 어머니를 향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 영미 자신의 자유스런 감정의 흐름을 주체하기 어렵다는 것도 읽을 수 있었다.
내가 회사를 그만 두고 그저 영미와의 데이트와 독서로 소일을 하고 있을 때, 나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준 것은 김 정림 여사였다. 그녀는 몇 개월 푹 쉬고 나서 같이 일하자는 조건을 제시하며, 내 정신적 안정을 위해 많은 것을 배려해 주었고, 내가 짧은 기간 안에 몸과 마음을 추스리게 된 데에는 그녀의 도움이 적쟎이 컸다.
그녀는 자기 사무실을 옮긴다는 이유를 들어 내 방을 만들어 주었고, 별다른 대안이 없었던 나로서는 그녀의 그런 배려에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성수씨, 난 이쪽에서는 00억 정도만 굴려볼 생각 이예요”
그녀는 사채와 부동산이 주 종목이었기에, 주식과 채권에 대한 투자를 전적으로 나에게 일임하게 되었고, 난 그녀의 완벽에 가까운 지원을 등에 업고 좋은 시스템을 갖춘 작은 팀을 구성하게 되었다.
초기에 투입되는 돈이 크질 않았기에, 큰 물량에 손을 댈 수가 없었고, 더욱이 이제는 철저하게 정석에 입각한 투자를 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해야 했기 때문에 투자의 방향 설정이 다소 보수적이 되었다.
운이 따랐고, 또 우리 팀의 실력은 다소 발군이라 할 수 있었다.
투자의 원칙은 심플했다. ‘손실의 최소화’ 그것이었다.
코스닥의 마지막 불꽃 활황에서 우리는 몇 배의 수익을 거두어 들였고, 상승의 끝자락 직후에 우리는 미련 없이 모든 투자금을 회수해 버렸다.
김 여사는 모든 일의 진행을 나에게 맡겨둔 채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았고, 단지 내 건강과 개인 생활에서의 어려움이 없는 지만을 체크하는 노련한 사람 관리 능력을 보여주었다.
“성수씨. 이것 받아요”
그녀는 가죽으로 만들어진 키홀더를 내밀었다.
“새 차하고, 아파트 열쇠예요. 책상에 서류가 있어요”
환하게 웃는 그녀의 보라색 입술이 싫지 않았다.
난 서투르게 어색한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호흡을 잘 맞추는 편이었다.
그녀와 같이 일을 한 이후에 난 그녀와 송 여사가 서로 상당히 경쟁적인 위치에 양립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녀의 한 팔이 되서 일을 하면서 송 여사와 그녀의 관계를 알고 난 이후에는 영미를 만날 때마다 약간씩 죄를 짓는 기분이 든 것은 내 자신도 어쩌면 송 여사를 향해 마음의 칼을 뽑아 들고 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송 여사로부터 전화를 받은 것은 내가 김 여사와 일을 시작한지 한 6개월쯤 뒤의 일이었다.
아무리 사건의 핵심에 있던 것이 나였고, 그녀에게는 큰 불똥이 튀지는 않았다고 해도 역시 그녀도 적지 아니 타격을 입기는 입은 모양이었다.
얼굴이 많이 해쓱해진 모습이었다.
“잘 지내시죠?”
그녀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아마도 공식적으로 오고 간 말이 없었다 하더라도 그녀 역시 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 지 전체적인 판을 잘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사실 어찌 모르겠는가?
난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의 조금씩 불안하고 초조해 하는 듯한 모습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여유가 생겨나고 있었던 것 같다.
“송 여사님도 잘 계셨지요?”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 무거운 분위기가 싫어서 나도 인사치레로 그녀의 안부를 물었지만, 사실 난 최소한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도의 근황에 대해서는 김 여사와 영미를 통해서 충분히 알고 있었다.
“술을 먼저 한잔 하는 게 어떨까요?”
이제는 거래 관계도 사라지고 단지 낯선 사람들로 만나듯이, 그녀는 예전과는 다르게 술 한잔을 마시기 위해서도 나에게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관계는 원점으로 돌아가 있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술을 마시면서도 우리는 별다른 얘기를 주고 받지 않았다. 단지 살아가는 모습만을 얘기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송 여사가 상의를 벗자 보라색의 투피스 속에 연한 핑크 색의 실크 블라우스가 그녀의 농염한 몸을 감추듯이 덮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문득 어설픈 성욕이 일었다. 술의 탓이었으리라...
그녀는 뭔가 할 얘기가 많은 듯한 표정이었지만, 쉽게 분위기가 만들어지지는않았다.
사실 왜 할 말이 없겠는가? 궁금한 것도 많고, 하고 싶은 얘기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영미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떤 얘기도 꺼내지 않았다.
아마도 조심스러워서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되었다. 내가 먼저 얘기를 꺼내는 게 도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를 시작해야 할 지가 난제였다.
“아시나요? 영미와 나와의 관계를…”
그녀의 시선이 내 얼굴에 꽂히는 듯했다.
“영미는 참 좋은 애입니다”
하고 보니 터무니없이 우스운 표현이었지만, 어머니인 송 여사 앞에서는 그렇게 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녀의 얼굴이 조금씩 경직되어 갔다.
“나는 요...?”
난 심하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그녀의 뜨거운 눈에 시선을 맞추었다.
“나는 요...?”
그녀는 내 시선을 마주한 채 검고 깊은 눈동자로 얘기하고 있었다.
가슴이 심하게 쿵쾅거렸고 머리 속이 하얗게 비어져 버렸다.
내가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녀의 얼굴만을 응시하자 그녀가 먼저 손을 뻗어 내 손등 위에 그녀의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을 포개어 왔다.
“우리는 이제...”
“아니 요... 난 아니 예요...”
그녀의 결연한 말투로 인해 그녀의 눈에 고인 물기가 안 보일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것들이 그녀의 희고 고운 뺨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난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그녀의 힘든 숨소리 속의 떨리는 목소리와 흐르는 눈물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성수 씨...”
“영미 많이 사랑해요?”
내가 말없이 고개만을 끄덕이자 그녀가 두 눈을 감아 버렸지만, 그게 뭘 의미하는 건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한참을 아무런 행동도 아무런 말도 없이 눈을 감은 상태로 그저 조용히 고개만을 끄덕이고 있었다.
많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성수 씨... 나 하나만 물어봐도 되요?... 아니, 먼저 말해야 될게 있어요...”
”나 성수 씨 아직도 많이 사랑해요...”
난 언제 인가부터 그녀를 믿지 않고 있었지만, 이 순간의 그녀의 말은 유난히 밝고 맑게 들렸다.
그러나 어쩌란 말인가?
참으로 난감한 순간이었다.
“성수 씨... 나한테 한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나요?”
문득 영미가 언젠가 물어본 질문이 생각났다. ‘우리 엄마 사랑해요?’ 라고, 내가 왜 그런 질문을 하냐고 물었을 때, 영미는 ‘엄마가 아직도 성수 씨를 많이 생각하는 것 같아요’ 라고 웃음을 머금은 채 장난처럼 주절댄 적이 있었다.
“내가 여사님의 딸과 행여나 깊은 관계로 가는 것이 두려워 장막을 치시겠다는 의미도 있는 건가요?”
이제는 어떻게 송 여사를 대해야 하는 지 충분히 터득을 하고 있었다.
“그건 아닙니다.”
고개를 떨구며 단호한 어조로 대답을 했다.
“그럼 뭔가요? 난 어쩌면 영미와 부부의 관계를 맺게 될 지도 모르는 상태입니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도 않았고, 한 마디의 말도 없었다. 단지 우는지 호흡이 불규칙하고 크게 들릴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고개는 계속 숙여져 있었고,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서서히 고개를 들더니 또렷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난 성수 씨를 놓칠 수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성수 씨,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난 성수 씨의 올바른 판단을 믿어요. 영미하고의 관계는 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나이 차이는 많이 나지만...”
그녀는 우리 둘의 나이 차이를 빌미로 내 냉정한 판단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난 솔직히 영미와의 나이 차이를 부담스럽게 느껴본 적은 있어도, 그것이 결정적인 장애 요인이 된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보다 솔직해 지시지요...”
“그래요... 난 아직도 성수 씨를 가슴에 담고 살고 있어요.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또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하는 것하고는 별개로 말이에요”
톤이 올라간 거칠고 빠른 대답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인가요?”
난 다시 한번 확인하는 집요함으로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지만, 그녀는 개의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만큼 그녀의 사정이 별로 좋지 않다는 반증이리라.
“그래요... 사랑해요. 아직도 난 성수 씨 당신을 사랑하고 있단 말이에요. 나도 내 지난 행동을 머리를 쥐어 뜯으며 후회했어요. 돈이 날 이렇게 냉혹하게 만든 현실도 증오스러웠고... 여하튼 난 당신이 날 받아 주기만 한다면 지금 당신 앞에 무릎을 꿇을 수도 있어요”
그녀는 처절한 눈빛으로 쉼 없이 말들을 토해냈다.
결과가 잘못된 사랑 연극의 끝에 그녀는 현실을 제대로 인식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영미와의 관계를 염려한 어머니로서의 마지막 거부인가?
난 이미 혼란스러워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읍시다”
“영미와 나의 관계를 염려해서 희생하려고 하는 건가요? 아니, 희생이라는 말보다는 우리의 관계를 방해하고 싶은 건가요?”
그녀는 내 말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저 날 어의 없다는 듯이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대답을 해야만 하나요?”
내가 그녀의 어의 없어 하는 눈길을 무시하자 그녀는 지체 없이 내 의도를 물었다.
“그래요... 그런 목적이 없지는 않아요. 그러나 영미가 설령 당신이랑 몸을 섞는 관계가 된다 하더라도.... 아...아... 모르겠어요... 난 도저히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단지 내가 바라는 것은 당신이 예전처럼 그렇게 내 곁에 있어주기만 ... 흑... 흑...”
그녀는 끝내 말을 마치지 못하고 격하게 울기 시작했다.
사랑의 감정을 어찌 이성의 연필로 다 그릴 수 있겠는가?
그녀의 울음 속에서 난 그녀의 혼란을 느낄 수 있었지만, 지금으로서는 나 자신도 그녀에게 어떤 방향을 제시할 수가 없었다. 그건 나 자신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테이블에 얼굴을 묻고 울던 그녀의 울음 소리가 좀 낮아졌을 때,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혜진 씨, 좀 진정하고 날 좀 봐요”
“나도 별로 뾰족한 방법은 없습니다. 단지, 내가 혜진 씨에게 확실히 얘기할 수 있는 것은 그게 증오든 미움이든 미련이든 아직도 혜진 씨 당신이 내 가슴속에 남아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도 이런 나 자신이 싫었습니다...그러나 영미는 당신과는 전혀 상관없이 나에게는 다른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나에게 그녀는 당신의 배반에 대한 보복이나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내가 그녀에게 ‘배반’이라는 표현을 쓸 때, 그녀의 눈이 애절하게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었지만, 아직도 난 그 흔들리는 눈빛의 의미를 완전하게 읽고 있지는 못했다.
가슴 한 구석이 저려왔지만, 애써 이야기를 마쳤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나를 응시하다 조용히 술잔을 들었다.
“성수 씨... 우리 재회에 성공한 건가요?”
몇 잔의 술을 마시고 발갛게 상기된 얼굴을 내 앞으로 가깝게 밀면서,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본래의 모습이었다. 아니 본래의 모습 이라기보다는 내가 알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여전히 영미의 문제가 미결론의 상태로 남아 있기는 했지만, 그녀는 그 문제를 그 자리에서 결론까지 낼 자신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건 어쩌면 나도 마찬가지 였다.
술을 마시면서 우리는 ‘예전의 우리’처럼 적당히 흥겨로운 얘기와 지나치지 않는 무례함으로 서로를 자극하고 있었다.
“내 손이 뜨겁지요? 성수 씨...”
그녀는 가기 손을 내 볼에 갖다 대면서 물었다.
“많이...”
“후후후... 열정이에요. 열정.”
그녀는 그렇게 먼저 도발을 시도하고 있었고, 난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조금씩 음욕의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왜 술을 마시면 나는 차츰 도발적이 되는가?
난 그녀의 손길을 느끼고 그녀의 내음을 맡으면서 그녀에게 다가가는 내 발길을 억제할 수 없었다.
“혜진 씨, 우리 오늘 같이 잡시다”
무례하고 거친 놈처럼 얘기하고 싶었다.
그녀는 내 느닷없는 제의에 눈을 크게 뜨며 날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우리는 그렇게 완전히 원래의 관계에 복귀했다.
호텔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이미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난 오랜만의 둘만의 공간 안에서 조금씩 성급해지고 있었고, 그녀의 몸에 대한 갈증으로 빠르게 흥분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