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쯔꾸르 야겜 속 촉수괴물이 되었다-53화 (53/108)

Ep. 53

평소에 너무 빵빵한 환경 속에서 살았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거유라고 부를 수 있는 여자들에, 복스럽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나는 잠시 이 세상에 ‘빈유’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빈유는 존재했다.

그것도 아주 뚜렷하게.

너무나도 안타까운 현실이다.

자고로 가슴이란 ‘마음 주머니’라 불리며, 크면 클수록 좋은 것이거늘.

저 굴곡이라는 것조차 찾기 힘든 안쓰러운 물건을 보자니, 절로 한숨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마치 절벽과 같이 작은 가슴에 탄식하고 있을 찰나였다.

- ......잠깐. 어딜 그렇게 뚫어져라 보는 것인가.

던전 수호 정령이 게슴츠레한 눈을 하고서 스스로의 가슴을 살짝 가렸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대놓고 본 모양이다.

나는 솔직하게 사과했다.

- 미안하다.

그 뒤에 ‘가슴이 너무 작아서 이게 정녕 가슴인지 절벽인지 관찰하고 있었다’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었지만, 지고의 인내심으로 참아냈다.

나는 던전 수호 정령이 아직 뭐 하는 존재인지 정확히 모른다.

마냥 처음부터 이상한 태도를 보일 수는 없기에, 일단 사과를 하며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 호오......

던전 수호 정령은, 내가 대답하자 흥미로운 기색으로 나를 살폈다.

- 그대는, 굉장히 신비한 재주를 사용하는구나.

아무래도 내 ‘전음’을 말하는 것 같았다.

신비하다면 신비하긴 하다. 보통 몬스터는 이런 재주가 없으니까.

그런데, 그건 상대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의지로 말하고 있다.’

나는 던전 수호 정령의 ‘말’을 분석했다.

던전 수호 정령은, 애초에 ‘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마치 나처럼.

분명 입을 뻥긋거리긴 하지만, 내게 들려오는 건 ‘말’이 아닌 그녀의 ‘의지’였다. 의지란 공기를 울리는 소리가 아닌, 머릿속에 직접 전달되는 형태의 것이다.

내가 사용하는 전음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전음은 내 말을 그대로 상대방의 머릿속에 전달하는 것이라면, 던전 수호 정령은 그냥 의지 자체를 상대방의 머릿속에 투영하고 있었다.

하긴, 던전을 깨우는 것은 보통 몬스터인데, 몬스터는 언어가 가지각색이다.

심지어 고차원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저지능체도 수두룩하다. 그러니, 정령은 말이 아닌 의지를 전하는 방식으로 몬스터와 의사소통을 하는 모양이다.

- 별것 아닌 재주지.

내가 답하자 던전 수호 정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 신기하구나. 그보다, 그대가 나를 깨운 몬스터가 맞느냐?

던전 수호 정령은, 다시 한번 물었다.

- 그렇다.

나는 긍정하며 그녀에게 대답해 주었다.

- 그렇군...... 흠, 흐음......

던전 수호 정령은, 혼잣말을 하며 나를 마치 품평하듯 쳐다보았다. 그 혼잣말마저도 내게 의지로 전달이 되었다.

위부터 아래까지 차근차근.

나는 그녀의 끈덕진 시선을 느끼다가, 이내 그녀에게 물었다.

- 그보다 궁금한 게 있는데.

- 음? 뭐지?

던전 수호 정령이 고개를 갸웃했다.

- 나는 이제 던전의 주인이 되는 건가?

일단 내가 알고 있기로, 던전 코어에 마력을 집어넣게 되면 그 자리에 던전이 생성되며, 마력을 집어넣은 몬스터는 던전의 주인이 된다고 들었다.

분명 전작의 떡밥에서, 던전 연구가가 그러한 소리를 했었다.

그러나, 던전 수호 정령에게서 들려온 말은 전혀 달랐다.

- 훗, 아니. 아니다.

- ?

아니라니?

그럼 뭐가 어떻게 된다는 소리인가.

- 비슷하긴 하다만, 뭐...... 긍정적으로 생각해본다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군. 그대의 ‘육체’만큼은 보스가 되어 던전의 주인이 될 터이니.

던전 수호 정령의 의문스러운 소리에 내가 물었다.

육체만큼은, 이라니?

- ‘육체만큼은’이라는 건. 대체 무슨 소리지?

내가 묻자, 던전 수호 정령이 후후, 하고 낮게 웃었다.

그 웃음은 다분히 불쾌했다.

- 후후, 말 그대로이다. 그대의 육체는 이 던전의 주인이 될 것이다. 다만...... 그 육체를 내게 넘겨줘야 하겠지만.

우우우우웅-!

그 말을 끝으로, 돌연 ‘던전 수호 정령’의 기세가 일변했다.

정말로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이었다.

당황할 새도 없이, 던전 수호 정령이 입을 열었다.

- 손수 마력까지 주입해서 나를 깨워주고...... 후후후. 아주 고맙구나, 몬스터여. 그러나, 원래 그것이 몬스터의 ‘운명’인 것이다. 한낱 마물 따위가 무언가의 주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 끝은 참혹한 법이지.

던전 수호 정령은 본격적으로 기세를 끌어올렸다.

과연 B+등급의 코어에서 나온 정령인 만큼, 느껴지는 힘은 압도적이었다.

동굴 전체가 흔들리는듯했다.

던전 수호 정령은 스산한 기운을 날카롭게 내뿜었고, 그건 내가 그녀에게 주입한 마력의 양보다도 훨씬 더 거대했다.

촤아아아악-!

촤아악-!

강력하게 느껴지는 힘에, 내 촉수 수족 슬라임들이 가시촉수를 뻗어 그녀를 공격했다.

본체인 내게 위협이 될 법한 것을 배제하기 위해, 수족들이 알아서 움직인 것이다.

그러나, 빛무리로 이루어진 던전 수호 정령의 ‘형체’는 단지 ‘형체’일 뿐 ‘신체’가 아니었다. 촉수 수족들의 공격은 허공을 뚫고 지나쳤다.

- 후후후. 네 부하들이더냐? 가소롭구나. 그런 공격들은 내게 통하지 않는다.

본색을 드러낸 던전 수호 정령의 웃음은 사악했다.

그녀는 몸체를 위협적으로 움직이며 내게로 다가왔다.

- 자, 얌전히 몸을 넘겨주도록 하거라, 이름 모를 몬스터여. 너의 몸은 내가 요긴하게 사용해 주겠다.

그녀의 눈빛에는 탐욕이 가득했다. 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며 질문했다.

- 다른 이들도,

- 음?

- 다른 이들도 그러는가?

던전 수호 정령. 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며 질문했다.

- 묻겠다. 모든 던전 수호 정령이, 던전 코어를 깨운 몬스터를 공격하는가?

그녀가 태세를 전환할 때부터 궁금했던 내용이었다.

내가 묻자, 던전 수호 정령이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 호오, 내가 던전 수호 정령인 것도 알고 있다라...... 참으로 신기하구나.

- 질문에 대답해라.

- 후후후. 그 건방진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기는 하나, 내 특별히 대답해 주지. 그렇다. 우리 던전 수호 정령은 몬스터의 정신을 빼앗아 던전을 수호하는 것이 목적이다.

‘과연 그렇군.’

나는 던전 수호 정령의 말에, 드디어 ‘일체형 던전’과 ‘분리형 던전’의 실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일체형 던전’이란 보통 보스 몬스터와 던전 코어가 하나가 되어 보스가 더 강력한 힘을 얻는 방식의 던전으로 알고 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냥 던전 수호 정령이, 몬스터의 몸을 빼앗아 마치 하나가 된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기존의 몸을 빼앗긴 몬스터와 ‘던전 수호 정령’의 무력 차이. 딱 그만큼 보스가 더 강해 보이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분리형 던전’이란, 던전 수호 정령이 몬스터의 몸을 빼앗는 것에 실패한 던전일 것이다.

그래서 그 수가 극히 적고, 분리형 던전의 보스 몬스터들은 애초부터 무력이 강한 경우가 많은 것이다.

내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 던전 수호 정령 히나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 걱정하지 말거라, 몬스터여. 나는 상냥한 정령인 편이니, 난폭하게 굴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가 가만히 있으면, 내 그대의 정신을 순식간에 죽여줄 것이다.

마치 자비를 베풀겠다는 듯, 녀석은 건방지게 말했다.

- 그대가 굉장히 높은 지능을 보유하여 깜짝 놀랐지만, 단지 그뿐이다. 어차피 내게는 그대의 수준이 보인다. 제법 강인한 육체를 보유하고 있는 듯하다만, 내게는 안 된다. 나는 던전 수호 정령 중에서도 굉장히 고강한 편이므로. 그대의 운이 없었구나.

던전 수호 정령의 말은 전혀 가감이 없는 팩트 그 자체였다.

지금 나의 육체 능력 평가는 C+등급.

그에 반해 그녀의 시스템상으로서의 코어의 등급 평가는 B+.

확실히 그녀 쪽이 훨씬 더 고강했다.

능력치 평가에서 시스템상으로 B+를 받으려면, 최소 평균 능력치가 170은 돼야 한다.

그러나, 나는 자신이 있었다.

애초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 또한, 어느 정도 가능성으로 예상해두고 있었다.

정말 안전하게 던전을 만들고자 했다면, 그녀 말고도 따로 챙겨온 C등급 코어에 마력을 불어넣었겠지.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내게는 자신이 있었으니까.

- 그래, 와라.

- ......으음?

내가 말하자, 던전 수호 정령이 고개를 갸웃했다.

- 빨리 오기나 해라. 정신을 빼앗겠다고 하지 않았나?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어서 결판을 내자.

그녀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 ......그대는 어찌 그렇게 침착하지? 나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인가?

- 다 두려운데, 딱히 질 것 같지를 않아서 그렇다.

- 으음...... 허세인가? 흥...... 어차피 내게는 저항하지 못할 것이다. 언제까지 그 허세가 이어지나 보도록 하지.

던전 수호 정령이 콧방귀를 끼고는 내게 돌진했다.

그녀의 ‘형체’는 이내 내 몸체 속으로 스르륵 스며들었다. 안으로부터 내 정신을 말살하고, 육체의 주도권을 가져오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 만생의 주인

모든 생명체의 정점이 될 운명을 타고난 자. 정신계 공격에 완전 면역상태가 되며,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할 수 있다. 상대방의 성감대와 처녀 여부 또한 확인이 가능하다.

만생의 주인.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할 수 있는 나만의 효자 스킬.

내 자신이란, 바로 이 스킬이었다.

능력치를 확인할 수 있다는 부분만으로도 매번 도움을 받고 있는 굉장한 스킬이지만, 이 스킬에는 또 다른 핵심 포인트가 있었다.

바로, 정신계 공격에 완전 면역상태가 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스킬의 또 다른 핵심이다.

이 세상에서 정신력을 올려주는 스킬은 몇 없다.

육체 능력과 마력 능력이 올라가면 자연스럽게 정신력 또한 같이 올라가기는 하나, 아무리 육체와 마력을 단련시킨다고 하더라도 정신계 공격에 완전히 대항할 수는 없다.

그래서 정신계 공격을 하는 몬스터들이 굉장히 까다로운 것인데......

- 윽...... 이게 대체 무슨......!?

이 스킬은 그러한 걱정을 완전히 덜어준다.

내 몸 안으로 들어와 나의 정신을 휘저으려던 던전 수호 정령 히나는, 그녀의 공격이 아무런 효과도 없자 눈에 띄게 당황했다.

- 그, 그대여...... 어, 어떻게 이런 정신 방벽을...... 마, 말도 안 돼......

고고하던 목소리는 당황스러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틈이 단 한 군데도 없기 때문이리라.

나는 그제서야 그녀에게 비릿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딱히 표정 지을 것이 없지만, 그녀는 내 정신 안에 있으므로 내 의사를 전달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비웃어주는 사이, 나는 그녀의 형상을 이루어주던 황금빛 구슬.

스륵-

내가 마력을 주입하자 깨져서, 그 안의 날것이 드러난 구슬인 ‘완전한 던전 코어’를 내 기본촉수로 움켜잡았다.

- 읏! 자, 잠깐만 그대여......! 대체 뭘 하려는 것이냐......!

던전 수호 정령이 몸을 떨었다.

참고로 던전 수호 정령 히나의 ‘형체’는 이 구슬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금은 내 정신 속으로 들어온 히나의 형체지만, 본체는 이 구슬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구슬을 살살 쓰다듬었다.

- 마, 만지지 말거라. 흑......! 부, 불쾌하다......!

마치 자기가 황제라도 된 것처럼 오만한 목소리.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 지금 네 처지를 알고 있는 것인가, 히나?

- 어, 어떻게 내 이름을......!

- 이 구슬을 깨뜨리면 너는 죽는다. 참으로 나약한 생명체야, 던전 수호 정령이라는 것은.

- 크윽......

애초에, 무릇 암컷이라면 수컷의 아래에 깔려 신음을 내뱉을 때가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다.

나는 히나의 저 고고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심지어 절벽 주제에.

어느덧 히나에 대한 나의 호감도는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그녀가 빈유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그녀가 내게 건방지게 굴기 때문이었다.

음...... 아마. 아마 그럴 것이다.

나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구슬을 촉수로 데굴데굴 굴렸다.

- 자, 잠깐만! 그렇게 막 만지지 말거라! 거기는 안 돼! 응학......! 미, 민감하단 말이다......!

던전 코어가 간드러진 소리를 내었다.

이렇게 약해서야.

B+등급은 어떻게 받았는지 의문이다.

그런데, 이해는 되었다.

이 던전 코어는 완전한 날것.

던전 수호 정령이 몬스터의 정신을 죽이고 그 몸을 차지하면, 몬스터의 심장부에 결합 되어 모든 명령을 내리는 일을 할 완전한 코어인 것이다.

그렇다면 몬스터의 몸 안에 들어가 모든 신경에 융합되어야 하니, 이렇게 민감한 것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히나는 내 몸을 훔치는 일에 실패하였으니, 내게 완전히 날것의 약점을 잡혀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나는 구슬 한 군데 한 군데를 눌러보며 그녀의 형체 어디에 반응하는지 지켜보았다.

그리고.

꾸욱-

- 으힉......!?

그녀의 형체가 몸을 움찔움찔 떨며, 가랑이 사이를 손으로 가리는 장소를 찾아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