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8화 (178/193)

  

  "자, 잠깐만! 살려준다면, 도, 돈을 더 주겠다!"

  "그걸 믿겠냐고 등신련아."

  산적에 당하는 상단은 많았고, 그만큼 토벌되는 산적도 많았다. 흔한 이야기다. 이 산적들도 얼마 안 가 엘프 경비대에게 목이 꿰뚫려 죽겠지.

  - 휘이잉…!!!

  "안녕하세요오――!!!!"

  하늘에서 떨어지는 붉은 머리 소녀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두목! 저, 저것 좀 보십쇼!"

  "또 뭐 가지고 지랄인데?"

  "어, 어? 이쪽으로 떨어진다…?"

  정령이 뿜은 빛은 꼬리처럼 늘어져 유성우가 되었다. 에일린은 오색찬란한 빛무리를 이끌고 마차 앞에 떨어졌다.

  - 착.

  바람을 찢는 살벌한 소리와 대비되는 얌전한 착지음.

  에일린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인사했다. 

  "사람들이다! 반가워요!"

  목 잘릴 준비를 하던 청련단주 하메일은, 엘프옷을 입은 소녀의 등장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와! 푸른색 머리! 흔하지 않은데, 신기하네요!"

  에일린은 바다처럼 푸른 머리를 보고 감탄했다. 푸른 머리는 남부 쪽이 아니라면 흔치 않았다. 거의 모든 푸른 머리가 남부에 밀집해있기에, 머리 색이 파랗다면 대부분 남부 출신이었다.

  "넌 뭐야?!"

  "씨발 무기 들어!"

  태연한 모습에 다 같이 멍을 때렸지만, 얼마 가지 않아 정신을 차렸다. 산적들은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트리고 무기를 뽑았다.

  "에, 엘프다! 엘프 경비대야!"

  "뭐, 엘프?"

  같이 납치된 상단원 하나가 소리쳤다. 하메일은 그 말을 듣고 다시금 소녀를 바라보았다. 발목까지 닿는 꼬리깃에 등허리가 파인 상의… 실베흐린을 자주 들리며 보았던 엘프들의 전통 의상, 하니쉬였다.

  "도와주십쇼! 이자들은 당신들의 영역을 침범하고, 사람을 죽이는 범죄자입니다! 우리는 무고합―― 커흑!"

  "닥쳐!"

  하메일은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외쳤다. 

  * * *

  변두리 마을에 식량을 보급하는 일은, 목돈을 챙길 수 있지만 모든 상단이 꺼리는 일이었다.

  이러한 일을 유랑 상단인 청련단이 맡게 된 이유는, 상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거대 상단을 만들기 위해서였고, 다르게 말하면 돈이 필요해서였다.

  동부와 남부는 이미 레드 오션이다. 발을 들이기엔 한참 늦었다. 그래서 손을 뻗은 곳이 서부였다.

  식량 보급 일은 나름 괜찮았다. 마차가 보이자 헐레벌떡 뛰어오는 영지민을 맞이하는 것도 재밌었고.

  뭐라도 된 듯한 기분. 딱 그런 느낌이었다. 이대로 오 년이면 그럴싸한 본점도 차리고 남부에도 진출할 수 있을 것이다. 하메일의 최종 목표는 해상무역이었다.

  하지만 이런 좋은 일을 왜 아무도 하지 않는지, 그걸 깊게 생각하기엔 청련단의 경험은 너무나 적었다. 돈도 나름 잘 벌리고, 매번 좋은 말만 들으니 너무 가볍게 생각해버렸다. 용병이 있으면 괜찮겠지, 하고 안심했다.

  상인이 가장 경계해야 할 안일함에 빠져버린 것이다.

  "…씨팔."

  고용한 용병들은 모두 죽었다. 산적의 규모가 예상보다 세 배는 많았다. 보이는 것만 서른 명. 숨어있는 자들을 생각하면 더 많았다.

  '죽는다고? 여기서?'

  죽음이 죽음으로만 끝날까. 남겨진 사람은 평생토록 고통받는다. 애를 가진 단원만 넷이었다. 하메일은 죽어서 원망받고 싶지 않았다.

  '아직 단원 중 사망자는 없지만…'

  곧 전부 죽겠지. 

  하메일은 제발, 제발 아무나 구해달라며 속으로 기도했다. 그런데 그의 기도가 효과가 있었던 걸까. 하늘에서 응답이 내려왔다.

  "안녕하세요오――!!!!"

  신이 아니라, 붉은 머리 소녀의 응답이 말이다.

  "와! 푸른색 머리! 흔하지 않은데, 신기하네요!"

  엉망이 된 푸른 머리칼을 만지작거리기도 잠시, 옆자리의 단원이 소리쳤다.

  "에, 엘프다! 엘프 경비대야!"

  "뭐, 엘프?"

  

  엘프.

  희망의 빛줄기가 보였다.

  하메일은 본인이 죽을 각오로 일어나 소리쳤다.

  "도와주십쇼! 이자들은 당신들의 영역을 침범하고, 사람을 죽이는 범죄자입니다! 우리는 무고합―― 커흑!"

  "닥쳐!"

  털썩. 뒤통수를 가격당해 쓰러진다. 하메일은 머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부들거렸다.

  "어, 어라?!"

  에일린은 멈칫하며 하메일을 보았다. 난데없이 얻어맞은 사내는 곧 죽을 사람처럼 꿈틀댔다.

  고개를 돌려 산적들을 응시한다. 무기를 들고 다가오는 그들의 미소는 음흉하기 그지없었다. 에일린이 어려서일까, 제압하고 한번 해보려는 변태들이 그득했다.

  "아저씨들! 그거 나쁜 거야! 무기 내려 빨리!"

  그 의도를 모르는 에일린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경고했다.

  엄마가 하는 짓들이 바깥세상에선 '나쁜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절대로. 절대로 무고한 사람을 건들지 않았다. 선을 넘어버리는 와중에도 지킬 것은 지켰다.

  무고한 사람이 다쳤다. 

  에일린은 눈앞의 상황에 극도의 거부감을 느꼈다.

  "뭐래, 씨발. 야 저 새끼 인간이야! 귀가 짧잖아 등신드라!"

  에일린의 위협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눈치 빠른 두목이 에일린의 귀가 짧다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들은 단원들의 눈가가 좁혀진다.

  ―쐐에에엑!!

  숏소드를 든 사내 하나가 에일린에게 달려들었다.

  - 구오오!

  위협을 감지한 정령들이 에일린의 앞에 밀집했다. 그중 선두에 나선 포그마우는, 뾰족한 바위 가시를 만들어 사내에게 내질렀다. 최고위 정령의 진심이 담긴 공격.

  "커흐흐윽―?!"

  - 콰드득!!! 근육을 찢고 척추뼈를 가른 가시는, 반대쪽 살을 뚫고 피투성이 바위를 내보였다. 포그마우는 가시에 찔려 붕 떠버린 사내의 가랑이 사이로, 뾰족한 꼬챙이를 소환했다. 쿠드드득! 고환, 복부, 목, 뇌가 뚫려버린 사내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나쁜 사람들!"

  에일린은 뺨에 튄 피를 스윽 닦으며 소리쳤다. 얼굴이 차가워진다. 엄마가 끝없이 되뇐 말이 기억났다.

  죄 없는 이를 건드는 작자들은 죽어 마땅한 놈이라고.

  에일린에게 도움을 요청한 사내들―― 청련단이 정말 죄가 없는지는 확실하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공격받는 자신은 무고했다. 간단한 논리였다. 난 죄가 없으니, 죄가 없는 날 죽이려 하는 놈은 죽여도 된다.

  그리고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에일린처럼 어린 소녀를 죽이려 드는 놈은 죄 쓰레기밖에 없었으니까.

  "씨발! 다구리 까!"

  "이 시발련! 헨슨을 죽였어!"

  다섯의 사내가 달려온다.

  에일린은 눈을 싸늘하게 뜨고 정령을 산개했다.

  "크흡!"

  "씨바아알!! 이것들 좀 떼봐아아!!!!"

  몇 명은 포그마우에게 심장이 터졌다. 또 다른 몇 명은 하급 정령 서른 마리에게 둘러싸인 채 살점이 갈가리 찢겼다. 그 참혹한 광경의 유일한 생존자인 사내는, 에일린에게 검을 내지르고 나서야 주변 상황을 파악했다.

  - 탁!

  "어, 어? 씨발! 거, 검이 안 빠져!"

  검신을 붙잡는다. 오러로 강화된 손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에일린은 그대로 팔을 뒤로 당겼다. 어린아이의 힘일 텐데, 사내는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우당탕 넘어졌다.

  "사, 살려줘!"

  

  말없이 바들바들 떨기만 하는 사내를 향해, 나무 스태프를 높이 치켜들었다.

  "자, 잠깐――"

  내려친다.

  "엄마가!"

  - 콰직.

  "너같은 놈은!"

  - 콰직!

  "죽어야 한댔어!"

  - 콰직…

  한 번 내려칠 때마다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흔들린다. 세계수의 심재로 만든 스태프는, 지팡이에 담긴 오러를 다섯 배로 증폭해버렸다. 그걸 처맞은 도적은 한 대에서 골로 가버렸지만, 화를 주체할 수 없는 에일린은 정확히 네 번을 후려쳤다.

  - 콰직!

  "후우…."

  에일린을 중심으로 크레이터가 생겼다. 사내의 시체는 이미 가루가 된 지 오래. 주위에 퍼진 도적들은 천지가 흔들리는 소음에 부리나케 도망갔다.

  "이게, 뭔…"

  청련단의 단원들은 기절한 하메일을 이끌고 천천히 거리를 벌렸다. 도저히 인간이라 생각할 수 없는 힘이다. 인간도, 심지어 엘프도 저런 짓은 못할뿐더러 정령을 수백 마리나 끌고 다니지도 않는다.

  "투, 투항하겠습니다!"

  가장 나이 든 단원은, 그대로 양손을 들며 도주를 포기했다. 그의 나이는 마흔다섯이었다. 이런 상처투성이 몸으로 도망가기엔 체력이 부족했다.

  "나쁜 놈들 이제 없어!"

  에일린은 살포시 땅을 밟아 청련단에게 향했다.

  일전의 충격파로 마차는 반파가 되었다. 상행을 끝내고 복귀하는 중이라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험지 한복판에서 식량도 없이 마차를 잃었단 소리는 그냥 죽으라는 말과 같았다. 에일린이 무해하다는 사실을 알아도, 침울한 표정을 풀 수 없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녀는 계속 죽상인 그들을 보며 걱정 어린 투로 말했다.

  "아저씨. 어디 아파?"

 그는 기절한 하메일을 흘깃 보다, 곧 눈앞의 어린 소녀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단장이 너무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단장?"

  "…저기, 푸른 머리의 청년입니다."

  살고 싶으면 소녀에게 붙어야 한다. 하지만 그래서 염치가 없었다. 그렇지만, 자신들을 위해 소리친 단장의 용기를 무시할 수 없었다.

  "이미 한번 도움받아놓고 정말 염치없지만… 괜찮다면 실베흐린 대삼림에 진입할 때까지 동행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부탁입니다. 보수는 넉넉히 드리겠습니다. 단장은, 여기서 죽을 사람이 아닙니다. 장차 더 큰―"

  "내가 치료해줄게!"

  에일린은 빵긋 웃으며 손을 뻗었다. 푸른 머리의 남자, 마음에 들었다. 에일린은 붉은색 못지않게 파란색을 좋아했다.

  "얘들아! 다친 사람들 모아줘!"

  - 구오오…!

  싫든 좋든 강제로 끌려간다. 정령에게 끌려간 단원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자, 잠깐! 투항하겠다고――"

  그런데 소녀가 손을 뻗은 순간.

  "……허억."

  몸에 있는 상처들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신관, 이십니까?"

  이건, 신성력이었다.

  에일린은 치유 마법을 사용했다.

  "끄으윽…?

  기절한 하메일은, 에일린의 치료를 받고 정확히 십 분 후 정신을 차렸다. 그가 눈을 떴을 땐, 이미 상황은 전부 끝나있었다. 다친 이들이 모두 치유됐다.

  "이게, 대체?"

  "단장! 정신 차렸군요!"

  "으윽. 크러헨. 왜, 왜 내 몸이 멀쩡한 거지? 다른 상단이라도 만났나?"

  "그게… 누굴 만나긴 했는데."

  "…잠깐."

  ―휙!

  하메일은 낯선 인기척을 느끼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

  "안녕하세요!"

  "으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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