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31/38)

            4. 

            정말이야, 너랑 살고 싶었어. 

            ..라고 은협이 몇 번이나 말했다. 

            우리들이 처음 부모님의 무덤 앞에서 서로 손을 잡고 칼을 긋듯 그렇게 말이다. 나는 그 때야 말로 할 말을 잃었다. 

            “너랑 살고 싶어서.. 

            그렇게 성공하려 애썼던 거야. 

            어서 돈을 많이 벌어서.. 

            우리도 네덜란드 같은 데로 이민가자, 유기연. 

            거기는 우리같은 사람들도 결혼할 수 있대.“ 

            철없는 연인. 

            언제나 순수하게 믿는 눈동자를 굴리며, 어떤 악의도 없이 그저 호기심과 건강한 궁금증으로 타인을 학대하는 철없는 아이. 

            그리고 상대가 자신을 위해 뭔가 희생했다는 걸 알게되면 이번에는 자신을 자학하며 견딜 수 없고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순수. 

            은협은 내가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짐들을 옮기며 내게 계속 떠들어댔다. 나는 녀석이 집에 들어오도록 반기지도 

            않았지만, 거절하지도 않았다. 

            어느 쪽이든, 나에게는 모두 똑같은 일이었다. 

            “조금 더 기다리려고 했는데... 

            강서준이 너 데리고 갔다는 말 듣는 순간, 완전히 돌아버렸거든, 내가.“ 

            녀석은 자신의 많은 책들을 내 책꽂이에 꽂으며 중얼거린다. 주말이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그 모습을 말끔하게 바라보며 나는 

            아무 생각없이 머리를 쓸어 올린다. 

            분명히 손 끝에는 감각이 있는데, 머리 속으로는 아무런 감각이 없다. 갈비뼈 아래는 심장이 사라진 듯, 고요한 혈액만이 

            부지런히 옮겨 다닌다. 심장은 더 이상 뛰지 않는다. 

            그 짐승의 흔적들은 나에게서 끈질긴 생명력을 뺏어갔다. 

            “강서준이 .. 

            뭐, 그 자식도 알고 보니, 사채업자가 시킨대로 너를 끌고 간 거지만.. 

            그래도 그 날 만나서 담판 지었어.“ 

            나른하게 앉아서 무신경한 태도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갑자기 정신이 확 깬다. ‘내일 다시 올게. 선배에게 할 말이 

            있어.’라는 목소리. 그리고 언젠가 뜨겁게 귀를 축이던 그 습기찬 낮은 속삭임. 

            머리 속으로 뭔가 쿵쿵- 울리고 지나간다. 방금, 은협이 뭐라고 말했다. 그래, 뭐라고 말했다. 분명히..강서준이라는 

            이름과 함께, ‘그 날 만나서 담판 지었다’라고 말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일어나는 이 놀라운 변화에 당황하며 잠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나 나에게 옆모습을 보이며 즐거운 듯, 

            책을 꽂던 은협은 여전히 뭐라고 뭐라고 떠들어댈 뿐이다. 

            “그 날 말야, 그 날. 

            내가 널 데리러 가려고, 거길 습격했거든. 

            친구 녀석들과.. 

            그래서 마침 큰 형님이랑 마주쳤지. 

            원래 돈 빌려준 인간 말야.“ 

            “..........-!!!!!!!!!” 

            “알고 보니, 큰 형님이 널 노리고 있더라구.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서 서로 결판을 내자고 했지. 

            내 오른 손 약지를 자를 테니, 너를 돌려달라. 

            잘려진 내 손가락은 돈을 갚겠다는 약속이다..라고..“ 

            나는 벌떡 일어섰다. 

            그렇다면, 서준이 마지막으로 나가던 그 다음 날. 

            그러니깐, 강서준이라는 그 개새끼가 자기 입으로 ‘내일’이라고 말한 그 날, 은협이 들이닥쳤다는 말이다. 

            하지만, 은협의 오른손 약지는 건강했다. 어떻게 된 걸까. 

            윤은협과 강원우, 그리고 강서준.. 

            셋 중에 나를 순수하게 지켰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나를 위해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소리쳤지만 손가락은 죄다 무사한 저 윤은협? 

            아니면, 실컷 성적인 배출구로 사용하고 두 번 다시 누군가를 안을 수 없게 나를 망가뜨린 강서준? 

            것도 아니라면..항상 먼 발치 멀어져서 언제나 내가 당하는 꼴을 보면서도,  절대 절명의 순간에 나를 탈출시킨 강원우? 

            셋 중에 누구!!! 

            너희들 다 죄다 쓰레기야!!!! 

            나는 식은땀이 흐르고 갑자기 오한이 드는 듯, 소름이 끼쳤다. 나는 정말 셋다 세상에서 지우고 싶었다. 

            “유기연.” 

            벌떡 일어서서 부들 부들 떨리는 내게, 갑자기 철없이 덩치 큰 녀석이 우뚝 멈춰선다. 등을 돌린 채로, 내게 표정을 보이지 

            않은 채 그 녀석은 웃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버리지 마.” 

            “........-!!!!!!!!!!!!!” 

            “그리고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도 마.” 

            순간, 내 입에서는 ‘억’하는 짧은 신음이 튀어 나왔다. 

            “너를 데리고 오기 위해, 내가 그 큰 형님에게 어떤 댓가를 치뤘는지 알려고 하지도 마.” 

            “.........-!!!!!!!!!!” 

            나는 그만 다시 털썩 - 주저 앉는다. 철없고 이기적인 아이는, 그 이기심만큼 자신을 위주로만 모든 일을 꾸민다. 그리고 

            이미 알고 있다는 것도 몇 년씩이나 모른 척 하며 위장할 정도로 그는 이기적이다. 

            자신이 그래야만 내가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녀석은 웃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똑똑하게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날 버리지 마.” 

            “................” 

            “강서준은 잊어.” 

            나는 녀석에게 기만당했다고 생각지 않았다. 녀석이 나를 속인 것도 아니다. 그저 우리들은 서로 원하는 만큼만 서로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익숙했을 뿐. 

            그것을 깨듯 강서준이 두 번이나 우리 관계를 밀치고 들어왔던 것이다. 

            용서하지 못한 쪽은 서준이 아니었다. 윤은협이 강서준을 용서하지 않고 있었다. 은협은 서준이 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십년간 길들어진 모습으로 서로를 속이고, 속아주는 연극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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