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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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회사일이 조금 많아졌더니, 즉, 사무실에 붙어있을 시간이 없어진 탓에, 연재주기가 조금 들쑥날쑥하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월요일까지 연휴니까 또 몰아서 쓰야겠죠...^^

그리고, 앞 글의 댓글에 보니까 약간의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먼저 말씀 드릴 것은, 전 리파잎님이 아닙니다..

에..그러니까 간단하게 설명하면...리파잎님이나 가온님과는 예전에 같은 카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챗으로 대화도 종종 나누었고요...

당시에 가온님은 '피터팬'이란 아이디를 썼었기에 저도 처음에 몰랐죠...

그리고 저 역시 지금의 아이디가 아니었기에 가온님도 저를 못 알아본 겁니다..

그런 와중에 제가 며칠 전 리파잎님의 글에다 댓글로 인사를 남겼더니,

리파잎님을 '리필'이라고 부른 건 저 밖에 없었으니,

리파잎님이 제 글에다 다시 댓글로 인사를 남긴 거고...가온님 역시 그걸 보고서, 저를 알아보신 거죠..

대충 이런 사연인데...저를 리파잎님으로 오해하신 분이 있어서...이렇게 밝힙니다..

그리고...전 지금 '961207' 이 아이디 하나뿐이니까, 그냥 그렇게 봐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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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시로 전화를 걸어대며 감시하는 상우의 눈길 때문에 그리 자주 만나지도 못했었지만, 그나마도 늘 조마조마하고 짧은 시간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달랐다.

대화 도중에 걸려온 상우와의 전화통화를 지켜보던 미현이, 은아에게 손짓을 해 재빨리 넘겨받더니, 친척언니라는 소개와 함께 너무나 오랜만에 만났기에 이런저런 할 이야기도 많은데다가, 동생과 최소한 저녁식사 정도는 같이해야겠다고, 아주 능숙하게 핑계를 댄 덕분이었다.

“고마워요, 언니..”

“호호호~ 아니야. 그나저나 너도 참 대단하네? 숨막히지 않아?”

둘은 만나자마자 이미 알고 있던 사이처럼 금새 친숙해져서는, 상혁을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로 만들어버릴 만큼 쉴새 없이 수다를 떨어댔었다. 물론 거기에는 ‘그’라는 구심점이 존재하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뭐,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지내는 거죠..”

은아의 자조 섞인 대답이 가슴을 짠하게 했다. 저 어린 나이에 그런 인생의 굴곡을 겪다 보니,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인내심일 거다, 아니, 차라리 체념이라고 부르는 게 맞겠지.

상혁이 그녀의 손을 가만히 거머쥐어주자, 마주보며 따스한 미소를 지어온다. 그때 미현이 그의 다른 손을 잡아왔다.

“여보, 하루라도 빨리 서둘러야겠어요, 사람이 어떻게 이러고 살아요?”

“응, 내 생각도 그래...그래서 말이야...”

상혁은 구상했었던 꽃가게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걸 듣고 난, 미현이 손뼉을 치며 반색했다.

“어머! 참 좋은 아이디어 같아요...하지만 그걸 꼭 거기에다만 한정할 필욘 없어요..어떤 걸 하더라도 비슷하게 써먹으면 굉장히 좋을 것 같거든요? 그리고...”

꽃가게를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구비되어야 할 것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화초를 다루는 지식에다가, 꽃꽂이는 물론 꽃다발, 화환, 꽃바구니, 부케 등을 만드는 기술 같은. 다시 말해서, 꽤나 긴 준비기간이 필수적이었다.

그런 설명을 듣고 나서야, 상혁은 자신이 너무나 즉흥적으로 접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적거리는 그에게, 미현이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호호호~ 너무 그러지 마세요, 응용할 곳은 무궁무진하게 많을 테니까요..”

“내 생각에도 그래, 오빠~ 정말 멋진 아이디어야~”

“하..하..하...그런가?”

두 여자의 칭찬에 낯이 간지러우면서도 왠지 흐뭇해지는 상혁이었다.

“어쨌던 성급하게 결론 내릴 일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나중에 은주와 벼리까지 모두 모여서, 충분히 의논한 후에 결정해야만 해요..”

“알겠어, 당신 말이 옳아..”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일단은 현재의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해도, 당장 큰 어려움에 부닥치는 상황은 아니었으니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선택하는 게 맞았다.

“그런데 동생은 어때? 이혼이라는 게 당사자들끼리만 합의한다고 다 끝나는 일이 아닌데...”

“..그건...”

은아야 애초부터 거의 홀몸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의 노름과 술버릇으로 인해 가족이 산산이 흩어지고는, 서로간에 연락 한번 안된지가 벌써 오래라고 했다. 고향에 먼 친척일가만 조금 남아있을 뿐이었다. 때문에 결혼할 당시에도, 그녀는 그 소식을 알릴 데가 없었단다.

그리고 그건 상우 쪽도 비슷했다. 홀시어머니는 아직도 둘의 결혼을 탐탁지 않아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우의 전처를 여전히 며느리로 생각하면서, 두 사람이 재결합하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라나? 손주 때문에 더더욱 그런 모양이었다. 상우가 양육권을 빼앗겨버린 탓에, 손주마저도 제대로 못 만나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 남편이랑 갈라서면 끝이란 소리네?”

“그렇긴 한데...그게 쉽지가 않을 것 같아요..”

“왜?”

미현의 물음에 은아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저한테 집착이 굉장히 강해요..”

“하긴...”

그 부분에 있어서는 상혁도 동의하는 바였다. 지금껏 상우가 해온 행태를 보면, 편집증증세에다가 의처증의 낌새마저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이 시점에서 벽에 부딪쳤다. 난제라고 생각했던 수한의 문제는 예상외로 술술 풀려가는 것 같은데, 물론 그전 전적으로 미현의 공이었지만, 반대로 쉽다고 판단했던 은아의 이혼이 그리 순탄치 않아 보였다. 상우가 아주 결정적인 과실을 범하지 않는 다음에야, 순순히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어줄 가능성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때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미현이 말했다.

“제일 자연스러운 해결책은 전처하고 다시 합치는 건데...동생이 보기엔 어때? 가능성이 있어?”

“아니요...”

“왜 이혼당했대?”

“저도 잘은 모르지만...어머님께서 언뜻 하셨던 얘기로는...”

당연히 아들의 편에서 이야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추측이 가능했다. ‘제 마누라가 밖으로 나도는 걸 좋아할 남자가 어디 있겠냐?’라는 핑계와 함께, 부부싸움을 하다 감정이 격해지면, 몇 대 때릴 수도 있다는 식으로 두둔했다는 걸 보니, 의처증증세는 그때부터 있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손찌검까지.

그 순간 상혁은, 자신 앞에서 은주를 술집여자 대하듯이 막 다루던 상우의 모습이 떠올라, 속에서 천불이 솟아났다.

‘이 자식 이제 보니까, 여자를 무슨 종 부리듯이 하는 아주 악질상습범이네? 아으~ 씨발~ 그때 반쯤 죽여놨어야 하는 건데...’

따귀 몇 대에 질질 짜던 찌질한 놈이, 여자 앞에서는 아주 폭군이 되는 것 같았다. 가식적일지는 몰라도, 차라리 수한이 백배는 나은 인간이었다.

“결정적이었던 건...아마 여자문제 같았어요...”

정말 골 때리는 작자였다. 제 마누라한테는 그렇게나 병적으로 굴면서도, 막상 제 놈은 딴짓을 하고 다녔다니 말이다.

그런데 그 시어머니라는 여자의 말이 더 가관이었다. ‘남자가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했다나? 그러면서, 그 일로 인해 ‘억울하게’ 직장에서 쫓겨난 불쌍한 남편의 힘이 되어주지는 못할망정, 이혼을 요구해서 집에다 자식까지 뺏어간 모진 년이라고 욕을 했다니, 흔히 하는 말로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그런 홀어미 밑에서 자랐으니, 상우란 놈이 그 따위 인간이 된 게 어쩌면 당연했다.

“뭐 그런 것들이 다 있어?”

상혁의 입에서 저절로 큰소리가 나왔다.

“아무래도 안되겠어..그냥 조용히 끝내려고 했더니, 이대로는 내가 열불이 받쳐서 죽을 것 같아...은아야..”

“응?”

“상우하고 이혼한 그 여자, 연락처를 좀 알 수 있겠니?”

그는 마음이 바뀌었다. 자신이 직접 응징(?)을 가하고 싶어진 것이다.

“여, 여보..어쩌려고요?”

“일단은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고 나서, 머리 속을 정리해야겠어..어쨌던 은아 일은 내게 맡겨줘, 필요하면 당신한테 도움을 청할게..”

“여보...”

상혁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손을 잡아오는 미현의 손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리고는 은아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알아낼 수 있겠어?”

“그거야 그 사람 핸드폰을 뒤져보면, 금방 알겠지만..”

“큰 문제를 만들지는 않을 거니까 걱정 마, 그리고 오래 끌고 싶은 생각도 없고. 나만 믿어, 알았지?”

“으, 응...알았어..”

어쩌면 예상보다 시간이 더 길어질 수도 있기에 은아에게 미안했다. 하지만 반대의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이혼했다면, 상우에게 맺힌 것도 많을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큰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얻어낼 수도 있을 터이다.

“자~ 오늘은 이 정도로 하고...앞으로는 당신이 은아를 자주 불러내서 숨통을 좀 틔어줘, 부탁할게..”

“호호호~ 걱정 마세요. 저도 말 친구가 생겨서 너무 좋은걸요?”

“언니, 고마워요..”

일단은 상황을 그렇게 정리한 상혁은, 두 여자의 허리를 양팔로 껴안았다

“같이 씻을까?”

미현이 그의 자지를 거머쥐어오면서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흐응~ 우리 서방님이 지금까지 용케 참으셨네요?”

그녀의 말처럼 아까부터 터지기 직전인 상태였다. 그때 은아까지 자지에다 손을 가져왔다.

“오빠, 오늘도 신기록에 도전하는 거야?”

“흐흐흐~ 당연하지..”

순간 상혁은 앞으로는 학교구내식당에서도 ‘덮밥’을 즐겨먹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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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고도 뜨거운 시간을 보낸 후, 미현이 일부러 은아의 집에까지 가서 차를 한잔 얻어 마시고 나왔다. 그러자 예상했던 대로 이미 귀가해서 기다리고 있던, 상우의 얼굴이 확 풀리더라는 것이다.

조용히 길을 걷던 미현이 문득 물어왔다.

“화가 많이 났었나 봐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안 그러겠어?”

그러자 그녀가 그의 팔에다 젖가슴을 더욱 강하게 붙여오면서 속삭였다.

“음~ 제 이야기를 들으면 더 화가 나겠네요?”

“으, 응? 또 무슨 일이 있었어?”

“뭐...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그러면서 넌지시 풀어놓는 그녀, 그걸 듣는 순간 상혁은 당장 돌아서서 달려가고 싶었다.

‘이런 개 자식이!’

대놓고 어떤 짓을 한 건 아니지만, 미현의 가슴이나 엉덩이를 쉴새 없이 훔쳐보더라는 것이다. 게다가 이혼했다고 하자마자, 아주 만만하게 보는 눈빛으로 바뀌었다나?

“아이~참? 너무 흥분하지는 말고요...”

꽉 거머쥔 그의 주먹을 풀어주면서 살살 달래온다.

“그런 남자들 속성이야 뻔하죠. 대신에 좋은 점이 있어요...”

“뭔데?”

“호호호~ 저를 어찌해볼 속셈인지, 자주 놀러 오라던데요? 은아한테 친구가 없어서 너무 외로울 거라나? 킥~”

“하..하...그 자식 얼굴 한번 정말로 두껍네?”

상혁은 어이가 없어져 맥이 탁 풀릴 정도였다. 은아를 그렇게 만들어놓은 게 누군데, 그 따위 망발을 한단 말인가!

“호호호~ 남자들이 원래 그래요...어떻게 해보고 싶은 여자가 있으면, 그쯤은 우습죠..”

“크흠...”

그 점에서는 상혁도 별로 할말이 없었다. 아니, 뻔뻔하기로 따지자면 자신이 훨씬 더했다. 그러자 미현이 그의 손가락에다 깍지를 끼어왔다. 보드랍고 따스한 감촉이 많은 걸 전해오면서,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이런 이야기를 한 건요...그러니까...”

마땅한 방법이 나오지 않을 경우, 상우의 그런 반응을 이용하자는 거였다. 거기에다 내 손을 더럽힐 필요도 없이 남의 손을 빌려서. 즉, 차도살인지계였다.

“순서를 바꾸는 거에요, 은아 다음에 저로...”

그녀의 계획은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이었다.

먼저 수한에게 은아를 인사시킨다. 상우에게 소개한 것과 마찬가지로 먼 친척동생이라면서 말이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왕래하면서 상우를 유혹한 후에, 수한에게 눈물로 호소하는 것이다. ‘제부에게 자칫 당할뻔했어요’라고.

“팀장급 회계사와 말단보험영업사원간의 싸움..어떻게 될 것 같아요? 호호호~”

창우를 그렇게 처리한 걸 생각해보면 뻔한 결과일 것이다. 아주 교묘하게 망가뜨리겠지. 어쩌면 상우가 다니는 보험사의 저 위쪽라인과 친분이 있을 가능성도 컸다. 아니, 국내에서 제일 큰 회계법인이니만큼, 그곳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보험사와 연줄이 있을 것이다.

머리가 좋은 것인지, 아니면 인생의 경험에서 차이가 나는 탓인지, 미현의 발상에 상혁은 감탄을 토할 수 밖에 없었다.

‘음...내 편이면 정말 든든한데, 적이면 무서운 여자구나...미현이는..’

약간은 등골이 서늘한 느낌까지 든다.

“일단 생각은 해둘게, 하지만...”

“알아요, 직접 혼내주고 싶은 거죠? 은아나 은주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그녀가 정곡을 찔러왔다. 깔끔하긴 하지만 못내 찜찜함이 남았던 것이다.

“감히 당신을 눈독들인 괘씸죄는 왜 빼?”

“킥~ 수한 씨도 그 괘씸죄가 있었죠?”

“흐흐흐~ 내가 원래 속이 좀 좁거든?”

하지만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다.

“그것도 그거지만...그러고 나면 수한이 그 자식, 나중에 안 걸려들지도 몰라..”

“아~! 맞아요...그걸 미처 생각 못했네요?”

미현도 그제서야 그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이미 한번 경험한 사건과 비슷한 과정이 진행된다면, 수한이 대뜸 경계심을 가질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그건 내게 맡겨. 정 안되면 당신 말처럼 시도하더라도...그땐 둘 다 한꺼번에 엮어서 처리할 방법을 고민해야 할 거야.”

“네~ 역시 당신은 똑똑하다니까요?”

하지만 스스로의 모자람을 늘 느끼는 그였기에, 괜히 쑥스러워져 말을 돌렸다.

“근데...오늘 어땠어? 기대했던 만큼 은아가 예뻤어?”

물으나마나 뻔한 줄 알면서도 그냥 던져본 거였다. 왜냐하면 미현은 그 대답을 아까 몸으로 충분히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지금 또 보지가 젖어오고 있어요..”

“후후후~ 내일 당장 은아에게로 달려가는 거 아냐?”

“두 남자에게서 부탁 받은 거니까, 제 임무에 충실해야겠죠? 호호호~”

재치 있는 그 대답에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상혁이나 상우, 둘 다 같은 부탁을 했던 것이다.

“음~ 그러다가 내가 필요 없어질까 겁나는데?”

“피~ 알면서? 당신 자지를 대신할 게 어디 있다고?”

몸을 더욱 바짝 붙여오면서 비비적거리는 미현, 상혁은 그녀의 귓가에다 속삭였다.

“은주한테 전화해볼까? 아직 퇴근 안 했으면 밖에서 만나자고..”

“당신 괜찮겠어요? 아까 그렇게나 많이 했는데..”

“후후후~ 당신하고 은주라면...아마 무덤 속의 해골이라도 자지를 새로 만들어서 세울걸?”

“호호호~”

상혁은 맑은 웃음을 터뜨리는 미현을 바라보며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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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묘한 느낌의 여자였다. 자그마했다. 키는 물론 얼굴이며 손발까지 모두. 거기에다 슬퍼 보이는 눈동자와 살짝 쳐진 눈꼬리가, 괜히 가슴을 찡하게 만든다.

“안녕하세요, 전 박 상혁이라고 합니다...느닷없이 뵙자고 해서 많이 놀라셨죠?”

“..저..그런데 무슨 일로...이미 그 사람하고는 완전히 끝났는데...”

“아...네..물론 잘 압니다..”

자꾸만 눈치를 살피며 뭔가 경계하는 듯한 눈빛이, 아니, 그보다는 겁을 집어먹었다는 게 맞다, 애처로움을 더하게 한다.

‘아~쒸~ 왠지 내가 굉장히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것 같네?’

상혁은 순간적으로 후회가 되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모든 걸 잊고서 잘 지내는 사람의 상처를 들쑤시는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렇게 가냘픈 여자한테 손찌검까지 했다는 상우란 놈에게는 정말로 분노가 치밀었다.

류 해인, 그녀의 이름이었다. 그런데 그 이름마저도 슬프게 느껴지는 거 왜일까?

은아에게서 이름과 전화번호를 받은 후 연락을 취했을 때, 그녀는 굉장히 꺼려했다. 그런 걸 상우에 대해 몇 가지만 물어볼 게 있다고 사정하고 또 사정해서, 1시간뿐이라는 조건으로 겨우 약속을 잡은 것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일단 핑계는 그렇게 댔다. 자신과 친 누나처럼 지내는 하숙집여주인의 친척동생이 상우와 재혼했는데, 그 동생이 힘들어하는 것 같다며 너무나 걱정하는 모습을 보다못해, 이렇게 대신 나선 거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상혁은 자신의 학생증부터 내보였다. 대학생이라는 신분을 확실히 밝혀야만 안심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상, 명문대생이라면 왠지 좋은 쪽으로만 봐주는 경향이 있다는 점도 고려했다.

“어머?”

“왜 그러시나요? 제가 무슨 실수라도?”

깜짝 놀라는 그녀에 상혁은 조금 당황했다.

“아, 아니에요...그냥 저한테 대학후배가 되길래..”

“아~ 그러세요? 하하하~ 반갑습니다..누나...”

“어머~ 그, 그러지 마세요...몇 살 차이도 안 나는데..”

“하하하~ 그래도 그건 아니죠....엄연히 선배님인데..”

확실히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상혁이다. 빈틈이 보이자마자 대번에 넉살 좋게 달라붙어버리니. 어쨌던 ‘누나’라는 그 한마디가 굉장한 효과를 발휘한 것 같았다. 내내 움츠렸던 해인의 분위기가 바뀐 것이다.

“그런데 상혁 씨가 묻고 싶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거죠?”

“저도 뭘 물어봐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아는 게 전혀 없으니...”

그렇게 눙치고 들어갔다. 섣불리 어렴풋이라도 알고 있다는 걸 티 내서는 안되었다. 그녀에게는 다시 떠올리기 싫은 아픈 상처일 거다. 그런데 전혀 모르는 낯선 이가 그걸 입에다 담는다면, 당장에 단단한 껍질 속으로 숨어버릴 게 분명하다.

“미현이 누나가...아~! 친 누나처럼 가깝다는 하숙집주인 말이에요..”

“네...”

이제는 해인도 긴장이 풀렸는지, 그와 시선을 마주치면서 선선히 말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미현이 누나 말로는, 결혼하고부터는 만나기가 힘든데다가, 어쩌다 한번씩 볼 때도 낯빛이 꼭 환자 같더래요...그래서 꼬치꼬치 따져 물었더니, 집밖에 잠시만 나가도 어디 갔었기에 전화를 안 받았냐며 화를 내고, 지금 다니고 있는 방통대마저 그만두라는 식으로 자꾸 이야기한다니...”

남자에게 뭔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서, 고민 끝에 염치불구하고 이렇게 실례를 범하게 되었노라 설명했다.

“휴~우~ 여전한가 보네요...”

해인이 별다른 의심의 기색도 없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일단은 제대로 먹혀 든 모양이었다. 그래서 내친 김에 조금 더 나가보았다.

“누나한테도 그랬었나요?”

“..네...”

여기까지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이미 그녀가 먼저 고백을 한 사실이니까.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결혼생활에 관한 이야기들을 끌어낼 수가 있을까? 잠시 고민하던 상혁은 입을 열었다.

“결혼하기 전부터 원래 성격이 그랬던가요? 아참~! 어떻게 결혼한 건지부터 먼저 물었어야 하는데...하..하...제가 좀 바보 같죠? 이래서 여자친구한테 늘 구박을 받아요...”

일부러 그렇게 바보스러운 면을 내보였다. 그래야만 더더욱 마음을 놓을 테니까.

“참 좋을 때네요...저희도 그럴 때가 있었는데...”

“꽤 오래 연애를 하셨었나 봐요?”

“그랬죠...대학 다닐 때부터 한 서클에 있으면서, 캠퍼스커플이었으니까..”

“어!”

순간 상혁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말았다.

“왜 그렇게 놀라요?”

그제서야 아차 싶었던 그는, 은주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지 망설였다. 한 서클에 있었다면 분명히 은주도 알 거다. 은아를 숨기다 보니, 은주에게 미처 물어보지 않았던 게 실수였다. 이제 와서 은주를 들먹인다면, 상우에 대해서 이미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는 걸 밝히게 된다. 그건 곧, 지금껏 전혀 모르는 척하면서, 해인을 기만해왔다는 걸 시인하는 꼴이고.

조용히 바라보는 해인, 상혁은 결국 고개를 숙이며 사과부터 했다.

“죄송해요, 누나..”

“갑자기 왜 그래요?”

“휴~ 누나, 혹시 ‘장 은주’라고 알아요?”

“어멋~!!”

역시 그런가 보았다. 이번에는 해인의 눈이 커다래졌다.

“사실은 은주가 제 여자친구...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결혼할 사이에요...”

“어머머머?”

“지금은 같은 하숙집에 있고요..”

“그럴 수가?”

단순히 그런 기가 막힌 우연이나, 상혁이 속였었다는 사실 때문에, 놀란다고 보기엔 뭔가 이상했다. 저건 놀란다기보다는 두려워하는 모습에 가까웠다.

‘분명히 뭔가 알고 있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은주마저도 의심만 할 뿐, 어떤 물증도 확인하지 못했던 그날의 사건, 그게 분명했다. 이렇게 되면 모든 게 달라진다. 지금이라도 접근방법을 바꿔야만 했다.

“누나, 혹시 은주하고 그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알고 있는 게 있어요?”

“헉~!!”

기절을 할 것처럼 소스라친다.

“누나, 알고 있는 게 있으면 제발 좀 말해줘요...은주한테는 이미 다 들었어요, 저도 다 이해한 일이고요...하지만 증명할 길이 없어서 그 사람, 아니, 그 자식을 어떻게 못했거든요? 제발, 제발 부탁해요...누나도 같은 여자로서 화나지 않아요? 어떻게 선배라고 믿었던 여자한테 그런 짓을..”

“미, 미안해요..상혁 씨...”

완곡한 거절의 표현을 하는 해인의 태도에, 상혁은 그만 힘이 쭉 빠졌다.

오판이었나 보다. 아무리 그렇게 헤어졌더라도, 한때는 살을 섞고 살았던 부부라는 사실이 저렇게나 크게 작용하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된다면, 그녀를 통해 뭔가 얻어내려 했던 애초의 목적까지도 다 허사였다. 결국엔 미현의 제안대로 할 수 밖에 없다는 건가?

그때였다.

“저도 잘은 몰라요...그 사람이 술에 취해 전화를 걸어왔을 때 언뜻 들은 이야기 밖에는..”

한줄기 빛이 보였다. 해인이 그렇게나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확 껴안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순간적으로 들 만큼.

“대충이라도 좋으니까...부탁 드릴게요...”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며, 간절하게 부탁하는 그를 잠시 바라보던 해인이, 입술을 잘끈 깨물면서 말했다.

“우리 내일 다시 만나요...애를 잠깐 맡겨놓고 나와서 이젠 가봐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내일은 아예 친정어머니께 맡겨놓고 나올 테니, 여유 있게 만나자고 했다. 자신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나 많다면서.

“지금껏 아무한테도 못했던 이야기를 후련하게 다 해보고 싶어요...”

“네, 누나...그렇게 해요...아니, 차라리 술이라도 한잔 하면서 이야기할까요? 그런 자리 오래됐죠?”

“좋아요...호호호~”

약간은 처연한 그 웃음이 상혁의 가슴 속으로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하~ 넌 또 왜 이러냐?’

자지가 지퍼를 열고 당장 튀어나올 것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그의 그런 고민도 모른 채, 해인은 처음과는 달리 밝아진 얼굴로 일어서고 있었다.

*

해인과의 짧은 만남에 대한 결과를 듣고 난 미현이 입을 열었다.

“이젠 은주한테도 이야기해주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일단은 내일 다시 만난 후에 한번 생각해봐야겠어.”

미현의 의견이 옳긴 했다. 벼리야 이제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가급적이면 심적인 동요를 주지 않기 위해서 미루고 있다지만, 은주는 지금쯤이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게 순리였다. 그런데도 미적미적 끌어온 것은, 상혁의 마음 속에서 왠지 켕기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쪽팔림이라는 감정이었다. 은주를 처음 만났을 때, 여관 벽에다 귀를 붙이고서 엿들으며 딸딸이를 쳤던 일이나, 그게 발단이 되어 동정을 떼러 갔다 은아를 만났던 사연까지 모두 털어놔야 하기에 말이다.

미현에게 고백하면서는 그런 기분이 별로 들지를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은주에게만은 그렇다. 그건 아마 은주가 당사자인데다가, 상우까지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관계라서 그럴 거다.

“그나저나 당신 정말 괜찮겠어?”

“호호호~ 걱정 마세요..”

미안한 마음에 밝게 웃는 미현을 꼭 껴안았다. 수한과 상우 사이에서 위태위태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는 그녀였다. 아무리 능수능란하게 상대한다지만, 그래 봐야 결국엔 연약한 여자였다. 만에 하나라도 녀석들이 미친 짓을 벌이기라도 한다면? 순간 상혁은 가슴 속이 싸해왔다.

“수한이 녀석이야 내 눈에 보이는 곳에 있으니까 그나마 낫지만...상우 그 자식은 절대로 방심하지마. 조금만 약점이 보인다 싶으면 곧바로 물어뜯을 놈이니까..”

그가 판단하기에는 그랬다. 비겁하다는 점에서는 그 놈이 그 놈이었지만, 어쨌던 수한은 제 잘난 맛에 사는 구석이 있어서, 자존심 때문에라도 드러내놓고 막 나가는 짓은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몸을 직접 쓰기보다는 잔머리를 굴리는 걸 좋아하는 사기꾼스타일이랄까?

하지만 상우는 전혀 달랐다. 뭐랄까, 전형적인 노름판의 야바위꾼이었다. 목적달성을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안 가리고 달려들 가능성이 컸다. 거기에다가 여자를 동네 강아지쯤으로 여기는, 자기중심적인 마초다. 그래서 더더욱 위험했다.

“알아요..그래서 은아랑 꼭꼭 달라붙어 지내는걸요? 흐응~”

“풋~”

그녀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상혁은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그래, 맞다, 찰싹 달라붙어 지내지, 그것도 아주 홀딱 벗고서 말이다.

“그래, 내가 한대 쥐어박아봐서 아는데...그 놈이 까불면 당장에 따귀를 날려버려, 그게 쥐약이거든?”

“킥킥~ 네~”

뺨을 얻어맞고 화장실바닥에 주저앉아 질질 짜던 상우의 모습에 대해서는, 미현도 이미 들은 바가 있다. 그렇기에 저렇게 킥킥대는 것이다. 그녀가 자지를 슬그머니 거머쥐었다.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어요...이걸 이렇게..”

“으, 음~”

부드럽게 움직이며 자극하는 짜릿한 손길에, 상혁은 침음을 토해내며 금새 단단해져 버렸다. 그때 미현이 기둥의 뿌리 쪽을 꽉 틀어쥐며 속삭였다.

“...서게 만든 다음에...팍~ 꺾어버리면 천하장사라도 끝이거든요?”

“헉~!!”

슬쩍 꺾는 시늉만 하는데도, 아랫도리 전체로 뻐근한 통증이 밀려들면서 등골로는 식은 땀이 흘러,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면...이걸 세게 거머쥐면...그냥 터지겠죠?”

“하, 항복!!”

이번에는 불알 두 쪽을 한꺼번에 거머쥔 손아귀가 조여오자마자, 그대로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간 상혁. 그는 양손을 번쩍 쳐들어 보였다.

“아이~참? 어떻게 감히 당신한테 그러겠어요? 그냥 이 정도의 방비책은 저도 있으니까, 걱정 마시라는 거죠..”

“하..하..하...”

늘 부드럽고 온화만 면만 보여주는 미현이지만, 가끔씩 내비치는 이런 모습엔 주눅이 들 정도다.

‘으, 음...둘 중에 뭐든, 걸리기만 하면 남자로서는 완전히 끝이겠다...정말 무섭구나, 무서워...’

해면체가 파열되든지 정낭이 부서져버린다면, 그건 수술로도 복구가 절대 불가능한 치명타였다.

그런데 남자로서의 위기를 이렇게나 생생하게 실감해본 이순간에도, 그의 자지가 더욱더 단단해지면서 짜르르한 흥분이 밀려드는 건 왜일까? 상혁은 그녀의 손을 덮어 쥐면서 말했다.

“아니, 그렇게 해도 돼..”

“네? 여보!”

깜짝 놀라 눈이 커지는 그녀에게 부드럽게 키스한 다음, 치마 속으로 손을 밀어 넣어 축축하게 젖은 팬티 위를 어루만지며 덧붙였다.

“대신에 이걸로 해야 해, 알았지?”

“깜짝 놀랐잖아요?”

귀엽게 투덜거리는 그녀의 팬티를 끌어내려서는 발목으로 빼냈다. 그리고는 보지 속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이 보지 속에서 죽을 거야, 뜨거운 백혈(白血)을 흘리면서 아주 장렬하게~”

“앙~ 여보오~”

미현이 그를 밀어 눕히더니, 바지를 벗기고서는 몸을 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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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그레하게 술기운이 오른 해인은 어제완 전혀 딴 사람으로 보였다. 이제야 비로소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 서로 잘 아는 사이는 아니라는 거네요?”

“응...”

상혁의 거듭된 권고에 결국 말을 놓은 그녀였다. 4살이나 터울이 지니 충분히 그럴만했다. 은주가 신입생으로 서클에 막 들어왔을 때 졸업반이었던 탓에, 취업준비로 여념이 없어 서클활동은 거의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은주와는 이름과 얼굴만 아는 정도라나?

“그러면 상우 그 자식...아, 미안해요, 누나...저도 모르게..”

무심결에 내뱉다가 큰 실례를 범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혼을 했더라도, 한때는 부부였던 사람이다. 그런데 막말을 해대면 당연히 거북할 거다. 덩달아 자신마저 그렇게 취급 받는 것처럼 느껴질 테니까.

그리고 은주에게 그런 짓을 저질렀다지만, 해인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이미 그때는 상우와 갈라서고 난 다음이기에, 이혼한 전남편의 오물을 같이 뒤집어쓸 이유도, 그럴 책임도 전혀 없었다.

“아니야..그게 사실이라면 정말로 개자식이지..내가 그런 인간하고 살았었다니...”

“누나...”

씁쓸하게 내뱉는 그녀에, 상혁은 또다시 후회가 드는 중이었다. 조금씩 아물어가던 상처를 덧나게 만든 것만 같았다.

“은주는 정말로 예쁜 애였어...몇 번 보지는 못했지만, 아직까지도 기억에 생생해..같은 여자인데도 왠지 내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으니까...여전하지? 잘 지내니? 아~ 맞아, 너랑 결혼할 사이랬지? 그러면 행복하겠구나..”

“사진으로라도 한번 볼래요?”

“으, 응? 그래, 있으면 보여줘...갑자기 굉장히 궁금해지는데? 호호호~”

학창시절의 추억이라는 건 저런 힘을 간직하고 있다. 어두워졌던 그녀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뛰는 걸 느낀 상혁은, 조금은 당황스러운 마음에 재빨리 시선을 숙이고는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자요. 이번 여름에 찍은 거에요..”

“어디? 어머~~ 더 예뻐졌네? 호호호~”

둘이 바닷가에서 같이 찍은 사진이었다. 비키니를 입은 은주의 사진이어도, 같은 여자인 해인이라면 상관없었다.

워낙 몸매가 좋아 아무거나 입어도 잘 어울리긴 하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을 때가 최고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사진을 주머니에다 넣고 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때문에 그 대용품으로 고른 게 저거였다. 물론 알몸사진은, 그것도 자위까지 하고 있는, 상혁의 컴퓨터에 고이고이 간직되어 있었다.

“와~ 몸이 아주 끝내주는데?”

“은주야 워낙 타고났으니까요. 그렇게나 술고래에다 먹보인데도,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걸 보면 참 신기하긴 해요....뭐~ 제 복이기도 하고요...하하하~”

팔불출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일단 자기여자를 말할 때 당당해야만, 상대방에게도 신뢰감을 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해인을 배려한답시고 어설프게 말을 돌릴 필요도 없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그녀만의 매력을 칭찬해주는 게 낫다.

그런 의도가 적중했는지 전혀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빙긋이 웃기까지 했다.

“호호호~ 은주 이야기가 아니야. 걔야 원래부터 모델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는데, 내가 새삼 놀랄 일도 없지.”

“에~? 그, 그러면...”

순간 뜻밖의 역습에 상혁은 당황하고 말았다. 첫인상이나 사전에 들었던 이야기 때문이었는지, 벼리처럼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덩어리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운동을 많이 했나 봐?”

“아, 네...군대 있을 때 조금...”

사진과 자신을 번갈아 보며 야릇하게 웃는 그녀에, 상혁은 괜히 낯이 뜨거워졌다. 그 역시 아주 작은 삼각수영복만 입고 있어, 자지의 윤곽이 뚜렷한 사진이라는 걸 깜박했었다.

“너무 잘 어울려, 수영복광고사진 같은데?”

“하..하..하..뭐, 은주는 몰라도 저야...”

해인이 돌려주는 사진을 받아서 지갑으로 넣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다행이야. 은주가 굉장히 행복하게 보여.”

아마 그랬을 것이다. 미현이 은주를 일컬어 ‘완전히 눈이 돌아갔다’라고 표현했을 시기니까.

“사진만 봐도 알겠어...상혁이 네가 은주를 진심으로 사랑해주고 있다는 걸...”

“아니에요, 늘 고민거리만 안겨주는 걸요? 은주가 워낙 마음이 넓어서 다 받아주는 거죠..”

사실이 그랬다. 벼리에다 미현, 이제는 은아까지 끌어들이는 중이었으니.

“후후~”

말을 해놓고는, 당당한 것도 좋지만 지나치게 오버한 건 아닌가 하고서 뒤늦게 ‘아차~’했지만, 다행스럽게도 해인은 즐겁다는 듯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관계는 절대 한쪽만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지. 너무 그렇게 겸손만 떨지마...은주가 널 믿고 의지한다는 게 표정에서 딱 보이던걸? 내가 보기엔 오히려 상혁이가 다 받아주는 것 같은데?”

“아..하..하..하...그냥..뭐...누가 누굴 받아주고 말고 할 게 어디 있나요? 서로 사랑하면 그만이죠.”

“호호호~ 오늘 너무 좋아...고마워, 이렇게 편안한 기분 정말로 오랜만이거든?”

마음이 짠하게 아파왔다. 아마 상우로 인해서 받은 상처가 너무 컸던 탓에, 그 동안 사람들과의 교류를 거의 피해왔던 것 같았다.

“참~! 내가 이렇게 정신이 없다니까? 상혁이가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만든 자리인데, 여태 딴짓만 하고 있었네?”

“누나...그건 천천히 들어도 되니까, 너무 그렇게 부담감을 가지지 말아요...지금은 그냥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해요.”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젠 그 이야기를 해야지..사실 처음엔 망설였어..”

어제 받은 느낌에서 그런 사람이 절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그 일을 가지고 은주를 두고두고 괴롭히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상우가 자기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랬는데 이젠 마음이 놓여..”

해인이 차근차근 풀어놓기 시작했다. 상우가 은주와 처음으로 만난 건, 해인이 졸업한 후 그가 복학해서였다. 그런데 그때 잠시나마 걱정을 하긴 했었다고 한다.

“은주가 워낙 예뻤어야지? 서클 안의 남자란 남자애들은 몽땅 걔만 바라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비록 서클 일에 거의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들려오는 소문까지 완전히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은주로 인해 이런저런 크고 작은 풍파가 끊이질 않았다나?

어쨌던 해인으로서는 연인이 군에 있은 덕분에, 그런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마음 편히 취업준비에다 몰두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이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게 되고, 상우는 복학을 해 은주와 자주 마주치는 상황으로 바뀌자, 그런 마음이 들 수 밖에 없었단다.

“..그랬는데 후배가 그러더라? 은주는 서클남자애들한테는 전혀 관심이 없으니까 안심하라고...걔한테는 이미 남자친구가 여러 번..”

문득 말을 끊는 해인, 상혁은 그녀가 왜 그러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하하~ 걱정 말아요, 누나...은주가 당시에 바람둥이였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요. 저한테 다 고백했거든요? 정 거북하면 그 부분은 그냥 건너뛰어도 되니까, 누나 편한 대로 하세요..”

“그런...거야?”

“네~”

눈길이 참으로 묘했다. 이상한 놈을 다 본다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감탄하고 있는 듯도 했다. 잠시 그러고 있던 그녀가 머리를 흔들더니 계속 이어나갔다.

“그래서 은주에 대한 일은 까맣게 잊어버렸어...사회생활을 갓 시작한 때라 그럴 정신도 없었거든?”

은주의 이름을 다시 들은 건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혼전임신을 한 탓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서, 졸업과 동시에 취직한 상우와 부랴부랴 식을 올렸다. 그리고는 출산에다 젖먹이를 키우고 홀시어머니를 모시는 시집생활까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2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있었다.

“그렇게 정신 없이 사는 와중에...나는 조금씩 미쳐가고 있었어...”

남편이라는 작자에게 그런 모습이 있는 줄만 알았더라도, 차라리 미혼모가 되면 되었지 결코 결혼하지 않았을 거란다. 그 오랜 연애기간 동안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상우란 인간도 정말 징글맞은 놈이었다. 거의 병적으로 감시하고, 작은 꼬투리이라도 잡히면 피를 말릴 듯이 볶아댔다니.

거기에다 시어머니라는 여자 역시 한술을 더 떴으면 떴지 덜하진 않았다고 한다.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서까지 아들에게 일러바치는 통에, 그 억울함을 호소했다가 상우에게 되려 맞기까지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상혁은 자신도 모르게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처음엔 은주인 줄만 알았어...”

언젠가부터 상우에게서 이상한 낌새와 함께 딴 여자의 흔적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다른 서클동기와 더불어 은주를 종종 만나곤 한다는 이야기를, 전에 언뜻 들었던 게 떠올랐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어...그 지옥 같은 곳을 벗어나는 게 소원이었거든? 아마 조금만 더 있었으면 정말로 미쳐버렸던지, 아니면 자살이라도 했을 거야..”

해인은 조금 전부터 눈물이 자신의 뺨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 것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상혁은 너무나 가슴이 저려와, 팔을 내밀어 맞은편에 앉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흠칫한다.

“누나...조금만 쉬었다 해요..”

상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곁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어깨를 감싸 품에다 껴안았다.

“제 가슴을 빌려드릴 테니까, 실컷 울어요...속이 후련해질 때까지..”

“흑...흑..흑흑흑~”

바짝 긴장한 것만 같던 해인의 몸이 조금씩 떨려오더니, 마침내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축축하게 젖어오는 가슴팍, 상혁은 그녀의 가녀린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하아~ 왜 이렇게 상처받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걸까? 그것도 착한 사람들만...’

맺혔던 설움을 다 녹여내려면 얼마나 많은 눈물이 필요할까? 그칠 줄을 모르는 해인의 눈물이, 그의 가슴팍을 적시다 못해 마음 속으로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아니, 온 세상이 젖어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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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이럴 줄 알았으면 녹음이라도 해두는 건데..”

겨우 진정한 그녀에게서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내용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에는 전혀 못 미쳤다. 그런 실망감이 얼굴에 드러났던지, 해인이 미안해했다.

“아니에요, 누나...그래도 그 자식이 범인이라는 건 확인이 됐잖아요? 사실 심증은 가지면서도, 혹시나 우리가 엄한 사람을 의심하는 건 아닌가 조금 걱정을 했었거든요..”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한 상우가 밤늦게 전화를 걸어와서는, 네까짓 년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은주를 안았노라고 자랑을 해대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헛소리라 치부하고는 그냥 끊으려는 순간, 아주 세세하게 이야길 늘어놓았는데, 그게 너무나 현실적으로 들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었다고 한다.

그 동안 추측해왔던 게 거의 들어맞았다. 술에 취해 정신이 없는 은주를 모텔로 데려가서는 능욕했단다. 젖가슴이 어땠느니, 보지가 얼마나 기가 막힌 움직임을 보였는지 등등, 온갖 음탕한 소리를 다 늘어놓았다니, 상혁은 순간적으로 살의마저 느껴졌었다.

“근데...지금 같이 살고 있다는 그 여자는 어쩌려고 하는데?”

“사실...당장에라도 헤어지고 싶어하는데, 그 개자식이 쉽게 놔주질 않을 것 같아서, 누나한테 뭔가 좋은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 기대했었어요...”

그러면서 자신과 은아와의 관계만 빼고 다 들려주었다.

“흥~ 날 아직도 며느리로 생각한다고? 그래서 그 여자를 인정 안 한다고? 웃기네, 정말..”

그런데 은아의 시어머니가 자신을 여전히 며느리로 여기면서, 재결합을 기대하는 것 같다는 말을 들은 해인의 반응이 조금 뜻밖이었다. 그냥 단순히 그 지긋지긋한 곳으로 되돌아갈 생각은 꿈에도 없다는 식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마찬가지야...그 미친 여자가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

“에? 미친 여자? 상우의 엄마요?”

“맞아..그 미친 개 같은 년..”

그의 눈이 커졌다. 상우를 언급할 때도 차마 쌍소리까진 하지 않던 해인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술을 마셨다지만, 시어머니에 대해선 너무나 강한 적대감을 드러낸 것이다.

“누나...그 여자..무슨 큰 문제가 있어요? 정신적으로 좀 이상하다거나...”

왠지 상우의 편집증적인 성격이 홀어미의 영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 것이다. 하지만 해인의 대답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거였다. 상혁은 그걸 듣는 순간, 처음에는 자신이 잘못들은 줄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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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을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서 돌아섰다. 들어와서 차라도 한잔 마시고 가라는 걸, 다음으로 기약했다. 아이마저 친정에다 맡긴 지금, 자칫 실수를 하게 될지도 몰라서였다. 많은 이야기를, 더더군다나 그런 엄청난 비밀까지 들어버린 탓에, 두 사람의 감정이 지나치게 동조해버린 상태였다.

‘뭐, 다음에 놀러 가서 차를 얻어 마시기로 했으니까...’

예전에 디자인회사에서 근무했었다는 그녀는 지금은 프리랜서로 뛰며, 일거리를 맡아와서는 대부분은 집에서 작업한다고 했다. 육아를 병행하려니 어쩔 수가 없단다. 정 급할 땐 친정에다 맡기긴 한다지만, 아직은 아이가 너무 어려서 엄마 품이 필요하다니, 역시나 어머니란 존재는 세상에서 제일 강한가 보았다.

‘그나저나...사실일까?’

상혁은 많이 혼란스러웠다.

‘하기야 나 같은 놈도 있는데...그렇게 미친 인간들이야 더하겠지...’

너무나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아무리 홀어미에 외동아들이라지만, 아들이 결혼까지 한 상황에서 같이 샤워하는 모자간이라니!

해인도 처음에는 몰랐단다. 밤에도 시도 없이 깨서 울어대는 아이 때문에, 상우가 시어머니 방에서 자는 일이 종종 있었어도 전혀 의심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벌거벗은 채 욕실에서 나란히 나오는 모습을 우연히 발견하고 난 후부터는, 모든 게 이상하게만 보였다고 한다.

‘흠...그러고 보니까 너무 이상하긴 하네?’

아무리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는다지만, 왜 따로 살고 있을까? 어쩌면 해인에게 들켰던 그런 경우를 피하기 위해서 그렇게 지내는 건 아닐까? 한번 의심이 들기 시작하자, 온갖 의혹의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 오르는 중이었다.

‘일단은 좀 더 확인을 해봐야겠구나...’

그걸 해줄 사람은 은아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 확인할 수가 있다면, 그리고 증거까지 확보한다면, 상우를 처리하는 건 물론 두 인간을 한꺼번에 매장시켜버리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딱히 꼭 깊은 관계일, 근친상간 같은, 필요도 없었다. 해인이 목격한 정도만 되어도, 최소한 은아와 이혼시키는 일과 더불어 먼 곳으로 쫓아내는 것이 가능했다. 그 증거를 슬쩍 흘리기만 하면, 나머지는 사람들의 입방아가 알아서 다 해결해줄 테니까. 최소한 그들을 알아보는 사람이 존재하는 곳에서만큼은, 절대로 발을 못 붙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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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을 만나고서 며칠 동안 생각을 정리한 상혁은, 저녁식사가 끝난 후 은주를 데리고 뒷마당의 은행나무아래 소파에 앉았다.

“은주야, 할 이야기가 있어..”

“응? 뭔데?”

그의 어깨에다 머리를 기대고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은주가 고개를 쳐들었다.

“너 혹시 ‘류 해인’이라고 알아?”

“어? 자기가 그 언니를 어떻게 알지? 내가 이야기를 했었나?”

고개를 갸우뚱하는 그녀가 굉장히 귀여웠다. 터프했던 모습이 갈수록 옅어지고, 그 동안에 숨겨져 있던 여성스러움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상혁은 그녀를 끌어당겨 자신의 허벅지를 베고 눕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부드럽고 매끄러운 머리카락을 쓸면서 말했다.

“음~ 그러니까 일단은 내 말을 듣기만 해...다른 건 다 듣고 난 후에 다시 이야기하고...알았지?”

“응~ 알았어~ 그전에 키스부터~”

“후후후~ 그래, 우리 예쁜이...”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그녀가 팔을 길게 뻗어 목을 껴안아오더니, 달콤하고도 보드라운 입술을 촉촉하니 붙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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