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9화 (159/193)

  "…오래 기다리게 했네요. 죄송해요. 이쪽으로 와주세요."

  결국.

  그녀는 원하는 말을 하지 못했다.

  * * *

  3층, 귀빈실.

  "이쪽으로."

  에르제는 사족없이 딱 필요한 말만 꺼내며 우리를 상대했다. 대답에 대한 기대가 없는 말은, 생각보다 더 무미건조하고 차가웠다. 기대 없는 말엔 감정도 무엇도 없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느껴지는 게 있었다면, 잊기 위한 몸부림. 그녀는 '소피아 클레이드'란 인물을 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아무쪼록, 돌아올 때까지 편하게 쉬고 계세요."

  끼이익, 쿵. 하고 닫히는 문.

  에르제가 사라지자 소피아는 축 늘어지며 앓는 소리를 냈다.

  "으어어… 이제 무리다아…."

  "마지막. 마지막이야. 이것만 잘 넘어가면 돼."

  "우으…"

  나도 긴장되기는 매한가지였다.

  나는 본체와 연결한 체인 링크를 점검하며 차를 들이켰다. 의식이 옮겨지는 조건은 육체 기능의 완전한 정지. 그러니까, 한 번 뒈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뭐… 의식과 영혼의 보존이라는 안전장치가 있는 이걸 '진짜 죽음'이라 부르긴 뭣할지 몰라도―

  "하아…."

  이거나 그거나. 죽음은 내가 느낄 수 있는 자극의 한계치였다. 이걸 느껴버리면, 다른 걸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조금 변태스러운 걱정이 들었다.

  ―똑똑.

  그런데 5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으헥."

  "…표정 관리해."

  화들짝 놀란 소피아는 내 말을 듣고 유진의 표정을 연기했다.

  "백작님이 바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안내해드릴까요?"

  문 너머로 들리는 에르제의 목소리. 나는 에르제에게 들리지 않게 전음으로 몰래 속삭였다.

  ―2층 식사실이냐 물어.

  소피아는 긴장한 얼굴로 되물었다.

  "2층 식사실인가요?"

  "네. 전과 같은 식사실이에요. 안내해드릴까요?"

  고개를 젓는다. 길은 아니 따로 안내받을 필요는 없다.

  "…둘이서만 갈게요."

  에르제는 몇 초의 침묵을 유지하곤 알겠다며 등을 돌렸다. 바닥을 울리는 구두 굽 소리. 나와 소피아는 그녀가 떠난 후 정확히 삼 분 후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또각, 또각.

  식사실까지 가는 길은 조용했다. 지나가는 인원은 많았으나 오가는 말은 없다. 나와 소피아, 우리를 지나가는 하녀와 사용인들까지 모두. 눈 한 번 마주치지 않고 지나치기 바빴다.

  그렇게 계단을 밟고, 조명을 지나 2층 식사실에 도착한다. 식사실. 아니, 도축장의 불은 켜져 있었다. 나는 테이블 옆으로 삐져나온 익숙한 인영人影에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올백머리의 중후한 외모의 미중년.

  "왔나?"

  파하르 슈발리에 폰 브리도니아. 그는 미리 도착해 자리를 잡았다. 에르제가 보고하고 우리가 귀빈실을 떠나기까지의 시간을 고려하면 7분 정도인데, 이 짧은 시간에 식사실에 올 정도면 상당히 급했나 보다.

  나와 소피아는 고개를 숙이고 앞으로 걸어갔다. 동시에, 소피아는 그간 연습해왔던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백작님을 위해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어요. 부디 마음에 들어 하셨으면 좋겠네요."

  "좋다. 내 기대해보지. 선물은 어딨지?"

  곧바로 본론. 소피아는 당황하지 않고 연기를 이어나갔다.

  "후후. 급하시네요. 제가 이걸 준비하려고 얼마나 큰 노력을 했는데요. 부디 백작님께서 제 노고를 알아주셨으면 좋겠네요. 소피아?"

  이제부터 내 차례다.

  "부디."

  귀족이 보일 수 있는 극한의 예의를 보이며 고개를 숙인다. 책을 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귀족만의 예법. 슈리엘과 함께 다니며 몸으로 터득한 배운 자의 몸짓. 나는 귀족 전용 언어라 불리는 북동부 가드리슈어를 구사하며 말했다.

  "개척과 도전의 상징, 모든 모험가의 아버지― 대부, 브리도니아의 주인을 만나게 되어 영광이에요."

  "…상당히 어려 보이는구나. 나이가 몇이지?"

  "열다섯이에요."

  "…."

  떨리는 눈. 추악한 탐욕으로 가득 찬 눈동자였다. 다시 말해, 그는 내게 흥분했다. 정말이지, 열다섯 살 소녀에게 흥분하다니 인간 말종이 따로 없었다. 물론, 성욕이 아니라 살해욕이라는 차이가 있겠지만, 그가 답도 없는 쓰레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나 오늘 도축장의 소 되어 도살당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응당 어울려줘야겠지.

  ―투둑.

  나는 생도복의 단추를 풀고 왼 어깨의 방패 모양 흉터를 보였다. 속옷 사이로 매끈한 겨드랑이와 은밀한 치부가 보인다. 허나 백작은 '그딴 것' 따위에 집중하지 않았다. 오직 왼 어깨에 새겨진 방패 문양에 눈을 처박곤 뜨겁고 가는 숨을 내쉬었다.

  "제 이름은 소피아에요. 이제 내년이면 아스트라에 입학해, 클레이드의 핏줄이 돌아왔노라 선언할 예정이죠. 물론, 어제까지만 해도요. 무슨 말인진 알고 계실 거라 믿어요."

  그는 클레이드 자작가를 알고 있었고, 이 문양이 가문을 부흥시킬 마지막 기회란 것도 알고 있었다. 백작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진정시키고 무어라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나는 그가 말을 내뱉기 전에 결정적인 화두를 꺼냈다.

  "저는 오늘, '사고사'로 죽을 거랍니다."

  참을 수 없는.

  그리고 참지 않아도 되는.

  ―스르륵. 

  그를 유혹하듯 포동포동한 살집을 강조하며 옷을 벗는다. 가슴, 팔, 허벅지, 다리. 옷가지가 줄어들수록 날것 그대로의 부끄러운 나신이 드러났다. 백작은 눈 한번 깜짝 안 하고 이 음란하고 배덕적인 모습을 똑똑히 눈에 담았다.

  나는 흥분과 부끄러움으로 상기된 얼굴을 수줍게 숙이며 말했다.

  "…그리고, 백작님에게 요리되어 식탁 위에 올려질 운명이죠. 부디 머리, 가슴, 팔, 다리. 어느 부위도 빼놓지 않고 모두 조리해주시면 좋겠어요."

  "최면이라도 사용한 건가?"

  백작의 첫마디는 이성적이었다. 그토록 원하던 이상향이 눈앞에 놓여져 있음에도, 섣불리 손을 뻗지 않고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먹어서 탈이 나는 건 아닌지.

  언젠가 자신에게 칼이 되어 돌아올 일은 아닌지.

  하지만, 당사자인 내가 직접 요리해달라 부탁했음에도 저런 모습을 보인다는 건―

  "이 모든 건 제 자의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자의自意라. 사람은 종종 제 입에서 나온 말은 과신할 때가 있지."

  ―그는 믿지 않았다.

  "그리 말씀하심은?"

  "네 말과 행동이 유도당하지 않은 것이라 입증할 수 있냐는 말이다."

  

  요컨데 돈 받고 팔려왔거나 세뇌를 받은 건 아니냐 묻는 거였다. 나는 장난스레 손을 휘휘 저었다. 재밌는 농담을 들은 소녀처럼 꺄르르 웃으며 말한다.

  "으음, '산 채로 요리되어라.'라는 상황에 유도당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은데요. 백작님도 알고 계시잖아요? 이건 세뇌나 최면 따위가 아니란 걸요."

  유도된 감정은 티가 난다. 최면과 세뇌로는 복잡한 감정을 구사할 수 없다. 아무리 뛰어난 사술을 쓴다 해도, 아주 약간의 틈이 생기기 마련이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기쁨과 환희는, 그따위 거짓된 감정으론 연기할 수 없는 종류다.

  물론 나조차도 백작을 속이려 드는 사기꾼일 뿐이지만― 내 마음속 어두운 심연에 죽음선망이 희미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 완벽하게 연기할 수 있었다.

  불리길 메소드 액팅.

  배역과 합일된 연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전율을 일으키게 하는 법이다.

  백작은 전율했다. 

  "그럼 왜?"

  그러나 광인의 행동은 여전히 의문을 남긴다. 이 변태 백작은 스스로부터가 이해받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내게 이유를 물어봤다.

  "꼭 이유가 있어야 하나요?"

  나는 박쥐의 도시를 불태우는 어느 광대처럼, '그냥'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고작해야 열다섯 소녀가 어째서 죽음을 자초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 이 모든 게 거짓이고 연기라 생각해도 상관없다. 내가 원하는 데 남의 이해가 필요한가. 무릇 광인狂人이란, 고독한 사막 위에 올려져 평생을 외로이 걸어가는 존재다.

  고로 이유는 내게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싫으면 나중에 기회를 도모하면 된다.

  "싫으면 마셔요."

  …굳이 백작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싱긋 웃으며 옷을 걸친다. 나는 입꼬리를 올리는 동시에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마치 '이번에도 실패구나.'라고 생각하는 듯 허탈하게 늘어진다.

  "…."

  백작은 나를 노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익숙한 표정이었다. 이 허탈한 얼굴은 백작이 짓고 있는 표정과 닮아있었다. 선을 넘지 못한 자의 미소.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새하얗게 칠해진 문으로 향했다.

  그가 향한 곳은 조리실이었다. 문이 열리자 부엌 특유의 차고 비릿한 바람이 스멀스멀 새어 나온다. 그 서늘한 공기가 칼날처럼 다가와 피부를 찌른다. 나는 열띤 숨을 내쉬며 허벅지를 비벼댔다.

  연기이긴 하지만, 나락까지 떨어진 피학성향 덕에 타이밍 맞게 발정했다. 투명끈적한 액체가 다리 사이로 흐르는 게 느껴진다. 이런저런 일을 처리한다고 비교적 조용하게 지냈건만… 저질스러운 본성은 어디가지 않았다. 사실, 소피아는 핑계고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완전히 부정은 못 하겠다.

  백작은 조리실로 들어가려던 찰나 뜨거운 신음을 듣곤 고개를 돌렸다. 그는 내 저속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붉은 마녀는 에르제에게 부속실 두 번째 서랍을 열라 말하라. 추천장을 포함해 필요한 서류들은 모두 준비해두었으니 가지고 돌아가도록."

  소피아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대략적인 상황은 내게 들어 알고 있는 바. 그런데,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추천장을 받아버렸다. 소피아는 '돌아가라'라는 말에 안심하면서도, 이 돌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몰라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눈동자가 떨린다. 백작은 보지 못했다.

  나는 소피아가 말을 더듬기 전에 미리 선수를 쳤다.

  "축하해요 언니! 이제 한 장만 남은 건가요?"

  "어, 어…"

  소피아는 침을 꿀꺽 삼키며 우물쭈물했다.

  "정말, 빨리 안 가시고 뭐 하는 거예요? 전 백작님이랑 좋은 시간 보낼 테니 어서 가세요."

   꺄르르 웃으며 등을 돌린다. 곧 음식물 찌꺼기가 될 사람치곤 이상할 정도로 활기찼다. 하지만, 방어기제로 보일만큼 어색한 활기참은 아니었다. 자연스러운 웃음. 조금이라도 공포를 느낀다면 나올 수 없는 미소였다.

  소피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돌리려 했다.

  "잠깐."

  그런데.

  백작이 그녀를 불렀다.

  "이런 특별한 요리는 혼자 즐기는 편이지만… 너라면 기꺼이 참관해도 괜찮을 것 같구나. 장차 대귀족이 될 인재와 미리 관계를 맺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다행히 의심을 사거나 하진 않았다. 그냥, 요리하는 걸 옆에서 구경할 거냐는 물음이었다.

  일종의 '교류'였다. 그게 인간을 산채로 손질하는 해체쇼라는 건 둘째치고, 이는 나를 어엿한 귀족으로 인정했다는 뜻이었으며, 그가 유진― 붉은 마녀를 자신과 '같은 부류'로 인식했다는 뜻이었기도 했다.

  "어떤가?"

  나였더라면 고개를 끄덕이고 흔쾌히 구경했을 것이다. 본다고 눈이 닳는 것도 아니고, 잔혹한 광경에 별다른 감흥이 생기진 않으니까. 하지만 심약한 소피아가 그럴 리 없었다. 그녀는 연기하는 것만으로도 지쳐있는 상태였다.

  "저는…."

  소피아가 고민한다. 본심은 거절하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 찼을 테지만,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몰래 전음으로 속삭였다.

  ―여기서 기다리겠다고 말해.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요리는 즐기지 않는 편인가?"

  "예. 아쉽게도."

  "오래 걸릴지도 모르는데?"

  "괜찮, 습니다."

  "미안하군. 사족이 길었구나. 그럼, 추천장을 받고 돌아오도록."

  백작은 작게 아쉬워하며 고개를 돌렸다.

  소피아는 그가 다시 부를까 식겁하며 식사실을 빠져나갔다.

  허나, 그의 관심은 사랑스러운 식재료에게 돌아간 지 오래였다. 나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조리실로 향했다.

  

  * * *

  때 묻지 않은 순백색의 문을 열고 들어간 조리실은 문의 색만큼이나 온통 새하얀 것들 투성이었다. 감히 표현하길 눈밭. 타일과 벽, 조리기구와 손질할 때 쓰는 칼들마저도 새하얬다. 조명이 약간 어두웠으나, 색이 밝아서 그런지 체감될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찬 공기에 으스스 떨어댔다. 안 그래도 속옷 차림이라 추웠다.

  "우와아… 새하얗네요."

  "왜일 것 같나?"

  "피가 튀는 걸 제대로 보기 위해?"

  "알아주니 나도 기쁘군."

  너도 만만치 않은 미친놈으로구나. 속으로만 중얼거리며 헤실헤실 웃는다.

  스릉! 백작은 벽걸이에서 칼을 집어 날의 경도와 예리함을 점검했다. 날이 맞부딪히며 울리는 금속음은 등줄기를 타고 올라 뒷목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보다 특이하게 생긴 칼이다. 발골용 칼은 '토막내기'보다 '발라내는' 것에 중점을 뒀기에 일반적인 칼보다 얇고 가늘고 길다. 악마 요리사 파르시히가 사용한 칼과 비슷했다.

  ―펄럭. 백작은 소 잡을 때나 걸칠 것 같은 하얀 앞치마를 두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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