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2화 (162/193)

  인정해야만 했다.

  동부는 참으로 평화롭다. 내가 같은 세상에 있는 게 맞는가 싶을 정도로 따스한 공기는, 마치 아침햇살처럼 다가와 몸을 녹여준다. 하늘은 아직 찬 바람과 낙엽을 휘날리고 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늘 따사로운 봄이며 뜨거운 여름이었다. 동부 사람들의 심장은, 불처럼 뜨거우니 결코 얼지 않았다.

  평화, 서부에서 볼 수 없는 평화가 그들의 마음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동부는. 참으로 평화로웠다. 뒷골목 특유의 서늘하고 음산한 공기는 찾아볼 수 없다. 매일 한량들의 고함을 알람 삼아 일어나는 모험가와는 달랐다. 때 이른 봄이 찾아와도 서리가 지워지지 않는 서부와는 달랐다. 서부 사람들의 심장은, 만년설처럼 차가우니 결코 녹지 않았다.

  고통, 동부에서 볼 수 없는 고통이 서부와 함께하기 때문이었다.

  "도착했소!"

  "끗차…. 고마워요. 이건 그냥 받으세요."

  "허허, 고맙수다. 역시 소문대로 씀씀이가 크신가보오."

  마차에서 내려 잘 닦인 돌바닥을 밟는다.

  두 달 만에 보는 동부의 풍경은 굉장히 이질적이었다. 분명 슈리엘과 함께 다니며 짧지 않은 시간을 보냈는데, 그래서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여전히 거부감이 드는 걸 보니 나는 어쩔 수 없는 서부 사람인가 보다.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자 문득, 동서부를 드나드는 행상인은 정신병에 걸리기 쉽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굳이 행상인이 아니더라도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서부로 자주 봉사를 나가는 사제, 그리고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구식 배달부 따위의 직업들. 그들은 동서부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해 외로이 갈댓길을 걸어간다.

  사제들이야 신에게 몸과 정신을 의지할 수 있다지만, 나머지는 얘기가 달랐다.

  그들은 마음의 병을 앓고 있었다. 어디에도 낄 수 없다는 절망감, 그리운 과거와 두려운 미래를 향한 우울감. 결국에는 현재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하루살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나도, 같은 병을 앓고 있는 걸까.

  다시금 땅을 밟자 메스꺼움이 느껴진다. 두 번째였다. 이번만 그런 게 아니었다. 남들의 행복을 보면서 우울해하기는 싫었지만, 역시 무리였다.

  나는 우중충한 얼굴을 보이기 싫어 깊게 로브를 눌러썼다. 허리춤에 돌돌 말려 매달린 추천장이 유달리 초라하게 보인다. 다음에 만날 때는 꼭 높은 위치에서 만나자 했는데… 목표를 조금 더 높이 잡을 걸 그랬나. 슈리엘 말마따나 포부가 부족했다.

  혹은, 내 역치가 너무 높은 것일 수도 있었다. 유명세로만 따지자면 이미 기준치를 훨씬 뛰어넘었다. 제국에서 '붉은마녀'를 모르는 귀족은 없다시피 할 정도고, 다른 마탑에서도 내 이름이 만천하에 퍼졌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왜 이리 소심할까. 멍청할 정도로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나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저 멀리 아른거리는 대저택에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편지라도 쓸 걸 그랬나….'  

  추천장을 땄다고 막무가내로 출발한게 화근이었다. 서부에서 더는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한 나는 곧바로 짐을 싸고 마탑을 떠났다. 이성적인 사고를 통해 도출한 합리적인 결과였다. 편지 배달은, 못 해도 나흘은 걸리니까. 그냥 직접 알려주는 게 낫다고 생각한 거다.

  다만 내가 간과하지 못한 게 있다면, 사람 간의 '만남'은 비단 이성理性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남이란 대개, 아쉬운 쪽이 절박해지는 잔혹한 시스템이다.

  말과 행동, 버릇 등. 나의 모든 것이 상대방의 평가범위에 들어가기 때문에, '아쉬운 쪽'은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한다.

  '…아쉬울 수밖에.'

  내 본모습을 털어놓고도 기꺼이 손을 내미는 사람은 슈리엘이 처음이었다. 비록 그의 손이 '나쁜 손'이 대부분이고, 내가 일방적으로 희롱당하는 처지라 해도 말이다.

  그는 이해와 배려로, 목조르기와 사지절단 섹스를 '이해와 배려'라고 말하기엔 두 단어에게 크나큰 모욕이겠지마는, 그래도 최대한 내게 맞춰주려 노력한다.

  그래서 슈리엘은, 그냥 끊어버리긴 아쉬운 인간이다. 날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보였으니까. 당연히, 전부 이해해주기는 바라지도 않는다..그 정도 양심은 있다. 내 취향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하아…."

  땀이 찼다.

  빵집을 지나고, 분수를 지나고, 신전을 지나고. 경비의 수가 늘어나는 저택 부근까지 다다른 나는 로브를 벗고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루셸리니 백작저로 가는 길은 단 하나다. 고로, 이 길을 지나겠다는 말인즉슨 저택을 방문하겠다는 소리와 같았다.

  이제 앞으로 서른 걸음이면 보초의 인식 범위 안에 든다.

  나는 길을 나서기 직전, 작은 손거울을 꺼내 표정 연습을 했다.

 '평범하게. 평범하게 하자.'

  백작 앞에서는 쉬웠는데, 오늘따라 어색하다. 소피아가 연기했을 때의 심정이 이랬을까. 이러다 날이 샐 것 같았던 나는, 어색하기만 한 연기를 포기하고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 슈리엘을 만나기로 했다.

  * * *

  "아둔하고 몽매한 아우야. 그 의미 없는 헛짓거리는 언제 그만둘 생각이냐."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좀 해줄래?"

  "형한테 말하는 버릇 하고는…"

  까드득. 이 가는 소리가 서류실 안에 작게 피어오른다.

  하이라크 루셸리니는 자신의 아우, 슈리엘 루셸리니가 벌이는 짓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미 슈리엘은 존재만으로 골칫덩이였다. 세계수의 선물이라고 머리에 뿔을 달고 왔을 땐 정말 기절이라도 하는 줄 알았다. 대회의 때 실수를 안 해서 망정이지, 다른 가문에게 꼬투리라도 잡혔으면 그날로 지위가 박탈당할 수도 있었다.

  "…넌 그 검은 머리 신관에게 백 번 절해도 모자랄 거다."

  "세르티가 유능하긴 하지. 그거 하나는 동의해."

  뿔이라니. 인간에게 뿔이라니. 뿔 달린 종족의 인식이 어떤지 알면서도 저리 태연하게 굴 수 있냐는 말이다. 이단적 측면에서도 실로 불경스러운 일이었다. 하이라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억지로 식히며 입을 열었다.

  "남부도 거절한다면?"

  "북부로 보낼 거야. 별수 있나."

  "하."

  빠직. 슈리엘의 능청스런 대답에 실핏줄이 튀어 오른다. 하이라크는 슈리엘이 쓰고 있는 편지지를 빼앗아 그대로 읽어 내려갔다. 남부 지역 나리몬드 백작에게 추천장을 부탁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그년이 대체 뭐라고 그렇게까지 하는 것이냐."

  유진.

  곁에 두면 음침한 기운을 사방으로 내뿜는 마녀같은 년을 귀족으로 만들기 위해 이리도 노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부의 귀족들은 대체로 보수적이라 슈리엘의 부탁을 들어줄 리 만무했다. 그들은 새로운 파벌을 환영하지 않았다. 그나마 같은 사냥꾼 가문이 협조를 해줘 두 장은 건질 수 있었지만, 나머지 한 장은 여전히 빈자리였다.

  소문만 무성하고 얼굴은 모르는 '붉은마녀'를 위해 추천장을 달라는 슈리엘의 제안은 너무 수상했고, 뜬금없었다. 하지만 슈리엘은 포기하지 않았다. 동부가 안 된다면 남부로. 남부가 안 된다면 북부로 편지를 보내 추천장을 부탁한다.

  하이라크는 광기에 가까운 집념을 보이는 슈리엘에게 말했다.

  "가문의 위세가 남아나지 않겠구나. 망신이란 망신은 다 시키고 있어."

  피식 웃은 슈리엘은 껄렁한 자세로 발을 쭉 뻗었다. 의자가 뒤로 넘어진다. 그는 의자가 절반쯤 넘어갔을 때, 테이블에 발을 걸어 충돌을 면했다. 반동에 고개가 뒤로 꺾인 슈리엘이 말한다.

  "왜 참견질이야?"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냐는 말이다."

  "뭘?"

  슈리엘은 슬슬 짜증이 났다. 이 일을 허락해준 건 다름 아닌 형, 하이라크 본인이었다. 그런데 틈만 나면 찾아와서 온종일 투덜거린다. 슈리엘은 하이라크의 도장이 찍힌 추천장을 펄럭이며 피식 웃었다.

  "형이야 말로 후회하지 마. 약속은 못 바꿔. 이거 가져가고 싶으면 날 죽이던가."

  하이라크는 이를 꽉 깨물며 새어 나오듯 말했다.

  "그래도 하나뿐인 동생이라 믿어주었건만. 너를 믿은 내가 머저리였구나. 그리 쉽게 도장을 내어줬으면 안 됐어. 네 세 치 혀에 속은 내가 원망스럽구나."

  "너무 원망하진 마. 아주, 아주 큰 판을 짜고 있으니까. 형도 분명 실망하지 않을 거야. 내가 어떻게 앙그리드랑 프루카이스의 추천장을 얻을 수 있었겠어?"

  큰 판. 

  슈리엘이 도장을 요구하며 했던 그 말. 하이라크는 그 엄숙하고 성스러운 분위기에 홀린 듯 도장을 건네주었는데, 정작 하는 짓이라곤 애먼 사랑을 위한 추천장 쓰기밖에 없으니 속이 탈 수밖에.

  하이라크는 격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붉은마녀 그년을―"

  "…또 '그년'이라 부르면 진짜 칼 뽑을 거야."

  "형제끼리 칼을 맞대면 아버지가 참 좋아하시겠구나. 그래, 유진. 그 여자를 정치판에 올려놓고 나서, 뒷감당할 생각은 있고?"

  "감당?"

  슈리엘은 하하 웃으며 의자를 바로 세웠다.

  "내가 감당하긴 너무 과분한 여자긴 하지. 그래서 더 매력적이고"

  "그런 놈이 제 여자 얼굴을 두 달 동안 안 봐? 오간 편지라곤 단 두 통이고. 참 잘난 사랑이구나. 그게 네가 말하는 사랑이라면 지금 당장―"

  슈리엘은 이를 까득 갈며 당장 꺼지라 소리치려 했다.

  "그딴 말 지껄일 거면 꺼――…"

  그때.

  "…―잠깐만."

  축 시들어있던 슈리엘의 뿔이 돌연 황금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주변 마나의 흐름이 요동친다. 슈리엘과 하이라크는 몸에 오러를 두르고 습격에 대비했다. 슈리엘은 경보기 같다고 싫어하는 기능이지만, 이렇게 뿔이 갑작스레 빛난다는 것은, 주변에 '감당하기 힘든 적'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슈리엘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뿔이 황금색으로 변한 상대는 단둘 뿐이었다.

  유진과 세계수.

  애초에 이런 기능이 있다는 걸 안 것도 유진과 헤어지고 나서다. 아무리 강한 적을 만나도, 그 둘처럼 환하게 빛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뿔의 색은 유진이 있을 때와 같은 색이었다.

  '…누구지?'

  슈리엘과 하이라크는 기척을 죽이고 창밖을 내려다봤다. 이만한 힘의 소유자라면 그 크기도 무시무시할 게 분명했다.

  "…!"

  그렇게.

  생각했었다.

  "저건…"

  슈리엘은 멍한 눈으로 칼을 떨어트렸다. 하이라크는 눈을 질끈 감으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둘은 동시에 중얼거렸다.

  "…유진."

  "…붉은마녀."

  정문 앞에서 쭈뼛거리며 보초를 얘기하고 있는 붉은 머리의 소녀는, 자신이 두 달 동안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임이었다.

  "비켜, 봐."

  "윽…! 이 체통도 없는 자식 같으니라고…!"

  슈리엘은 하이라크를 거칠게 밀치곤 빠른 속도로 밑으로 내려갔고, 하이라크는 한숨을 퍽 내쉬며 슈리엘을 뒤따라갔다. 다만, 아주 천천히. 둘이 해후를 풀 수 있는 시간 정도는 줄 생각이었다.

  체통도 없이 계단을 뛰어 넘어간다. 바닥에 금이 갈 정도로 강한 착지. 근처에서 일하던 사용인들이 기겁하며 소리를 질러댔지만 슈리엘의 알 바가 아니었다. 그는 곧바로 정문으로 뛰어가며 외쳤다.

  "유진!"

  눈앞의 소녀는 두 달 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여전히 아릅답고, 여전히 가련했으며―― 여전히, 우울했다. 그녀는 슈리엘을 멍한 눈으로 몇 초간 쳐다보더니, 입을 우물거렸다. 이윽고, 유진은 고르고 골라낸 말을 뱉어냈다.

  "…잘 지냈어요?"

  유진은 약간 기운 없는 목소리로 눈을 굴렸다. 무언갈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그녀는, 허리춤에 매단 양피지 두루마리를 건네며 말했다.

  "이, 이거. 브리도니아 백작 추천장이에요. 그, 슈리엘만 고생하는 것 같아서 저도 최대한 노력해봤어요."

  "하…."

  슈리엘은 특유의 썩소를 지으며 냉소했다. 두 달 만에 만나서 하는 말이 고작 잘 지냈어요랑, 추천장 따냈다는 말뿐인가? 어이가 없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 그리고. 어, 또…"

  유진은 슈리엘의 냉소에 당황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보기 드문 유진의 '당황'이었다. 슈리엘은 이 희귀한 광경을 놓치고 싶지 않아 정색을 유지한 채 싸늘한 눈으로 유진을 노려봤다.

  "으…."

  유진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지더니, 이내 침을 꿀꺽 삼키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쥐 죽은 듯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 미안, 해요…."

  슈리엘은 유진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곧 그녀의 등허리를 잡아 자신의 품 안으로 당겼다.

  가슴팍 안으로 쏙 들어오는 작은 몸. 살짝 젖은 땀마저 향긋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향기는 슈리엘의 정신을 각성시켜주었다. 저택 창문 너머 하녀들에게 이 갑작스러운 스킨쉽이 모두 공개됐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보고 싶었다."

  "보, 보고 싶었다고요…?"

  "…온다고 편지라도 보내면 좋았을거늘."

  "어, 그, 그게. 어, 으."

  * * *

  사람들이 말하길, 인간관계에서 가장 만나기 싫은 유형을 뽑자면 '만약'을 상정하고 현실화하는 인간일 테다. 만약 실패하면 어떻게 할 건데? 그게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 안 될 거야. 포기해. 마땅한 대안도 없이 '만약'을 상정하는 이들은, 냉소적일 뿐 비판적이지 못하다. 자기는 비판적이겠다고 믿고 있겠지만, 남들이 보기엔 소위 말하는 쿨한척하는 사회 부적응자일 뿐이다.

  터질 듯이 뛰는 가슴. 사고가 일순 마비될 정도로 강한 감정의 격류가 휘몰아친다. 나는 백작저 정문 앞에서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마른 입술만 핥아댔다.

  ―한 명은 있겠지.

  날 이해해 줄 사람이 한 명은 존재하겠지. 당연한 소리다. 이 세상은 넓고, 미친년놈도 많다. 세상을 뒤져보면 한 명은 나올 것이다. 반드시 말이다. 그리고 슈리엘이 날 거부하더라도, 다른 이를 찾거나 평생 혼자 살면 되는 거다. 하지만 동부에 오며 극도로 심해진 자기혐오와 우울증은 사고를 오염시키고 뒤틀어버렸다.

  이제는 빛바랜 과거의 일까지 끄집어냈다. 여기사 아그네스에게 본모습을 드러내자, 처참할 정도로 거부당했을 때. 성황청의 검은 머리 신관, 세르티가 내게 이해 불능의 시선을 보냈을 때.

  거절을 상정하고 현실화한다.

  얼굴이 창백해진다. 또. 내 앞에서 꺼지라고 소리치는 슈리엘이 떠올랐다. 단지 생각했을 뿐인데, 다리가 미친 듯이 후들거렸다. 그야, 두 달 만이었다. 미궁부터 카르드라실까지 논스톱으로 같이 다녔을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그때는 붙어있었잖아. 내가 싫다고 해도, 앞에서 싫은 티를 낼 수는 없었겠지.

  나는.

  어떻게 해야하지. 고통은 익숙했지만 거절당하는 건 익숙하지 않았다. 내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으려던 것도, 그 끔찍하고 자기파멸적인 소용돌이 안으로 들어가기 싫어서였다. 그건 너무 비참하고, 한심했다. 힘과 돈으로도 얻을 수 없는 그것은, 아주 강력한 탐욕이 되는 동시에 엄청난 두려움을 일으켰다.

  거절 받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법이었다.

  '…돌아가고 소문부터 내볼까.'

  다시 혼자가 되어, 직접 찾아가기보단 날 찾아오게 만든다. 소극적이고 비겁한 방법이었다.

  '탑을 오를까? 아니야… 또 탑을 오르는 건 너무 오래 걸려… 그렇다고 몬스터를 잡기엔 마땅한 장소도 없는데…'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래도 내세울 만한 지위는 있으니 무언가 일을 벌이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동부의 일이니 슈리엘의 귀에도 빠르게 들어가겠지. 하지만 만약. 그럼에도 찾아오지 않는다면.

  쿨한척하는 사회 부적응자들과 내가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쿨하지 못했다.

  ―쿵.

  "으…?"

  그때, 무언가가 박살이 나는 우직한 소리가 들렸다. 콰직, 쿵. 그득. 나무판자가 부서지는 소리였다. 나는 그대로 경직되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창문 너머로 의미하게 보이는 금발 머리.

  "유진!"

  그가, 왔다.

  상황을 파악하고 도망치기엔 이미 한참 늦었다. 나는 지금까지 준비해둔 대사와 연기를 모두 잊어버려, 멍청할 정도로 새하얀 백지장이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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