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
‘이 숲은...... 도대체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 거지?’
꾸물꾸물-
이 세계에 온 지도 벌써 5일이 지났다.
나는 슬슬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정말로 촉수 괴물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꿈이겠지, 꿈이겠지 하고 하루하루를 지내다 보니, 이게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걸 뼈저리게 자각할 수 있었다.
‘그 망할 여신년...... 이제 막 전역해서 자유를 누리려는 20대 초반의 남자를 정체도 알 수 없는 세계에 보내고 몬스터로 만들어......!?’
나는 잠시 여유의 시간을 즐기고 대학에 복학해, 파릇파릇한 여후배들과 알콩달콩한 대학 생활을 할 완벽한 계획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튀어나온 그 여신이 내 모든 계획을 망쳐버리고 만 것이다.
‘으으.’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까라면 까야지’라고 말한 다음 나를 짓누르고, 이런 촉수 괴물로 만든 여신의 얼굴이.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분명 그 여신은 저 하늘 위에서 꿈틀거리는 내 모습을 깔깔거리며 구경이나 하고 있겠지.
‘반드시...... 반드시 복수하고 말겠다!’
나는 속으로 그렇게 다짐했다.
3일 전에는 이런 괴물로 변한 게 서러워 하루종일 눈물을 펑펑 짜내기도 했었다.
그렇게까지 감수성이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문득 풀떼기를 뜯어 먹다가 현자 타임이 찾아온 것이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하는가, 하고 말이다.
뭐...... 내가 변해버린 이 촉수 괴물은 눈이라는 기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그냥 속으로만 흑흑거리면서 오열하고 울었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더라고.
결국, 나는 이런 촉수 괴물이 되어버렸고, 이 괴물로 앞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변함이 없었다.
그저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여신이 나중에 뭐 인간화 스킬도 얻을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지.’
레벨업을 하면 할수록 무언가 새로운 스킬을 얻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인간화 스킬은 고사하고, 초반부터 진도가 완전히 막혀있는 상황이었다.
‘젠장. 어제부터 레벨이 전혀 안 오른단 말이지.’
나는 꿈틀거리던 것을 멈추고, 스테이터스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러자 허공에 활자들이 조합되었다.
------ 스테이터스( Status ) ------
⚫ 기본 정보( Basic Information )
- 진명 : 천유진
- 종족 : 촉수 괴물
- 레벨 : 8
⚫ 육체 능력 평가 : F+
- 근력 : 7
- 민첩 : 8
- 체력 : 8
- 내구 : 6
- 감지 : 8
⚫ 마력 능력 평가 : F
- 효율 : 4
- 용량 : 5
- 회로 : 3
- 친화 : 3
⚫ 스킬
- 유동적인 몸과 코어
- 진화하는 촉수( 3족 : 소화촉수, 감지촉수, 둔기촉수 )
------ ◦ ------
‘일단 능력치가 오른 건 확실히 좋아.’
5일간 열심히 풀떼기들을 뜯어 먹으며 레벨을 8로 올렸다.
레벨이 오를 때마다 몸집이 커지는지, 이제는 몸집도 성인 남성의 팔뚝 정도 되게 커졌다. 게다가 능력치도 상당히 올라서 평가가 F-에서 각각 F+, F로 올랐다.
‘여전히 그래도 F에서 머무르고 있긴 하지만.’
일단 올랐다는 사실 자체가 호재였다.
2레벨이 됐을 때는 모든 능력치가 1씩 올라서 레벨이 오를 때마다 모든 능력치가 오르는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더라고.
어떤 능력치는 오르고, 어떤 능력치는 오르지 않고. 랜덤인 듯했다.
어쨌든, 그래도 레벨이 오르면 능력치가 오른다는 걸 알았으니 레벨을 꾸준히 올려야 한다는 건 알았는데...... 이게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분명 금방 3레벨, 4레벨에 도달했다. 하지만, 5레벨부터 성장이 급작스럽게 더뎌지기 시작했다.
특히나 8레벨은 그제 하루종일을 꿈틀거리면서 풀떼기를 먹어서 겨우겨우 도달한 레벨이었다.
‘레벨이 오를수록 레벨을 올리기 힘들어지는 모양.’
나는 촉수를 꿈틀거리며 생각했다.
뭐, 사실 이건 RPG 게임을 조금이라도 해봤다면 알 수 있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레벨을 올리면 올릴수록, 다음 레벨에 도달하는 데에 필요한 경험치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건 자명한 이야기.
그래서 플레이어는 더 많은 경험치를 주는 고레벨 몬스터를 사냥하기 위해 이전의 사냥터를 떠난다.
그리고 지금, 내게도 그런 상황이 닥친 것 같았다.
[ 이제 풀떼기는 질렸습니다. ]
[ 좀 더 많은 영양분을 주는 무언가를 섭취하세요. ]
8레벨에 도달한 그제 밤에 이러한 메시지가 눈 앞을 가렸다.
일단 메시지는 메시지대로 놔두고, 그래도 널려있는 게 풀떼기뿐인지라 어제부터 오늘 점심이 되도록 열심히 풀떼기를 먹었다.
그래도 안 먹는 것보다는 먹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하지만 시스템 메시지는 정확한지, 어제부터는 뭔가 성장한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를 않았다.
8레벨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풀떼기를 먹으면 성장의 밑거름이 될 듯한 느낌이 조금이라도 들었는데, 그 이후부터는 정말로 그저 영양분을 섭취하는 용도일 뿐 레벨을 올리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 보였다.
‘아무래도 곤충...... 아니면 동물 같은 걸 사냥해서 먹어야 하는 모양이야.’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런 게 보여야 말이지.
5일 동안 숲을 계속해서 전진했는데, 그동안 동물을 목격한 건 단 3번밖에 되지 않는다.
첫날에 사슴 비슷하게 생긴 동물을 한 번.
나머지 두 번은 3일 전에 도마뱀 비슷하게 생긴 녀석을 본 게 끝.
게다가 그때는 그냥 풀떼기를 먹는 데에 정신이 팔려있던지라, 도마뱀을 사냥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끙...... 젠장. 과일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높이까지 뻗은 숲속의 나무들은 이파리만 무성할 뿐, 과일은 열려있지 않았다.
그나마 숲을 헤매면서 중간중간 버섯을 발견하긴 했는데...... 버섯은 위험할 수도 있잖아!
뭔가 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 먹기가 껄끄러웠다.
꾸물꾸물-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속으로 노래를 부르며, 오늘도 그렇게 도저히 끝이 보이지를 않는 숲을 전진했다.
꾸물, 꾸무울-
‘왜 이렇게 힘들어~.’
쫑긋-!
‘응?’
그때였다.
돌연, ‘감지촉수’에 묘한 감각이 걸려왔다.
‘이건......?’
‘감지촉수’는 내가 5레벨에 도달했을 때 ‘진화하는 촉수’ 스킬이 업그레이드 되면서 얻은 촉수였다.
몸에서 촉수 하나가 안테나처럼 삐져나와 소리, 냄새, 시야를 밝혀주는 기능을 수행했다.
이게 웃긴 게 촉수를 길게 빼면 길게 뺄수록 소리와 냄새, 시야를 감지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졌다.
덕분에 5레벨 전까지는 완전히 내 촉각에만 의지해서 숲을 나아가야 했지만, 감지촉수를 얻고 나서부터는 평범하게 숲을 둘러보면서 전진할 수 있었다.
지금 8레벨의 수준에서는 최대한 길게 빼면 성인 남성의 허리 정도 오도록 뺄 수 있는데, 그렇게 하면 평범한 인간 수준으로는 알아차리기 힘든 조그마한 소리나 냄새까지도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촉수가, 지금 반응하고 있었다.
‘어디......’
귀가 아니라 촉수를 기울이자, 어딘가에서 구수한 냄새와 누군가가 이야기하는듯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오빠아~, 우리 도시락 너무 많이 싸 온 거 아니야?”
“어...... 그런가?”
“응. 이걸 우리 둘이서 어떻게 다 먹어!”
“하하, 원래는 너희 언니도 오신다고 했었잖아. 그래서 넉넉하게 10인분 어치는 만들었지.”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감지촉수에 소리가 감지되었다. 남자와 여자가 대화하는 듯한 소리였다.
‘어? 잠깐만...... 그렇다면 사람?’
5일 동안 어딘지도 모를 숲을 돌아다니면서, 사람은커녕 동물조차도 3번밖에 보지 못했다.
상당한 반가움을 느끼며, 나는 몸을 빠르게 움직였다.
꾸물꾸물-
소리와 냄새가 감지되는 쪽으로.
“지금 우리 언니 많이 먹는다고 핀잔주는 건가아~?”
“어? 아니! 그런 게 아니잖아!”
“아하하, 농담이야. 애초에 내가 많이 챙기자고 했으니까. 그리고 원래 언니뿐만 아니라 모험가는 대부분 많이 먹어.”
수풀을 해치며 쭈우욱 나아가자 점점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오오.’
냄새도 더욱 짙게 풍겨왔다.
‘이건...... 킁. 스프 냄샌가? 약간 양송이버섯 스프 냄새나는데. 게다가 빵 냄새도......’
냄새에 따라 머릿속에 자동으로 지구에 있을 적 먹었던 양송이 스프와 빵이 생각났다.
뜨뜻한 양송이버섯 스프에 빵을 찍어서 먹는다.
‘꿀꺽...... 와, 미친.’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5일 동안 풀떼기만 먹어온 입장으로, 진짜 먹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다.
나는 다시 감지촉수에서 들려오는 감각에 집중했다.
“하하. 사실 3인분만 가지고 오려고 했는데 혹시 몰라서. 남은 건 이따 들어가서 신선고에 놔두자.”
“응, 그러자.”
‘도착했다.’
수풀을 헤치고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자, 드디어 소리가 들려오는 진원지까지 올 수 있었다.
감지촉수를 수풀 사이로 빼꼼 내밀자, 지금까지의 울창한 숲과는 어울리지 않는 산뜻한 들판에 남자와 여자가 돗자리를 깔고 캠핑하듯 요리하는 모습이 보여왔다.
‘오오. 진짜, 진짜 사람이야......!’
사람답게 요리하는 둘의 모습을 보자 내 몸통이 부르르 떨려왔다.
지금까지는 너무 숲만 돌아다녔다.
사람의 ‘시옷’자도 보이지 않아서 조금 외롭기도 했다. 사실 이 세상에 사람이라곤(?) 나 혼자만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기는 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와...... 스프 진짜 맛있겠다. 샌드위치도 있네. 게다가 여자도 엄청 예쁘다.’
감지촉수를 기웃거리며 나는 여자의 모습을 살폈다.
여자의 외모는 이국적이었다.
주황색 머리카락에 얼굴에는 주근깨가 좀 있었고, 서구적인 외모를 하고 있었다. 가슴이랑 골반이 상당히 컸고, 키는 한 165cm쯤 돼 보였다.
무엇보다 얼굴이 아주 예뻤다.
그렇게 여자의 모습을 뇌에 새기며 관찰하고 있는 중이었다.
“꺄악! 모, 몬스터!?”
“어? 어디......! 어!?”
여자가 꿈틀거리는 내 감지촉수를 보더니 기겁하며 남자의 어깨를 흔들었고, 남자는 여자의 시선을 따라 나를 보더니, 마찬가지로 기겁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시발 그래.’
그리고 그 둘의 반응을 보며 나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맞아.
나는 이제 인간이 아니라 이제 촉수 괴물이지.
충분히 현실을 자각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저 둘의 반응을 보니 괜히 씁쓸함이 올라왔다.
나는 인간을 마주해 반가움을 느꼈지만, 저 둘에게는 아니었다.
그저 한 마리의 몬스터일 뿐이다.
“치잇, 슬라임인가......? 처음 보는 몬스터인데?”
“으읏, 징그러워......! 스, 슬라임이 원래 촉수도 있어......?”
“모르겠어. 후우. 가, 가만히 있어 봐. 내가 처리할게.”
남자는 식칼로 보이는 칼을 들더니, 서슬 퍼런 날을 내게 들이밀며 한 발짝 한 발짝씩 다가왔다.
“이 괴물......! 거기 가만히 있어!”
“오, 오빠. 괜찮겠어?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니야?”
“후으, 아냐...... 슬라임은 괜찮아. 침착하기만 하면 된다고 했어. 후우우, 처리할 수 있어. 고블린 같이 무리생활을 하는 놈들도 아니라서.”
남자는 내게 살기를 내뿜으며 다가왔고, 어느덧 우리 둘 사이의 거리는 5m도 되지 않게 짧아졌다.
쿠르르릇-
그리고 나는, 8레벨이 되면서 새로 얻은 ‘둔기촉수’를 몸에서 빼내며 남자를 향해 위협적으로 흔들었다.
둔기 촉수가 솟아남에 따라 내 유동적인 몸이 꿀렁꿀렁 움직였고, 이상한 소리를 냈다.
이어서 나는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었다.
‘시발......! 내가 지금 미친 건가?’
원래는 그냥 무작정 도망칠 생각이었다.
들키면 도망친다. 생존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만큼, 우선은 내 목숨을 확보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였다.
사람과 전투한다니. 뒤지려고 환장한 것도 아니고.
애초에 사람을 막 때리고 싶은 마음도 별로 안 들었다. 원래 나는 사람이었고, 촉수 괴물이 되었어도 평화롭게 살고 싶은 게 내 마음이었다.
하지만......
두근두근-
‘싸우고 싶다.’
몸속에서 뭔가가 들끓어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촉수 괴물이 가지고 있는 본능인가?
심장이라 불릴만한 것도 없는데, 심장이 뛰는 느낌이 든다.
미칠 듯이 아드레날린이 샘솟는 기분이었다.
내게 전투 자세를 취하며 살기를 내뿜는 남자를 보니, 나 또한 ‘감히 내게’ 살기를 내뿜는 저 ‘미물인 남자’를 갈기갈기 찢어버려서 씹어먹고 싶다는, 그러한 본능이 피어올랐다.
결코 질 것 같지 않았다. 내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는 눈앞의 인간보다 약하지 않다고.
저 인간을 씹어먹을 수 있는 포식자라고.
제발 그만두고 싶지만, 이 충동은 거스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시발, 나 싸우기 싫은데.’
하지만 그러면서도, 내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스프링처럼 숲 위로 높이 뛰어올라, 남자를 향해 돌진하며 묵중한 촉수를 휘두른다.
부우웅-
‘아, 시발 여신 개새-.’
속으로 그렇게 읊조리면서도, 나는 갑작스러운 습격에 당황해하는 남자의 뺨싸다구를 둔기 촉수로 무참하게 후려갈겼다.
퍼어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