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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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숭생숭, 아니, 뒤숭숭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거다. 뒤척뒤척하다 까무룩 잠이 든 상혁으로서는, ‘아침식사~’하고 문을 두드리는 누님에게, 비몽사몽간에 ‘야~! 내무반으로 가져와!’라고 외치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었다.

억지로 일어나 비틀비틀 화장실로 향해서는, 그 앞에서 손을 뻗는 순간 문이 스르르 열렸다.

“안녕하세요~?”

“으, 응~ 그래~”

옆으로 비켜서더니 아주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누군가에, 눈을 반쯤 감은 채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서 안으로 들어서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 누구지?”

처음 듣는 차분하고 고운 음색에다가 욕실 안을 떠도는 이 향긋한 방향이라니! 그렇다면?

“크흑~ 망했다.”

20살 꽃띠, 재수생, 미술학도...왠지 야릇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단어들, 아주 귀엽고 예쁜 종달새 한 마리가 ‘푸드득~’ 하고 날아가버리는 날갯짓소리가 들렸다. 듬직한 복학생오빠로서의 인상을 강하게 심어주리라 내심 잔뜩 벼르고 있었는데!

어째서 여자들과 마주치기만 하면 꼭 마이너스가 될 짓만 골라서 하게 되는 걸까? 그것도 첫 대면에서 말이다. 하다못해 얼굴이라도 봤으면 조금이나마 덜 억울하기라도 할 텐데, 마치 안개가 스러지듯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쳇~ 이 집 여자들은 모두 무공고수라도 되나? 기척이라도 좀 내지..”

괜히 툴툴거리며 화풀이라도 하듯이 찬물에다 얼굴을 푹 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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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정도의 실수는 병가상사(兵家常事)라 했다. 다시 전의를 다진 상혁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아주 깔끔하게 세팅(?)을 마친 후,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모두들 안녕히 주무셨어요? 하하하~ 어~?”

환한 미소와 함께 짐짓 여유 있게 아침인사를 하던 상혁은 멈칫하고 말았다. 식탁의 인원은 단 3명, 그것도 새로운 얼굴이라고는 늙수그레한 아저씨뿐이었던 것이다.

“어서 앉아.”

“네, 누님...”

자리에 앉자마자 누님이 인사를 시켜주었다.

“여기가 내가 말했던 수한 씨.”

“안녕하세요, 형님. ‘박 상혁’이라고 합니다. 그냥 막내 동생처럼 편하게 생각해주세요~”

첫눈에 정감이 갔다. 왜냐고? 아주, 아주 편안한 외모 때문이다.

35살이라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마흔이라고 해도 충분히 통할 정도로 팍삭 삭은 얼굴에다, 저 뱃살은 또 어떻고, 최소한 5개월쯤?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의기소침했던 기분이 싹~ 사라지면서, 자신이 영화배우라도 된 듯 우쭐한 기분을 팍팍 심어준다.

그래서 상혁은 깍듯한 모습으로 이렇게 친근감을 표하는 중이었다.

“하하하~ 그래. 여자들만 있어서 좀 심심했는데...좋아~, 오늘 저녁에 남자끼리 축하주 한잔 찐하게 어때?”

오오옷~! 그 말에 호감수치가 급상승한다.

“아이쿠~ 황공무지로소이다~~ 행님~ 충성을 맹세합니다~”

“크크크~ 제수씨, 아주 재미있는 동생이 들어왔는걸?”

“호호호~ 너무 귀엽죠?”

상혁의 너스레에 누님과 형님, 아저씨에서 곧바로 신분상승이 된, 이 굉장히 재미있어했다.

“근데 은주 누나...”

“응, 왜?”

“왜 걔는 안보여? 아까 분명히 마주쳤었는데...”

“벼리?”

“이름이 벼리야?”

“응, 성은 한씨고, 그래서 한 벼리...”

크으~ 이름도 너무, 너무 예쁘다. 귓가에 착착 감겨오는 것만 같다.

“벌써 나갔지, 원래부터 제일 먼저 나가는 애야.”

맥이 쭉 빠졌다. 이래서는 반짝반짝 윤이 나게 치장한 보람이 없지 않는가?

“근데 너 재주도 좋더라? 어떻게 벌써 그렇게 친해졌어?”

상혁은 눈이 번쩍 뜨이면서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마구 뛰었다. 생선에 홀린 고양이마냥 은주의 발등에다 머리라도 비비적거릴 기세로 물었다.

“친해지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누나~”

“아까 밥 먹을 때 네 이야기를 꺼내니까, 안 그래도 좀 전에 인사를 했다면서 막 웃던데? 원래 걔가 거의 안 웃는 애거든..”

‘막 웃던데~’라는 말이 상혁의 머리 속을 메아리 치면서, 잠깐 붕~ 떴던 기분이 한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잠을 설친 탓에 푸석푸석한 얼굴에다, 수세미같이 엉망인 머리카락, 게다가 눈곱까지 덕지덕지 붙인 상태였다. 그리고 눈은 뜨는 둥 마는 둥 거의 시체처럼 흐느적거렸고. 가만, 무심결에 인사를 받을 때 아가리를 있는 대로 쩍~ 벌리고서 하품을 하고 있었던 것도 같은데......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가관이었다. 그런데 은주는 다르게 상상한 모양이다.

“어이~ 숫총각~!”

“컥~!!”

은주의 느닷없는 공격에, 상혁은 들이마시던 숨이 목구멍에 턱 걸렸다.

“어린애를 노리는 건, 범죄라는 생각 안 들어?”

“노, 노리다니 무슨?”

상혁은 가슴이 뜨끔해졌지만 강하게 부인했다.

“호오~ 너 어디 취직했어? 출근해?”

“아니...”

“그러면 도서관에라도 가는 거야?”

“..아닌...데...”

“그런데 왜 이렇게 빤질빤질하게 쫙~ 빼 입고 나온 건데?”

상혁은 목까지 벌개져 고개를 숙였다.

‘내 인생에 당췌 도움이 안돼...이건 정말 악연이야, 악연...’

물론 민망한 겉모습을 그저 연기할 뿐, 언감생심 속내를 드러낼 수야 있나?

그때 이어지는 뜻밖의 멘트.

“요즘은 동갑내기나 연상의 여자가 대세인 거 몰라? 차라리 나 정도가 맞지..”

방금 전까지 악연이네 뭐네 하면서, 마음 속으로 마구 씹어대던 기억이 순식간에 저 멀리 훌훌~ 날아가버렸다.

‘지금 이건 분명 나한테 마음이 있다는 뜻이 맞지?’

처음 봤을 때의 충격적이면서도 짜릿했던 그 느낌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지금이라면 은주의 보지에다 그냥 넣는 순간, 그대로 싸버릴 게 분명하다. 왠지 그녀에게만큼은 ‘낯가림’ 따위가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을 것 같았다.

여태까지 늘 여자 앞에서 버벅댔지만, 그것도 마음이 끌리면 끌릴수록 더, 지금만큼은 용기를 내보고 싶었다. 또다시 후회와 미련을 반복하기는 싫으니까.

상혁이 마른 침을 삼키며 입을 떼려는 그때.

“..뭐...물론 나야 남친이 있으니까 어림도 없는 이야기지만....”

순간 입에서 튀어나오려는 욕을 겨우 삼켰다.

악연?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이건 웬수다, 웬수.

‘망할 년, 썩을 년, 이 벼락맞아 죽을 계집애...’

사람을 들었다 놨다, 아주 장난감 가지고 놀듯이 하다니!

소리가 나지 않게 이빨을 갈아붙이며, 속으로 욕을 한 바가지 퍼부었다. 혼자 착각하다가 배신감을 느낀 아전인수격인 자신의 잘못은, 물론, 당연히, 전혀 생각지 않고서. 사실 그런 것까지 생각할 주변머리도 없거니와, 속이 좁고 배배 꼬인 걸로야 이미 예전에 일찌감치 증명되지 않았던가? ‘헌 숫총각’ 사건으로 말이다.

식식거리던 상혁은, 분풀이라도 하듯이 밥을 푹푹 떠서는, 간만에 아주 전투적인 모습으로 마구 쑤셔 넣었다.

“컥~ 컥~”

“어멋~! 얘, 얘~ 어서 물 좀 마셔. 어쩐지 너무 급하게 먹더라니?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지, 쯧쯧~”

밥알이 목구멍에 걸려 켁켁거리자, 은주가 호들갑을 떨면서 물컵을 들이밀었다.

제발 입만 다물어도 덜 하련만, 얄미운 소리를 꼭 한마디씩 갖다 붙이는 저 못된 심보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런데 그때 상혁은 입술을 벌리고서 들어오는 차가운 물에 갑자기 뭔가가 떠올랐다.

‘자, 잠깐~ 이건 어제랑 비슷...’

그제서야 자신의 입에다 소주를 무식하게 들이부어서 한바탕 곤욕을 치르게 만들었던, 은주의 그 무지막지함을 기억해냈지만 늦은 후였다. 이미 음식이 입 안을 가득 채우고 목구멍까지 막아 섰는데, 저렇게 불이라도 끄듯이 들이붓는 물들이 어디로 가겠는가?

“푸학~ 케엑~ 켁~ 쿨럭~ 쿨럭~”

“꺄악~”

“으악~!!!”

턱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것까지야 볼썽사나워도 대충 넘길 수가 있다지만, 비강을 타고 역류한 물은 어쩌란 말인가?

콧속이 찡해지면서 눈물과 함께 아주 커다란 재채기가 터졌다. 그리고 당연한 결과로 식탁 위를 가로지르며 산탄처럼 흩어지는 저 무수한 밥알들.

상혁은 아득한 절망감과 함께 펑펑 울고 싶어졌다. 시한폭탄 같은 이 여자는 무조건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라는 걸, 정말 뼈저리게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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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식탁에서 화끈하게 신고식을 받은 수한은 연륜(?)이 느껴지는 모습답게, 곧 ‘허허~’ 웃으면서 침착하게 옷을 새로 갈아입고 출근하는 여유를 보여, 존경심이 우러나게 만들었다. 물론 아침식사는 거기서 끝이었지만.

눈꼬리가 사납게 올라가 상혁을 순간적으로 바짝 쫄게 만든 누님 역시, 어이없는 실소를 흘리는 것으로 무난히 넘어가주었다.

다만 사건의 원흉이자 옆자리였기에 상대적으로 피해가 거의 없었던 은주가 오히려 방방 뜨면서 온갖 잔소리를 퍼부어대, 역시나 서로 궁합(?)이 맞지 않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게 했다.

“누님, 죄송해요...”

“뭐가?”

두 사람이 출근한 후, 엉망이 된 식탁을 치우는 누님을 돕던 상혁이 사과했다.

“누님이 애써 만든 음식들을 망쳐놨잖아요...저도 그 정도는 알아요. 음식을 준비한 사람이 제일 즐거운 순간이 다른 사람들이 맛있게 먹어줄 때라는 걸요. 그리고 이렇게 버리게 되면 얼마나 속이 상한지도 잘 알고요. 군대서 생활하다 보면 그런 건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거든요.”

그저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심으로 미안했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이 다 먹어 치우고 싶을 정도로. 그러나 아무리 자기 입에서 나온 거라지만, 상혁은 도저히 그러지 못할 것 같았다. 상상만 해도 토가 쏠리는 기분이니.

“호호호~ 참~ 신기하네?”

“네?”

“자~ 우리야 급한 게 없는 사람들이니까, 이건 천천히 치우고 커피나 한잔할까?”

상혁을 끌어다 앉히고서 커피 두 잔을 가져왔다.

“자~”

“고마워요, 누님...”

이런 표현이 꽤나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찻잔을 ‘호호~’ 불며 커피를 홀짝거리는 그녀의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상혁은 왠지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물었다.

“근데..좀 전에 저보고 신기하다고 했던 말은 뭐에요?”

“아~ 그거?”

“네...”

“뭐, 숫총각이라니까 더 이상은 물을 필요도 없겠고, 그냥 사귀던 여자친구도 전혀 없었어? 그러니까 같이 영화도 보고 가끔씩은 뽀뽀도 하고 말이야...”

상혁은 얼굴이 벌개졌다. 자신의 별명인 ‘헌 숫총각’이란 단어 안에 모든 게 들어있었다. 흔히 말하는 연애라는 행위에 해당되는 건, 그날 수정과 했던 것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있다고 하기에도 그렇고, 전혀 경험이 없다고 대답하기에도 왠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찜찜했던 것이다.

“그냥 어쩌다 비슷하게 그런 적은 딱 한번 있지만...여자친구는 아니었어요...”

“흐음~”

애매모호하게 대답하자 그녀는 그냥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미팅이나 소개팅 같은 건 해봤을 거 아냐? 상혁이 정도라면 꽤나 인기가 있었을 텐데?”

“에? 제가요? 에이~ 무슨...”

“왜 그렇게 생각하지?”

“솔직히 저희 과 남학생들이 여대생들 사이에서 미팅선호도 1위로 꼽힌다고 듣긴 했어요. 실제로 건수도 많았고요...하지만...전..”

상혁은 솔직하게 다 털어놓았다.

사실상 아주 잘 생긴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못 생기 건 아니었다. 아니, 스스로 판단하기에도 제법 귀여운 스타일에, 특히 눈이 매력포인트라고 자부하긴 했다. 그런 이야기는 여자들에게 심심치 않게 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그냥 호감의 표시일 뿐, 강하게 어필할 정도는 아니었다.

말빨이라도 좋아서 상대를 즐겁게 해주어야 하는데, 아무리 침묵이 금이라지만 과묵하다 못해 답답하게까지 만드니 늘 꽝일 수 밖에.

“친구들하고 있을 때는 농담도 잘하는데..이상하게 여자한테만 그래요.”

“친구는 많아?”

“아주 많을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적은 편도 아니에요.”

“그런데 어제 이사할 땐 도우러 온 사람이 왜 아무도 없었어?”

“하하~ 그건 제가 워낙 게을러서 그래요.”

왠지 지금 이순간만큼은 섹시한 누님보다 엄마처럼 아주 따스하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어제처럼 꾸민 모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다 보여주고 싶었다.

“게을러? 네가? 호호호~ 그건 또 무슨 해괴한 소리야? 땀을 뻘뻘 흘리면서, 책장이며 책상이며 혼자 다 나르던데?”

“후후후~ 그래서 제가 게으르다는 거죠.”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그녀에게 말했다.

“에..뭐라고 할까요, 그러니까 이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네요. 몸이 아니라 마음이 게으르다고요..”

“얘가, 얘가 지금 이 누나를 놀리는 거야?”

“아, 아니에요...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군생활의 후유증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괜히 남에게 신세를 져서 부담감을 가지는 게 귀찮아, 그냥 속 편하게 자신이 직접 몸으로 때우고 말았다고 설명했다.

“호호호호~ 수한 씨 말처럼 너 굉장히 재미있는 애구나?”

“그, 그런가요?”

크게 웃는 그녀를 보면 이번에는 상혁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네가 정말 게으르다면 이렇게 나를 도왔을까? 여자들도 잘 안 그래, 자기 돈 내고 지내는 하숙집이니까 말이야. 지 팬티도 그냥 내놓는 걸?”

“그렇지만...”

“떽~ 이 누나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지, 무슨 잔말이 많아?”

“뉍~ 누님 말씀이라면, 뒷집 고양이가 짝다리를 짚고 껌을 씹으면서 침을 뱉었다고 해도, 무조건 믿슙니다~ 할렐루야~”

“호호호~ 정말 보면 볼수록 신기하네? 이렇게 애교도 많고 넉살도 좋은데 말이야?”

“친해지면 자연스럽게 되는데...거기까지 가질 못하니까요.”

상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내가 한가지 가르쳐줄까?”

“네...”

“뻔히 보이는 거짓말로 큰소리 치는 바람둥이한테, 쉽게 넘어가는 여자들이 바보 같지?“

맞다. 상혁은 그게 늘 궁금하면서도 이해가 안 됐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신감이야. 여자들의 심리가 그래. 뻔한 거짓말인데도 너무 당당하게 나오면, 진짜로 꼭 뭔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거든? 그게 매력으로 다가오고...”

“..그런가요?”

어쩌면 그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일 거다. 수정이 말했던 ‘낯을 가린다’는 평가도 같은 맥락이었다. 하지만 그게 머리 속으로 생각한다고 해서 쉽게 고쳐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내가 보기에 상혁인 장점이 아주 많아. 여자가 좋아할 만한 매력도 충분하고...그러니까 괜히 어설프게 상대에게 맞추려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믿고 평상시 하던 대로만 하면 돼.”

“휴~ 그게 안되니까 문제죠...”

그녀의 말에 힘이 쭉~ 빠진 상혁은 맥없이 고개를 숙였다. 사실 뭔가 획기적인 해결책을 기대했던 것이다.

“에고~ 불쌍한 우리 상혁이...자신감을 찾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긴 한데...”

“네? 그, 그게 뭐죠?”

상혁은 귀가 번쩍 뜨였다. 그러자 그녀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와 속삭였다.

“여자와 한번 자봐...그러면 아마 확 바뀔 거야.”

“엑~?”

이건 기지도 못하는 아이한테 숫제 뛰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게 쉽게 될 거면 ‘헌 숫총각’이라는 오명을 달고 살까? 상혁이 황당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자, 그녀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이었다.

“사귀라는 게 아니야...눈을 뜨고 주변을 잘 살펴보면 분명히 그런 기회가 올 거야...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가끔씩은 그냥 무작정 사고치고 싶을 때가 있거든?”

순간 상혁은 온몸으로 짜르르한 전율이 흘렀다. 아무리 숫총각에다 눈치가 둔한 그라지만, 무슨 뜻인지 모를까? 이건 노골적으로 유혹해오는 거다. 드디어 오명을 벗을 기회가!

“누, 누님~!!”

자신도 모르게 손을 와락 잡고 말았다. 그런데 그녀가 손을 슬쩍 빼더니 코를 튕겨왔다.

“악~”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너무나 아팠다.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는 상혁에게 그녀가 빙글빙글 웃으며 충고했다.

“아서라~ 아서~ 누가 날 덮치랬어? 주변을 잘 살피랬지.”

상혁이 쥐구멍을 찾고 싶은 심정으로 얼굴이 벌개져 고개를 숙이자, 그녀가 그의 귀를 잡아당기더니 소곤거렸다.

“그렇게 무작정 덤벼들면 마음이 동하다가도 확~ 깬단다...분위기야 분위기, 알겠니? 서둘지 말고 찬찬히 잘 연구해봐. 이런 기회가 어딨어? 당장 네 주변에만 해도 세 사람이나 있잖아?”

그리고는 휙~하니 일어서 설거지를 시작하는 그녀. 하늘하늘한 뒷모습이 굉장히 유혹적이었다. 상혁은 그걸 멍하니 바라보다 조심스레 일어서서 방으로 향했다.

‘세 사람이라고?’

그건 분명 그녀 자신도 포함시킨 숫자였다.

상혁이 곁에서 설거지를 도울 생각을 못하는 건 바로 불룩해진 아랫도리 때문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자지가 서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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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퇴근해온 수한과 밖으로 나와 고깃집에서 술잔을 마주했다.

“형, 근데 주인아저씨는 어떤 분이에요?”

“창우? 창우는 왜?”

“그냥 궁금해서요. 어제도 안 들어온 것 같던데...”

그러자 수한이 소주잔을 쭉 비우고서 말문을 열었다.

“그 녀석...사람은 참 좋은데...쯧쯧~ 남편으로선 영 꽝이야, 미현 씨만 불쌍하지...”

누님의 이름이 ‘미현’이라는 건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남편의 이야기를 하면서 언뜻 아픔이 느껴지던 게, 역시나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직도 예전에 잘 나가던 때의 헛꿈에서 못 벗어나고는...”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한방에 만회할 사업거리를 찾아 헤맨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집에다 돈 한푼 벌어다 주기는 고사하고, 되려 까먹지나 않는 게 다행이란다. 하기야 이제는 집 빼고 남은 게 없으니, 그나마 그걸 건사하고 있는 것도 미현 덕이라고 한다. 한참 잘 나갈 때도 왠지 불안한 느낌이 든 그녀가 자신의 명의로 바꾸길 요구했다나? 그리고 와장창 망하고 망연자실해 있는 남편 대신, 하숙을 치며 생계를 꾸려나가기 시작했단다.

어쨌던 그런 사정이다 보니, 전국을 돌아다니느라 집에 들어오는 일도 드물뿐더러, 가끔씩 들러도 옷만 갈아입고서 얼마간의 용돈을 받아 다시 나가는 게 보통이라니, 수한이 한탄할 만도 했다.

“참...근데...형은 왜 아직도 결혼을 안 하셨어요? 형 정도면 얼마든지 좋은 자리가 많을 텐데요?”

그건 사실이었다. 어린 나이에 연애를 할 때나 외모가 큰 작용을 하는 거지, 실제 결혼을 생각할 때쯤엔 당연히 남자의 경제력이 1순위였다. 그런 점에서 제법 큰 회계법인에서 일하는데다가, 조만간 팀장의 자리에까지 오를 예정이라면, 가만히 있어도 여기저기서 좋은 혼처가 많이 들어올 게 분명했다.

“뭐...전에는 시험공부를 하느라 연애고 뭐고 할 정신도 없었고....이제 여유가 생기니까 결혼 생각이 없어져서 말이야...”

왠지 쓸쓸하게 느껴지는 눈빛을 보니 뭔가 사연이 있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이럴 때는 모른 척하는 게 순리였다.

“참~ 근데...너야말로 그게 무슨 소리야? 숫총각이라니?”

“켁~”

아침에 은주가 입 방정을 떨더니 결국엔 여기까지 여파가 온다. 상혁은 잠시 망설였다. 이미 선배라는 인간에게 뒤통수를 한번 맞은 적이 있지 않은가?

“휴~ 그게요...”

수정과의 일까지 다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쩌다 보니 아직까지 동정인 걸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미현과 농담으로 시작했던 게 은주에게까지 넘어간 과정을 설명했다. 그러자 수한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너 앞으로 큰 일이구나...”

“네?”

왠지 불안해진다.

“지금쯤이면 벼리도 다 알고 있을걸? 은주 걔는 마음 속에다 묻어둘 성격이 절대 못되니까..큭큭큭~”

“으악~”

은주, 은주...이 놈의 계집애가 처음부터 끝까지 말썽이었다.

“후후후~ 은주만 잘 구워삶으면 하숙생활이 편할 거야...아니다, 아침에 보니까 너희 둘이 은근히 잘 어울리던데 아예 사귀어버려~”

“형?”

“오늘밤에라도 방에 몰래 숨어들어가서 확~ 덮쳐버리든지?”

“컥~!!!”

이 하숙집의 사람들은 도무지 정상적인 인간이 하나도 없단 말인가? 겉으로 보기에 아주 점잖아 보이던 수한 형마저 상상을 초월하니. 아니, 아직 한 명은 남았구나.

‘벼리야~ 벼리야~ 제발 너만은 내 상식을 벗어나지 않길~”

상혁이 그렇게 기도하는 사이 수한이 계속 충동질을 했다.

“임마, 은주 정도면 특A급인데 양에 안차?”

“그, 그게 아니잖아요? 아침에 형도 들었잖아요? 남자친구가 있다고...”

“후후후~ 그거? 글쎄, 이번엔 한 두어 달 갈려나?”

“네에~?”

요 2~3년 사이에 본 것만 해도 대여섯 명은 된단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은주의 방에서 자고 갔으니 알 수 밖에 없다는 말에는 정말 기가 막혔다. 그러면서도 ‘그러면 나도 한번 시도해봐?’라는 마음이 불쑥 드는 건, 어쩌면 수한의 말 때문이 아니라 미현이 했던 충고 탓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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