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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역을 나와서 건물 앞으로 다가가자 은주가 보였다. 정장치마에다 시원한 블라우스가 아주 잘 어울려, 지적이면서도 섹시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벌써 와있었네? 많이 기다렸어?”
“아니, 돌반지를 사려고 조금 일찍 왔던 것뿐이야.”
작고 예쁘장한 쇼핑백을 흔들어 보이며 방긋 웃는다.
“참, 그런데...그...”
뭐라고 불러야 할지 꽤나 난감했다. ‘선배’라는 표현을 쓰기는 죽어도 싫고, 그렇다고 ‘그 자식’이라고 할 수도 없으니. 그러자 눈치를 챈 은주가 먼저 말해주었다.
“상우 오빠 때문에?”
“으, 응...좀 그렇잖아?”
“뭐, 어때서 그래? 상우 오빠도 이젠 재혼했는데, 이미 다 지난 일이잖아? 오늘같이 좋은 자리에선, 마주치더라도 그냥 모른 척해주고 넘어가, 응? 자기야~”
“나야 별 상관이 없지만, 그쪽에서 불편해할까 그러는 거지...알았어...”
은주가 ‘상우 오빠’라 칭한 사람이, 예전에 상혁에게 따귀를 맞고서 엉엉 울던 그다. 오늘은 그때 같이 만났던 선배의 둘째 아이 돌잔치였고.
그 선배와 약속했던 대로 은주와 셋이서 술자리를 한 적이 두어 번 있었기에, 돌잔치초대에 안 올 수가 없었다. 문제는 친구 사이인 상우가 당연히 참석할 거기에, 서로 불편한 자리가 되지 않을까 저어한 것이다.
하지만 은주의 말마따나 이미 재혼까지 한 상태이니, 그 사건을 언급하지만 않으면 별탈은 없을 것 같기도 했다. 더군다나 상우에겐 너무나 치욕적인 일이었으니, 그가 먼저 말을 꺼낼 리도 없을 테고.
상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팔에 매달려 애교를 부리는 은주의 허릴 껴안았다.
“후후후~ 그나저나 우리 예쁜이는 갈수록 더 예뻐져서 걱정인걸? 오늘도 울 각시를 지키려면, 밥이나 제대로 먹을 수 있을지 몰라...”
“치~ 난 이게 더 걱정인데?”
“컥~”
역시나 화끈한 성격답게, 쇼핑백으로 슬쩍 가리긴 했다지만 길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자지를 쥐어오는 그녀에 상혁은 당황하고 말았다.
“세우지마, 알았지? 아줌마들 눈치가 얼마나 빠른데...”
“하..하...하...그, 그래...”
‘네가 그렇게 만져대는데 어떻게 안 서냐?’라는 항변을 마음 속으로만 하면서,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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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잔치라는 게 뭐 특별한 게 있을까, 다 거기서 거기지. 북적거리는 사람들과 뷔페음식 그리고 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박수치고 웃어주는, 대충 그런 거다. 하지만 상혁에게 있어서는, 오늘이 꽤나 특별하고 충격적인 경험이 되고 있었다.
“왜 안 먹어? 많이 불편해?”
“아, 아니야...점심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 별로 배가 안 고파서 그래...난 괜찮으니까 많이 먹어. 그리고 사람들이랑 얘기도 하고..”
소곤거리는 은주에게 미소를 보내고는, 안심하라는 뜻으로 테이블 밑에 놓인 그녀의 손을 꼭 거머쥐어주었다.
그녀가 그렇게 걱정스레 물어온 건, 어쩌다 보니 상우와 한 테이블에 앉게 된 탓이다. 아무래도 대학시절 서클사람들끼리 자연스레 뭉쳐졌고, 은주 역시 그들 무리에 함께 섞일 수 밖에 없었다. 상혁이야 그녀에게 딸린 옵션으로 당연히 묻어간 거고.
길다란 테이블에 열댓 명이 주르르 앉은 저쪽 대각선으로, 상우와 그 곁의 한 여자가 보였다. 얼마 전에 재혼했다는 그의 아내였다. 상당한 미모에다 은주보다 더 어린듯한 앳된 얼굴, 상우가 어깨에다 힘을 팍팍 주면서 으쓱거릴 만도 했다.
‘하~ 미치겠구나, 미치겠어~~’
상혁은 담배생각이 너무나 간절했다.
“잠깐 나가서 담배나 한대 피고 올게.”
“응, 알았어...많이 지루하지? 미안해..”
“후후후~ 아니야...원래부터 혼자서도 잘 놀잖아?”
아까 던졌던 농담을 떠올린 건지 은주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 난 여기서 꼼짝 안 할 테니까, 걱정 말고 천천히 와~”
“쿡쿡~ 절대 세워서도 안되고?”
“킥~ 맞아..”
둘이 속닥대면서 킬킬거리자,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특히 남자들의 열렬한(?) 눈길에는, 제법 선명한 적의가 들어있어서, 고소를 머금게 했다.
‘흐흐흐~ 이놈들 봐라? 이제 봤더니 상우란 놈만이 아니구나?’
학창시절 은주의 인기를 실감케 했다. 보나마나 저들 대부분은 마음 속으로만 끙끙댔을 게 뻔했다. 상혁은 짓궂은 마음에, 은주의 어깨를 꽉 껴안으면서 뺨에다 입맞춤을 했다.
“어머~ 호호호~ 우리 애인이 갈수록 로맨틱해지는데? 쪽~”
은주가 주위의 시선은 아랑곳 않고, 활짝 웃으면서 입맞춤을 되돌려주는 순간, ‘와르르~’ 쏟아지는 따가운 눈총들, 상혁의 온몸을 갈갈이 찢어낼 듯하다.
‘어이쿠~~ 살인 나겠다, 살인~ 이 쪼다들아~
상혁은 ‘썩소’라도 한방 날려줄까 하다가, 남의 잔치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 것 같아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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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밖으로 나와, 어두운 밤거리를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자, 답답했던 실내공기로 인해 띵했던 머리가 한결 나아졌다. 그렇지만 복잡한 심사까지는 도저히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 은주 말처럼 지난 일인데, 뭘? 더군다나 아는 척도 안 하잖아? 하기야 그게 서로를 위해서도 백 번 옳은 일이지..그나저나 상우는 알고 있을까? 쳇~ 그 자식이 알던 말던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렇게 혼자 상념에 빠져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나지막한 음성.
“저기요...”
상혁은 깜짝 놀라 몸이 굳고 말았다. ‘또각~ 또각~’ 소리와 함께 다가오는 인기척.
“상혁이 오빠...”
아~!!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구나!
묘한 환희가 밀려오면서 동시에 긴장이 풀렸다. 그는 돌아서면서 말했다.
“후후~ 그래, 정말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오빠도 아주 좋아 보이던데요?”
“하..하...뭐...이젠 군바리 물이 다 빠졌으니까...”
가끔씩 떠오르는 기억 속에나 남았을 뿐, 완전히 끊어졌다고 여겼던 인연이 다시금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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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들에게 나눠주는 기념품을 하나씩 받아 들고서 그곳을 나섰다. 은주가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나누는 동안, 상혁은 뒤쪽으로 멀찌감치 떨어져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저 반대편에서 그와 비슷한 모습으로 서있던 그녀, 상우의 아내가,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손을 귀로 가져가 전화를 달라는 시늉을 했다.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후후후~ 진짜 이름은 만나서 알려주겠다니...’
지금 그의 핸드폰에는 그녀가 직접 찍어준 전화번호가 입력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건 누군가가, 특히 은주가 보더라도 전혀 문제가 생기지 않게 저장된 상태였다. ‘수정’이란 이름으로.
‘하기야 나한테는 수정이지...진짜 첫 여자...’
첫 휴가 때 은주 때문에 자극을 받아 달려갔던 그곳에서, 그의 동정을 받아주려다 결국 실패했던 ‘수정’ 바로 그녀였다. 뭔가 사정이 있는 것 같더니, 결국엔 그곳을 벗어나는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그래, 정말 잘한 거야, 수정아, 축하해...음...음...솔직히, 네가 결혼한 남자에 대해서는 축하해주기가 좀 힘들지만...’
어쨌던 정말로 힘든 일을 해낸 것이다. 사창가는 아니라지만, 그 못지않은 곳에서 몸을 팔던 과거를 벗어 던지고, 저렇게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왔다는 건 거의 기적과도 같다.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너무나 대견했다.
‘음...물론...’
뻐근해지는 아랫도리를 의식하며 상혁은 침음을 삼켰다. 뭐니뭐니해도 그의 기억에 가장 생생하게 남아있는 건 바로 수정의 몸이었다. 그럴 수 밖에, 처음으로 접한 여자이었으니까. 그리고 단순히 손님으로서만 대한 게 아니라, 여자가 얼마나 신비하면서도 따스하고 포근한 존재인지를 알게 해주었다.
“자기야~ 이제 가~”
은주가 팔짱을 끼면서 그렇게 말했다.
“많이 아쉬워하지? 특히 남자들이..”
“호호호~ 당~연하지~~ 이 몸의 인기야 어딜 가든 최고잖아?”
당당하게 시인하는 그녀이기에 오히려 더 믿음이 간다. 언제가 장담했던 것처럼, 절대로 속이면서까지 딴 짓을 하지는 않을 여자다. 차라리 대놓고 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으니 헤어지자고 하면 했지.
‘미안해, 은주야. 난 너처럼은 안되네. 타고 나기를 다르게 타고 났나 봐.’
미안함에 그렇게 변명해보았다.
미현과 벼리에다, 이제는 수정에게까지 야릇한 마음이 생기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물론 은주에 대한 사랑이 식은 건 아니었다.
‘네 말처럼 우린 아직 젊으니까...결혼 전까지는 좀 봐주렴, 알았지? 부탁할게..’
하지만, 그러면서도 미현에게 약속했던 ‘모두가 함께 행복해지는 길’ 역시, 여전히 꿈꾸고 있는 걸 보면 자신은 정말 이기적인 놈인 모양이다.
상혁은 은주를 꼭 껴안고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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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혁은 며칠을 망설이다가 수정에게 전화했다. 야릇한 감정 따위를 떠나, 그 후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상우와 결혼하게 된 사연, 그리고 지금은 행복한지 등등, 궁금증이 너무나 컸다.
생각해보면 정말로 특별한 인연이지 않은가? 첫만남에서도 그랬고, 재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후후후~ 여전히 예쁘구나...아니, 더 예뻐졌어..”
“치~ 거짓말~ 나 같은 거 까맣게 잊고 있었을 텐데, 뭐~”
서로의 몸 구석구석뿐만 아니라 온갖 짓들도 다해본 사이라 그런지, 처음의 서먹함도 잠시뿐이었다. 곧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가 오갔다.
“무슨? 난 네가 날 못 알아보는 줄 알았는데?”
그 많은 손님들 중에 잠시 스쳐 지나간 남자였을 뿐 아니냐는 표현을, 대놓고 말할 정도로 미숙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일부러 그러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가슴이 너무 떨려서 아는 척을 못했어요..”
상우란 인간이 잠깐 보여주었던 그 찌질한 모습을 생각할 때, 그녀의 과거를 알고 결혼했을 리가 없다. 그런데 숨겨야만 할 과거흔적과 딱 마주쳤으니 얼마나 놀라고 떨렸을까? 그 심정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오빠를 만나는 상상을 늘 했었거든요? 처음엔 꿈인 줄만 알았어요.”
어라? 이건 뭔가 이야기가 다른 쪽으로 흐르는데?
왠지 부정적인 분위기가 아닌 것에 상혁의 고개가 갸우뚱거려졌다.
“사실 그 생활을 접을 결심을 하게 된 게 오빠 때문이에요...떳떳한 모습으로 만나보고 싶었거든요...”
그쪽으로 뛰어들게 된 건 경제적인 문제가 시초였지만, 나중엔 쉽게 벌어 쉽게 쓰는 생활에 완전히 물들어버려, 처음에 결심했던 악착같이 모아서 하루빨리 벗어나겠다던 의지마저 사라진 상태였다. 그런데 상혁과 그 난리를 피운 뒤, 갑자기 모든 게 허무해졌단다. 그런 곳에서 썩어가고 있는 자신의 청춘이 너무나 서럽고 억울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어렵더라도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보자고 생각했어요..”
그나마 빚만 남아있던 다른 여자들과는 달리, 약간은 모아놓은 게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단칸방을 얻은 후, 몇 개나 겹치기로 알바생활을 하며 검정고시에다 방통대입학까지, 그 모든 걸 1년 만에 해냈다는 것이다.
“와~ 대단한데? 굉장해...”
“헤헤헤~ 내가 고등학교 때까진 그래도 꽤나 공부를 잘 했거든요?”
해맑게 웃는 수정, 그 모습에 상혁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당시에도 도저히 그런 생활을 하는 여자라고 여겨지지 않을 만큼 티가 없더니, 이제는 저 환한 모습에 어울리는 자리를 스스로 되찾은 그녀가 정말 아름답게 보였다.
‘하~ 미치겠네? 난 왜 이런 애들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거지?’
최근에야 깨달은 점이 바로 그거였다. 그는 뭔가 아픔이 느껴지는 여자에게 유독 약했다. 거기다가 꿋꿋하게 버텨내고서 밝은 웃음을 지을 줄 안다면, 마음이 사정없이 끌렸다. 물론 예쁘기까지 하다면야 더 말할 필요도 없고. 당장에만 해도 그 주변에 널리고 널린 게 그 증거들이다. 미현, 은주, 벼리..이 모두가 그런 경우였다. 그리고 지금 또다시 한 여자가 막 추가되는 중이다.
“..그리고 오빠하고는 못다 푼 숙제가 있잖아요? 그래서 꼭 다시 만나보고 싶었어요..”
상혁의 가슴 속에서 ‘쿵~’하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리고 뭔가가 날아와 심장으로 날카롭게 박혀 들었다.
“수, 수정아...”
“은아...강 은아...”
“강...은..아...예쁜 이름이구나..”
드디어 그녀의 진짜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걸 한자한자 되새겨보자 묘한 감동이 느껴졌다. 그런 상혁을 따스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은아가 잔잔한 음성으로 말했다.
“오빠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보통 여자로 대해줬었어요. 처음엔 그냥 ‘참 순진하고 착한 사람이구나’ 하고만 생각했는데..”
상혁이 떠오를 때마다 눈물이 났단다. 그에게 한 여자일 수가 없었던 자신이 너무나 서러워서.
“이제는 오빠 앞에서 여자일 수가 있어요.”
“은아야...하지만...넌 이미...”
상우가 저질렀던 괘씸한 짓을 생각하면 양심이고 뭐고 그냥 사고를 확 치고 싶지만, 그래도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건 상우가 아니라 은아를 위해서였다.
처음 이곳에 올 때만 해도 내심으로 은근히 뭔가를 기대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지금에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그 얼마나 힘든 노력 끝에, 이제야 겨우 남들과 비슷한 출발점에 서게 된 게 아니던가? 자칫 그 모든 걸 물거품으로 만들지도 모르는 짓을 어찌 하랴.
“걱정 마요, 오빠의 발목을 잡을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그 언니랑 정말 잘 어울려요, 보기가 너무 좋았어요..”
자기가 결혼하기 전이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거란다. 그저 ‘못다한 과제’를 풀기 위해, 상혁 앞에서 딱 한번만 여자이고 싶단다.
그는 왠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달콤하면서도 서글프고, 짜릿하면서도 가슴한구석을 아프게 ‘콕콕’ 찔러오는 이 느낌.
“오빠...도와줘요...내가 ‘수정’이를 완전히 잊을 수 있게...”
“아~!!!”
상혁은 그제서야 어렴풋이 뭔가를 알 것도 같았다. 은아의 마음이, 왠지 자신이 한때 은주에게 가졌던 것과 비슷하다는 걸 깨달은 덕분이다. 아련하고 달콤한 추억이자 아픈 상처다. 그걸 넘어서야만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날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의 그처럼 말이다.
“그래...알았어...나도 이젠 ‘수정’이를 떠날 보낼 때가 된 것 같아.”
집착이자 미련일 수도 있고, 그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요식행위라고 치부해도 좋다. 그에게도 과거의 잔재가 남아있었다.
“훗~”
“왜?”
갑자기 실소를 터뜨리는 은아에게 묻자,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때는 진짜 맹~했는데, 이젠 정말 멋있어졌어요...그 언니 때문이겠죠?”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다른 이에게 빼앗겼다는 억울함이 담긴 말투다. 상혁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면서 속삭였다.
“넌...그때나 지금이나 굉장히 아름다워...”
“그만해요, 오빠...”
얼굴이 살짝 붉어지면서 슬그머니 손을 빼는 그녀, 은주와 벼리를 반반씩 섞어놓은 듯한 그 모습에 상혁의 가슴이 마구 뛰었다.
“오빠, 시간이 될 때 다시 연락할게요...이제 가봐야 할 거 같아서..”
“그래, 기다릴게..”
“네...고마워요...”
“나도..”
아직도 묻고 싶은 이야기와 듣고 싶은 사연들이 너무나 많았지만 붙잡을 수는 없었다.
상혁은 진한 아쉬움 속에서 은아와 헤어졌다. 그리고는 천천히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잘하는 짓일까?’
모르겠다. 아까는 그게 옳다고 판단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알 수가 없다. 어쨌던 이미 굳게 약속까지 해버린 상황이었다. 이제는 그저 흘러가는 대로 맡겨놓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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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해?”
뽀얀 젖가슴을 다 드러낸 채, 한 손으로 자지를 만지작거리던 은주가 속삭였다.
두 사람은 주말을 이용해, 은주의 승용차로 바람을 쐬러 나왔다가, 한바탕 뜨겁게 카섹스를 나눈 뒤, 이렇게 여운을 즐기는 참이었다.
상혁은 그냥 문득 생각이 난 척, 가볍게 이야기를 꺼냈다.
“으, 응 그냥..그날 돌잔치에서...”
“응..그런데?”
“상우 말이야...꽤나 능력이 좋구나 싶어서...”
“으, 응~ 사실 나도 많이 놀랐어..”
은주 역시 그렇게나 어리고 예쁜 신부를 얻었다는 사실이 의외였던 모양이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이혼하면서 집까지 뺏겼으니 가진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출난 외모나 좋은 직업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뭐, 그 졸렬한 인품이야 이미 익히 알고 있는 바이고.
“너한테는 미안하지만...그때 좀 엉뚱한 상상을 했었어..”
“무슨 생각이길래 미안한데?”
잠시 망설이던 그는 조심스레 물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참 그렇긴 한데...솔직히 너하고 뭔가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예전에 했었거든? 그날 난리를 치던 게 아무래도 너무 이상해서 말이야..”
그러자 잠시 침묵하던 은주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맞아...일이 있긴 했어...”
“혹시 내가 알아도 될까? 하기 싫은 이야기면 말고...”
“아니야...언젠가는 하려고 했었어...자기 눈치가 이상했던 건 아니까..”
역시 그의 표정은 너무나 잘 읽히는 모양이었다.
“작년 일이야...”
조용조용하게 시작되는 그녀의 이야기, 그걸 듣고 있자니 속에서 천불이 났다. 그때 따귀만 날리며 봐주었던 게 너무나 후회되었다.
종종 있었던 것처럼 셋이서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날따라 폭음을 해댄 상우 때문에, 다른 둘도 덩달아 엄청 취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기억이 노래방에서 폭탄주를 마시던 거였는데, 눈을 뜨니까 혼자 모텔에 누워있었다. 화들짝 놀라 몸을 더듬어보자, 옷을 다 입고는 있었지만 누군가와 섹스를 한 느낌이 분명히 있었다.
그 후 확인해본 결과, 상우가 그녀를 바래다주겠다며 택시에 태워갔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도 그 놈은 전혀 기억이 없다고 잡아뗐다. 하지만 그걸 증명할 방법이 없는지라, 그들과의 만남을 어정쩡하게나마 계속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단다. 대신에 그들과 만날 때는 항상 너무 취하지 않게 조심하고 말이다.
“내 잘못이기도 했으니까...”
“아니, 그건 잘못된 생각이야..실수일 수는 있어도 잘못한 게 절대 아냐..사람의 신뢰를 배신하고 강간한 그 씨발 놈이 개새끼지..”
“자, 자기야..”
거칠게 터져 나온 욕설에 은주가 깜짝 놀라 움찔했다. 상혁은 자신이 순간적으로 너무 흥분했다는 걸 깨닫고서, 곧바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 사고를 치거나 하진 않을 테니까...그런 놈은 상대할 가치도 없어..”
‘대신에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걸 뺏어주마’라고 속으로 다짐했다.
이제는 더 이상 망설임 따위는 없어졌다. 은아가 힘들게 만든 보금자리를 깬다는 사실이 조금 걸리긴 해도, 그런 개자식이라면 차라리 일찌감치 헤어지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다. 은주에게 미련이 남아 그 개지랄을 떤 놈이, 일을 저질러놓고는 잠시의 비난이 두려워 거짓말을 할 정도다. 자기에게 불리하면 언제라도 은아를 버리고도 남는다.
상혁은 그런 내심을 숨기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사실 조금 걱정했어, 그 자식이 엄청 잘해서 너를 꼬신데다가, 그래서 그 여자하고도 결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했거든..후후후~”
그녀의 보지 속으로 손가락을 슬쩍 밀어 넣으면서 속삭였다.
“그 자식이 하고 다니는 꼬락서니를 보면...이 안에서 몇 초도 못 버텼을 거야...다시 서지도 않았을 거고...원래 자지는 주인을 닮거든? 내가 마음이 넓으니까, 자지도 크고 아주 오래 하잖아."
“킥킥~ 고마워...”
너무나 황당한 논리에 은주가 웃었다. 그리고는 다정한 손길로 그의 뺨을 쓰다듬으면서 속삭였다.
“기분 나쁘지 않아?”
“미친 개한테 물렸는데, 덧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면 되지, 기분이 왜 나빠? 그나저나 너도 참 대단하다..”
“뭐가?”
“그 인간을 여전히 오빠라고 부르면서 선배대우를 해주는 걸 보면...”
“불쌍하잖아?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이혼당하고는 사람이 좀 이상해졌어..어쨌던 이제는 정말 잘 살았으면 좋겠어...”
은주의 바람대로 되지 않을 거라는 너무나 잘 알기에 조금 미안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힘든 일을 겪으면서 사람이 변했다지만, 상혁의 생각은 달랐다. 원래의 본성일 거다. 다만 그런 게 드러날 기회가 없었을 뿐.
“올라올래? 아니면 내가?”
“어머? 벌써 또?”
어느새 기력을 회복한 자지를 보면서 눈이 동그래지는 그녀, 상혁은 빙긋이 웃으며 손을 잡아 끌었다.
“흐흐흐~ 내가 그랬잖아? 내 자지는 대인배라고...밖에서 해보자..”
“앙~ 자기야~”
은주가 뜨거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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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대출해온 책들을 옆에다 쌓아놓고서 컴퓨터 앞에 앉아 씨름하기를 몇 시간, 마침내 엔터키를 누르고서 파일을 저장하는 것으로 1학기의 마지막 리포트를 끝낸 상혁은, 뻑뻑하게 아려오는 눈을 비비고는 기지개를 쭉~ 켰다.
“휴우~~ 정말 정신 없이 지나갔구나...”
복학준비를 위해 하숙집을 정하던 그때로부터 반년, 참으로 많은 일들이 벌어졌었다. 그의 인생을 확 바꿔놓은 이 하숙집은, 하늘이 내려준 축복이자 행운의 선물이었다.
그건 단순히 염복(艶福)이 터졌다는 정도로 쉽게 말해버릴 성질의 것이 아니다. 미현, 은주 그리고 벼리, 이 세 여자를 통해 자기자신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가짐으로써 얻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자신감, 배려심, 포용력, 넓어진 시각 등등, 인간이 가져야 할 덕목들을 자연스럽게 배양하게 되었다는 점이야말로, 그가 앞으로 세상을 살아나가는데 있어서 가장 소중한 자산이 될 게 분명했다.
“후후후~ 남들은 일부러 돈까지 줘가면서 지루하게 배우는데...”
그랬다. 비싼 수강료를 내가면서까지 유명강사의 강연을 들으러 다니지 않는가? 거기에 비하면야 연인들과 짜릿하고 달콤한 사랑을 속삭이면서 그런 소득을 얻었으니, 이거야말로 임도 보고 뽕도 딴 격이었다.
“그나저나 은아는 시간내기가 많이 힘든가 본데..”
상우란 놈은 그 찌질한 성격에 딱 맞게, 자신의 새 신부를 챙기는데, 아니, 감시한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할 거다, 여념이 없었다. 수시로 전화를 걸어 어딘지 체크하고, 일이 끝나기가 무섭게 집으로 쪼르르~ 쫓아온다니 말이다. 심지어 그녀가 다니고 있는 방통대마저도 달갑지 않게 생각해, 구태여 꼭 졸업을 해야 하냐는 식의 뉘앙스를 풍긴다나? 그간 전화통화로 간간히 전해들은 그런 사실들이, ‘은아 구출작전’이라는 상혁의 결심을 더욱더 굳어지게 만들었다.
“당장에야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별로 없겠지만..미현이 누나라면....”
미현과 은아를 짝지어주면 뭔가 좋은 해결책이 나오지 않을까 했다. 사실 미현도 결국엔 이혼이 정답이 아닌가 하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런 두 여자가 똘똘 뭉치면 꽤나 상성이 잘 맞을 것 같았다. 하다못해 작은 가게를 하더라도 충분히 잘 꾸려나가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물론 거기에는 자신의 여자들 모두와 함께 살고 싶다는 욕심이 깃들어있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는다.
“응?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됐었네?”
밤 11시가 다되어있었다. 지금쯤이면 벼리가 자신의 품에서 헤실헤실 미소를 짓고 있어야 정상이었다. 슬슬 걱정이 들기 시작한 상혁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으, 응?”
혹시나 싶어 벼리의 방으로 가봤지만 불이 꺼진 채 잠겨있어 그냥 돌아오려던 상혁은, 은주의 방문 앞에서 문득 멈추었다.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 그 방에 있을 사람은 자기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미현도 간만에 귀가한 남편과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으니까.
‘똑~ 똑~’
노크를 하고는 잠깐 멈추었다가 열었다.
“어?”
뜻밖에도 벼리가 그곳에 있는 게 아닌가? 하지만 빨리 나가라는 손짓을 하는 은주에, 그냥 주춤주춤 물러나 자신의 방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서, 설마? 아니겠지...’
심장이 콩닥콩닥 아주 빠르게 뛰고 있었다. 조금 전에 봤던 장면 때문이다.
침대 위에서 꼭 껴안고 있던 두 사람, 은주의 가슴에다 얼굴을 푹 파묻은 벼리의 목덜미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던 것이다. 뭔가 금단적인 상상을 하게 만드는, 굉장히 야릇한 그 분위기에 상혁은 당황스러웠다.
‘끄응~’
아니, 흥분을 한 거다, 자지가 빳빳하게 선 걸 보면. 그러면서 순간적으로 스치는 생각.
‘어쩌면 손쉽게 해결책을 찾은 건지도 모른다는 얘기잖아?’
일단 은주나 벼리는 동성애자가 아니었다. 사랑을 나눌 땐 물바다를 이룰 만큼 아주 뜨겁게 달아오르는 여자들이다. 그렇다면 양성애자? 그건 가능성이 있었다. 만약에 예전부터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면, 벼리에게 양보했던 은주의 태도가 설명되었다. 다시 말해 그가 고민할 필요도 없이, 두 여자는 이미 한 남자를 공유하기로 처음부터 합의가 되어있었다는 얘기다.
‘흐흐흐~ 이거 왠 횡재냐?’
은주가 결혼하면 절대 어림도 없니 어쩌니 했던 것도 다 쇼라는 소리다. 딱히 여자들간의 동성애에 거부감을 느끼진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자신도 동참하는 경우에 한해서다. 그건 동성애라기보다는 3P이니까.
‘미현이 누나는 이미 의사표시를 한 거나 마찬가지고..’
은주와 벼리를 잘 설득해보라는 말로, 자신은 언제라도 좋다는 뜻을 은근슬쩍 밝혔던 미현이다. 상혁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실실 나왔다. 입가로 침이 줄줄 흘러내릴 듯하다.
“크크크~ 요 깜직한 것들~ 그러면 그렇다고 진작에 말해주지~”
그때였다. 느닷없이 들려온 은주의 음성.
“뭘 말해?”
“허엇~!”
야리꾸리한 상상에 너무 빠져있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와 뒤에 설 때까지도 전혀 기척을 못 느꼈으니. 상혁은 ‘쿵쿵’ 요란하게 뛰는 가슴을 겨우 달래며 입을 열었다.
“아, 아니..그, 그냥...벼리는?”
“응, 자기 방으로 갔어...근데...”
“왜, 왜 그러는데?”
코앞에다 얼굴을 바짝 들이미는 은주에, 그는 눈길을 슬쩍 피했다.
“빨랑 불어...”
“뭐를?”
“깜찍한 것들이 진작에 말해줬어야 하는 게 뭔지!”
“헉~!!”
잊고 있었다. 자신은 얼굴에다 게시판을 매달고 다닌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가 얼마나 눈치가 빠른지도. 게다가 혼자 중얼거렸던 그 소리를 이미 다 들은 게 아닌가?
상혁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하지만 그 순간 뺨을 두 손으로 꽉 붙들면서 눈을 맞추어오는 은주에 맥이 쫙 빠졌다. 마치 뱀 앞에 선 개구리처럼.
“이것 보세요, 서방님~~”
헉~!! 도저히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은주가 저렇게 ‘서방님’ 소리까지 서비스해가면서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다는 건, 맘에 찰만한 대답이 나오기 전까지는 절대로 놓아주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적당히 둘러대면 되지 않냐고? 미리 생각을 해두었다면 몰라도 어림없다. 벼리 정도라면 통할까, 은주나 미현은 그보다도 한참은 더 윗길의 고수들이었다.
그러면 사실대로 다 털어놓으면 될 걸, 왜 그렇게 쩔쩔매냐고 답답해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다. 하지만, 사실은 상혁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의 상상은 그저 희망사항일 뿐, 실제로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걸 말이다.
“자~ 자~ 이제 들어볼까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길래, 이렇게 자지를 세우고 있었는지..”
“그, 그게....끙~”
자포자기한 상태로 두 눈을 질끈 감은 상혁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조금씩 실토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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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효~”
은주에게서 긴 한숨이 흘러나오는 순간, 상혁의 몸이 움찔했다.
“하아~”
또다시 들려오는 소리에 그의 어깨는 더욱더 움츠러들었다.
“정말로 벼리랑 콱~ 사귀어버려? 이런 황당한 남자는 확 차버리고...”
“헉~!!! 무, 무슨 소리야!!”
“시끄럿~!! 한대 더 맞고 싶어?”
“아, 아니..”
간만에 보는 저 카리스마 넘치는 터프한 모습, 은주가 번쩍 치켜드는 손에 그는 화들짝 놀라 자신의 뺨을 감싸며 물러섰다. 아직도 화끈거리는 왼쪽 볼에서 열기가 느껴진다.
‘크흑~ 내가 미쳤지, 그래도 뺨 한대로 끝난 게 다행인가?’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다음,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은주가 느닷없이 뺨을 날린 거였다. 순간 눈앞이 번쩍했던 상혁은 뒤늦게 울컥했지만, 눈물마저 글썽이는 그녀의 모습에 그만 기가 팍 죽고 말았다. 자신은 반 장난 삼아 가볍게 꺼낸 소리였건만, 그녀에겐 꽤나 상처가 되었던 모양이다.
그나마 지금은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슬렀기에 저런 태도를 취하는 거다.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듣고 벼리한테 가봐...”
“으, 응? 벼리? 무슨 일이 있어?”
“행여나 벼리한테도 엉뚱한 소리는 말고...”
상혁은 은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가 화를 내면서 따귀를 날릴 만도 했다.
“미안해, 많이 아팠지? 쪽~”
“아니야...내가 눈치도 없이 헛소리를 한 건데...”
“빨리 가서 잘 달래줘...그리고 나중에 나한테 들렀다 가, 할 얘기가 있으니까...”
“응, 사랑해...”
“나도..”
참 좋은 여자다.
상혁은 그녀에게 부드럽게 키스를 하고서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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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을 두드린 후 조심스레 열고 들어갔지만 잠잠하기만 했다. 침대 위를 보자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있었다. 아직은 에어컨을 돌리지 않은 탓에, 저렇게 있으면 꽤나 더울 게 분명했다. 땀띠라도 나서 고생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어, 선풍기를 켜고는 살며시 다가가 앉았다.
“벼리야, 자니?”
분명 이불 속의 실루엣이 움찔하건만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휴~ 이 오빠는 우리 벼리의 예쁜 얼굴을 봐야만 잠이 오는데..할 수 없네? 오늘밤은 그냥 뜬눈으로 새야겠구나.”
“..오빠...”
그제서야 벼리의 음성이 가늘게 들려왔다. 상혁은 재빨리 곁으로 누웠다.
“응, 아직 안 잤구나. 덥지 않아?”
“괘, 괜찮아..”
이불을 슬쩍 끌어내리자 당황해 하며 몸을 돌린다.
“자~ 자~ 얼굴을 보여줘야지? 왜? 예쁜 얼굴을 오빠한테 보여주기 싫어?”
“..그게 아니라...”
상혁의 손길에 어쩔 수 없이 다시 돌아눕는 벼리의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그걸 보자 가슴이 찡해오면서 속에서 불길이 치밀었다. 하지만 그걸 애써 감추며, 땀방울이 촉촉히 맺힌 그녀의 예쁜 이마를 닦아주었다.
“에고~ 에고~ 안 되겠다. 이러다가 땀띠 나겠어, 잠시만 기다려..”
상혁은 화장실로 달려가 차가운 물에다 수건을 적셔서 돌아왔다. 그리고는 그녀의 얼굴과 손을 닦아나갔다.
“자~ 이제는 웃옷을 벗고...”
“으, 응...”
고분고분 착하게 말을 듣는 벼리, 이 예쁜 아이를 울린 녀석에게 화가 부글부글 치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여리고 뽀얀 상체가 드러나자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가늘게 솟아오른 쇄골과 어깨를 닦고는, 봉긋한 젖가슴을 감싼 브래지어의 후크에다 손을 댔다. 그걸 가볍게 푸는 순간 탱글탱글한 살덩이가 튀어나왔다. 촉촉하게 땀이 맺힌 새하얀 젖가슴과 그 한가운데서 수줍게 떨고 있는 분홍색 꼭지가 너무나 강한 유혹을 던져주었다.
늘 시간에 쫓기는 생활이기에 잠이 부족한 그녀를 생각해, 가급적이면 평일에는 사랑을 나누지 않는 편이었지만, 지금은 도저히 참기가 힘들었다. 상혁은 자신도 모르게 젖가슴으로 입을 가져갔다.
“아앙~ 오빠~”
말캉한 살점을 가득 빨아들여 혀끝으로 젖꼭지를 살살 굴리자, 벼리가 얕은 신음을 내뱉으며 머리를 꽉 껴안아왔다. 희미하게 맡아지는 땀냄새가 왠지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손을 내려 치마 속을 더듬었다.
“오빠...”
“응...”
꿉꿉하게 젖은 팬티의 중앙이 쏙 빨려 들면서, 손끝에다 따스한 온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하고 싶어...”
“그래, 일단은 입으로 먼저 해줄까?”
“으, 응..”
이제는 보지를 빨아주지 않으면 서운해할 정도로 발전한 벼리였다. 아직은 자기 입으로 먼저 ‘오빠, 보지를 빨아줘’라고 말할 만큼 대담해지진 못했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팬티를 벗기자마자 가랑이를 넓게 벌리면서 그의 뒤통수를 끌어당기는 건 서슴없이 해낸다.
정갈하게만 느껴지는 벌어진 보지 사이에서 말간 액체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상혁은 그곳으로 혀를 내밀어 부드럽게 핥아 올렸다.
“앙~ 오빠~”
땀이 스며들었는지 짭짤한 맛이 났다. 흐느적흐느적 미끌미끌하게 혀끝으로 달라붙어오는 보지가, 마치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조갯살처럼 아주 싱싱하게 느껴졌다. 입 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끈적한 과즙, 상혁은 혀의 움직임을 점점 더 빨리 하며 그걸 삼켜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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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일이었다. 무슨 만병통치약처럼 남자의 정액에도 그런 효과가 있는 걸까? 아니면 섹스를 통해 온몸의 혈류가 빨라지면서 자연스럽게 치유가 된 건지도 모르지만, 뜨겁게 타올랐던 벼리의 눈에서는 어느새 붓기가 사라져있었다.
상혁은 아직도 은은한 열기가 전해지는 보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제는 기분이 나아졌어?”
“응~ 오빠~”
“이건 누구 거라고?”
그러자 얼굴을 살짝 붉힌 벼리가 그의 귀에다 속삭였다.
“오빠 거...오빠가 제일 좋아하는 벼리의 예쁜 보지..”
“후후후~ 그래, 그래...맞아..”
틈만 나면 주입을 시키듯이 읊어댔더니, 이제는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이 나온다. 귀엽고 천진해 보이는 저 얼굴로 음탕한 말을 내뱉는 그녀가 너무나 아찔했다.
“사랑하는 우리 벼리를 울린 나쁜 녀석을 내가 한번 만나볼게.”
“오, 오빠?”
“후후후~ 괜찮아, 아무 걱정 말고..내일 너희 학원 앞으로 몇 시에 가면 그 녀석을 볼 수 있니?”
“우웅~ 그건...”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벼리가, 부드럽게 애무하는 그의 손길에 용기가 났는지 소곤소곤 말해주었다.
‘그것 참...왜 이리 거는 놈들이 많아? 하기야 다들 너무 예쁘니까 그렇겠지만...’
벼리가 은주에게 울며 털어놓았던 사연은 어떻게 보면 별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일찌감치 미리미리 단속을 해야 후유증이 없는 법이다.
‘완전히 없는 말을 지어냈던 건 아닌 모양이네?’
처음 관계를 가질 때 벼리가 했던 거짓말, 학원오빠의 존재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아마 계속 쫓아다녔던 것 같다. 그랬기에 그때 그 녀석을 언급했고, 오늘의 일 또한 벌어졌을 거다.
‘많아 봐야 벼리보다 한두 살이겠지?’
오늘 학원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려는 벼리에게, 갑자기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붙들어놓고는 느닷없이 키스를 했단다. 그 때문에 상혁의 방엘 들리지도 못하고서, 연적이기도 한 은주에게 털어놓으며 펑펑 울었던 그녀가, 안쓰러우면서도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어쨌던 그 녀석은 자신이 직접 만나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열정에 불타오른 치기인지, 아니면 상우처럼 이상하게 꼬인 놈인지 판단이 설 테니 말이다. 물론 그 결과에 따라서 대응방법은 완전히 다를 거다. 아무리 폭력을 싫어하는 그라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게 가장 확실하고도 빠르게 효과를 발휘한다는 걸 잘 안다.
그가 조금은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는 이유는 벼리가 처한 상황 때문이었다. 이제부터가 정말로 중요한 시기였다. 그런데 주변에서 그런 장애요소가 얼쩡거린다면, 자칫 올해도 대입에 실패하고 말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 섰다~”
“훗~”
잠시 생각에 잠긴 동안, 밑으로 기어 내려가 자지를 빨던 벼리에게서 탄성이 터져 나왔을 때, 상혁은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야하다 못해 음란하기까지 한 짓을 해놓고는, 저렇게나 순수하고 맑은 말투라니! 여자와 소녀가 뒤섞인 듯한 저런 모습이 굉장히 색정적으로 느껴진다.
“또 하고 싶어?”
“응~ 오빠~ 해줘~”
“내일 힘들지 않겠어?”
“앙~ 괜찮으니까 어서~”
어린아이처럼 보채는 그녀가 정말로 사랑스럽다.
“후후후~ 그래, 그래..알았으니까 이번에 네가 위에서 해볼래?”
“사랑해~”
“나도 사랑해, 벼리야~”
보드랍고 따스한 여체가 와락 안겨왔다. 그리고는 작은 손을 내려 자지를 잡더니, 축축하고 뜨거운 보지로 이끌었다. 상혁은 이 아름다운 요정에게 한없이 매료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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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이나 사랑을 나눈 탓에 은주의 방에 들렀을 때는 이미 새벽이었다.
“이제 왔어? 오래 걸렸네?”
“으, 응...많이 기다렸지? 미안해..”
“난 괜찮으니까 이리 들어와..”
이만큼이나 늦었다는 게 의미하는 건 뻔했기에 머뭇거리는 상혁에게, 은주가 미소와 함께 이불을 들쳐주었다. 그리고는 옆으로 들어와 누운 그의 팔을 당겨 베고서, 가슴팍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벼리는 어때?”
“응..이젠 괜찮아졌어. 내일 내가 그 녀석을 만나보기로 했고..”
“훗~ 상우 오빠한테처럼 하려고?”
“만나봐야 알겠지...말이 통하는 녀석이라면 구태여 그럴 필요까진 없을 테니까..”
“안심이네? 자기를 믿어..”
그 말에 스민 짙은 신뢰감에 가슴이 뿌듯해지면서도 한편으론 굉장히 미안했다. 이런 여자를 두고서도 자꾸 딴짓만 해대는 자신이기에, 어쩌면 그녀의 넓은 마음과 믿음을 이용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자길 보자고 한 건...이젠 이야기를 해줄 때가 된 것 같아서야...”
“아~!”
‘오빠’라는 존재와 얽힌 사연일 게 분명했다. 마음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까 그가 했던 황당한 오해가 그 결심을 굳게 만들었을 거다. 상혁은 긴장감에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어깨를 꽉 껴안았다.
“그러니까 내가 고3...지금의 벼리보다 한 살이 적을 때였어...”
은주의 나지막한 음성이 마치 고해성사라도 하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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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의 가슴은 두근두근 정신 없이 뛰고 있었다. 짝사랑하고 있던 사람과 함께 이렇게 있다니!
그녀가 다니는 교회의 오빠였다. 뽀얀 얼굴과 금테 안경이 잘 어울리는 다정하고도 지적인 눈매, 그리고 부드러운 음성과 우아한 몸짓이 늘 설레게 만들었었다. 물론 그런 만큼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아, 언제나 먼 발치에서 훔쳐볼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었다. 그와 야한 짓을 하는 꿈을 꾸고서 아랫도리를 적신 일이나, 그를 떠올리며 자위를 했던 일 따위는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은주야, 뭐해? 안 마시고..”
“으, 응...언니..”
단 둘만이 아닌 게 아쉬웠지만, 은주는 막내언니의 말에 술잔을 들었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쓰고도 뜨거운 느낌, 처음으로 먹어보는 소주의 맛이 너무나 싫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어지러워...’
혼자만이 미성년자라는 걸 티 내고 싶지가 않아 주는 술을 겁도 없이 받아 마신 탓에, 벌써부터 정신이 몽롱하고 눈이 감겨왔지만 억지로 버텼다.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있는 이런 행운을 놓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예정에 없던 여름휴가였다. 그런데 막내언니가 교회오빠들과 바캉스를 가야겠다고 박박 우기자, 결국 부모님이 은주를 같이 딸려 보내는 조건으로 허락한 거였다. 아마 공부에 지친 막내 딸을 잠시 쉬게 해주려는 배려와 함께, 남자들 틈에 셋째 딸만 덜렁 따라 보내기에는 안심이 안 되었을 거다. 어쨌던 그 일행 속에 자신의 짝사랑이 끼어있다는 걸 알게 된 은주가, 마음 속으로 만세를 부른 건 당연했다.
“아이~ 참~ 저 계집애는 왜 따라와서 말썽이야?”
“야~ 야~ 그만해, 동생한테 자꾸 왜 그래?”
잠시 졸았던 모양이다. 막내언니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와 함께 만류하는 ‘그’의 음성이 들려왔다.
‘언니는 내가 그렇게도 미운가?’
뛰어난 외모에다 공부까지 잘해서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건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도 늘 예쁨을 받고 자란 은주와는 달리, 질이 좋지 않은 친구들과 어울려 온갖 말썽을 다 피우고 다닌 막내언니는 동생을 늘 미워했었다. 아니, 그건 질투라고 해야 옳을 거다. 그나마 어렵게라도 대학에 들어간 이후로는 좀 잠잠하다 싶더니 여전히 그 미움을 간직하고 있었던가 보았다.
‘그래도 오빠가 내 편을 들어주니까 너무 행복해..’
그때 자신의 어깨를 감싸는 손길에 겨우 실눈을 뜨자, 그녀의 심장은 터질 것처럼 돼버렸다.
“자~ 자~ 조심해서 일어나...”
“네...오빠...”
바로 그였다. 부축을 받으며 일어선 은주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어질어질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따스한 그의 품이 너무나 황홀했다. 게다가 등을 가로질러 안은 그의 손이 젖가슴언저리를 건드리는 느낌에, 젖꼭지가 꼿꼿하게 서고 아랫도리의 깊은 곳이 축축하게 젖어오기까지 했다.
“한숨 자고 나면 괜찮을 거야..”
“고마워요...”
잠자리를 챙겨주고 난 뒤에 멀어지는 그를 붙잡고 싶었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저 고맙다는 한마디뿐이었다. 은주는 그런 자신의 용기 없음을 한탄하며 깜빡 잠이 들었다.
“아악~”
아랫도리가 떨어져나가는 것 같은 고통에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자 입을 막아오는 손, 그제서야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깨달은 그녀. 반사적으로 뿌리치려다가 멈추었다.
‘그래, 오빠야...’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고는 그렇게 생각했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몸 속을 파고드는 딱딱한 이물질, 참기 힘든 고통에 저절로 다물어지려는 허벅지를 억지로 막고 있는 그때, 저쪽에서 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아흑~ 더~ 더~ 아앙~”
막내언니의 음성이었다. 깜짝 놀란 은주가 눈을 뜨고 고개를 돌린 순간, 눈앞이 아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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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랑 오빠가 하고 있었어...”
“헉~!! 그, 그러면?”
“맞아...내 위에 있던 건...다른 사람이었어..”
그랬구나, 그래서 벼리에게 양보를 했었구나.
상혁은 그제서야 은주의 심정이 이해 갔다. 벼리만은 진짜 사랑하는 사람과 첫경험을 하기 바랬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놀라운 고백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나중에 두 사람이 자리를 바꿨어...오빠가 내 위로 올라타고, 내 위에 있던 사람은 언니한테로..”
“뭐, 뭐야?”
상혁의 경악에 은주가 씁쓸한 미소와 함께 설명했다. 그 모든 게 그녀의 막내언니가 꾸민 짓이란다. 열등감과 질투심으로 늘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곤 했던 동생에게, 그렇게 잔인한 복수를 저지른 것이다. 그녀는 이미 동생이 그 남자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까지 모두 알고 있었단다.
“그래서...대학생이 되자마자 나와서 살았어...언니하고는 도저히 한집에서 살기가 싫었거든?”
“은주야...”
그녀를 꽉 껴안았다. 벼리에게 그렇게까지 잘 해주려는 게 바로 그런 이유였던 것이다. 다정한 언니를 둔 대리만족. 상혁의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