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55
휘이이잉-
검붉은 하늘.
으스스한 분위기.
기다랗게 뻗은 나무들 사이로 불길한 달빛이 창백하게 내려앉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숲속. 그 숲 한가운데에 서서 나는 주변 풍경을 감상했다.
감지촉수를 끝까지 뻗어 ‘마력 감지’를 펼쳐봐도, 보이는 거라고는 어딘가 스산한 기운을 풍기는 앙상한 나무와 말라비틀어진 풀들 뿐이다.
이 숲이 굉장히 넓다는 증거였다.
- 여기가 던전인가?
- 맞습니다. 여기가 제, 던전......이 아니라. 아, 앞으로 보스의 던전이 될 ‘미궁의 숲’입니다......
미궁의 숲.
분명 동굴의 가장 안쪽에서 포탈을 타고 넘어왔는데, 도달한 장소는 숲이다. 그것도 검붉은 달이 비추는 으스스한 숲.
과연 던전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공포 게임이나 영화에나 나올 법한 분위기이다.
그런데, 던전이라는 것이 원래 이렇다.
그 안쪽이 어떤 환경을 가질지 모르는 미지.
숲에서 포탈을 타고 넘어왔는데 돌연 사막이 펼쳐질 수도 있고, 늪지대에서 포탈을 타고 넘어왔는데 돌연 절벽일 수도 있다.
계절도 다를 수가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두 제멋대로이다.
‘미궁의 숲’의 날씨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스산한 기운이 흘러 느껴지는 기온 자체는 꽤 낮았다.
- 숲이 되게 넓은 것 같은데.
- 그거야 당연합니다. 제가 열심히 만든 숲이기 때문에......!
- 네가?
내가 놀란 듯 물어보자, 히나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 그렇습니다. 이 숲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 그럼 던전 수호 정령은 자기가 직접 만든 던전을 수호하는 건가?
- 아, 그렇습니다...... 던전 수호 정령은 아무것도 없는 심상세계에서 홀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상상력만큼 세계를 조형하고 넓힌 뒤 코어가 됩니다.
상당히 신기한 종족이다.
하긴, 따지고 보면 굳이 자기 것이 아닌 던전을 지킬 필요는 없었다.
던전 코어가 자기만의 던전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 던전이 코어 안에 있던 던전 수호 정령이 직접 만든 던전이었을 줄은 몰랐다.
- 거주 구역은 어디에 있지?
나는 히나에게 물었다,
던전은 보통 ‘공략 구간’과 ‘거주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거주 구역에는 던전의 보스가 거주하고, 그 밖의 공략 구간에는 온갖 몬스터들과 함정으로 득실거린다.
던전을 공략하러 온 자들은 공략 구간을 넘어 거주 구역에 도달해 보스를 죽이는 것이 목표이다.
당연히, 보스는 공략하러 온 자들이 거주 구역에 도달하기 전에 퇴치하는 것이 목표이고.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스산한 숲은, 공략 구간일 것이 뻔했다.
- 아, 거주 구역은 저 끝에 있습니다.
나는 히나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바라보았다.
멀리 보이는 산의 정상. 히나는 그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 아무것도 없는데?
- 가보면 아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히나는 무언가 주문을 외웠다.
우우웅-
주문은 나와 히나의 몸을 동시에 감쌌고, 나는 눈 깜빡일 사이에 어딘가로 순간이동을 했다.
슈슉-
- 오.
보니까 아까 가리킨 그 산의 정상이었다.
직접 걸어서 오려면 몇 시간은 꼬박 걸릴 만한 거리로 보였는데, 순식간에 이동했다.
내가 히나를 바라보자, 그녀가 말했다.
- 보스는 이제 던전의 주인이시지만, 저도 던전의 운영자라서...... 언제든지 이렇게 순간이동을 할 수가 있습니다.
던전 내의 순간이동.
전작을 플레이할 때 갑자기 배후에서 던전 보스가 파티를 덮쳐오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이런 거였나.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 그 순간이동, 나도 할 수 있지?
- 네, 보스도 하실 수 있습니다. 보스는 이제 제 던전과 저의 그, 소, 소유주이시기 때문에...... 마음대로 가능합니다.
그렇게 말한 히나는 또다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순간이동 주문과는 달라 보였다. 그녀는 허공에 원형 진을 만든 다음, 나를 바라보았다.
- 피하지 말아주세요. 보스.
그녀는 내게 주문을 발사했다.
피하지 말라는 말도 있었고, 위협적인 느낌이 아니라 가만히 있자, 주문이 내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 몇 가지 주문과 더불어 이 던전의 지도가 떠올랐다.
- 잘 전달 됐나요......?
굉장히 편리한 주문이다. 나는 그녀의 물음에 그렇다고 답해주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던전의 지도는 상당히 넓었다.
애초에 던전 자체가, 험악한 산맥과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으스스한 숲 하나를 통째로 박아넣은 것만 같았다.
[ 아주아주 굉장히 그리고 엄청나게 대략적인 지도 ]
나는 처음에 던전의 입구에 있었고, 지금은 산의 꼭대기에 있다.
던전의 입구에서 출발해 숲을 지나, 산을 넘고 나서야 거주 구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산의 정상에 서서 아래쪽의 거주 구역을 바라보았다.
창백한 달빛이 온 세상을 비추는 가운데, 거주 구역에는 고고한 성과 같은 커다란 저택 하나가 있었다.
- 저 성도 네가 만든 건가?
내가 묻자 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 네, 맞습니다.
- 되게 잘 만들었네.
- 그렇습니까? 흠흠! 거주 공간은 저의 취향이 들어가 있어서......
히나는 돌연 자신이 성을 어떤 식으로 디자인했고, 무슨 영감으로 만들었는지 설정을 풀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적당히 흘려들으면서 성을 관찰했다.
처음에 히나가 나를 대하던 말투를 생각해본다면, 그녀의 이미지와 딱 들어맞는 성이기는 했다.
고고한 마녀가 살 법한 성이다.
- 이제 성 안쪽도 좀 둘러보자.
- 아...... 아직 이야기가 더 남아 있는데.
히나는 아쉬워 보였지만, 나와 같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지하도 있고, 지상으로는 7층. 침실, 욕실, 식당 등등 있을 건 다 있었다. 무슨 몬스터의 몸을 차지하더라도 고상한 생활을 보내려고 한 것 같았다.
내게는 행운이다.
여자들이 아주 좋아할 것 같다.
나는 저택을 둘러보다가, 히나를 저택 안에 내려놓았다.
- 보스?
시종일관 그녀를 들고 있다가 갑자기 내려놓으니, 히나가 나를 약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넌 밖으로 못 나가지.
- 네...... 그, 그렇습니다.
던전 코어. 그러니까, 던전 수호 정령은 던전을 생성하면, 그 던전 밖으로 다시는 나갈 수 없다.
나는 그녀를 저택 안에 놔두고 등을 돌렸다.
- 자, 잠깐만요 보스. 호, 혹시...... 저, 저를 두고 그냥 가실 생각이십니까......?
히나의 목소리에서 커다란 불안감이 느껴졌다.
지금 그녀를 혼자 놔두고 내가 던전을 떠난다면, 그녀는 영영 혼자 있어야 한다. 게다가, 언젠가는 발견되어 죽을 목숨이다.
던전은 커다랗지만, 아직 던전을 지켜줄 몬스터라든가 그런 게 하나도 없으니까.
나는 피식 웃었다.
- 걱정하지 마, 안 버리니까.
- 아...... 그, 그럼.
- 밖에 있는 내 여자들을 데리고 올 뿐이야.
내가 말하자 히나의 얼굴에 한 줄기 안도감이 스며들었다.
- 여자들...... 이라면 아까 본 부하들 말씀이십니까?
- 걔들은 성별이 없어. 다른 여자들.
부하들은 공략 구간에 놔둘 거고, 내 여자들은 거주 구역에서 나와 함께 지낼 것이다.
나는 금방 돌아온다고 말하고, 주문을 외워 던전의 입구로 순간이동했다.
그다음 여자들과 몇몇 내 경험치 파밍을 위한 슬라임들을 제외한 수족들을 데리고, 던전 안쪽으로 돌아왔다.
나는 히나를 그녀들에게 소개해주었다.
그녀들은 던전 코어 안에서 정령이 나왔다는 사실에 다분히 놀란 듯했지만. 이내 히나의 가슴팍을 보고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 * *
중립 구역, 네비스 숲.
험난하기로 소문이 난 울창한 숲의 한 가운데에서, 주황색 머리카락을 찰랑인 여성이 앞을 바라보았다.
“크르르륽......”
쿵-! 쿵-!
커다란 눈알을 가진 거인형 몬스터, 자이언트 아이가 무서운 기세로 발을 놀렸다.
무려 네 마리의 자이언트 아이들.
E클래스의 모험가 정도는 가루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몬스터가 네 마리나, 이마에 있는 세 번째 눈을 번뜩이며 사냥감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방에서 자이언트 아이들이 거리를 좁혀온다면, 인간인 이상 마땅히 위협을 느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위협의 중심에 있는 여성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단지 호흡 한 번.
후우-
그녀가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자, 그녀의 안에 있던 마나가 숨결과 함께 흘러나왔다.
파지지지직-!
뇌전.
마나는 번개로 바뀌었고, 여성의 몸 주변에 어마어마한 뇌기가 쏟아져나왔다. 그 전격은 마치 화살처럼 변하여 순식간에 몬스터들의 심장을 꿰뚫으며 전진했다.
푸콰아악-!
“크륽......!?”
“커흙......!”
쿠우웅......!
쿠웅......!
네 마리의 자이언트 아이들은 뭔가를 해보기도 전에 심장이 터져나갔다. 그들은 커다란 몸체를 바닥에 쓰러뜨렸다.
“......몬스터가 많이 나오기는 하네.”
엘레나는 투덜거리듯 중얼거리며 몬스터들의 시체를 밟고 지나쳤다.
그녀의 목표는 따로 있었다.
엘리네.
바로 그녀의 여동생.
길드를 뛰쳐나올 때만 해도 죽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생각한 그녀였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분명히 말했지...... 성역의 사람들이...... 엘리네를 봤다고......’
엘레나는 하루 전, 성녀의 성역을 들렸다.
다른 게 아니라, 루이즈 숲으로부터 이어지는 흔적을 따라오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다.
루이즈 숲에서는 마땅히 볼 만한 흔적이 없었다.
처음에 그녀의 여동생을 찾으러 떠난 C클래스 모험가 두 명의 실종. 그 뒤에 그 C클래스 모험가 두 명을 찾으러 간 B클래스 모험가 한 명, C클래스 모험가 4명의 실종.
단서는 이 둘 뿐이었다.
엘레나는 그 모험가들이 남겨둔 흔적을 따라서 루이즈 숲에서 가이든 산맥으로. 가이든 산맥에서 티르엔 숲으로. 티르엔 숲에서 네비스 숲으로 향했다.
네비스 숲에는 성녀의 성역이 있었고, 모험가들의 흔적은 그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마치 몬스터와 같이 이동한 듯한 흔적이 중간중간 있어서 심히 혼란스럽긴 했지만, 일단 있는 흔적이 이뿐이기에 엘레나는 성역에 들러 사람들에게 질문했다.
혹시 누가 성역을 방문하지 않았냐고.
처음에는 경계 태세를 취하던 성역의 병사들이었으나, S클래스 모험가의 신분증을 보여주며 조사 중이라고 밝히자 정보를 술술 불어주었다.
이럴 때는 굉장히 편리하다. S클래스 모험가라는 직위가.
엘레나는 고저 없는 눈빛으로 성역의 병사들이 하는 말을 들었으나, ‘엘리네’라는 이름이 나오자 과연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 에, 엘리네......! 엘리네가 정말로 이 성역에 들렸습니까?
- 예, 예에......! 그, 그렇습니다. 커헉! 자, 잠시 왜 멱살을......!
- 아, 죄송......
굉장히 살살 흔들었지만, 상대가 제르파라는 기사가 아니었으면 정말 부상을 당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엘레나는 뻘줌함을 느꼈지만, 이내 날아갈 듯한 기분이 되었다.
그녀가 보여준 엘리네의 사진에도, 제르파를 비롯한 성역의 병사들은 분명히 그녀를 봤다고 했으니까.
꿈만 같았다.
여동생이 살아 있다니.
며칠 전까지 숙소에서 쉬다가 어느 날 말도 없이 떠났다고 해서 불안하긴 했지만, 이전만큼은 아니었다.
‘흔적이 있어.’
엘레나는 엘리네를 비롯한 모험가들이 떠난 흔적을 발견했다.
그 흔적은 네비스 숲을 관통하듯 이어져 있었고, 마침내......
“여기가, 페로스 협곡.”
S클래스 모험가 엘레나는, 페로스 협곡에 도착했다.
‘곧 갈게 엘리네...... 조금만 기다려.’
그녀는 광활한 협곡을 내려다보며 다짐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여동생과 떨어지지 않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