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4화 (174/193)

  "여기라면 땅을 부수든 지진을 일으키든 상관 없을 거예요."

  사실, 이것만 보여줘도 충분할 것 같았다. 별도의 술식 없이 장거리 텔레포트를 쓸 수 있는 마법사는 극히 적었고, 다수의 인원을 무영창으로―― 그것도 동부에서 서부까지 이동하는 마법사는 없다시피 했다.

  다만 라엘도, 유진도 이걸로 만족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보다 더 확실한 믿음을 위해서라면 재구축이나 다른 걸 보여줘도 됐겠지만, 서로 칼을 부딪히고 싶다는 욕망이 조금은 있는 모양이었다.

  ―딱! 유진은 손가락을 튕겨 사방에 마나를 흩뿌렸다. 시에라 바위지대는 지맥의 마나가 꼬여 일 년 내내 건조한 기후를 유지한다. 그것을 살짝 비틀었다. 꼬인 지맥이 원상태로 돌아오자 모래바람이 멎고 서늘한 공기가 내려왔다.

  "이제야 숨쉬기 좀 편하네요. 땅도 좀 갈아버릴까요? 이래서야 움직이기 불편하니까요."

  손을 교차시키고, 펼친다. 그러자 직사각형 모양의 마법진이 만들어졌다. 이것은 주변의 지형 정보였다. 마법진 위로 보이는 곡선과 자잘한 알갱이들. 유진은 마법진 위로 튀어나온 부분을 꾸욱, 하고 눌렀다.

  ―쿠웅!!!

  그 순간, 낮은 바위 언덕이 가루가 되어 바스러졌다. 간단한 기술이었다. 주변 지형과 연동한 마법진을 소형화하면 된다. 세상의 경계를 조작하며 배운 것이었다. 경계를 구체화할 수 있다면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지형뿐만 아니라 생체 데이터도 가능할 것 같았다. 오컬트에 나오는 밀짚 인형처럼 말이다. 인형의 팔을 부러뜨리면 진짜 팔이 부러지는 식으로.

  "잠시만 기다리세요. 조금 시끄러울 수 있어요."

  나중에 꼭 써먹어야겠다 다짐하며 지형 정리를 시작한다. 쿵, 콰직. 와르르. 유진은 뽁뽁이를 터트리듯 마법진 위로 튀어나온 언덕들을 부숴댔다.

  * * *

  나는 '이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전혀 생각지 못했다. 몇 달 전만 해도 도로를 갈아엎고, 손짓 한번으로 언덕을 폭파한 전적이 있는지라 조금 무감각해졌을지도 모르겠다.

  직사각형의 푸른 마법진을 조작할 때만 해도 대행자들의 표정은 당황에 그치었다. 하지만 두드림의 결과가 언덕의 붕괴로 이어지자 당황은 경악으로 바뀌었다. 이런 식의 마법은 듣도 보도 못했기 때문이리라.

  마법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건 '위력'이지만, 그다음으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이 바로 '독창성'이다. 허나 그 둘은 늘 별개의 것으로 취급되어왔다.

  그것들을 묶으려는 시도조차 없었다. 오히려 분류했다. 마법사, 배틀메이지, 마도학자, 연금술사 등. 스스로의 역할과 한계를 정해놓고 제 발로 감옥에 들어간다.

  낭비였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마법은 모든 형태로 발현될 수 있다. 술자가 원하는 것이라면 자연의 섭리를 깨부수지 않는 한 모든 것이 가능했다. 반인륜적 기술까지 더하면 세상 그 자체를 움직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신기하나요? 고작 이런 거에 놀라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괜찮겠어요?"

  나는 완전히 평평해진 바위 지대를 바라보며 쿡쿡댔다.

  내가 싸움을 앞두고도 너무 태연한 모습을 보여서일까, 아니면 이 황당무계한 광경이 저들로선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그런 걸까. 어느 쪽이든 기선 제압은 성공했다.

  오직 슈리엘만이 놀라지 않았다. 이보다 더한 걸 본 적이 있기 때문일까. 동요를 금치 못하는 둘에 비해선 비교적 나아 보였다. 

  "무대도 준비됐으니, 슬슬 움직일까요? 아, 준비되면 말해주세요. 저는 여기서 기다릴 테니."

  선공을 양보하는 것도 모자라 여유까지 부린다. 라엘은 이를 까득 갈며 자리를 이동했다. 퍽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라엘의 요구를 들어줬을 뿐이다. 삼 대 일 다구리 계획은 라엘이 꺼냈다.

  나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 '준비'를 기다렸다.

  라엘은 이미 한참 전에 준비를 마쳤고, 슈리엘은 육탄전에 의존해서 그런지 별다른 준비를 요하지 않았다. 움직이는 것은 파윈 뿐이었다. 그녀는 수십 개가 넘는 성흔을 이용해 싸우기에, 고통을 줄여주는 성역이 없다면 스스로 자멸하고 만다.

  그녀는 라엘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성역을 설치하겠습니다. 라엘, 성수가 필요합니다."

  "내가 있는데 뭐하러? 기다려 봐. 만들어 줄 테니까."

  라엘은 손을 들어 커다란 물방울을 생성해냈다. 그냥 물이 아니었다. 신의 힘이 담긴 성수였다. 그는 물방울을 하늘 높이 던져버리곤, 그대로 터트려 사방으로 물을 흩뿌렸다. 촤아아악! 모래투성이 대지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됐지?"

  그는 머리를 흔들어 물방울을 털어냈다.

  "…감사합니다."

  파윈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저렇게 성수를 뿌리는 것만으로 성역을 설치할 수 있는 걸까. 의문이 머리를 꿰찼지만, 어차피 곧 보게 될 일. 나는 의문을 고이 묻어두었다.

  내가 오만해서 저들에게 선공을 넘기고, 전력을 발휘할 수 있게 시간을 준 게 아니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했다. 나는 저들이 준비하는 동안 수백 수천수만의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그리고 내겐, 저들이 무슨 짓을 하든 이길 수 없는 절대적인 이점이 있었다. 나는 손을 만지작거리며 성역 설치를 기다렸다.

  "…악한 것들이 감히 이 땅을 침범할 수 없게, 신께서 빛을 내리리라."

  ―화아악!!

  파윈이 짧은 기도문을 읊자, 샛노란 빛기둥이 저녁노을을 가르며 솟아올랐다. 성역의 설치였다. 그녀는 반쯤 감은 눈을 부릅떴다. 살짝 내리고 있던 고개도 빳빳이 세웠다. 온몸에 힘이 들어간 모습. 가끔 내던 고통스러운 신음도 완전히 멎었다. 

  파윈의 몸이 빛난다. 두꺼운 갑옷 사이로 새하얀 빛이 새어 나왔다. 성역 안에서 그녀는, 성흔의 부작용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었다.

  "…준비를 마쳤습니다. 신호를 주시면, 바로 응답하겠습니다."

  그녀는 방으로 돌아가 길쭉한 철퇴 하나를 챙겨왔다. 파윈의 키와 비슷한 길이의 손잡이, 그 끝엔 날카로운 가시가 달린 구체가 달려있었다. 그녀가 말한 '응답'이 어떤 종류인지 대충 감이 왔다.

  자신의 애검 카라반을 챙긴 슈리엘은 모래 평야에 나서며 말했다.

  "다 끝났나?"

  "어쭈, 갑자기 리더 행세야?"

  "그렇다고 너를 리더로 세울 수는 없잖느냐."

  "닥쳐. 그보다 언제 시작할 거야? 쟤 다리 아프겠는데."

  나는 치맛자락을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언제든지."

  여유로웠다. 하지만 오만하지 않았다. 슈리엘과 라엘은 각자의 무기를 쥐며 자세를 낮췄다.

  "파윈. 시작해라."

  슈리엘의 신호가 떨어진 순간, 나는 주변의 마나를 흡수했다. 서늘하게 불던 바람이 멎는다. 땅 밑으로 흐르던 마나도, 공기 중에 퍼진 마나도 전부 한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나로 차오른다. 몸이, 정신이 충만한 마나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적색마탑의 붉은 마녀 유진."

  파윈은 위로 떠 오르는 나를 향해 철퇴를 겨누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눈. 항상 한 템포 늦게 말하던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확고한 의지를 담아 선언했다.

  "――지금부터 당신을 이단으로 지정하겠습니다."

  이단異端 지정.

  심문관의 자격을 가진 앙그리드는 상대방을 '이단'으로 지정할 수 있다. 이단으로 지목받은 상대는, 성역 안에서 온갖 제약을 받게 된다.

  "끄흡…!"

  나는 정신과 몸을 속박하려는 정체불명의 기운을 떨쳐내며 마나를 끌어모았다.

  ―쿠웅!

  찰나. 파윈과 슈리엘은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땅을 박찼다. 날카로운 검날과 뭉툭한 가시가 초월적인 속도로 다가온다. 모두 오러가 담긴 공격이었으며, 살의가 담긴 공격이었다. 나를 향해 무기를 뻗는 것에 어떠한 망설임도 없었다. 그 노골적인 움직임에 사고를 가속한다.

  나는 느려진 세상 속에서 저들의 위치를 눈에 담았다. 오른쪽엔 슈리엘이, 왼쪽엔 파윈이 살벌한 얼굴로 무기를 휘둘렀다. 슈리엘이 더 빨랐다. 간단히 고개를 숙이는 것만으로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피하고 나면 곧바로 파윈의 철퇴가 날아왔다.

  그 시간 차이는 아주 교묘하고 계산된 것이어서, 고개를 숙이든, 뒤로 내빼든 후속타를 맞는 건 필연적이었다. 슈리엘은 자신의 속도를 이용해 사각지대를 만들어냈다.

  죽음이 다가온다. 하지만 내게 죽음은 너무나 익숙했다. 다정함마저 느껴지는 칼날의 쇄도에 슬며시 웃는다. 나는 공중에 떠오른 그대로 마력을 방출했다.

  '일그러져라.'

  ―퍼어어엉!!!

  "크윽!"

  "꺄흑!"

  칼날이 목에 닿기 직전, 공간이 뒤틀리며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충격파에 밀려난 슈리엘이 날아가고, 뒤따르던 파윈이 이어서 날아간다. 이건 저항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공간이 일그러졌고, 순식간에 펼쳐졌다. 저 둘은 공간이 복구될 때 일어난 반동에 튕겨 나갔다.

  "라엘――!!!"

  카드드드득!! 슈리엘은 바닥에 칼날을 꽂아 넣으며 소리쳤다.

  "이 머저리들…! 축복도 안 받고 먼저 뛰어드는 놈들이 어딨어?!"

  저 멀리. 주머니에 손을 꽂고 조용히 신성력을 끌어올리는 프루카이스가 보였다. 슈리엘의 몸에 푸른 빛이, 파윈의 몸에 샛노란 빛이 감돈다. 그는 쉴 새 없이 기도문을 읊으며 정체 모를 축복을 걸어주었다.

  그것이 어떤 종류인지는 잘 모른다. 다만 세르티가 일전에 걸어주었던 성기사의 축복과 굉장히 흡사했다. 고통은 줄여주고 회복력은 높여주는 전쟁 찬가. 그것 말고도 다섯 개가 넘는 축복을 동시에 걸어주었다.

  그걸 구경만 할 내가 아니었다. 선공을 양보했으니, 이제 이쪽에서 나갈 차례였다. ―콰드득!! 나는 한쪽 팔을 들어 지면을 뽑았다. 내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대지. 집채 만한 흙을 퍼 올리고 그대로 라엘에게 던진다.

  ―쇄애애액!

  반월半月. 푸른 빛의 궤적이 반월을 그리며 흔적을 남긴다. 소닉붐을 일으키며 날아간 흙뭉치는 라엘에게 닿지 못했다. 정확히 반으로 갈라진 흙뭉치는 그의 양옆을 타격했다. 꽈앙! 가공할 만한 소음과 흙먼지가 시야를 가린다. 흙뭉치를 가른 것은 슈리엘이었다.

  괜찮았다. 기회는 차고 넘쳤으니까. 내겐 저들의 이점을 모두 상쇄할 만한 이점이 있었다. 이곳이 '평야지역'이라는 이점이 말이다. 대행자들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뼈저리게 절감했다. 공간 제약 없이 마법을 구사하는 마법사는 그 자체로 재앙이었다.

  마법사의 맹공은 그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화르륵! 나는 손가락을 튕겨 파이어볼을 만들어냈다. 용암처럼 뜨거운 불꽃. 수천 개의 불덩이가 하늘을 덮는다. 그 새빨간 불꽃은 성역이 만들어낸 신성한 빛을 집어삼켰다.

  '메테오.'

  오른손을 높이 든다. 그다음 동작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손을 내리고, 지옥불을 선사한다. 공기를 불사르며 떨어지는 수천 개의 불덩이는 마치 종말이었다.

  ―휘이이잉!!!

  "모두 피해――!!!"

  슈리엘은 검에 오러를 불어넣으며 소리쳤다. 불덩이 수십 개쯤은 가를 수 있었지만, 나머지 구백구십 개의 불덩이가 문제였다. 그는 제 한 몸을 지킬 순 있어도 라엘까지 지키진 못했다. 라엘은 아직도 기도문을 읊고 있었다. 

  "제가 쳐내겠습니다!"

  파윈은 철퇴에 신성력을 불어넣으며 땅을 박찼다. 우웅! 철퇴에 신성력을 불어넣을수록 크기가 커진다. 신의 힘을 게걸스럽게 빨아들인 철퇴는 건물 만하게 커다래졌고, 곧 불덩이를 향해 휘둘러졌다. 타자가 공을 치듯 불덩이들을 날려 보낸다.

  ―퍼어어엉!!!

  "라엘, 라엘은 어딨지?!"

  "자리를 옮겨야 합니다! 슈리엘! 그곳에 서 있으면 안 됩니다!"

  불덩이의 절반이 공중에서 폭발했다. 라엘은 무사했다. 대신, 나머지 절반에 직격당한 땅이 그대로 녹아, 용암지대를 방불케 하는 뜨거운 공기를 뿜어댔다. 순식간에 지옥이 돼버린 시에라 바위지대. 그들은 감히 숨쉬기를 주저하며 무기를 쥐었다.

  나는 난장판이 되어버린 바닥을 내려다보며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대행자들을 죽일 방법은 그 가짓수만 수천 개가 넘어갔지만――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쓰지 않을 것이고, 써서도 안 됐다. 그렇다면 죽음 대신 압도를, 믿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정도의 압도를 선사해야 했다.

  "이제 좀 믿을 수 있나요?"

  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조용히 속삭인다. 나는 이번 전투에서 선공을 제외하곤 어떠한 공격도 허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것에 딱 어울리는 마법이 하나 있었다. 마도의 끝에 다다른 초월자만이 구사할 수 있는, 초월 끝에 육체의 의미가 없어진 자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그것을.

  '영체화.'

  영체화는 사용자의 온전한 정신 상태가 무척이나 중요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자신이 자신에게 잡아 먹혀버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다.

  육체를 포기하고 날것 그대로의 정신으로 회귀하는 것이기에, 본인의 감정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불안정하고, 뒤틀린 정신으로 영체화를 시도한다면―― 미처 돌아온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영원히 반半 영체로 세상을 살아야 했다. 

  과거의 나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마음의 평온을 찾았다.

  그것이 어떤 방식이든 상관없었다.

  '육체를 포기한다.'

  나는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켜 몸을 숨겼다. 태풍의 눈 한가운데서 숨을 고른다. 점점 희미해져 가는 감각. 몸이 먼저 스러지고, 입고 있던 옷이 소용돌이로 떨어져 가루가 돼버린다.

  '옷 구조는 기억했으니 다시 만들 수 있어.'

  소멸한 옷을 보며 아쉬움에 빠진다. 영체화에 돌입했음에도 혼란스럽지 않았다. 망가진 옷이 먼저 생각날 만큼 내 정신이 안정됐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피학성향은 그대로 남아 내 육체를 좀먹고 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나름 '정상'이라 부를 수 있었다.

  아크 메이지의 마음에 평온이 찾아왔다.

  푸르고 반투명한 빛 덩어리는, 한곳에 뭉쳐 어떠한 형상을 이루었다. 발목 밑까지 뻗은 푸른 실선은 생머리를 연상케 했고, 몸의 굴곡 또한 선명하게 보였다. 하지만 푸른 입자가 모여 인간의 형상을 흉내 낼 뿐, 겉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자유자재로 늘어났다 줄어드는 몸은 유령처럼 보이기도 했다.

  영체화는 간단하게 말해서,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육체라는 한계를 말이다. 내가 아무리 아크 메이지라 해도, 결국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는 이상 사용하지 못하는 기술이 있다. 너무 많은 마나를 운용하면 뇌가 익거나 심장이 터져버린다. 물론 육체가 폭발할 정도로 강한 기술은 경계 조작 말곤 써본 적이 없지만… 이참에 써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얼어라.'

  마법진을 전개할 필요는 없었다. 모든 건 내 의지대로 움직일지니, 그저 상상하기만 하면 되었다.

  ―쩌저저적…

  소용돌이치던 태풍이 통째로 얼어붙는다. 퍼져나가는 한기. 땅을 녹이던 불구덩이도, 휘몰아치던 바람도 한기를 이기지 못하고 파랗게 얼어버렸다. 불 다음엔 얼음이, 이 황량한 바위 지대를 강타한다. 땅과 하늘을 수놓은 거대한 얼음 기둥은 그 난폭하고 격렬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했다. 

  마천루처럼 솟아오른 나선의 탑. 영체에서 발하는 푸른 빛이 반사되어 수정처럼 빛난다. 환상처럼 퍼진 빛은 땅거미 진 황혼과 섞여 역동적인 빛을 자아냈다. 차갑지만, 뜨거웠다. 몸을 기어 다니는 추위는 피부가 찢어질 정도로 시렸다.

  ―겨울을 앞당긴다. 수백 년 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바위지대에 기어코 눈을 내린다. 나는 혹한酷寒을 알기에, 지난날의 마음 시린 눈발을 알기에, 쌓이고 쌓여 심장마저 얼어붙은 그 날을 알기에,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겨울을 만들 수 있었다.

  세상이 얼어붙는다.

  "――북부를 수호하는 영령들이여!"

  평범한 인간이라면 수 초 안에 얼어붙어 죽어버릴 추위. 라엘은 읊고 있던 기도문을 전부 중단시키곤 북부 전사의 가호를 걸었다. 늘 추위 속을 살아가는 북부인을 위한 가호. 라엘과 대행자들에게 빛의 장막이 씌워진다.

  파윈은 가는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얼어 죽을 뻔했습니다."

  압도적인 추위는 그 자체로 무기였다. 장막 안에 들어와도 좀처럼 몸이 녹지 않았다. 그들은 오러를 몸에 활성화해 얼어붙은 손을 녹였다. 그런데도, 한숨을 쉬면 서리가 나온다. 급격한 온도 변화에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주위는 눈밭이 되어버렸다.

  "미친… 저걸 어떻게 이기라고?"

  "본인이 싸우자 해놓고 내빼려는 건가?"

  "내빼고 자시고, 저거 인간 맞냐?"

  "포기할 거면 지금이라도 하는 게 좋아 보이는군."

  "…할 수 있는 데까진 해봐야지."

  인류의 검이 되어 선봉에 나서는 이들인 만큼, 그들의 의지는 쉽사리 꺾이지 않았다. 각자 무기를 꼬나쥐고 다시 자세를 잡는다. 다만 그들의 눈에는 승부욕이 아닌,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보고자 하는 의지가 깃들어있었다.

  믿음 다음엔 신뢰, 신뢰 다음은 관철이었다. 이제 저들은 내게 힘을 증명하려 한다. 앞으로의 전투에서 내 발목을 붙잡지 않겠다는 발버둥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나도 저들의 의지에 부응해줘야겠지.

  '갈라져라.'

  쩌저저적! 얼어붙는 게 아닌 갈라지는 소리. 나를 감싼 얼음 기둥에 금이 간다. 아무리 오러를 때려 박아도 흠 하나 나지 않던 기둥에 금기 가자, 대행자들은 긴장하며 위치를 사수했다. 점점 올라가는 실선. 이윽고, 툭 건들면 부서질 정도로 많은 금이 갔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얼음 파편. ―지금이었다. 나는 사방으로 마나를 퍼트려 태풍을 깨트렸다. 채애애앵! 수천, 수만 개의 파편이 사방으로 날아간다.

  '멈춰라.'

  의지를 담아, 대자연에게 명령한다. 중력에 이끌려 떨어지던 수만 개의 얼음 파편은,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고 그대로 공중에 머물렀다. 그때. 얼음 기둥이 깨지는 순간, 내게 돌진하려던 슈리엘이 멈칫한다.

  뺨을 스친 얼음 조각. 그 아래로 흘러내리는 선명한 핏방울. 울퉁불퉁한 얼음에 난반사된 빛은 그들의 시야를 가렸고, 조금만 스쳐도 베이는 날카로운 파편은 움직임을 제한했다. 세상이 적청색의 광채로 일렁인다. 나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고, 않을 것인데, 저들은 내게 다가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움직이면 안 됩니다. 라엘이 방위 지역을 선포할 때까지 버텨야 합니다. 다음 공격이 날아오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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