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7화 (177/193)

  가지는 적정 높이까지 내려오자, 내용물을 떨구곤 다시 올라가 버렸다.

  '이건…?'

  에일린은 쪼르르 달려가 내용물을 집었다. 구불구불하지만 전체적으론 올곧은 나무 막대기. 끝은 달팽이관처럼 휘어있고, 그 가운데엔 샛노란 보석이 박혀 있다. 

  '…막대기?'

  그것은 세계수의 심재心材로 만든 마법 스태프였다.

  스태프는 마나를 다룰 줄 모르는 초보들이나 쓰는 무기라 알려졌지만, 그것이 심재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나무 최중심부에 존재하는 심재는, 종류에 따라 희귀 아이템으로 분류된다. 마나를 흡수하고, 증폭하는 나무가 몇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나무는 무척 귀하고 비싸서, 궁정 마법사단이 아니라면 잘 쓰지도 않았다.

  그런데 세계수의 심재다.

  나뭇가지는커녕 세계수 잎만 구해도 마법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구매하려는데. 나무줄기를 파내야만 얻을 수 있다는 심재라니?

  세계수를 파내는 짓을 했다간 종족 자체가 영원히 척살령에 걸려버린다. 엘프가 멸족하지 않는 이상 평생 얻을 수 없으리라 생각되는 세계수의 심재가――

  "우오…?"

  ――지금 에일린에게 건네어졌다.

  "히히. 이쁘다."

  실상을 모르는 에일린은 그저 예쁜 막대기 정도로만 생각했지만 말이다.

  "선물 고마워요 아줌마!"

  - 콩.

  "아야!"

  아줌마라는 소리를 꺼내자, 머리 위로 황금 사과가 떨어진다. 에일린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과일 폭격에 눈물을 흘리며 힝힝거렸다.

  "히잉…."

  먹으라는 뜻이었지만, 에일린은 그저 운이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황금사과를 지나쳐 출구로 향한다.

  - 콩.

  "―아야!!"

  다시 한번 황금 사과를 떨어트린다. 이번에는 먹겠지. 세계수의 심술 섞인 의도는 잘 먹혀들었다.

  "대, 대체 왜…."

  ―덥썩! 머리 위로 떨어지는 사과를 낚아챈다. 에일린은 머리에 혹을 만든 사과를 노려보더니, 와작―! 하고 깨물었다. 먹어서 혼내주겠다는 유치한 발상이었다.

  "우뭄…."

  맛있었다.

  한입 깨물 때마다 달콤한 과즙이 뿜어져 나온다.

  엄마와 마찬가지로 뭘 먹을 필요도 없고, 마찬가지로 식욕도 별로 없었지만, 이건 달랐다. 계속해서 먹고 싶은 맛이었다.

  "히히… 엄마·아빠 가져다줘야지."

  에일린은 커다란 가죽 주머니를 만들곤, 바닥을 뒹구는 황금 사과를 주워 집어넣기 시작했다. 대충 스무 개 정도. 그 이상으로는 들어가지도 않았다.

  "끄으응…!!"

  무겁다. 하지만 참을 만했다. 에일린은 몸에 오러를 둘렀다. 몸이 가벼워진다. 그녀는 벌써 마법과 오러를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루셸리니의 피가 섞였다는 증거였다.

  ―바스스…

  미처 줍지 못한 사과들이 먼지가 되어 소멸한다.

  "흐흥…♪"

  이 노란 과일이 50년 간격으로 딱 하나만 열리는 엘프들의 보물, '황금 사과'라는 사실은―― 레칸테에 도착한 후, 황금사과를 발견한 슈리엘이 말해주기 전까진 알지 못했다.

  "콩콩아. 길 좀 알려줄래?"

  - 구오오……

  흙과 바람의 대정령 '포그마우'는 카르드라실을 떠나 에일린과 붙어 다녔다. 에일린이 방출하는 엄청난 마나. 마치 세계수 근처에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그래서인지, 에일린을 따라나선 정령은 포그마우 뿐만이 아니었다. 그를 필두로 수십, 수백의 정령들이 에일린 주위를 떠돌았다.

  "이쪽으로 가라고?"

  - 구오오…!

  "고마워 콩콩아!"

  카르드라실 밖은 온통 수인투성이였다.

  "우와아…."

  3방벽 가르퀴나 구. 쌍둥이 악마의 피해가 거의 복구됐는지 예전과 같은 활기를 보였다. 에일린은 본인을 지나치는 적랑족을 보며 '쓰다듬고 싶다'라는 생각을 품었다. 그래서 다가갔다. 하지만 적랑족들은 기겁을 하며 에일린을 피했다.

  "기, 기다려 멍멍아…!"

  붉은 달이 뜨고 모든 수인이 광폭화에 빠졌을 때, 적지 않은 수의 동족들이 엘프에게 학살당했다. 2방벽 근처에 오기만 해도 엘븐 나이트들이 몸을 두 동강 냈다. 수인들은 그날의 일을 기억했다. 그리고 다시금 깨달았다. 엘프들이 얼마나 무자비한 존재인지를.

  그것이 에일린과 무엇이 관계있냐 물으면, 엘프들의 전통 복장 하니쉬를 입고 있기 때문이었다.

  새의 꼬리처럼 뒤로 길게 뻗어있는 초록 치마. 하지만 앞은 허벅지를 겨우 넘어갈 정도로 짧았다. 또 상의는 등허리가 파여있어 노출도가 굉장히 높았다. 야하다는 느낌은 아니지만, 브라 안 입는 모 게임 캐릭터들과 비슷한 인상을 주었다.

  에일린은 그 사실도 모르고 우울해했다. 노골적인 회피는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 남에게 기피 받는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태어난 지 일 년도 안 된 에일린에겐 그 사실이 더 크게 다가왔다.

  - 구오오오!

  그걸 보고만 있을 정령들이 아니었다. 에일린의 감정과 공명하는 정령들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빠졌다.

  "그아아악――?!"

  포그마우가 적랑족 청년 하나를 납치해 앞으로 끌고 왔다. 아무 말도 못 하게 입을 막고, 머리와 꼬리를 쓰다듬을 수 있게 자세를 고정한다. 에일린은 자신에게 머리를 내미는 적랑족 청년을 보더니 설레는 얼굴로 물었다.

  "쓰, 쓰다듬어도 돼?"

  하위 정령들이 목에 달라붙어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에일린은 기쁜 얼굴로 손을 뻗었다.

  "…푹신푹신해!"

  그렇게 삼 분을 털 쓰다듬는 데 소모했다.

  "고마워! 너 이거 먹어!"

  에일린은 적랑족 청년에게 황금 사과를 쥐여주며 길을 떠났다.

  * * *

  "으음… 여긴 공기가 그리 좋진 않네….

  바르하이야, 동쪽 적랑문을 지나 방벽 밖으로 나간다. 제국의 영토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실베흐린 대삼림. 나무가 많은 것 치곤 공기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카르드라실 안은 마치 박하사탕을 먹고 마신 물과 같은 청량함이었지만, 밖은 먼지가 끼는 듯이 텁텁했다.

  엘프들이 밖을 싫어하는 이유가 왜인지 알 것 같았다. 항상 그런 공기를 끼고 살면 밖이 싫어질 만하지.

  "콩콩아. 혹시 엄마 어디 있는지 알아?"

  심상세계를 탈출하고 연결도 끊겼다. 더는 엄마의 눈을 빌릴 수 없었다. 알아서 찾아가야 했다. 날기 위해 둥지에서 떨어지는 새끼 새처럼, 두려움을 딛고 나아가야 했다.

  - 구오오…

  "모른다고? 힝."

  엄마가 레칸테에 있다는 건 알았다. 다만 좌표를 몰랐다. 텔레포트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직 엄마처럼 자유자재로 텔레포트를 쓸 수는 없었다.

  '맞아… 라냐 언니가 그걸 알려줬었지!'

  엘프들이 길을 헤맬 때 사용한다는 기술. 에일린은 마법 스태프를 꺼냈다. 스태프를 일자로 세우고, 바닥에 꽂는다. 바람이 불면 바로 쓰러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린다.

  - 휘이잉…

  바람이 불고, 스태프가 쓰러진다.

  스태프는 정확히 레칸테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쪽이구나!"

  한숨밖에 안 나오는 엉터리 수법이었지만, 엘프들은 세계수가 길을 인도해준다고 굳게 믿고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길을 잃은 적이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세계수는 그들의 믿음을 대변해주었다.

  에일린은 황금사과 하나를 아작아작 씹어먹으며 땅을 박찼다. 타악! 발끝을 세우고 총알처럼 튕겨 나간다.

  가공할 만한 속도였지만 풀이 밟히거나 가지가 부러지는 일은 없었다. 엘프들과 생활하면서 특유의 보법을 배웠다. 숲에서 그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바람이 분다.

  초록 날개옷을 입은 요정이 숲을 뛰노닌다. 펄럭이는 머리칼은 불꽃처럼 빛났고, 사이사이 숨겨진 금색의 조각들은 찬란한 빛을 냈다.

  때로는 나무 위를 타고, 바위를 넘으며 달린다. 버섯을 채취하는 모험가들을 지나가고, 짐승 사체를 뜯어먹는 고블린의 골통을 부수며 점프한다. 바람처럼 스치는 그녀를 눈치채는 자는 없었다.

  "조오아아써――!!!"

  에일린은 천상 미소를 지으며 속도감을 즐겼다. 안면과 부딪히는 바람은 따가울 정도로 세찼다. 눈을 뜨면 따끔한 통증이 찾아온다. 하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을 눈에 담기 위해선 눈을 감을 수 없었다.

  푸른 창공, 눈동자를 수놓는 수많은 구름. 이글거리는 태양, 빛 아래 살아가는 수많은 생물. 나무껍질을 갉아먹는 벌레도,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동물도, 돈을 벌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험가도, 모든 게 새로웠다.

  발에 오러를 주입한다. 흥분을 참지 못한 에일린은 나뭇가지를 밟고 높이 뛰었다. 대충 30m는 올라왔다. 눈을 내리면 빽빽이 심긴 나무가 보였고, 고개를 들면 저 멀리 커다란 산맥이 보였다.

  속옷이 보이지 않게 치맛자락을 꾸욱 누르며 포물선으로 떨어진다. 나무 위에 착지한 에일린은 다시 가지를 박차고 하늘로 올라갔다.

  나무 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에일린의 뒤로 수백 마리의 정령들이 쫓아온다. 아침 태양살에 굴하지 않고 선명하게 반짝거린 빛무리는, 땅 위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의 이목을 끌었다.

  바람을 즐겼다.

  몇 시간을 뛰어도 부족했다. 종일이라도 이럴 수 있었다. 고작 이 정도의 운동량은, 황금사과를 먹으며 급속도로 늘어난 체력을 따라잡지 못했다.

  어느새 대삼림을 벗어나고 인간들이 파놓은 길목이 보인다. 에일린은 더이상 나무가 보이지 않자 아쉬워했다. 몸에 바람을 두른다. 수십 마리의 정령이 발목에 달라붙었다. 그녀는 그 간지러움에 꺄르르 웃으며 흙길에 섰다.

  "―후우!"

  에일린은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었다. 아직 부족했으나 주변엔 딱히 구경할 만한 것이 없었다. 레칸테에 가까워질수록 지형이 험해지고, 단순해졌다. 아직 초입에도 다다르지 못해 비교적 평탄했지만, 돌 많은 언덕이 주로 보였다.

  "여기서부턴 걸어가자 콩콩아!"

  돌조각 많은 길을 밟는다. 맨발이었지만, 정령들이 보호해 아무 상처도 나지 않았다.

  천천히 자연의 색채를 눈에 담는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잠깐만 콩콩아! 갈림길이니 잠시만 기다려!"

  그녀는 때때로, 나무 스태프를 세워 길을 확인했다.

  - 탁.

  "응?"

  그런데, 나무 스태프가 엉뚱한 방향을 가리켰다.

  '이쪽이 아닌 것 같은데?'

  의심이 들었다. 길을 돌아가는 것도 모자라 왼쪽으로 난 산을 타야 했다. 멀쩡한 길을 냅두고 갑자기 산을 타라니?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무시하고 갔을 테다. 그야 나무 막대 하나 세워놓고 바람 불기만을 기다리는, 주술과 다름없는 엉터리 수법이잖는가. 이곳까지 온 것도 기적에 가까웠다.

  하지만,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나아갔다.

  세계수의 의지는 실존했다.

  에일린은 느낄 수 있었다.

  - 폴짝! 

  몸에 바람을 두르고 급상승한다. 광활한 창공에 도달한 에일린은 스태프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산 너머에 있는 또 다른 길. 실베흐린 대삼림의 진입로였다. 옅은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무언가 꿈틀대는 무언가가 있었다.

  "콩콩아, 저거 뭐야?"

  포그마우는 시야를 확대해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 구오오…

  "모른다고? 알겠어! 직접 가봐서 확인해보지 뭐!"

  포그마우가 확인한 그것들은 상행길을 떠나는 마차였다. 마차를 통해 실베흐린 대삼림에 진입하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이곳, 쿠룸 산맥을 경유해 쭉 돌아가는 것이었다.

  멀쩡한 길 냅두고 이런 험한 길을 사용하는 이유로는, 물론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변두리 마을에 식량을 팔기 위해서였다.

험지에 세워진 마을은 식량 보급에 힘을 들이니까. 가격을 좀 싸게 쳐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일단 가져온 대로 팔 수 있었다. 재고 처리할 때 유용한 방법이었다. 

  아마 상행을 끝마치고 실베흐린 지부 신전에 체류하려는 모양이었다. 갔던 길을 돌아가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문제가 있다면.

  지금 저 상단이 도적들에게 고립됐다는 정도일까.

  "두목. 저것들 어떻게 할까요? 그대로 풀어줄까요?"

  "자, 잠시만! 돈은 줬잖나! 얘기가 다르다! 풀어줄까요? 라니!"

  "건진 게 많아서 고민이라도 해주는 거야. 두목!"

  납치된 상단은 서부 원정 상인 청련단靑蓮團이었다. 이들을 습격한 건 이런 원정 상행을 주 표적으로 한 악질 산적이었다.

  "죽이고 마차도 불태워. 음식은… 챙길 것만 챙기고 싹 다 묻어버려."

  "예!"

  그냥, 운 없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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