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한 가지 중요한 점을 깨달았는데, 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은협과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서준이 지금도 딱히 그를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들 세 사람은 서로 적대시 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한 때 은협이 사귀었던 여자의 동생이었다.
그런데 9년이나 흘러서 다시 이런 상황으로 만나야 하다니!!!!
나는 뜨금할 정도로 속이 탔는데, 손이 묶여 있는 곳에서는 식은땀이 간간히 배어나왔다.
“저기, 강서준!!..
나는 은협이네 회사랑 아무 상관이 없어...
니가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인데............“
나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말하려 애썼다. 비교적 정확하게 내 뜻을 전달한 거라 믿었다. 그러나 녀석은 조금 생각하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다른 녀석들에게 잠시 자리를 비워달라고 부탁한다.
“선배님.”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건지나 알자.
이게 뭐야.“
녀석과 나는 고등학교 졸업이후 몇 년동안 서로 격조하며 지내왔다. 그런데 난데없이 나타나 이 대낮의 납치극이라니. 도대체
은협과 서준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알아야겠다. 과거, 우리들이 고등학생이었을 때 일 말고....지금 내가 모르는
은협과 이 녀석 사이의 일!!!
그래야지 속이라도 시원하지.
“너, 이러는 거 법에 위배된다.”
답답한 어조로 조금 언성을 높이자, 녀석이 나에게 물컵을 내민다.
순간적으로 손을 내밀 뻔 했다. 비록 묶여 있었기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지만-!
“일단, 드세요.”
그는 마치 아량좋은 사람이 그렇듯,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내가 고개를 젖힐 때 물을 붓는다. 꼴 한번 좋군..이게 무슨
날벼락인가..라고 고민하며 나는 그러나 잠자코 받아마셨다.
어쨌든, 고등학교 때부터 날고 기는 녀석으로 가희 은협과 맞장을 뜰 녀석이었는데, 졸업하고 나서 진로가 이렇게
정해졌나보다. 녀석과 은협에 대한 여러 가지 과거들이 떠올랐다. 나는 서준과 그다지 친하진 않았지만, 고등학교 때 딱 한번
만났다. 바로 은협의 차 버린 여자친구, 서준의 누나에 대한 일 때문에 몹시 껄끄러운 사이로 만났었다.
그러나 스물 일곱이 되어서도 마찬가지 상황이 발생할지는 꿈에도 몰랐다. 역시 우리는 은협 때문에 만났다. 달라진 것은
없다. 서준은 십여년 전의 그날들처럼, 침착한 목소리로 조용히 상황을 설명한다.
“강은협 선배는 우리에게 거액의 빚이 있는데다가, 지금 종적을 감췄습니다.”
“..........-!!!!!!!”
그럴 리가.
은협이 나에게 전화한 것이 오늘 낮이었단 말이다.
놀란 눈으로 녀석을 쏘아보자, 서준은 표정없는 얼굴로 침착하게 설명하듯 덧붙인다.
“오늘 낮에 선배에게 전화한 것이, 아마 일주일 동안 은협이 선배가 걸었을 처음의 통화입니다.”
“..............하......... 하지만...나는...”
은협은 나에게 그런 말을 일절하지 않았다. 녀석은 나에게 그저 빌려 쓴 돈 때문에 사람들이 사무실을 점령하고 있다고 말했을
뿐.
또 한편으로 아무리 은협이 이들에게 거액을 빌렸어도 나와는 사실 상관없다. 내가 은협을 좋아한다는 감정 빼고 녀석과 그렇게
깊은 관계도 아니다. 가족같은 관계이긴 하지만, 정말 가족도 아니다.
그런데 납치라니..아니 이거 인질 아닌가, 인질.
“나는 은협이와 아무런 관계도 없어.”
“........알고 있습니다.”
서준은 다시 얼음을 물컵에 담으며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알면 풀어달라고, 이 새끼야..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는다. 이런 싸움에서는 이성을 잃은 사람이 지는 거다.
“물론 선배를 납치했다고 해서 은협 선배가 돈을 내놓으리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녀석은 바에 놓여져 있는 양주를 잔에 부으며 느긋하게 설명한다. 아니, 녀석에게는 느긋한 일인지 몰라도 나에게는 아니다.
나는 적어도 내일 출근해야 하는 직장인이다.
친구를 잘못만난 게 그렇게 인생 꼬이는 일이라니. 마지못해 녀석의 비서 역할을 했던 게 그렇게 잘못이라니-!!! 이 땅의
우정들은 모두 이렇게 바닥을 치고 있단 말인가!
지금까지 살면서 여러 가지 안 좋은 일을 많이 겪어 봤지만, 이런 식은 두 번째였다. 하나는 내 손등에 짐승 할퀸 자극이
남은 바로 열 아홉의 그 골목길.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바로 지금.
항상 냉정하고 이성적인 나도 잠시 긴장으로 몸이 아파왔다. 살짝 떨리는 아랫입술에 힘을 주어, 여느 때의 침착함으로 겨우
따졌다.
“그럼 이거 풀어.
나랑 은협이는 아무런 관계도 아냐.
나도 윤은협이 어디로 숨었는지 알 길 없으니 말야.“
정색을 하고 딱 잘라 말하자, 내 머리에 묻어 있던 물기가 셔츠로 뚝뚝- 떨어진다. 서준은 그 말에 대답없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다시 양주를 한모금 축인 채 가까이 걸음을 옮긴다.
순간적으로 움찔-
나는 얼어붙을 것 같은 오싹함에 뒤덮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오싹함이었지만, 녀석은 개의치 않고 내게 손을 내밀며 턱을
꽉 눌러 잡았다.
“아파- 이 개새꺄...!!
아프다구..-!!“
손가락 두개에 어떻게 이런 센 힘이 있을까..라고 짜증이 났다. 필사적인 힘을 다해 고개를 이리 저리 저어본다. 녀석의
힘을 피하기 위해 씨름한다. 그러자 녀석은 잡고 있던 턱을 놓으며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순간적인 아픔과 이
부자유스러운 상황에, 나는 짜증이 슬슬 밀려왔다.
“하지만 선배님은 썩 괜찮은 인질입니다.”
“...........무슨 소리야, 나는 은협이랑 아무 관계도 아니라니깐!!.......”
그러자 녀석은 쓰윽 웃었다. 하얀 셔츠 위로 단단한 팔짱을 낀 채, 내려다보며 웃는 미소는 일종의 비웃음처럼 차갑다. 그
미묘한 냉기에 저절로 오금이 저릴 정도다. 나도 싸움이라면 지지 않을 정도로 붙을 자신이 있지만, 그렇다고 이런 냉랭함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은협과 이 녀석, 그리고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의 객기와 호기였을 뿐.
씩씩거리며 노려보는 내 눈길을 의식한 듯, 서준은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선배님이 강은협을 좋아하는 거 다 압니다.”
“.........-!!!!!!”
“그것도 꽤 오랜 시간이라는 것도.”
비겁한-!!!
..이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타인의 마음을 공개해서 짓밟으려는 아주 나쁜 속임수다. 그럼에도 속수무책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은 사실이었고, 또한 웬만한 정보 수집력을 가진 녀석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일이다. 더군다나 녀석은 단호하고
단단해 보였다. 쉽사리 부정할 여지를 만들지 않은 것이다.
“은협이에겐 말하지 마.”
나는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겨우 되쳤을 뿐이다. 어차피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녀석은 다 알고 하는 말이다. 숨긴다고
숨겨질 일이 아니다. 은협이 녀석만 모르면 된다. 지난 7년 동안 내가 감춰온 감정을. 나를 가족같이 믿고 의지하는
은협에게 나의 그런 부도덕한 마음은 일종의 배신이다. 나는 그 순수하고 철없는 마음이 나에게 실망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저 지금 상태로 계속되기만을 바랄 뿐.
그러나 마치 마지막 뒤틀림같은 내 고함에, 녀석은 그저 씽긋 웃었다. 양주를 조금 털어 다시 입에 넣으며 그는 가만히
테이블 위 수화기에 손을 올린다.
"말할 생각 없습니다.“
“................”
“단지 윤은협 이사가 그 젊은 나이에 그만한 성공을 한 뒷 배경에 당신이라는 남자가 있고, 또 한편으로는 범법에 해당하는
주가조작이 있었다..라고 알고 있을 뿐입니다.
사실 그것만이 아니죠.
...윤 선배는 우리에게 불법적인 돈을 거액으로 여러번 차액해 갔습니다.”
“...........-!!!!!!!!!!”
윤은협의 주가 조작.
그것으로 인한 불법 이득과 급속한 회사 성장.
내가 은협이 녀석에게 가진 감정이 비밀이라면, 은협의 회사는 은협 자신의 비밀이었다. 그러나 서준은 어찌된 영문인지 둘 다
알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명백한 협박이다. 둘 다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빌미로 뭔가 얻어내려는 수작이다.
허나 강서준이 원하는 게 뭔지 알 수 없었다. 녀석은 마치 협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내가 이성을 잃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의자 뒤로 묶여 있는 손의 부자유스러움과 조금 전에 끼얹어진 물기 때문에 급속히 하락하는 체온, 그리고 녀석이 들끓게
만들어 놓은 분노 속에서 나는 잔뜩 그를 노려본다. 강서준 쪽에서만 별로 신경쓰지 않고 양주를 홀짝일 뿐이다.
녀석은 그 이상 이 협박과 기묘한 납치극의 전말을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전화기를 들어, 밖의 누군가에게 작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린다. 뭐라고 하는지 내 쪽에서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이내 문이 일리고 아까 보았던 강실장이라는 남자가
들어섰다.
강실장 역시 잘생긴 사내였다. 서준의 차갑고 냉혈한 같은 표정에 비해서, 그는 조금 따뜻한 느낌을 주는 부드러운 갈색
동공을 가졌다. 그러나 이 사내 역시 방심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조직의 ‘실장’이라는 직급이면 아무리 명분만이 그렇다 해도 꽤 센 권력을 가진 거 아닌가.
그의 등장으로 인상을 더욱 찌푸리자, 강실장은 서준의 얼굴을 한번 돌아보며 부드럽게 나에게 미소지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