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착의실로 향하는 알펜로스의 눈매는 축 처져있었다. 그녀는 영혼이 빠진 사람처럼 터덜터덜 걸어갔다.
나는 드레스 꾸러미를 한 손에 들고 나지막이 말했다.
"기운 내요, 파니. 슈리엘이 그렇게 속 좁은 사람은 아니니까요. 갑자기 일을 바꾼다 해도 불이익은 없을 거예요."
"…힝."
"돈도 세 배로 받잖아요? 파니가 얼마나 받는진 모르지만, 그래도요. 아니면 제가 따로 챙겨드릴까요?"
파니 알펜로스. 내 전속 시녀. 내가 시녀를 가지게 될 줄은 몰랐다. 비록 급조된 직위라 해도 감회가 남다른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인지 괜히 챙겨주고 싶었다. 노예 목걸이를 찬 이상 슈리엘과 계속 붙어 다녀야 하는데, 내 전속 시녀라면 자주 만날 게 분명했다.
파니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아가씨."
"전 아직 평민이니까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아녜요. 이게 더 편하기도 하고, 그러다가는 작은 도련님한테 죽어요."
그렇게 말한 알펜로스는 돌연 얼굴을 붉혔다. 워낙 경황이 없어서 처음엔 신경 쓰지 못했지만, 이렇게 둘만 있다 보니 다시금 떠오른 것이다. 정액 웅덩이에 얼굴을 처박고 암캐처럼 핥아먹던 내 모습이. 첫 만남부터 범상치 않았다.
그녀는 착의실의 문고리를 잡고 돌리기 직전 질문했다.
"음… 아가씨?"
"네?"
"작은 도련님이랑… 아가씨는, 그, 무슨 관계인가요…?"
―끼익…
문이 열린다. 슈리엘이 쓰던 방이었지만 좀처럼 사용하질 않아서 방치된 드레스 룸. 그는 시녀를 대동하지 않았다. 옷도 집무실에서 갈아입었고. 차라리 칼버드 같은 기사가 더 안심된다고 하나 뭐라나. 들은 바로는 날 만나기 전에도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가며 대답했다.
"주인과 노예, 정도려나요."
"네?"
먼지가 잔뜩 묻은 접이식 거울이 펼쳐져 있고, 용도를 모를 여러 도구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다. 못해도 반년은 방치된 것 같았다. 그 한가운데 보이는 살짝 높은 의자. 나는 드레스 꾸러미를 꺼내 조심스럽게 알펜로스에게 건넸다.
"노, 노예…? 네?"
드레스를 받아 든 알펜로스의 눈이 두 차례 흔들렸다. 슈리엘에게 엿듣는 걸 들켰을 때보다 더 혼란스러워 보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이 목걸이, 노예 목걸이에요. 슈리엘한테 대충 1리 정도 멀어지면 빈사 수준에 이르는 전기 충격이…"
"아, 아니! 잠깐만요! 네? 노예라구요?"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원해서 된 거예요."
"대, 대체 왜…?"
"슈리엘은… 음, 머, 멋지잖아요."
딱히 표현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화려한 미사여구를 붙이기엔 너무 부끄러웠다. 부끄럽지 않으면서 적절한 칭찬을 생각해낸 게 고작 저것이었다. 나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의자에 앉았다.
"…무덤까지 가져가겠습니다."
알펜로스는 '못 들은 걸로' 하기로 했다. 신변에 위협이 될 만한 정보는 뱉어버리는 게 맞았다. 나도 그걸 알면서 말한 거고. 너무 과한 정보는 그 자체로 입막음이 된다. 사실, 딱히 말해도 상관없지만 알펜로스에게 그 정도 깡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아가씨, 팔 좀 벌려주세요."
내가 의자에 앉자 능숙하게 옷을 벗기기 시작한다. 나는 알펜로스에게 몸을 맡긴 채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 이 세상 사람들에겐 익숙지 않은 구조일 텐데 한 번에 알아보고 벗긴다. 앉아있는 상태에서 치마는 어떻게 벗긴 거지? 당하고도 신기했다.
알펜로스는 삼 분도 안 되어 나를 속옷 차림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건네받은 드레스를 주름지지 않게 절도 있는 동작으로 드레스를 쥐었다.
"솔직히, 조금 걱정했어요. 일단 고개를 끄덕이긴 했는데, 알다시피 이 저택엔 도련님만 둘이잖아요?"
"그렇, 죠?"
"그 탓에 여성용 물품이 부족하거든요. 코르셋이나, 여성용 화장품 따위요. 그런데 피부도 고우시고, 허리도 얇고…그냥 별다른 준비 없이 걸치기만 해도 옷이 살겠는데요? 정말 살면서 드레스 한 번도 안 입어봤어요?"
알펜로스는 말을 하다가도, 자꾸만 자궁 위에 새겨진 하트 문신에 눈을 두었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슈리엘의 노예라는 말이 절로 와닿았다. 이런 음란한 문신은 노예가 아니고서야 새길 수 없으니까.
나는 자꾸만 눈을 피하는 알펜로스에게 말했다.
"파니."
"잠시만요, 드레스를 입기 전에 속에 입어야 될게 있어서요. 등 좀 보여주실래요?"
"그게 아니라, 말할 게 있어서요."
"네?"
"저희 솔직하게 지내자는 얘기에요. 계속 보게 될 사이인데, 아무것도 몰라서야 그게 시중이겠어요? 궁금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보셔도 좋아요. 대답해드릴 테니까요."
마부가 있어도 신나게 강간했던 슈리엘이다. 어차피 말하지 않을 것이란 걸 아는데, 과연 날 가만히 놔둘까? 그러니, 미리 밝혀두지 않으면 기겁할 게 분명했다. 알펜로스가 있다고 손을 안 댈 것 같진 않았다.
파니 알펜로스는 상식을 넘어서는 상황이 계속되자 멍하니 입을 벌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바짝 긴장한 채로 물었다.
"아, 아가씨께서는. 진짜로… 노예, 인가요?"
"제가 뭣 하러 거짓말을 하겠어요? 어차피 알게 될 텐데."
"…성노예?"
"그건, 음. 아마 아닐 거에요. 뭐 그렇게 불려도 부정은 못 하겠네요. 성노예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옷 가방 좀 주시겠어요?"
밑에 깔려있어서 보지 못한 건지, 아니면 봐도 모른 척 하는 건지, 알펜로스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옷 가방을 건넸다.
나는 고이 접힌 새하얀 천 조각을 꺼내 들었다. 오늘 가게에서 산 음란하기 짝이 없는 속옷. 유두와 음부 부분에 구멍이 뚫려 훤히 드러난, 속옷 같지도 않은 속옷이다. 이걸 왜 꺼냈냐 물으면, 당연히 입기 위해서다.
접힌 속옷을 펼치자 알펜로스의 얼굴이 새빨개진다. 웨딩드레스마냥 새하얀 프릴과 레이스가 달린 팬티는 한가운데가 뻥 뚫려, 순백색의 이미지와 반대되는 음란함을 자아냈다. 브래지어는 가슴 모양을 잡기 위해 나름의 구실을 하고 있지만, 이 역시 유두와 유선이 훤히 드러나 무척 저속해 보였다.
"됐어요. 이제, 입혀주세요."
"…나간다고 하지 않았나요?"
"안 들킬 자신 있어요. 괜찮아요."
"네, 네?!"
하지만 이렇게 생겨도 속옷은 속옷. 원래라면 대신 입어야 할 드로워즈와 캐미솔을 과감히 패스한다. 코르셋도 패스. 그런 거 없어도 개미허리라 필요 없다. 이래서야 입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걸치는' 엉터리 착의였으나 겉만 봐서는 모를 것이다. 그래도 슈미즈는 껴입었으니까.
당연히 알펜로스가 기겁을 하며 뜯어말렸지만, 계속된 설득에 마지못해 진행했다. 어차피 드레스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고, 보인다 하더라도 마법으로 가리면 그만이다. 오프숄더이기도 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알펜로스가 입혀주는 옷을 얌전히 받아들였다. 눈을 감고, 다 됐다고 하기 전까진 바비인형처럼 손길에 따라 움직인다.
지금까지 셔츠에 치마라는 비교적 밋밋한 옷들만 입다가 '진짜 여자 옷'을 입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이 부드러운 비단하며, 발목에서 나풀거리는 느낌하며, 하나같이 익숙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래도.
슈리엘의 반응이 기대되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자, 눈 뜨셔도 돼요!"
알펜로스는 재빠르게 드레스를 입혔다. 대충 오 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다 됐다. 나는 그녀의 말대로 눈을 떴다.
"우와…."
세 방향으로 전개된 거울. 그 속에 비친 흑색의 드레스의 소녀. 나는 완전히 변해버린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뒤에서 알펜로스의 감탄이 들려온다. 확실히, 감탄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빗장뼈와 어깨가 훤히 보이는 시원한 오프숄더 드레스. 팔꿈치 밑으로 쭉 뻗은 가느다란 팔은 퍽 관능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시선을 끄는 건, 무슨 짓을 해도 가려지지 않는 커다란 가슴이었다.
가슴골이 드러나지 않도록 최대한 옷을 당겨 가슴께를 가리려 했지만―― 손을 놓자 튕기듯 내려가 노골적인 계곡을 형성했다. 밑으로 내려가면 작은 프릴과 나선 모양의 자수가 새겨져 있는 검은색 스커트가 계단처럼 펼쳐졌다.
마지막으로, 가장 밑으로는 매끈한 발바닥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어 그 모습을 보였다. 때 하나 묻지 않은 작디작은 발은 특정 취향의 사람들이 매우 좋아할 것 같았다.
마치 흑장미의 검은 드레스.
당한 짓들을 생각하면 창녀보다 더했으나… 적어도 아름다움과 품위는 그녀들에게 밀리지 않았다. 당장 흑장미의 최고급 인력으로 투입 돼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았다.
흑장미와 큰 차이점이 있다면, 그녀들은 모두를 위한 장미꽃이었지만, 나는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장미를 피운다.
알펜로스는 꺅꺅거리며 흥분했다.
"진짜, 진짜 예뻐요! 이렇게 예쁜 사람은 처음 봐요!"
"으음… 어울리나요?"
"어울리다뇨! 이건, 이건 예술이에요!"
"그 정도에요…?"
옷과는 별개로, 머리 스타일도 포니테일로 바꾸곤 간단한 화장을 했다. 없는 물품에 기초화장만 했는데도 인상이 싹 변했다. 화장하기 전엔 비 내리는 날에 자살할 것 같은 음침한 인상이었다면, 지금은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우울한 인상 정도로 나아졌다. 순정만화 속 불우한 여주인공 같은 표정이라 해야 하나.
그래도.
자존감이 낮아서 그런지 자신감을 못 가지겠다. 나도 내가 예쁜 건 알지만, 약간 긴장됐다.
"빨리 작은 도련님한테 가보세요! 뿅가 죽을걸요?"
"자, 잠깐만요!"
음부는 가려질지 몰라도― 흥분이라도 해서 유두가 딱딱해지면 옷 위로 희미하게 보일 수 있었다. 일부러 이렇게 입긴 해도… 처음부터 보여주긴 싫었다. 대행자들을 만나고, 단둘이 있을 때 기습적으로 이 음란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효과가 배가 된다.
"하우으…."
심호흡한다. 발정하지 말자, 발정하지 말자. 차라리 눈을 감고 만날까. 하지만 그이의 냄새는 너무 황홀했다. 잘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제, 가도록 해요."
나는 알펜로스가 건넨 신발을 신고 슈리엘의 방을 향해 나섰다. 신발도 평소에 신던 가죽신이 약간 낮은 굽을 가진 여성용 구두였다.
―또각, 또각.
나는 알펜로스의 손을 잡고 어색한 걸음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의 조언을 들으며 조신하게 걷기 위해 발을 모으며 걷는다. 나와 파니의 모습은, 가히 정석적이라고밖에 말하지 못했다. 영락없이 귀족 영애와 그녀를 시중드는 시녀였다. 마치 그림의 한폭. 모든 여자라면 한 번쯤은 빠지고 싶은 몽환적인 모습이었다.
- 똑똑.
"후아아…."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들어와라."
* * *
슈리엘은.
유진 못지않게 메마른 인간이었다. 냉혈한 성격과 무력을 신봉하는 가치관 탓이었다. 그는 근처에 힘없는 자를 두지 않았다. 시종이나 집사 따위를 무시하고 혼자 다니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유일한 동행인이었던 칼버드가 은퇴하고 나서는, 대부분을 혼자 보낸다.
그것은 유년기 시절부터 솟아오른 하나의 의심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대행자가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왔던 그는, 자신이 남들보다 몇 배는 더 빠르게 강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피를 이어 내려온 재능. 루셸리니의 축복. 그는 그때부터 평등은 존재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생을 동부에 살았던 그는, 대행자가 되고 나서 첫 임무를 받고 처음으로 서부로 떠났다. 그곳에서 타버린 어미와 어린아이의 끊어진 숨결을 보았을 때, 그는 구원은 모두에게 내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동부로 돌아온 그는, 서부가 동부에 비해 얼마나 낙후되었는지 알게 됐다. 서부는 제국의 어둠이었다. 많은 사람이 어둠 속에서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다. 그는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의 존재는 확실했다.
그러나 믿기 싫었다.
그는 세상에 환멸을 느꼈다.
이 압도적이고 타고난 힘은, 마음속이 불경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그대로 유지됐다. 속으로 신에게 엿을 날려도, 땅을 가르고 악마를 징벌하는 구원의 힘은 예외 없이 발동됐다. 신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신을 향한 의심과 의문은 비관주의로 빠지기 마련이었다. 이제 그에게, 대행자는 의무가 아닌 단순한 일이었다.
다만 그가 다시 신을 믿게 된 건…
대단히 우연하고, 아주 사소한 계기였다.
* * *
―들어와라.
알펜리스는 뿌듯한 표정으로 나를 응원했다. 내가 긴장한 기색을 눈치챘다. 하긴 백작가에서 능숙하게 일할 정도인데 남 눈치 보는 건 일도 아니겠지. 나는 그녀의 응원을 원동력 삼아 용기 있게 문을 열었다.
- 끼이익…
"들어갈게요?"
안은 조용했다. 슈리엘은 의자에 등을 기대곤 눈을 감고 있었다. 순간 자고 있다 생각할 정도로 미동 없는 자세였다. 방금 대답했으니 깨어있긴 할 텐데, 피곤하기라도 한 걸까. 그리고 슈리엘의 얼굴을 보자마자 암캐처럼 발정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의 나른한 모습을 보니 나까지 진정됐다.
―….
그때, 슈리엘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몸을 꿈틀댔다.
나는 헛숨을 삼키며 황급히 말했다.
"…잠시만 눈 감고 있어 볼래요?"
스윽. 고개가 옆으로 꺾인다. 다행히 눈을 뜨진 않았다. 나는 발소리를 내지 않고 은밀하게 다가갔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뛴다. 거기에 혈압도 올랐는지 얼굴이 새빨개진다. 기껏 발소리를 숨겼는데, 숨소리 때문에 들켜버린다.
테이블 하나의 거리. 눈을 뜨면 전신이 눈에 담길 정도의 거리. 손을 뻗으면 허리까지 닿을 거리. 나는 눈동자를 옆으로 치우고 작게 속삭였다.
"…이제 눈 떠도 돼요."
번쩍.
슈리엘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을 떴다.
"…."
"…슈리엘?"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호수처럼 맑은 눈동자를 고정하곤 드레스 차림의 나를 계속 볼 뿐이었다. 나는 그 시선이 부끄러워 자꾸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슈리엘의 시선은 내게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으…."
얼굴이 점점 뜨거워진다. 나는 이대로 있는 것이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부끄러움에 머리가 터져 죽거나, 암캐처럼 발정해 씹물을 질질 흘리며 박히거나.
급히 등을 돌린다. 명령대로 옷도 입었으니 출발만 하면 되잖는가. 먼저 가 있는 것이다. 그게 좋아 보였다. 나는 대충 고개를 숙이고 문밖에서 기다리는 알펜리스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휙!
"꺅―?!"
등을 돌리자마자 누군가 등허리를 당겼다. 우악스러운 손을 뻗어 개미처럼 얇은 허리를 감싼다.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손길이었지만, 느껴지는 의도는 그것과 정반대였다. 나는 그 모순적인 이끌림에 반 바퀴 돌았다.
"아, 으. 자, 잠깐――"
반 바퀴 돌아 마주 본 슈리엘의 얼굴엔 옅은 미소가 번져있었다.
숨이 멈춘다. 너무 가까웠다. 시원한 머리카락 냄새, 야성적인 피부 냄새, 텁텁한 옷감 냄새. 등골을 타고 춤추는 손가락은 나라는 무대 위에서 천천히 막을 고조시켰다. 나는 애액을 찔끔 흘리며 야릇한 신음을 냈다.
"하읏―…"
가버린다. 안 된다. 가버리기 싫었다. 이건, 나중에 둘만 있을 때 보여주려 입은 옷이다. 지금 해버리면 십 분도 못 즐기고 끝날 게 분명했다.
나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가버리는 걸 참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슈, 슈리엘. 지금, 하면. 드레스으… 힉, 더. 더러워 지니까아…"
"잘 어울리는구나."
"히긋―…"
―찌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