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36
꾸물꾸물-
촤아아악-
“우우, 촉수님...... 왜 엘리네만 촉수님 위에 타고 가요?”
가이든 산맥의 끝자락.
53레벨이 되면서 대형 버스만 한 크기가 된 나는, 원래의 크기로 생활하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항상 변화무쌍으로 적당한 크기로 몸체를 줄여서 행동한다.
지금도 마찬가지.
나는 내 몸을 딱 대형 침대 크기 정도로 줄인 다음, 엘리네를 등에 태우고 꾸물꾸물 이동하는 중이었다.
엘리네는 헤헤하고 웃으며 내 등 위에서 편안한 미소를 지었고, 옆에서는 에이미가 나와 딱 달라붙어 걸으면서 질투 담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나는 에이미의 물음에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 왜냐니, 엘리네는 체력이 약하잖아.
엘리네는 일반인이다. 체력이 기본 10이 넘어가는 모험가가 아니기 때문에, 하루종일 걸으면 지칠 수밖에 없다.
스윗 촉수인 나는 그런 그녀를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이동이 느려지기도 하고. 그래서 이렇게 업고 이동하는 중이었다.
“흠흠...... 저도 체력이 약해요 촉수님.”
에이미가 귀여운 목소리로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딱 봐도 자신도 태워달라고 어필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넌 안 돼.
에이미가 피오나나 내 다른 여자들에 비해 체력이 약한 건 사실이지만, 그녀의 체력 능력치는 19. 지구에 가면 능히 세계 체력 챔피언이 될 수 있는 능력치이다.
산 정도는 산책하듯 오르내릴 수 있다.
- 체력이 약하다고?
내가 묻자 에이미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 그럼 다음부터는 몸에 부담이 갈 테니, 섹스 시간을 조금 줄이면 되겠어.
“네, 네에?”
에이미가 내 말에 당황한 듯 손을 휘저었다.
“아, 아니에요! 그건 절대 안 돼요!”
- 왜? 체력이 약하면 너무 몸에 부담을 주면 안 되지. 다음부터는 1시간 정도는 구경하다가 참여하도록.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닌데에...... 히잉, 저 체력 좋아요......”
시무룩하게 대답하는 에이미를 보고 피식 웃으며, 우리는 계속해서 산맥을 이동했다.
3시간 정도 더 이동하다 보니, 산맥이 끝나고 숲이 나왔다.
‘여기가 티르엔 숲.’
나는 시야 촉수로 넓은 숲을 한눈에 담았다.
50m의 크기로 높게 뻗은 나무들.
끝이 보이지 않는 초록빛의 향연.
가히 영화에서나 보던 장관이었다.
“와아......”
“멋있다아.”
피오나나 에이미, 로샤, 엘리네도 숲의 풍경을 보고 감탄했다.
로샤와 유리를 범한 지도 이틀이 지났다.
드디어 우리는 가이든 산맥에서 벗어났다.
나는 티르엔 숲을 바라보며, 이 숲에 대한 정보를 떠올려보았다.
‘전작을 기준으로, 별로 위험하지 않은 숲.’
몬스터가 나오지 않고, 흉포한 야생동물도 없는 숲.
마을로부터도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사람도 아예 찾아볼 수 없는 숲이, 바로 티르엔 숲이었다.
언뜻 보면 전혀 중요하지 않은 장소로 보이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여기에는 보물창고가 있으니까.’
나는 숲을 보며 눈을 빛냈다.
티르엔 숲에는 보물창고가 숨겨진 연못이 하나 있다. 당연히 내 보물창고는 아니고, 전작 등장인물의 보물창고이다.
백합 길드 내 서열 3위.
S클래스 모험가 전체 5위에 빛나는 용의 피를 이은 용족의 여자 ‘룬.’
그녀의 보물창고 중 하나가, 이곳 티르엔 숲에 있었다.
뭐, 룬이라는 이름은 가짜 이름이고 진짜 이름은 따로 있었다. 하지만, 나도 그녀의 진짜 이름은 모른다.
왜냐하면 전작에서도 진짜 이름을 이야기해주지 않거든.
주인공의 길드에 들어온 것도, 사라진 그녀의 어머니의 흔적을 찾기 위함이다. 결코 주인공을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길드 활동을 1년에 2번씩만 하면 되고, 나머지 시간은 전부 개인 활동을 하며 보낸다. 주인공은 그 개인 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고.
그런 그녀의 창고를 터는 건 본래 굉장히 위험한 일이지만, 이곳 티르엔 숲은 그녀가 버린 보물창고였다.
전작을 기준으로 이미 중요한 물건은 다른 창고로 다 옮긴 후였고, 잡동사니만 굴러다닌다.
그래도 그 잡동사니 중에서 내게는 큰 도움이 될 물건이 있었다.
그 물건을 차지해야, 나는 무사히 던전을 건설할 수가 있었다.
‘슬라임 B, C, D. 너희는 지금부터 숲속을 돌아다니면서 연못을 찾아라. 슬라임 A는 계속 주변을 경계하고.’
나는 나로부터 200m가량 떨어진 장소에서 주변을 경계하며 우리를 호위하던 촉수 수족 슬라임 넷에게 명령을 내렸다.
쯔즙-!
나의 의지가 촉수 수족 슬라임들에게 곧바로 전달이 되고, 연못을 찾으라는 명령을 들은 세 마리의 슬라임은 내 말이 끝나자마자 꾸물거리며 연못을 찾기 위해 움직였다.
참고로 슬라임 A, B, C, D는 내가 촉수 수족 슬라임들에게 각각 붙인 이름이었다.
네 마리의 슬라임들을 구분 짓긴 해야 하니 이름은 붙여야겠는데, 또 정성스럽게 작명을 하기는 귀찮아서 대충 알파벳으로 나열했다.
참고로 슬라임 A는 내가 가장 처음에 만든 약한 슬라임이다, B는 그다음에 만든 강한 슬라임.
슬라임 C와 D는 어제 새로 뽑은 신상 슬라임들이다. 현재 레벨에서 최대 영양분을 먹여 탄생시켰으니 강함은 B와 같았다.
나와 촉수 수족 슬라임들은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슬라임이 연못을 찾으면, 나도 바로 알 수가 있다.
‘그러면 뭐다?’
나는 여기서 여자들이랑 섹스하면서 꿀이나 빨고, 잡일은 슬라임들한테 시키면 된다는 뜻이다.
으음, 아주 완벽하군.
- 오늘은 여기서 쉬도록 하자. 나랑 유리는 사냥하고 올 테니, 다들 준비하고 있어.
나는 엘리네를 내려놓고, 내 몸의 크기를 또 상당히 줄였다.
쭈물쭈물-
그리고 작은 노트북 정도의 크기가 된 다음에, 유리의 어깨 위로 스윽 올라탔다.
또잉-
유리는 내가 올라타자 뭔가를 기대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짚어 그녀의 소원을 이루어주었다.
스윽스윽-
“헤헤.”
쫑긋쫑긋-
기본촉수를 작게 뻗어서 그녀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어주니, 유리가 귀를 쫑긋거리고 웃으며 기쁨을 표시했다.
- 사냥하러 가자, 유리.
“네에.”
쫑긋쫑긋-
유리는 정말로 고양이 그 자체였다.
처음 볼 때는 전신을 가리고 있는 시크녀 같았는데, 성격은 완전히 정반대였다.
무력은 이 하렘 파티 내에서 나를 제외하고 가장 강하면서, ‘사랑과 복종의 음문’ 스킬이 차는 속도는 이 중에서 가장 빨랐다.
정말로 압도적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였다.
첫날부터 14%의 진척도를 보이더니, 이제는 벌써 진척도가 40%를 넘어갔다. 이러다가 며칠 안에 피오나나 에이미는 물론이고, 엘리네까지 따라잡을 기세이다.
분명히 허접 보지는 아닌데 말이야...... 흐음. 정신력도 강하고......
그냥 주인님을 따른다는 묘족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인 듯했다.
“저, 촉수님......”
- 응? 왜?
그렇게 유리의 귀여운 모습을 감상하고 있을 때, 옆에서 피오나가 우물쭈물하다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약간 갈팡질팡하는 얼굴이었다.
“저, 저는 요즘 왜 사냥하러 안 가요......?”
아.
본래는 피오나가 나의 사냥 전용 롤러코스터(?) 담당이었는데, 그 자리를 그제부터 유리에게 빼앗겼다.
틱틱 튕기면서도 내 말을 다 들어주는 츤데레 피오나는 사냥에 나가자고 하면 한 번씩 튕겨서 유두를 괴롭힘당하고는 했는데, 자신을 아예 부르지를 않으니 쓸쓸해진 모양이었다.
- 왜, 너 사냥 나가기 싫어하지 않았어?
“아, 그, 그건...... 그게에......”
우물쭈물하며 뭐라 말을 못 하고 있는 피오나에게 내가 전음을 날렸다.
- 그럼 오늘은 같이 갈까? 한 명보다는 두 명이 빠를 테니까.
“아...... 네!”
피오나의 얼굴이 환해졌고, 동시에 유리의 예쁜 얼굴에 약간의 아쉬움이 번졌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피오나는 얼굴이 고양이상이고, 유리는 진짜 고양이다.
찌릿-
뭐야.
동족 간의 경쟁인가.
둘의 눈빛에서 약간의 전류가 흘렀다.
* * *
“......정말로 떠날 거야?”
“응. 이제는 던전 공략도 끝났잖아. 더는 나를 막아설 이유가 없을 텐데, 샬롯.”
프리지아 대연합, 하카피아 통치령.
대도시 샤온.
브레이브 길드의 길드 하우스.
짐을 싸서 떠날 준비를 하는 엘레나의 말을 들은 브레이브 길드의 길드장, 샬롯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그랬다. 그녀를 막아설 명분이 더이상 없었으니까.
그녀의 여동생이 실종된 지도 거의 2주가 지났다.
3일째가 되던 날, 샬롯은 엘레나의 실종된 여동생인 엘리네를 찾는 모험가 모집 공고를 올렸었다.
그 의뢰를 C클래스의 여성 모험가 2명이 수락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의뢰가 성공할 거라고 확신을 했다.
그야, 루이즈 숲은 그만큼 안전한 장소였으니까.
그러나,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온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의뢰는 실패로 돌아갔으며, 엘리네를 찾으러 떠난 2명의 C클래스 여성 모험가마저 모조리 실종되었다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곧바로 후발주자가 숲으로 출발했다.
그녀는, 앞서 엘리네를 찾기 위해 출발한 두 명의 여성 모험가들과 평소 친하게 지내며 같이 활동을 해왔던 또 다른 C클래스의 모험가였다.
그런 모험가가 푸른 도끼 모험단이라는 C클래스의 3인조 모험단 한 팀과 B클래스 모험가 1명까지 대동하여 루이즈 숲을 탐사하러 나섰다.
샬롯은 이번에야말로 수확이 있을 거라고 확신을 했다. 하지만, 아직도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이쯤 되면, 엘레나의 여동생은 실종이 아닌 사망했다고 보는 게 맞았다.
샬롯은 도무지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엘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여동생, 아직 시체도 찾지 못했다고 해.”
그녀의 얼굴은 굉장히 슬퍼 보였다.
“나는...... 여동생 때문에 모험가가 된 거야. 그런데, 클래스가 오르고...... 활동에만 신경을 썼어. 정작 여동생을 돌보는 게 소홀해지고, 그걸 넘어서 아예 따로 살게 됐지.”
차분하지만, 그렇지 않다. 엘레나의 내면에서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나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워 샬롯. 지금까지의 길드 활동을 후회한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나는 가야겠어. 길드를 탈퇴하고서라도, 여동생을 찾으러 가야겠어.”
샬롯은 속으로 입맛을 다시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S클래스의 모험가이다. 길드를 지탱해주는 기둥이나 다름이 없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녀를 말릴 정도로 샬롯은 독한 인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연결고리는 만들어두고 싶었다.
샬롯은 입을 열었다.
“......외부 활동으로 처리해줄 수도 있어. 지원이 필요하면 지원도 해줄 수 있고. 그리고-.”
“샬롯.”
“......”
“미안해. 그냥 혼자가 되고 싶은 기분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샬롯은 엘레나에 대한 것을 완전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철저하게 수색할 거야. 동생이 설령 죽어있더라도, 그 시체라도 찾아서 장례를 치러야겠어...... 조금 걸릴 수도 있지만, 정말 만약 때가 돼서 다시 들어오고 싶으면...... 그냥 다시 신입으로 가입할게.”
엘레나의 의지는 그만큼 확고했다. 어쩌면, 모험가를 평생 은퇴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샬롯의 머릿속에 들었다.
“......그래. 어쩔 수가 없구나.”
샬롯은 눈을 짙게 감았다가 떴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탈퇴 처리는 우리가 진행할게. 이번의 던전 공략 보상은...... 네 집으로 보내놓을 거야. 그동안의 활동 보상이랑 같이. 그래도 네 방은 남겨둘 테니...... 언제든지 돌아와.”
가만히 앉아서 말을 듣던 엘레나가 뭔가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응. 그동안 고마웠어...... 샬롯.”
“아니야, 우리야말로.”
엘레나는 짐을 전부 짊어지고 길드하우스를 나왔다. 새벽에, 그것도 아주 조용히 진행된 탈퇴이기 때문에 이를 지켜보는 다른 길드원들은 없었다.
길드하우스 1층 밖을 바라보며, 샬롯은 엘레나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엘레나.”
“응?”
“꼭 찾았으면 좋겠네, 여동생.”
“......응.”
“부디 가는 길에 축복이 있기를.”
“축복이 있기를.”
엘레나는 샬롯의 마지막 인사를 받고는, 뒤를 돌아 터벅터벅 길드하우스를 떠났다.
그녀의 뒷모습은 쓸쓸해 보였다. S랭크 모험가가 된 이후...... 아니, 그녀가 길드에 들어온 이후 본 뒷모습 중 가장 처량해 보였다.
하지만, 그런 뒷모습과는 달리 엘레나의 두 눈은 아주 낮고 은은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엘리네...... 제발 살아만 있어.’
믿고 싶지 않았다. 여동생이 죽었다는 사실을.
정황만 보면 죽은 게 맞겠지만, 엘레나는 단 0.1%의 가능성이라도 믿고 싶었다.
‘살아만 있으면...... 지금 언니가 구하러 갈 테니까.’
S클래스 모험가.
1천만 명이 넘는 모험가 중에서도 극상위권.
전체 모험가 순위 376위. 뇌염검 엘레나가, 도시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