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30/38)

            3. 

            물론 충분히 나는 변해 있었지만 표를 내지 않았다. 오기와 고집, 그리고 기묘하게 속을 가득 채우는 뒤틀린 서글픔- 그것에 

            이를 꽉 깨물며 일어섰다. 

            얼굴빛은 여전히 조금 창백했지만, 근 일주일 동안 노력한 끝에 간신히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일주일 쯤 뒤에는 드디어 

            은협의 사무실에 다시 찾아갈 수 있을 정도였다. 

            “아아..괜찮아?” 

            다시 두꺼운 책으로 자신의 머리를 마구 박으며, 은협은 측은한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나 때문이야, 나 때문이야..하는 

            지겹고 지겨운 녀석의 자학증세. 그러나 내일이면 다시 까맣게 잊고 아이처럼 하하 거리며 또 사고를 칠 그런 순수. 

            아아...물론 괜찮지. 괜찮구 말고. 

            ....그러나 나는 껍데기만 남은 인형같이 멍하니 녀석을 바라보았다. 

            “원대리, 여기 커피 한잔만 부탁해요-!!” 

            은협은 은발의 머리카락을 마구 흔들며 마치 악을 쓰듯, 사장실 밖에 있는 사원에게 부탁한다. 내가 이전부터 항상 사무실에 

            오면 내 손으로 커피를 타 마셨기 때문에 이것을 알고 있는 녀석의 단 한마디 배려다. 

            나는 커피를 타온 사무실 직원에게 말없이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했다. 원래부터 그렇게 붙임성이 좋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근간에는 더욱 심해진 것 같다. 

            “괜찮아, 정말?” 

            커피를 마시자, 머리 속이 조금 개운해 진다. 

            “너...사람 같지가 않아... 

            이상해.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지나치게 조용한 나를 의식해서인지, 은협은 쩔쩔매는 듯한 너스레를 떨며 위로하기에 바빴다. 반면, 내 쪽은 점점 차가워지는 

            의식으로 앞을 그런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공허. 

            그 씁쓸한 독에 마음이 쓰라렸다. 내게 느껴지는 인간의 감정은 그것 뿐이었다. 나머지는 이상하게도 그 호텔을 나오던 날, 

            동굴 속에 남겨놓은 것 같다. 

            역시 떠오른다. 동굴 속에 백일을 갇혀 있으며 쑥과 마늘을 먹고 인간이 되었다. 아니, 인형이 되었다. 

            “..저기, 기연아...” 

            은협은 얼굴까지 시뻘게 진 채, 가만히 손을 모으며 나를 바라본다. 그 안타까운 얼굴에 그제서야 조금, 나에게도 관심의 

            마음이 떠올랐다. 

            ..아아.. 

            ..떨쳐버리기 힘든 너. 

            “돈은 다 갚은 거냐..그래서?” 

            나는 말라붙은 입을 커피로 달래며 겨우 묻는다. 그 곳에서 나온 후, 내가 건넬 수 있는 유일한 질문이었다. 내내 

            궁금했다. 설령 서준이나 그들의 큰형님이라는 작자가 내가 없어진 걸 알았다 한들, 어차피 강원우가 나를 풀어낸 것이고 

            찾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들이닥칠 인간들이다. 

            그러나 일주일.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했고, 나는 마치 기억을 조작당한 사람처럼 숨을 가쁘게 내 쉰다. 

            나는 인형처럼 점점 생기를 잃었다. 이미 그곳에서 정말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충분히 시험당한 것이다. 

            마치 누군가가 의식적으로 내 정신을 빼앗아가고, 뒤에서 흔들어대는 인형처럼 감정은 점점 말라붙었다. 

            은협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기가 찬 듯 조용히 한숨쉰다. 이쯤 되고 보니 녀석도 이제 자신이 얼마나 막나가는 인생을 

            살아왔는지 알게 된 것 같았다. 

            녀석의 인생을 건져낸 댓가. 그것이 바로 내 혼을 뺏기는 결과였던 것이다. 

            마침내 은협은 땅이 꺼져라 숨을 몰아쉬며 단호하게 고개 저었다. 

            “아니. 

            돈은 다 갚지 않았어.“ 

            나는 그저 허탈하게 웃었다. 하하하..라고 메마르게 웃으며 고개 젖는다. 그래..처음부터 제대로 살았으면 이렇지 않았을 

            것을. 

            “하지만 그 집을 팔 수 없었어, 유기연!!!” 

            마치 혼이 빠져 나간 듯한 인형의 날카로운 웃음에 녀석은 붉게 물든 얼굴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렇게 내 이름을 다 

            붙여 부를 때는 뭔가 대단히 감정이 고조되었을 때이다. 

            그러나 나는 말없이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내가 ‘알겠어.’라고 말하며 차갑게 일어설 때까지 숨을 씩씩거릴 뿐이다. 이제는 너와 이별이다. 윤은협. 

            우리가 철없이 서로 손등에 칼을 그어 남겼던 혈맹의 의리. 그런 덧없는 우정. 이름뿐인 사랑-그것에 등 돌린다. 

            등을 돌린다. 

            누군가가 겁탈해버린 영혼을 찾아야 한다는 결심이 섰을 때, 비로소 나는 제정신이 들었다. 

            “결혼 준비 잘해. 윤은협. 

            식장에서 도망치지 말고..“ 

            결혼한다고 했나, 이 녀석.. 

            그래 할 때도 됐지. 나이도 먹었고..언제까지 내가 너를 돌보거나 등을 지킬 수도 없는 일이지. 알아서 잘 살아봐, 

            윤은협. 

            .......너 때문에 인생을 갉아먹었다고 생각하지 않을게. 

            이것도 어쩌면 내가 밟고 지나가야할 몫이었겠지. 그 동굴에 갇혀 있으며 백 일동안 쑥과 마늘을 먹으면 인간이 된다잖아. 

            그 때였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나에게 성급하게 다가서며 녀석이 휙- 하고 손목을 낚아챈다. 

            “...?.................” 

            나는 다시한번 표정없이 녀석을 쳐다보았다. 

            그 잘생긴 입술이 더듬더듬 말하는 의미들은 훨씬 나중에 내게 들려왔다. 

            “그 집을 팔 수 없었어.” 

            언제나 그렇듯이, 녀석은 악을 쓰고 고집부리는 아이처럼 맑은 눈동자로 서럽게 외쳤다. 이제 그런 것들이 통할리 없는데도 

            말이다. 이것을 이렇게 길들인 내 잘못인데도 말이다. 

            내가 못알아듣는다고 생각했는지, 녀석은 숨도 쉬지 않고 재빠르게 덧붙였다. 

            “그 집을 팔 수 없었다고!!! 

            우리에게 남은 건 그거 뿐이니깐! 

            ...내가 결혼하면 들어가 살 집은 거기 뿐이니깐!!!“ 

            “...........??...........” 

            나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녀석이 결혼을 하든 말든, 왜 남의 집에 쳐들어와 산단 말인가. 

            여전히 아무런 느낌도 떠오르지 않자, 갑자기 와락- 녀석이 작지도 않은 내 몸을 끌어 안으며 간신히 입을 연다. 

            그 뜨거운 열기에 숨이 막혔다. 

            “너랑 하는 거라구, 유기연..” 

            “.........-!!!!!!!!!!” 

            “..겨..결혼까지는 아니지만.. 

            이젠 정말... 

            둘이 같이 살고.. 

            우리끼리만이라도.. 

            상징적으로 ... 약속도 하고.. 

            그렇게........너랑 그 집에서...“ 

            “...........-!!!!!!!!!!” 

            하느님.. 

            ...이 빌어먹을 하늘-!!!!!!!!!! 

            나는 숨통까지 죄여올 듯, 나를 끌어안은 단단한 팔 안에서 간신히 눈을 떴다. 녀석이 내 손등을 들어 십자무늬 상처에 입 

            맞췄다. 

            마음이 욱씬거린다. 

            이유도 없이 그 행동이 더 아프게 나를 몰아쳤다. 

            설명할 수 없을만큼 나는 울고 싶었다.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나..라는 생각이 나에게는 그 때서야 절실하게 떠오른다. 

            질끈- 여전히 마음을 묵직하게 누르는 통증. 그 기묘하게 뒤틀린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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