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이런 일은 전에 한번도 없었다. 이렇게 이성이 완전히 무너지고, 내 몸에 죽어있던 감각이나 감정이 동시에 동물처럼 튀어나온
적은 한번도 없었다.
나는 그동안 그토록 절제하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손을 움직일 수도 없이 침대에 누워 있자, 녀석이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다시 담배를 빼어 문다.
“제가 심하다고 생각하시겠지만......”
“...............”
“사실은 선배의 그 우는 모습을...
강실장님 아니라 은협이 선배에게 보여줬으면 하고 바랬습니다..”
“............-!!!!!!!!!!!!!”
나는 내가 오늘 느껴버렸다는 것에 가장 절망했다. 어차피 강원우야 이 방에서 벌어지는 일을 뻔히 알고 있고..비록 그에게는
충격이었겠지만, 나에게는 그보다 더한 충격이 있었다.
바로 느꼈다는 것...
이런 관계에서 반응해버린 내 몸과, 아무리 약기운이었다고 변명해봐도 지워지지 않을 강렬한 쾌감.
또다시 나는 무서워졌다. 내가 나 아닌 것으로 변해가고, 단순한 배출구의 역할에서 쾌감을 느껴버린 스스로에게 깊게
충격받는다.
“날 놓아줘.”
처음으로 부탁하듯 말했다.
이렇게 정색을 하고 애원한 적은 한번도 없다. 그만큼 나에게는 자존심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러나 이
사내는 그런 나같은 종속들이 가장 적절하게 망가지는 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녀석은 나를 그냥 심심풀이 노리개, 그리고 단순한 지난날의 복수의 대상, 혹은 채무 관계를 해결할 적절한 열쇠 등등으로
여길지 몰라도, 나는 이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이렇게 머리 속이 텅 비는 듯한 격렬한 자극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원하는 몸이 되어 간 것도 깊게 고통스러웠다.
“내가 놓아주어도 선배는 정신 못 차려요.”
그러나 여전히 잘생긴 미간을 조금 흐리며, 녀석은 씁쓸하게 대답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허한 표정에 나는 잠시 시선을
피했다.
“오늘 윤은협을 만났습니다.”
“............-!!!!!!!!!”
“그는 선배를 잡고 있다는 내 말에 길길이 날 뛰더군요.
...이만하면 원하는 반응 아닙니까.“
그렇다고 너 같으면 이런 상태로 녀석에게 돌아갈 것 같아??
다시 한번 불이 날 것같은 눈동자로 쏘아보자, 녀석은 쓰게 웃으며 담뱃불을 비벼 끈다.
“하지만 선배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감정을 숨기고 적당히...윤은협 곁에 있을 겁니다.”
“......놓아주기나 해.
내가 돌아가서..
그 돈을 갚도록 만들어줄게.“
그러나 녀석은 작게 고개만 저을 뿐이다. 이를 갈며 자신을 노려보는 내게, 일말의 표정도 없이 그는 그 방을 나갔다.
언제나 손님처럼 굴고, 손님처럼 행세하며 철저히 나를 길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정오에 나는 행동에 나섰다.
필사적으로 탈출해야 할만큼 뭔가 쫓기는 기분이 된 것이다.
외출은 처음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에 조금 떨어진 종로에서 은협을 만났다. 그것도 공개적인 장소보다는 작은 여관에서.
우리는 메일로 주고 받은 내용처럼 서로 다른 시간에 여관에 투숙했다. 그러나 약속 시간에 내 방으로 찾아온 은협은 턱이
떨어져 나갈 듯 놀래며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너!!!!!!!!!!!!”
질끈-
나는 눈을 감는다. 언제나처럼 냉철하고 이성적인 친구인 유기연이다. 이 녀석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
그러나 녀석은 다그치듯 날뛰기 시작했다.
“강서준이 그 자식이 무슨 짓을 한 거야!!!
너를 협박이라도 했어??!!!!!
얼굴이 왜 그래?
왜 그렇게 창백해진 거야?? 엉??
넌 이런 녀석이 아니었잖아!!!!!“
아아..그래.
협박했지. 바로 너에 대한 내 감정을.
그러니깐 소리 좀 그만 질러. 안 그래도 머리가 떨어져 나갈 듯 아파.
“돈은 마련했어?”
나는 질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누르며 겨우 대답했다. 가장 중요한 본론부터 매듭짓고 싶었다. 날뛰는 어린 사자는 나중에
설명해줘도 늦지 않다.
“돈?
물론 마련했지!!!“
그러나 녀석은 역시나 내 예상에 걸맞게 1억밖에 마련하지 못했다.
“내 집 세를 받아내라니깐..”
언제까지 이 상태로 지내야 하나..라고 중얼거리며 나는 냉정하게 잘라 말한다. 윤은협도 지금 상황에서는 위로가 되지
못했다. 내가 왜 이 따위 녀석에게 반해 지금까지 모진 고통을 겪었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그러나 녀석은 그 순수하고 맑은 눈빛으로 곤혹스러운 듯 내 타박에 고개 젓는다.
“하지만, 집이 빠져야 계약금을 받지!
서준이 일당들이 무슨 수를 쓴 건지, 아무도 집을 보러 오겠다는 사람이 없다구!!!...“
맑고..
언제나 상대방을 의심없이 믿는 이 눈초리.
나는 갑자기 그 동공을 오랜만에 쏘아보며 마음이 싸하게 아팠다. 아니 울컥-하고 뜨거운 기운이 식도를 타고 흘렀다.
조금 살이 빠지고 많이 하얗게 질린 표정. 여관 속 거울의 나는 그런 모습이었다. 살이 빠지는 바람에 옛날부터 문제였던 한
쪽 눈의 홑겹의 쌍꺼풀이 드리워졌고, 밤마다 시달리는 것을 대변하듯 눈 밑이 검게 피로로 차 오른다. 그 바람에 눈은 더
커보였고, 그렇게 노리개감으로 갖고 놀만한 구석은 아무리 봐도 없지만..그래도 아무튼 이전의 내 모습은 아니다.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서 예나 지금이나 처음보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재수없다고 생각할만 하지만, 지금 그 눈꼬리 끝에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매달려 더욱 날카로운 빛이 담겨 있다. 나는 매번 거울을 볼 때마다 타인 이상으로 이미 나 자신에게 절망하고
있었다.
그것을 같이 느끼기라도 했는지 은협이 스스로의 머리를 마구 때리며 자조적으로 말했다.
“나는 바보야!! 내가 바보야!!
내가 머저리 미친 놈이지!!
왜 그런 사고를 쳐서, 너 까지-!!!!“
정말 자책하는 것이다. 녀석은 분해 죽겠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마구 박아대며 울먹이기 시작한다. 그 덩치 큰 녀석이 스물
일곱이나 되어서 자책하는 꼴은 못 봐주겠다.
휴우-라고 짧게 한숨을 내쉬며 나는 손을 내밀었다. 은협은 고통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 선 채로 내 목을 와락 끌어
안는다. 이 아무 것도 모르는 착해 빠진 녀석은 절대 모를 것이다.
내가 어떤 일을 당해왔는지..
그리고 사실, 이 녀석에게만은 죽을 때까지 비밀로 지켜야 한다.
“은협아...........”
녀석의 가슴팍에서 소금끼 냄새가 났다.
무더운 계절을 등 뒤로 하고 달려온 체향이다. 가만히 숨을 들이쉬자, 퍽 오랜만의 그 체취가 알싸하게 마음을 움직였다.
“돈을 마련해.
너 강서준이 어떤 녀석인지 잘 알 거 아냐....강은협.
부탁이니깐..
내 집..어떻게든 처분해 봐...“
내가 중얼거리자, 내 머리 위에서 녀석이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마침 생각났다는 듯 중얼거린다.
“나..........결혼해.”
“.....-!!!!!!!!!!”
“...물론 이 일이 다 마무리 되고 니가 무사해지고 나서 말야.”
아아..
나는 지금까지 뭘 기대해 온 걸까?
바로 이런 말? 바로 이런 헤어짐?
모든 것이 항상 이 녀석 때문에 일어났다.
처음 강서준의 누나 강여준을 만났을 때가 문득 떠오른다. 그녀는 젖어 있었고, 파리해진 얼굴로 눈가에 기미마저 껴 있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차갑고 침착해지려 애썼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너무나 그녀가 가련하고..또 한편으로 그녀의 아기도 불쌍했다. 철없는 은협 때문에 우리는 피해자가 되어 버렸고, 나는 그
녀석을 짝사랑하는 내 처지마저 잊혀질 정도였다.
그래도 애써 입을 열어 그녀에게 은협을 놔주라고 말했다. 차가운 내 태도에 질린 그녀가 쓰러졌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그것도 학교에서 하혈하는 바람에 바로 퇴학당했다는 것도.
바로 그 가슴 아픈 일 때문에, 나는 강서준과 처음으로 만났던 것이다. 당시 고등학교 이학년인 강서준과 고등학교 삼학년인
나는 서로를 진하게 노려보았다.
서준은 나를 한대 칠 기색이었지만, 그것을 애써 눌러담으며 냉정하게 말했었다.
‘당사자인 윤은협은 어디가고 선배가 나오셧습니까.’
그 때 내가 말했었다.
‘그 녀석과 나는 한 가족이나 다름없어.
볼 일 있으면 나에게 말해.
....한 대 때리려거든 나를 때려.‘
그러나 그 때도 여전히 어른스러운 거친 눈빛의 서준은 아름다운 얼굴을 흐리며 낮게 내뱉었다.
‘여차하면 윤은협 대신에 자신을 죽이라고 말하겠군요.’
나는 두 번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
그 때, 녀석이 각목을 쥐고 잠시 망설였다. 당시에 불던 차가운 바람이 뺨에 닿았다. 한동안 뭔가 곰곰이 생각하던 녀석은
이내 내려칠 기색이었던 각목을 조용히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조금 당황했던 나, 그리고 여전히 조용한 음성이 강서준.
서준은 나를 똑바로 노려보며 그 때 말했었다.
‘윤은협은 복받은 인간입니다.’
‘....................’
‘자신을 대신해서 선배가 그렇게 나서는지 죽어도 모를 인간이죠.
....그래서 윤선배에게 유기연이 필요한 거겠죠...‘
그리고 녀석은 돌아섰다.
잠시 멍해진 나를 두고, 강서준은 그 날 그렇게 복수를 단념했다. 차라리 그 때 몇 대 맞거나 죽었다면 지금처럼 참혹하진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머리 정수리에서 농구공만한 눈물을 뚝뚝 흘리는 윤은협을 향해 나즉히 중얼거렸다.
“울지 마, 개새꺄......”
“.....하지만,............”
“..울지말고 돈이나 마련해.”
그래야 이제야 내가 널 떠나지..
완전히 포기하고 정리하지...라고 나는 들리지 않게 속으로 중얼거린다. 강서준이 뭘 생각했는지 몰라도 한가지는 성공했다.
..
적어도 나를 윤은협에게서 떼어 놓는 것- 그것이 바로 서로에게 더한 복수라는 걸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