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89
말을 놓고 난 뒤에, 나는 세라와 간단히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오빠는 어쩌다가 이 마을에 오게 되셨어요?”
세라가 문득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어쩌다가 이 마을에 오게 되었냐.
사실은 내가 촉수 괴물인데, 괜찮은 암컷이 있으면 따먹고, 마을에 있는 마력석도 조금 훔치러 왔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여행하다가 들렸어. 프리지아 대연합에 있다가, 이번에는 국가 연합 쪽을 돌아보려고 했거든. 중립 구역을 넘어와 쭈욱 올라왔더니, 마을이 보이더라고.”
“아......! 여행.”
내가 말하자, 세라가 감탄하며 물었다.
“그, 그러면, 오빠는 여행자인 거예요?”
“응, 그렇지.”
“와아......”
이 세계에서 여행자라고 한다면 그 의미가 좀 남달랐다.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여행자.
일종의 낭만이 있는 직업이다.
그리고 여행자라는 소리는, 일신의 무력이 굉장히 강하다는 소리와도 일맥상통했다.
이 세계의 숲과 협곡에는 몬스터들이 득실거리고, 산에는 산적들이 도사리고 있으니까. 애초부터 강하지 않으면 결코 세계를 여행하는 짓 따위를 할 수가 없다.
‘강력한 호위를 고용하고, 연결돼있는 곳이라면 항상 포탈을 타고 다니면 여행을 할 수는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돈이 필요했다.
여행자의 95%는, 본인 자체가 스스로 A클래스 모험가 수준에 들 정도인 강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럼...... 유진 오빠는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응? 뭐가?”
“그, 여행자시면 이제부터...... 어디로 가실 건지......”
세라가 우물쭈물하며 물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미약한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여행자라고 밝힌 이상, 그녀는 내 행선지에 따라서 자신들의 처우가 결정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여행자는 단순히 여행하는 사람일 뿐이지, 누군가를 구하기 위한 사람이 아니다.
내가 세라와 세리를 발견하긴 했지만, 그녀들을 구할 의무 자체는 전혀 없었다.
설령 지금 바로 ‘이야기 나눠서 즐거웠어. 그럼 잘 있어’라고 말한 다음 그녀들을 내버려 두고 내 갈 길을 가더라도, 인성이 안 좋다고 혀를 차는 사람은 있을지언정 책망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목적지라......
나는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다음 목적지는 론도 제국으로 생각하고 있어. 볼만한 게 많은 곳으로 유명하거든.”
“아...... 그, 그렇군요...... 론도 제국......”
론도 제국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두 자매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론도 제국은 로셸 왕국 바로 옆쪽에 있는 제국으로, 이대로 북서쪽으로 쭉 가면 도달할 수 있는 국가였다.
그 말은 즉, 로셸 왕국의 영토에서 벗어난다는 뜻과 같았다. 세라와 세리가 가야 하는 방향과는 반대쪽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바뀌었어.”
“네?”
“원래는 론도 제국이 다음 목적지였는데, 너희 둘을 발견했잖아.”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너희는 내가 로셸 왕국의 안전한 마을까지 데려다줄게.”
“어? 저, 정말이요?”
세라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곤란해하고 있는 사람들을 두고 혼자 갈 수는 없잖아.”
“아,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세라가 연신 고개를 숙였다. 나는 손을 저었다.
“감사 인사는 됐어. 그보다 걸을 수는 있겠어? 3일 전에 마을이 습격받았으면, 그동안 계속 지하실에만 있었다는 소리인데.”
내가 걱정된다는 듯 묻자, 세라가 고개를 주억였다.
“아, 네......! 괜찮아요. 지하실에 비상식량이 있어서 밥도 먹었고...... 어디를 다치지는 않았어요. 세리도 괜찮지?”
“응! 언니.”
둘의 대답에 나는 몸을 풀었다.
“다행이네. 그럼 바로 출발하자. 체력이 있을 때 최대한 많이 걸어 둬야 나중에 편해.”
“아, 네......!”
나는 세라와 세리를 데리고, 지하실에서 나왔다.
끼이익-
철컹-
“아......”
지하실에서 나온 세라와 세리는, 온통 망가져 버린 마을을 보고 다소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습격받을 당시 바로 지하실로 들어갔으면, 밖의 상황을 보지 못했을 테니까.
이렇게까지 마을이 망가졌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래도 마음을 굳게 먹었는지, 그녀들은 마을에 대해 별달리 하는 말 없이 나와 함께 다음 마을로 향하는 길로 들어섰다.
“이 길을 따라서 3일 정도 걸어가면...... 빈보나라는 커다란 마을이 나와요. 그곳은 성벽도 있고 경비도 탄탄한 마을이라서, 아마 무사할 거예요.”
“그렇구나.”
세라는 걸으면서 내게 이것저것을 설명해 주었다.
나는 세라의 말을 들으며 차근차근 길을 따라서 걸었고, 어느덧 몬스터들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크르르-.”
“크륵......!”
터벅, 터벅-
“아, 유, 유진 오빠......! 몬스터들이......!”
“어떡해요......?”
세라와 세리가 내 몸에 딱 달라붙었다. 그녀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넘실거렸다.
길이라고 해봐야 숲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기 때문에, 당연히 오크와 트롤들에게 점거당한 곳이었다.
다섯 마리의 오크와 세 마리의 트롤들은, 먹잇감에 입맛을 다시며 우리를 조여왔다.
“크르르으......”
특히나 오크들은, 그들의 커다란 자지를 잔뜩 발기시키고 있었다.
아무래도 세라와 세리가 상당히 예뻐서, 그녀들을 범하고 성욕을 풀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다.
‘어딜, 내가 찜한 여자들한테.’
나는 불안해하는 세라와 세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 날 믿어.”
“아......”
“오, 오빠......”
세라와 세리가 안심하도록 어깨를 잠시 토닥여준 나는, 앞으로 한 발자국 나아갔다.
그다음, 순식간에 손에서 마탄을 생성해냈다.
“마, 마법......!”
“와......”
푸른색 기운이 회전하고 있는 구체는, 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그것을 동시에 여덟 개나 생성해냈으니 더더욱 그럴 것이다.
나는 둘의 놀라는 표정을 구경하며, 마탄을 각각의 몬스터들에게 빠르게 쏘아 보냈다.
투콰악-!
마탄에 맞은 몬스터들은, 역시나 몸체가 흔적도 없이 터져나갔다.
* * *
“잘 잤어?”
“아, 오빠......! 네. 잘 잤어요.”
“좁아서 미안해. 조금 더 크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아, 아니에요! 이 정도만 해도 정말 편하게 잘 잤는걸요......!”
다음 날 아침.
세라는 약간 볼을 붉히며 말했다.
세라, 세리 자매와 함께 길을 나선 나는, 어제 하루종일 길을 따라 걸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밤에는, 그녀들이 편하게 잘 수 있도록 작은 나무집 하나를 만들어주었다.
나무를 고정하는 건 고정액이 있었기에,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은 10분도 채 되지 않았다.
세라는 자기가 불침번을 서겠다고 나섰지만, 나는 마법이 있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주변에 몬스터가 오면 알 수 있다며, 그녀들을 편하게 재웠다.
실제로, 이 세계에는 그런 마법이 존재했다.
구역 내에 사람이나 몬스터가 들어오면 알람을 울려주는 마법.
나는 세라와 세리 옆에서 같이 잠을 청했고, 불침번은 미리 생성해둔 촉수 수족 슬라임들에게 맡겼다.
솔직히 자는 와중에도 위협이 느껴지면 알 수 있을 만한 감각을 가졌지만, 그러면 일일이 깨서 싸워야 하니까.
부하들을 자동 사냥시켜두는 게 훨씬 더 편하다.
문제는, 오히려 몬스터들이 아니라 세라와 세리였다.
‘쉽지 않았지.’
옆에 예쁜 여자 둘이 있으니, 건드리지 않기가 쉽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촉수 괴물로 변해 한 번에 먹음직스러운 두 보지를 쑤셔주고 싶었다.
그러나 강제로 따먹을 거리면, 애초에 인간으로 변신한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실험해볼 것도 있고.’
둘과는 자연스러운 섹스를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게, 이 몸으로는 쉽게 가능할 것 같았다.
나는 세라와 세리에게 열심히 호감작을 했다.
워낙 개연성이 뛰어난 얼굴과 몸이라서, 그냥 상냥한 오빠를 연기하며 이야기만 해도 호감도가 쭉쭉 오르는 느낌이었다.
특히나, 둘은 이야기를 좋아했다.
시골에서만 살아서 그런지, 이 세계를 여행하며 겪은 일들이라면서 이야기를 해주니,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흥미롭게 들었다.
‘전작을 플레이해서 다행이네.’
내가 직접 다닌 건 아니지만, 내 머릿속에는 프리지아 대연합에 대한 정보가 아주 많이 들어있다.
전작 게임의 에피소드를 진행하던 중 있었던 재미있었던 이야기들을 몇 개만 풀어도, 세라와 세리를 웃음 짓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둘과 금세 친해졌고, 이틀이 더 지난 뒤 무사히 빈보나라는 다음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기하라! 가만히 서서 신분과 신원을 밝...... 음? 세라양 세리양?”
마을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비병은 나를 보고 경계 태세를 취하다가, 이내 내 뒤에 있는 세라와 세리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중년기에 접어드는 것으로 보이는 장년의 남성은, 아무래도 세라, 세리와 일면식이 있는듯했다.
그는 나와 두 여자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내 분위기를 풀고 경계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세라양과 세리양이 여기는 어쩐 일로......”
그는 둘을 바라보며 물었고, 세라는 경비병에게 지금까지의 일을 설명했다.
라일락 마을이 오크와 트롤들의 습격을 받았고, 그 결과 마을 건물이 전부 무너져내렸다. 사람들은 전멸했고, 둘만 살아남았다.
도무지 믿기 힘든 일이었지만, 마을의 주민인 세라와 세리가 이야기한 내용이라서 경비병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세, 세상에 어떻게 그런......!”
나는 세라와 경비병이 하는 이야기를 옆에서 가만히 들었다.
경비병이 어떻게 세라와 세리를 아는가 했더니, 그는 라일락 마을에 물자를 공급하러 가는 공급대의 호위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마을에 세라와 세리 말고도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여럿 있는 듯, 그들의 이름을 물어보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이분은 여행자신데, 저희를 구해주셨어요. 수상한 사람이 아니에요......!”
“으음......!”
세라가 나를 소개하듯 말했고, 경비병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로셸 왕국 사람들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행자시라고 들었는데, 혹시 어디서 오셨는지 말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경비병의 말투는 처음보다 훨씬 친절해져 있었다. 나는 세라에게 말했던 것과 똑같이 말했다.
“프리지아 대연합에서 왔습니다. 하카피아 통치령에 있다가, 이번에 중립 구역을 통해 왕국으로 넘어왔습니다.”
“으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우선, 임시 통행증을 발급해드리겠습니다.”
경비병은 성문을 열어주었고, 나는 세라, 세리와 함께 무사히 마을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후우...... 라일락 마을이 어쩌다가......”
경비병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세라와 세리의 표정은 어두워졌고, 나는 실제로는 처음 보는 멀쩡한 이세계의 마을에 조금 감탄했다.
빈보나 마을은 라일락 마을보다 훨씬 더 규모가 컸다.
도시로 가면 빈보나와도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발전된 건물들을 볼 수 있겠지만, 이 빈보나 마을에서는 현대에서 맡을 수 없는 특이한 향취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세라, 세리와 함께 여관에 들어왔다.
여관 비용은 세라가 계산했다. 그녀는 지하실에서 비상금을 챙겨 온지라, 어느 정도 자금에 여유가 있는 듯했다.
여관의 테이블에 앉자, 세라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 오빠는 이제 가시는 건가요......?”
빈보나 마을에 둘을 무사히 데려다주었으니, 이제 내 역할은 끝났다고 볼 수 있었다.
“음, 그렇지. 오늘 하루만 쉬고 내일 바로 론도 제국으로 출발할 거야.”
“아......”
세라의 표정에 명백한 안타까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 표정을 본 나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막상 무사히 마을에 도착해서 목숨을 건졌지만, 세라와 세리의 얼굴은 별로 좋지 않았다.
비단 그녀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마을 사람들이 다 죽어서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나와 함께 마을로 오는 길을 걸을 때만 해도, 미소 지을 때는 환하게 웃었으니까.
우리는 여관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잘 먹었어. 고마워.”
“아, 아니에요......”
테이블의 분위기는 조금 무거웠다.
스튜와 빵, 고기를 즐긴 나는 배정받은 방으로 올라갔다.
세라와 세리는 201호실을 같이 사용하기로 했고, 나는 그 옆방인 202호실이었다.
몸을 깨끗하게 씻은 뒤, 침대에 앉아서 명상을 했다.
‘인간 폼 이거. 상당히 좋은 것 같단 말이야.’
명상이라기보다는, 조금 더 인간 육체를 잘 다룰 수 있도록 몸속에서 이것저것 촉수를 움직여보며 수련을 했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가시촉수를 조금 빼내어 등이나 팔에 상어지느러미 같은 칼날 가시를 만들어 보기도 했고, 주먹에 둔기촉수를 연결해 근력을 보다 압도적으로 끌어내는 연습도 해봤다.
‘무궁무진하네.’
인간의 몸이지만 이건 껍데기일 뿐. 본체는 촉수 괴물이기 때문에, 내부 구조에 구애받지 않고 나는 여러 가지 전투적인 변형을 취할 수 있었다.
본체인 촉수 괴물만큼은 아니지만, 인간 형태를 취하더라도 나는 내 스테이터스보다도 한 단계. 아니...... 두 단계는 더 강한 힘을 낼 수 있었다.
스슥-
그때였다.
한창 몸의 변형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는데, 옆방으로부터 바스락거리며 움직임이 느껴졌다.
나는 다시 본래 인간 모습을 취했다. 그리고 문을 바라보았다.
똑똑똑-
어느덧 새벽이 된 밤.
노크 소리와 함께 문밖으로부터 세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호, 혹시 오빠...... 깨어 있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