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 이럴 때 찾아오다니. 아직 마음의 준비도 덜 됐는데, 이렇게 추잡하게 섹스하고 있을 때 찾아오다니. 나는 클린 마법으로 남은 정액을 없애곤 부들거리는 다리를 일으켰다.
나를 닮은 붉은 머리 소녀가 엄마, 엄마 하고 날 찾는다고? 떠오르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에일린.'
세계수와의 약속은 석 달.
기한이 끝나기까지 정확히 이틀이 남았다. 나는 석 달이 되는 날, 텔레포트를 이용해 카르드라실로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날 찾아왔다는 건, 이미 한참 전에 육체가 완성되었다는 소리였다.
세계수가 거짓말을 한 걸까? 아니면 생각보다 더 빨리 육체가 만들어져 그냥 보낸 것일 수도 있었다.
"…그 꼬마. 지금 어디있지?"
아직도 쾌락에 빠져 허덕이는 날 대신해 슈리엘이 묻는다. 알펜리스는 사뭇 진지해진 우리의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별관에 대기시키고 신원 조사를 하고 있는데… 어째선지 엘프나 입는 옷을 입고 있더라고요? 일단 여기 데려올까요?"
엘프들이나 입는 옷.
확실했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땅을 짚어 일어났다.
"제가, 제가 찾아갈게요. 슈리엘도 같이…"
꼴사나운 모습으로 딸을 맞이할 수는 없지. 이 꼴을 보였다간 자괴감에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흐트러진 드레스를 바로 입고 문을 나섰다.
"안내해주세요, 파니."
"네에~"
*
빈 땅을 채우기 위해 지은 별관. 건물의 수가 상당해 지금은 병사와 하녀들이 숙소 대신으로 쓰고 있다. 나와 슈리엘은 본관에서 지내는 데다, 잘 나가지도 않았으니 눈치 볼 것도 없고, 도시는 유지 코어로 인해 24시간 깨끗한 상태라 잡일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됐다.
빡빡한 업무에서 탈출한 그들은 남녀가 한 짝을 이뤄 아름다운 거리를 구경하거나, 곳곳에 설치된 유흥시설을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레칸테의 절경은 관광도시 못지않게 아름다웠고, 그 어떤 도시에서도 볼 수 없는 마법적인 몽환이 스며들어 그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해고까지 당하면서 이곳에 살기를 결심한 이유가 있다. 심지어, 아이를 가지면 이곳에서 살게 해준다는 소문이 퍼져 더 적극적으로 섹스를 했다.
처음엔 서로 눈치를 보며 밤에만 몸을 섞었지만, 나와 슈리엘이 항상 본관에 처박혀 섹스하느라 나오지도 않자, 그들의 리미터도 덩달아 풀려버렸다. 아예 밖에서 대놓고 몸을 섞는 자도 있었다. 어차피 무인 도시다. 대로 한복판에서 수치스러운 자세로 앙앙거린다 해도 볼 사람 하나 없었다.
아침이고 밤이고 끊이지 않는 음탕한 신음.
하지만, 오늘은 수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얘기치 않은 손님이 찾아온 덕이었다.
"슈, 슈리엘이 열어주면 안 될까요…?"
별관 정문.
나는 문고리를 쥐기에 겁이 났다. 별관 2층에 에일린이 있다. 느껴지는 마나를 형상화하자, 하녀들이 가져다준 과자를 우물우물 씹어먹는 에일린이 보였다.
두렵지는 않았다. 슈리엘과 함께 지내며 내 걱정이 얼마나 부정적이고 쓸데없는 것인지 알았다. 에일린이 날 싫어할 리가 없잖는가.
대신 미안함이 들었다. 얼굴 보기가 부끄럽다. 알면서도 추태를 보이고, 딸을 걱정하게 했다. 최악의 태교였다.
"유진."
슈리엘은 문고리를 쥐며 입을 열었다.
"…어깨 펴라. 거울 될 부모가 그런 모습을 보여서 되겠느냐."
"…."
슈리엘의 말을 듣곤 허리를 편다. 그래, 난 에일린의 거울이다. 내가 침울해 있어야 쓰겠나. 축 처진 입꼬리를 올린다. 나는 한층 더 당당해진 모습으로 고개를 들었다.
- 끼이익…
문이 열린다.
"올라가지."
별관 1층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인기척은 확실히 존재했다.
―엄마아빠는 언제 와요?
―…아가씨랑 작은 도련님 말하는 거니?
바로 위층.
명랑한 소녀의 목소리.
―꼬, 꼬마야! 그거 먹으면 안 돼!
―이거 먹는 거 아녜요?
―그거 비누야!
- 삐걱, 삐걱.
계단을 밟자 삐걱대는 소리가 난다. 심장이 삐걱대는 소리일까. 나와 슈리엘은 한 모퉁이만 돌면 에일린을 만난다는 사실에 한껏 긴장했다.
…아니. 슈리엘은 멀쩡했다.
긴장한 건 나뿐이었다.
"얌전히 있어! 그러다 병사 아저씨들이 이놈하고 혼낸…"
"으응? 어, 어?"
새로운 시작을 향한 모퉁이.
틈 사이로 붉은 머리카락이 보인다. 나는 숨을 최대한 들이마시고 앞으로 한걸음―― 다 커버린 딸을 만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
"……."
에일린은.
과자가 잔뜩 묻은 입을 떡하니 벌리고 나를 바라봤다.
나를 닮아 붉은 머리, 슈리엘을 닮아 청명한 눈동자.
심상세계에서 봤던 모습보다 더 성장한 모습이었지만―― 틀림없는 내 딸, 하나밖에 없는 내 딸, 원한다면 목숨마저 내놓을 수 있는 소중한 내 딸.
"에일린."
에일린은 눈을 커다랗게 뜨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머리칼이 부스스 떠오르고, 입꼬리가 찢어질 듯 올라간다. 마나가 요동친다. 기쁨의 격류였다.
"엄마――!!!!"
"꺄악?!"
내 작은 체구에도 쏙 들어오는, 140cm 좀 안 되는 작디작은 소녀가 가녀린 손을 뻗는다. 에일린은 의자에서 사출되듯 튕겨 나갔다.
나는 반사적으로 양팔을 벌려 에일린을 품에 안았다. 그 힘은 너무나 미약했지만, 감히 저항하지 못했다.
뒤로 넘어진다. 이대로 넘어진다면, 계단을 구를 게 분명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몸을 멈춰야 했지만, 마비된 머리는 어떤 것도 도출해내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계단을 구르는 일은 없었다.
―와락.
"조심해라."
슈리엘이.
넘어지는 나를 잡아주었다.
"아빠――!!!"
에일린은 내 품에서 귀엽게 고개를 들어 슈리엘을 바라보았다.
내 눈을 빌려야만 볼 수 있었던 아빠가 눈앞에 있다. 에일린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슈리엘에게 손을 뻗었다.
"아빠, 아빠! 보고 싶었어요!"
슈리엘은 나와 똑같이 생긴 에일린의 모습에 어색함을 느끼는 듯했다. 그는 멋쩍게 머리만 긁으며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나한테 어깨 펴라고 조언해준 슈리엘이었지만, 막상 딸과 만나고 나니 나보다 더 긴장했다. 그는 눈동자를 돌리며 팔짱을 꼈다. 오랫동안 슈리엘을 봐온 나는, 저것이 무언가를 말하고 싶을 때 내보이는 표현이라는 걸 알았다.
"인사라도, 해주는 거 어때요?"
나는 에일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머리를 닳도록 부빈 에일린은, 헤실헤실한 얼굴로 다른 걸 요청했다.
"뽀뽀해주세요! 뽀뽀!"
"뽀뽀…?"
"엄마랑 아빠랑 맨날 하는 거 있잖아요! 저두, 저두 해주세요!"
"매, 맨날 하는 거라니?"
움찔. 몸이 굳는다. 나는 극심한 위화감을 느끼며 되물었다. 분명 어린아이다운 순진무구한 요구였지만, 내가 쌓아온 업보가 너무 많아서 그런지 이상하게 느껴졌다.
에일린은 해맑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밑에 깔아뭉개고 혀 집어넣는 거요! 목은, 음. 안 졸랐으면 좋겠어요! 그건 아프잖아요!"
"…."
………
……
…자살하고 싶어졌다.
에일린의 발언이 얼마나 큰 파급을 몰고 왔는지는 설명할 것도 없다. 수많은 하녀가 보는 앞에서 엄마, 아빠라 부르는데 놀랄 수밖에.
하지만 호수 위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퍼져나간 물살은 연안에 그칠 뿐 파도가 되지 못했다. 혼란과 충격은 한순간. 곧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본래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하루가 멀다고 몸을 섞는 것도 모자라 정액을 질질 흘리며 복도를 돌아다닌지라, 하녀들이 보기에 '개연성 없는' 전개는 아니었다. 내가 저택에 발을 들이기 전에도 이랬다는 걸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사생아 정도로 생각하려나. 그게 아니라면 유모가 대신 키워준 아이? 후자라면 절반은 맞는 이야기였지만, 뭐가 됐든 그들이 생각하는 진실과는 멀었다. 눈앞의 아이가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미성숙한 영혼이라고 누가 생각할까.
에일린은.
특유의 당찬 성격과 똘똘한 머리 덕에 분위기에 금방 적응했다. 태어나길 카르드라실에서 지냈다고 했는데, 성격이 밝은 건 그 덕분인 것 같았다. 천연의 보고는 아이의 훌륭한 놀이터가 되었다.
나는 그 사실에 감사했다. 처음부터 세상에 던져진다면, 인간에게 실망할지도 몰랐다. 이 세상은 그리 밝지 않다. 차라리 엘프와 보내는 게 나았다.
순수함…. 앞으로도 그러길 바랐지만, 이미 에일린은 알을 깨고 하늘을 향해 날갯짓했다. 그렇다면, 아이가 날 수 있도록 응원해주는 게 부모의 도리이지 않겠는가. 새장 속에서 좋은 것만 듣고 보기를 바라는 건 옳지 않았다.
다만 에일린의 처참한 교육 상태는 의도치 않은 것이었다.
절대로.
"자, 따라 하세요. 뽀뽀는 목조르기가 아니다."
"뽀뽀는 목조르기가 아니다!"
"혀 집어넣는 것도 아니에요. 그건 키… 흠. 됐어요. 다음으로 넘어갈게요."
부끄러운 자화상이라는 게 이런 말일까. 에일린의 충격 발언에 혼절 직전까지 간 알펜리스는, 에일린을 반강제로 끌고 가 재사회화 교육을 했다.
"아가씨도 따라 하세요!"
"…뽀뽀는 목조르기가 아니다."
…나도 함께.
"…저기, 파니?"
"네, 말씀하세요."
"왜 저도 같이 받는 거죠…?"
옆을 바라보면, 내게 딱 붙어 싱글벙글 웃는 에일린이 보였다. 에일린은 나와 함께 있는 게 마냥 행복한 듯 보였다. 나는 가슴에 머리를 비비는 에일린을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알펜리스는 나와 에일린을 향해 하아, 하고 한숨 쉬었다.
"작은 아가씨가 뭘 보고 배웠겠어요?"
"…."
"무례한 말 해서 죄송해요. 하지만! 저도 포기 못 해요! 아가씨가 멀쩡한 상식을 가져야, 작은 아가씨가 따라 배운다구요!"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찌른다.
상식이 부족하단 말은 살짝 억울하기도 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정한단 말이다. 냄새를 맡아도 가버리고, 스치면 조수를 뿜으며 헐떡인다. 참아보겠다고 결심을 해도, 나는 어쩔 수 없는 암컷의 몸뚱어리였다.
나는 알펜리스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치만… 슈리엘이랑 가까이 있기만 해도 몸이 저절로…"
"도련님도 문제에요!"
"….
"하아…."
그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러대며 말을 이어갔다.
"…지금 해고 안 당한 사용인이 저밖에 없는 거 알죠?"
레칸테의 사용인들은 나와 슈리엘을 위해 일하고 있지만, 모두 아이를 가지거나 루셸리니 시민권을 포기했다. 섹스에 거부감을 가진 알펜리스만이 루셸리니에 시녀로서 멀쩡히 일하고 있다.
옆에서 난폭하기 그지없는 교미를 여러 차례 봐와서 그런지, 섹스촌이 다 된 레칸테에서 유일하게 순결을 지켰다.
그녀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에일린을 보며 말했다.
"맘 같아선 도련님도 같이 훈계하고 싶지만… 제가 겁이 많아서 그러진 못하겠네요."
"…미안해요."
"미안하시면 제발 좀 말해주세요. 애 앞에선 자제 좀 해달라고."
슈리엘은.
영지에 찾아온 상단을 맞이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유랑 상단 청련단. 에일린을 이곳까지 데려다준 사내들. 딸이 외간 남자와 붙어있다는 사실에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지만, 다행히 별일은 없었다. 뇌가 썩어서 그런지 불온한 생각이 많이 들었다.
"…아빠 바빠요?"
에일린은 그 사실이 내심 서운한 모양이었다.
"…얼마 안 걸릴 거야."
이곳이나 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