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너에게 두 가지 다른 흔적이 있다는 걸 견딜 수 없었어..라고 은협이 말했다. 자신이 남긴 손등의 +자 외에, 또 다른
누군가가 남긴 혈흔- 그것을 녀석은 사실 내내 신경썼던 것이다.
난감했다.
나 역시 그랬다. 초조할 때마다, 혹은 긴장할 때마다 그 발톱자국을 혀로 핥는 그 습관. 본능적으로 그렇게 행동했고, 또
그 본능에 스스로 당황했다.
말을 돌리기 위해, 왜 그럼 너는 난잡하게 놀아났냐..,,,라고 묻자, 녀석은 여전히 웃는 철없는 얼굴로 순수하게 눈알을
굴렸다. 그리고 맑게 대답했다.
‘그래야, 니가 나를 떠나지 않지.
그래야 니가 점점 더 나에게 빠져들지.‘
소름이 끼칠 정도다.
나는 내가 진심으로 도망갈 수 있는 쪽이 어딘가에 두려워졌다. 강서준을 두려워하던 것은 아주 잠시였지만, 은협은 근 십년
동안 내가 저렇게 키워온 것이다.
나에게는 두 가지 상처가 있는데, 하나는 오른쪽 손등에,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왼쪽 손등에 자리 잡았다.
하나는 내가 직접 그었고, 나머지 하나는 누군가 나를 향해 낙인으로 남긴 것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이 두 상처 위에는 덧살이 올라오지 않았다. 시간만이 그저 숨죽인 듯 자꾸 흘러갈 뿐이다. 계절이
바뀔만큼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출근할게. 너는 좀 더 쉬어.”
은협은 언제나처럼 맑게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아무런 말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내 얼굴을 부드럽게 바라보며 말이다. 녀석은 그대로 내게 다가와 손을 잡는다.
그리고는 그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맞닿게 하고 잠시 숨을 들이쉬었다. 아주 순수한 저 시선. 절대 사람들로 하여금
배신할 수 없게 만드는 바로 저 눈동자.
지독하다. 순수에 사로잡히는 것만큼 지독한 것은 없다. 녀석은 조금 처연하게 웃으며 맑은 눈망울로 호소하듯 말했다.
“배신하지 마.”
“.................”
“날 떠나면..
널 안 죽여.
...대신 내가 죽어.“
너 없이 어떻게 할 수가 없어..라는 작은 주문.
그 말에 가만히 웃어 보인다. 입술 끝이 떨리는 이 웃음은, 그저 언제나처럼 동굴을 빠져 나온 뒤에 내게 달라붙은 인형의
증표다.
녀석은 근본이 착한 놈이다. 아주 눈치가 없지도 않고, 사실은 다 알면서도 눈 감아 주려는 듯 가끔 핏발 선 눈동자로
허공을 노려볼 때도 있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출근했다.
우리가 같이 산 지 , 딱 한 달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표정을 잃었다.
또한 녀석은 그런 인형같은 나를 안지 않았다. 그렇다고 버리지도 않았다. 다만 계속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다렸다.
집을 나가는 순간까지도 언제나처럼 기분 좋게 웃는 아이 연극을 계속하며 녀석은 나를 안심시켰다. 너를 떠나지 않아. 그러니
너도 떠나지 마...라는..
아주 어린 이기심.
물론 나는 딱히 떠날 생각도, 또 딱히 떠날 곳도 없었다. 그리고 다음 주면 이제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 다시 이전처럼
프리랜서 비서 일로 뛰어들 생각이었다.
잠시간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며 커피를 탄다. 아무도 없는 빈 공간- 이제는 점점 타인의 물건에 익숙해진 이 공간을
음미하며 나는 이제 서서히 깨어나는 내 안의 인간을 조용히 품에 안는다.
어쨌든, 끝난 일-
그리고 모든 것은 마침표를 찍었다. 언젠가는 이 빈 껍데기 안으로 환희 가득찬 인간이 찾아오리라 믿는다.
이때까지 살면서 늘 그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