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는 꿈을 꾸었다.
녀석의 침대에서 얼핏 엎드려 잠든 그 날.
고된 숨소리만큼 아주 먼 기억 속 장면이 꿈에서 리플레이 되었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그 날의 열 여덟 내가 꿈속에서는 아직 어렸다. 뽀송 뽀송한 얼굴, 차갑고 냉정한 표정.
학교 뒷 뜰에서 녀석이 나를 죽이기라도 할 듯 마찬가지 어린 모습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어리지만 분명히 강렬한 감정을 담고
나를 노려보고 있다.
..아아..
..사실은 알고 있었다.
겁이 날 만큼 지독한 눈빛이어서 나는 그 나이의 치기대로 냉정하게 말했다.
‘돈이 필요하면 말해. 니 누나에게 얼마든지 보상해 줄게.’
녀석은 그 오만하고 철없는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그 때 뺨에 와 닿던 그 서늘한 공기는 꿈속에서도 생생하다. 나는 짐승의 꿈을 꾸었다. 검은 암흑
사이로 맹렬하게 빛나는 그 두 눈동자!
갑자기 떨리는 입술을 냉정하게 씹으며 나는 더욱 얼음같이 말했다.
‘윤은협은 내 형제이자 친구다.
그 녀석을 위한 거라면 더 한 것도 해 줄 수 있어.‘
‘..................’
‘욕을 하려면 나에게 하고, 죽기 직전까지 패고 싶으면 나를 패.’
그 때야, 녀석은 조금 비웃듯 입술을 올리며 중얼거렸다.
‘그 새끼가 죽으라면 선배는 죽을 수도 있겠군요.’
물론, 두 번 주저하지 않고 나는 말했다.
‘당연.’
어둠속에서 눈이 빛난다. 언제나 사냥감을 쫓는 그 맹수의 두 시선이 혼란스러울 정도로 거칠게 빛났다. 언젠가는 저 날카로운
발톱이 내 심장을 가를 것이다.
그러기 전에 저 녀석을 죽여야지. 없애야지.
그러자 눈물이 났다. 그렇게 강하고 울지 않는 얼음같은 내가 눈시울이 뜨거워져 어쩔 줄 모를 지경이었다.
일그러지는 내 얼굴이 고통을 생생히 느끼게 만들었다.
외마디 절규가 마음 안에서 쏟아진 것이다.
저 녀석을 죽여야지,
죽여야지.
나를 물어뜯기 전에, 어서...
없애야돼.
..없애야...
그러나, 나는 녀석을 소멸시키지 못했다.
아..안돼...라는 단 한마디의 본능적인 절규가 튀어 나온 것이다.
그것은, 흡사 나를 죽이는 것과 같은 무게의 고통이어서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꿈이 아닌 듯, 나는 벌떡 깨며 손등이 무척이나 저리다.
무심해 손등을 내려다보자, 야수의 시선이 격렬하게 다가와 그곳을 찍어 누르듯 할퀴었다. 저릿한 통증과 생존을 위해 심장이
마구 뛰어 오른다.
짐승의 흔적이 남았다.
아무리 애써도 지워지지 않을 흔적이.
악몽같은 그 꿈에서 허덕인다. 누군가가 귓전에 속삭일 때까지 계속 나는 뒤척거리며 신음했다. 그리고 그 때서야 조용한
음성이 내게 말했다.
‘알고 있죠?
나도 몇 번이나 선배를 없애고 싶을만큼 사랑했다는 걸..’
...라고.
‘모든 상처를 내 탓으로 돌려요.
....그래야 나도 한번쯤 당신이 나를 기억하리라...
..그런, 욕심을 부리죠..‘
...라고.
비로소, 나는 안심하고 다시 잠들었다.
내일은 은협에게로 돌아가야 겠다.
서준은 여기서 혼자서 버틸 수라도 있지만, 은협이 녀석은 그렇지 못할 녀석이다. 아니, 은협 역시 내가 스스로 만들어 온
덫이다. 그렇다면 해결하지 않고는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었다.
다시 이전처럼 돌아가야 한다..
은협은 은협의 자리로, 나는 나의 자리로, 그리고 서준은 서준의 자리로.
그렇게 돌아가 뭔가의 답이 보일 때가 되면..어쩌면 이들 모두를 정말 떠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심지어, 강서준..
너마저도.
마음은 이렇게 아픈데, 아직도 용서되지 못한 너 마저도.
그 사실을 생각하면 내내 마음이 욱씬거리지만, 겨우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 치열한 감정은 그저 한 낱의 꿈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꿈을 꾸는 것이다.
아주 길고 질릴만큼 반복되어온 짐승의 흔적을.
누군가 내 모든 상처를 짊어진 채 뒤에서 기다리는 그 꿈을.
내가 누구와 있던, 그가 나를 기다리던 그 꿈을.
언젠가는 이 짐승의 흔적이, 다시 나를 너에게 불러줄 그 꿈을.
내가 이 흔적을 끌어안을 꿈을.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