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 완결>
1.
나는 병실의 한 쪽에 놓여진 전화를 조용히 들었다. 뭔가 할 말이 잔뜩 있었던 것 같은데, 전혀 입 밖으로 세어 나오진
않았다.
늦저녁의 중환자 실 방문에 간호사들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지만, 마지막까지 포기하진 않았다. 강원우를 이용해서 어떻게든
허락을 받아내자 곧바로 두고 온 핸드폰이 떠오른다.
아마, 윤은협...그 녀석은 지금 쯤 막 돌아와 내가 없는 아파트를 발견했을 것이다. 강원우의 말마따나, 생각없는 빈
대가리인척하고 살아가는 그 녀석이지만...나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녀석은 또 다시 착한 그 눈동자에서 바보같이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책망할 것이다.
아아..라고 나는 짧게 신음하며 전화기를 들었다.
몇 번의 벨이 울리고 상대방이 저 쪽에서 다급하게 받는 기색이었다.
-어디야.-
서로가 하고 싶은 말들이 있을 거다.
그러나, 가끔은 그런 말들이 허락되지 않을 때도 있다.
지금와서 무엇을 하려는 건지 나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계속 해서 아파오는 짐승의 흔적에만 집중할 뿐이다. 욱씬거리는 그
발톱 모양의 상처를 똑바로 쏘아보며 나는 수화기를 들고 침묵한다.
숨을 몇 번이나 거칠게 토하며 은협은 전화기 너머로 작게 속삭였다.
-돌아올거지?-
목 위로 울컥- 뭔가 치미는 이 기분.
욕설을 퍼붓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는 이 기분.
- 오늘만 외박이야....?-
나는 그 욱하는 기분 속에서 겨우 대답했다.
“...........그래.”
라고.
오늘만 외박이야.
내일이면 다시 돌아갈 거야.
오늘만..
단 하루만 필요해.
......그것이면 충분할 거야.
달칵.
전화를 끊고 나는 병실에 들어선다.
문 앞 명패에 ‘강서준’이라고 적혀 있었고, 병실 앞에는 경찰 두명이 지키고 있었다.
강원우가 무슨 빽을 써서 이 경찰까지 포섭했는지는 알 수 없다. 끝까지 알 수 없는 사람이 바로 강원우란 인간이다. 따뜻한
시선을 하고 사람을 죽였다 살릴 수도 있는 그런 종류의 사람.
뚜뚜..
병실 안으로 들어서자 오실레이터에서 작은 파음을 그리며 규칙적인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조금 전에 내가 끊어버린 전화기
소리와 닿아 있었다.
참, 지독한 녀석들...이라고 중얼거리며 가슴 가득 붕대를 메고 잠들어 있는 서준의 옆에 앉았다. 창 밖으로는 계속 비가
내린다.
처음 이 상처를 입던 날도 그랬다. 어쩌면 작정이라고 하고 노리듯 이 녀석은 그 날 골목에 나타났는지도 모른다.
이 녀석이 처음으로 내 손등에 맹수의 상처를 입힌 날.
그 날은 이미 서준과 그 전에 은협의 일로 진작 만난지 일년이 훨씬 넘었을 때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 날로부터도 장장
7년이나 흘렀다.
그런데도 나는 지금 녀석을 처음 만나는 것처럼 또 다시 손등이 쓰린다. 말없이 들고 간 발톱 모양의 철제 칼을 내리고,
나는 침대에 엎드렸다.
“선배가 그 녀석과 헤어지기를.........”
머리 위로 들리는 갈라진 음성.
가라앉은 채 조금 쉬어 있는 그 목소리.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저 그 음성을 잠시만 음미하고 싶었다.
내가 이런 녀석 따위를 좋아할 리가 없다. 당연하다. 그렇게 잔인한 일들을 잔뜩 시켰는데 좋을 리가 없다.
...그러나 사경을 헤매다 살아난 저 쪽 끝에서의 목소리. 그 맹수의 목소리에 잠시 전율한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녀석은 마치 중얼거리듯 말했다.
“선배가 그 녀석과 헤어지기를...
..얼마나 저주했는지 모릅니다.“
“..................”
“....당신의 상처는 모두 내가 가져갔으니깐................”
당신의 상처.
상대방의 이기심에 맹목적으로 희생하고 싶을 정도의 그 통증들.
그것을 이미 모두 내가 가져갔으니깐.
“...알고 계시죠?.........”
나는 계속 엎드려 있었다. 만약 이 순간에 고개를 든다면, 나도 모르게 그 따뜻한 음성에 현혹된 눈물이 비췰까봐 겁이
났다.
그러나 녀석은 그런 것 쯤은 이미 단련되어 있다는 듯.
내가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것 쯤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조용히 덧붙였다.
“...선배..
알고 있죠?“
“.............”
“...항상 뒤에 있었어요.”
“.................”
“...그러니깐...
자꾸..
돌아보지 않아도 돼요.
....그 상처는 처음부터 내 것이니깐.“
온통 상처로 왜곡된 내 삶 자체를 이미 가져갔으니깐.
마치 그렇게 들린다.
그 말이 너무나 따뜻하고 안심되어서 하마터면 흔들릴 뻔 했다. 그러나 나, 유기연은 그렇게 단순한 인간이 아니다.
그저 엎드린 채, 나는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을 뿐.
“..........죽어버리지..
왜 살아났어..강서준...“
한동안 그 말에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그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겨우 녀석이 말문을 이었다.
“.......저에게 앞으로 무사하지 않을 거라고 경고하셨죠?...........”
그래. 기억난다.
분명히 이 녀석이 사고 당하기 전 날.
......그 목욕을 하던 날, ..
방을 걸어나가는 녀석에게 그렇게 말했다.
‘나에게 이런 짓을 하고도 니가 무사할 거라 기대하지 마.’라고..
이제 우리 사이에 서로 진 빚은 없어..라고.
그러나 녀석은 그 질문에 조금 긴 시간이 지난 오늘. 비로소 이렇게 대답을 건넨다.
“..처음부터 무사한 적이 없습니다, 선배.”
“.................!.........”
“..선배를 만나 이후로..
나는 한번도 내가 무사히 살고 있다고 느껴진 적이 없었어요.
당신은 항상, 저를 위험하게 만들었거든요..
.......항상.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을 떠올리게 만드는 고통..
....당신을 매일 생각할 때..
그 매일 동안, 내 짐승의 본능은 한번도 무사하지 못했습니다.“
“..................................”
“..........나는 당신 때문에 늘 아팠거든요..........................”
끝까지 고개 들지 않았다. 발끝까지 떨리는 심장 소리 때문에 아무런 감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내 손등을 감싸는 녀석의 거친 손바닥을 느낄 뿐. 그리고 아무런 의미없이 이상하게 내 얼굴을 묻은 시트가
축축해지는 기분 뿐.
상처가 드디어 주인을 만났다. 녀석은 언제나 나를 알아볼 수 있게 처음부터 그 흔적을 내게 낙인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