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03
“이쯤에 심으면 될까요?”
“응, 거기서 조금 더 오른쪽으로 심으면 될 것 같아.”
“여기요?”
“응응, 좋다. 거기.”
촥- 촤악-
피오나가 삽으로 땅을 판다.
촉촉한 땅 아래에 나무열매의 씨앗을 심고 흙을 덮으면, 이브가 피오나를 도와 흙을 고루고루 퍼뜨린다.
스윽, 스윽-
둘 다 허리를 숙이고 있어서 그런지, 포동포동한 엉덩이라인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던전 안 거주구역에는 오직 내 아내들만 있기 때문에, 그녀들은 편안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진짜 예쁘다.’
피오나와 이브는 역시 최상급의 암컷들이다. 외출하느라 얼굴을 며칠 못 봤다고, 그녀들이 더욱 예쁘게 느껴졌다.
츤츤거리는 매력이 있는 피오나는 그 매력 그대로 날카로운 눈매를 하고 있었고, 이브는 반대로 조금 쳐진 눈꼬리로 색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두 아내의 몸을 진득하게 바라보며,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피오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응......?”
“왜?”
“음, 아뇨...... 뭔가 기척이 느껴져서요. 마치 누군가가 저희를 보고 있는 듯한......”
“그래?”
일부러 기척을 지우지 않고 접근했기에, 피오나는 내 시선을 느낀듯했다. 나는 그대로 그녀들을 향해 걸어가, 내 몸을 노출했다.
“어? 사람......!?”
“어, 어떻게 여길......!”
피오나와 이브가 동시에 놀라며 나를 경계했다.
나는 그녀들의 반응에 피식 웃었다.
‘이게 당연하겠지.’
어차피 알아볼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애초에 아내들은, 내 인간 모습을 알기는커녕 내가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니까.
그렇기에, 이렇게 나타나면 나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야? 대체 어떻게 공략구간을 뚫고 던전의 거주 구역까지 들어왔지?”
피오나가 순식간에 단검을 꺼내 들고는 나를 향해 겨누며 물었다. 나는 가볍게 답했다.
“그야 내가 던전의 주인이니까. 나야. 피오나, 이브. 너희들이 사랑하는 남편인 촉수괴-.”
쐐애애액-!
투콰앙-!
“......물.”
말하던 도중에 갑작스럽게 단검이 날아왔다.
‘실화냐......?’
피오나가 투척한 단검이 내 얼굴 바로 옆의 나무를 파괴하고 들어가, 깊숙이 박혔다.
공격 자체는 여유롭게 피했지만, 속으로는 상당히 놀랐다. 이렇게 순식간에 공격해올 줄은 아예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피오나는 살기를 풀풀 풍기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감히 촉수님을 사칭해? 큰 실수를 저지른 거야.”
그녀의 옆에 있던 이브가 나와 피오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피오나, 어떡하지?”
“어떡하긴요, 언니. 촉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던전에 침입한 생물은 누구든 적이니. 죽이라고.”
“으응, 마, 맞아......”
“예외가 있으면 예쁜 여자뿐. 몸매가 좋고 예쁜 여자의 경우, 촉수님이 직접 판단하실 테니 가능하면 살려서 잡아놓으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상대는 남자니 그럴 필요도 없어요.”
으음.
확실히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특수 수족, 촉수 수족, 설치촉수들이 던전을 지키고 있어 침입하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지만, 만약에 그를 뚫고 들어온 상대가 예쁜 여자일 경우 나는 아내들에게 가능하다면 상대를 죽이지 말고 제압하라고 하였다.
물론, 그게 버거우면 그녀들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라고 하긴 했지만.
“그, 그런데 설마 여기까지 침입할 사람이 있을 줄은......”
“그러게요. 지금까지 침입해온 몬스터는 다 던전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입구에서 죽었는데...... 아무래도 운 좋게 촉수님의 수족들의 눈을 피해서 들어온 모양이에요. 물러서세요, 언니. 제가 상대할게요.”
“으, 으응.”
터벅, 터벅-
피오나가 이브 앞에 서더니 내게 단검을 겨누었다.
“한 번은 피했지만, 두 번은 없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앞서 투척했던 단검은, 어느덧 그녀의 마력에 이끌려 다시 그녀의 손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피오나가 살기를 풀풀 풍기며 내게 단검을 겨누다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내 옆에 있으면 츤츤거리고 부끄러워하면서도 언제나 교태를 부렸으니까.
맨 처음 그녀가 에이미와 함께 던전을 쳐들어왔을 때가 생각났다.
‘만약 지금 바로 촉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오해는 전부 풀리겠지만......’
모처럼의 일이니까. 그러기에는 아깝다.
내 마음속에서 장난끼가 발동했다.
“잠시만요. 같은 사람인데 왜 적대하는 거죠?”
나는 순진한 청년인 양 그녀에게 말했다.
“여기는 내 주인이신 촉수님의 던전. 외부인 따위가 들어올 곳이 못 돼.”
“주인이신 촉수님? 그럼 당신은 몬스터를 주인으로 섬기고 있는 건가요?”
“너한테 해줄 말은 없어. 금단의 영역에 발을 들였으니, 죽는 수밖에. 그리고 왜 모르는 척을 하지? 좀 전까지 촉수님을 사칭했던 주제에. 자비를 구해도 소용없어.”
쐐애액-!
피오나가 내게로 돌진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라는 듯, 나를 공격하는 데 망설임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촤아아악-!
마력이 폭사하며 피오나의 움직임을 증폭시켰다. 단검이 내 목을 노리고 급소를 향해 정확히 휘둘러진다.
샥-
나는 여유롭게 공격을 피했지만, 피오나의 공격에 담긴 위력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더 강해진 것 같은데?’
엘레나한테 피오나를 가르쳐달라고 했는데, 그 수업의 효과가 벌써 찾아오고 있는 건가. 피오나의 단검술은 명백히 이전보다 날카로워졌다.
게다가 지금 이 몸과 얼굴의 개연성에 흔들리지 않고, 같은 인간인 침입자를 제거하려고 하는 저 망설임 없는 태도.
조금 감동이긴 하다.
나는 피오나의 공격을 피하면서, 입을 열었다.
“피오나. 나야, 촉수 괴물. 공격하지 마.”
“끝까지 사칭하겠다는 거야? 촉수님은 너같이 빈약하지 않고, 훨씬 늠름하신 몸체를 가지셨다고!”
잠깐, 그래도 인간의 몸과 촉수 괴물의 몸을 비교하는 건 아니지.
촤아악-!
촤아아악-!
“그리고 단검술도 진짜 많이 늘었다.”
“자꾸 친한 척하지 마!”
빠지지직- 스펑!
오.
피오나의 단검에서 미약한 전류가 흘렀다.
마치 엘레나처럼, 단검에 뇌전의 힘이 담겼다.
아직 어설프긴 하지만, 명백히 마력 속성을 단검에 부여한 것이다. 엘레나에 비해서는 공격력이 한참이나 모자라 보이지만, 제대로 사용하면 상당히 강력한 위력을 보일 것이다.
‘내가 나가 있는 동안 엄청나게 수련했나 보네.’
피오나가 더욱 기특해졌다.
”어쩔 수 없네, 피오나. 증명하려면 자지를 넣어주는 수밖에.”
“내 몸을 노리겠다고? 역겨운. 편히 보내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
피오나는 더욱 이를 악물고 나를 빠르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화르륵- 화륵-!
뇌전에 이어서 이번에는 화염까지.
엘레나에게 속성 과외는 제대로 받은 듯하다.
나는 피오나의 공격을 피하면서, 이상하게 웃음이 나오는 걸 느꼈다.
피오나가 온 힘을 다해 공격하는 게, 마치 자신이 이만큼 성장했다고 자랑하는 것 같았다.
“하악, 학, 하악......”
체력에도 한계는 찾아오는 법.
압도적인 스피드를 가진 나를 맞추겠다고 무리해서 체력을 끌어 사용한 피오나는, 얼마 가지 않아 호흡이 흐트러졌다.
“이게 끝이야?”
“허억, 헉, 하악...... 아, 아직 멀었어......!”
“아니야. 이 정도면 많이 늘었네. 수고했어.”
“애 취급하지-!”
티잉-
“헉......!”
나는 피오나나가 휘두르는 단검을 피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막았다. 그리고 엄지와 검지로 두 단검을 잡고 위로 날려, 아예 무장해제를 시켜 버렸다.
“이, 무, 무슨......”
“피, 피오나......!”
피오나가 당황해했고, 나와 피오나의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이브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어, 언니! 어서 엘레나 언니랑 유리 언니를......!”
“으, 응!”
뒤늦게 이브가 저택을 향해 달려갔지만, 나는 피오나의 몸을 마력으로 묶어두고 순식간에 이브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샤샥-
“아......!”
콱-
이브의 앞에 서서 그녀의 손목을 붙잡자, 이브가 싫은 표정을 하면서 소리쳤다.
“윽! 이거 놔요!”
우우웅-!
이브의 손에서 신성력이 발휘되었다. 그녀의 몸으로부터 나온 신성의 기운은 마치 창처럼 바뀌더니, 나를 향해 발사되었다.
그리고.
쑤우욱-
“에......?”
이브의 신성력이 모두 내 몸체 안에 흡수되었다.
“뭐, 뭐지? 하압!”
이브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한 번 더 내게 신성력의 창을 날렸다.
쏘오오옥-
이번에도 마찬가지.
이브가 쏜 신성력의 창은 내 몸체에 완전히 흡수되었다.
“어......”
이브는 커다란 눈을 깜빡깜빡하더니, 갑자기 뭔가를 깨달은 듯 내게로 다가왔다.
“이, 이브 언니 뭐해요! 어서 엘레나 언니랑 유리 언니를......!”
“잠시만.”
이브는 아예 내 바로 앞에 서서 신성력을 흘려 넣었다. 그러자, 그녀의 신성력이 내게로 남김없이 흡수되었다
그 순간, 그녀의 눈빛이 바뀌었다.
경계에서 놀람.
놀람에서 그리움으로.
“혹시...... 촉수신님?”
“응?”
“정말로 촉수신님......이세요? 촉수신님의 기운이 느껴져요.”
이브가 나에 대한 경계를 완전히 풀었다. 그녀는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어, 언니! 무슨 소리예요!”
“그렇지만...... 촉수신님의 기운이 느껴져......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따뜻한 기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확신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이브한테는 이 조잡한 연극이 먹히지 않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