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8화 (158/193)

  "하―."

  나는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켜며 주저앉았다. 타들어 가던 폐에 미적지근한 공기가 들어오며 몸을 진정시킨다.

  "야! 너 팔 괜찮아?"

  나는 새하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써 웃으며 손을 든다. 허나 시커멓게 물든 팔은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다.  페카폴리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내게 손을 뻗었다. 그나마 멀쩡한 오른팔을 이용해 손을 잡는다.

  "일어나. 팔부터 치료하자."

  "괘, 괜찮. 아요. 하으… 그보다, 시험은."

  "네 역량은 전부 파악했으니 걱정하지 마. 그보다 아까 그 기술. 마법이야?"

  "하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맞았지만, 내가 클레이드의 핏줄이란 말에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선 거짓말을 해야 했다.

  "남부 지역에 존재했던 클레이드 자작가라고… 혹시 아시나요?

  "클레이드? 불타서 다 뒈졌다던 놈들?"

  나는 울컥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페카폴리스는 나와 방패 모양 흉터를 번갈아 보더니, 곧 놀란 얼굴로 숨을 죽였다.

  "혹시, 너…."

  "아스트라 입학 전까진 비밀로 해주세요. 이 기술도 부담이 심해서 여러 번은 못 쓰니까요."

  페카폴리스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이윽고 새로운 포탈을 열어 사람을 불렀다. 난장판이 될 홀을 고치고, 왼팔이 망가진 나를 치료할 사람을 불렀다. 그러자 곧 기술자들이 내려와 나를 부축해주었다.

  ―멸문하고 나서야 방패의 가호를 받은 자가 나타나다니…

  거짓말이 아니었구나. 페카폴리스가 중얼거린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병실로 이동했다. 이제 추천장만 따내면 완벽할 텐데. 나는 직원의 부축을 받으며 물었다.

  "시험은, 통과했나요?"

  페카폴리스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나름 괜찮았어. 난전 중에 집중력을 유지하는 능력이 탁월해. 그리고 태생적인 저항력도 높고. 이 정도의 열기를 버티는 놈은 손에 꼽는데…. 무엇보다, 기본기가 수준급이야. 재능도 재능이지만, 깡이 있어. 마음에 들어."

  "하아… 죽는 줄 알았어요."

  "좋은 결과 기대해. 역시 붉은 마녀의 눈에 들어간 이유가 있었네."

  해냈다. 페카폴리스의 인정을 받아냈다. 보여준 것은 얼마 없지만, 그녀가 일으킨 열기 속에서 침착하게 공격에 성공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그녀는 부탑주다. 제국의 단 네 명뿐인 부탑주. 그런 부탑주의 진심을 다한 공격 속에서 살아남은 것도 모자라, 비록 편법을 쓰긴 했지만― 반격까지 해냈다. 열다섯 살 소녀가 이룩하긴 불가능에 가까운 위업이었다.

  "헤헤…."

  나는 헤실헤실 웃으며 포션을 들이켰다. 조금 어색한 웃음이었지만, 페카폴리스는 부상 때문에 그런 것이리라 짐작하곤 잔해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들킬까 봐 식겁했다. 느끼지 못한 기쁨을 연기하는 건, 전장을 조작하는 것보다 힘든 일이었다.

  페카폴리스는 직원들에게 웬 건량 하나를 건네받더니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다. 격렬하게 움직여서 그런지 배가 고픈가 보다.

  "너도 줄까?"

  "아, 네!"

  건조식량이었다. 무슨 고기인지는 모르겠다. 그녀는 육포를 씹어대는 나를 보더니 슬며시 미소 지었다.

  페카폴리스가 말한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보자. 그 실력 갖추고 미궁은 왜 납치당한 거야? 남부 출신이 여긴 또 왜 온 거고?"

  예측 범위 안에 있는 질문이었다. 나는 미리 생각해준 그럴싸한 변명거리를 말했다.

  "페헬만 부근에서 오거 무리를 맞닥뜨렸어요. 나름 열심히 싸웠는데… 배도 고프고, 힘도 없어서…"

  "페헬만이라, 하필이면 남부 경계선에서 고립됐네. 미궁에서 엄한 짓은 안 당했지?"

  "네! 그 전에 유진 언니가 구해줬어요! 막, 물이랑 불이랑 엄청나게 뿜어대고, 또, 신기한 마법들도 마구 쓰고…"

  "근데 너, 분명, 그. 유진이…

  "네?"

  "…모르면 됐어. 무시해. 유진은 마음에 들었나봐?"

  "그럼요! 얼마나 잘해주는데요. 제가 출신을 밝히자마자 도와주겠다고 했는 걸요. 제가 뭐 하는 사람인 줄도 모르고…"

  내 입으로 나를 찬양하려니 양심이 찔렸다. 벽에 머리를 박는 한이 있더라도 억지로 잊어야겠다. 페카폴리스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음 질문을 꺼냈다.

  "청색 마탑은 안 가봤어?"

  각각의 마탑은 고정관념이 존재했다.

  모험가가 많이 몰리는 서부의 적색마탑은 성질이 사납다는 게 첫 번째.

  부유한 자들이 지배하는 동부의 백색마탑은 선민의식이 강하다는 게 두 번째. 

  늘 어둡고 추운 북부의 흑색마탑은 음침하다는 게 세 번째.

  마지막으로, 상인들이 이룩한 남부의 청색마탑은, 규율을 중시하고 빡빡하다는 편견이 있다.

  나는 청색마탑의 빡빡한 규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게… 청색 마탑이랑은 상성이 안 좋아서요. 규칙도 빡빡하고, 속성도 안 맞기도 하구요."

  "거기 사는 샌님들이 재수 없긴 하지. 보나마나 불 다룬다고 꼽 좀 줬겠구만. 맞지?"

  "어, 음. 대충은요."

  "그럴 줄 알았어. 거기 탑주랑 부탑주가 꼴통이라 그래. 걔네 아직도 속성 가려서 받나? 꼰대 새끼들 같으니라고. 요즘 같은 시대에 속성 가려서 받는 놈들이 어딨어? 들어오겠다 하면 얼씨구 감사합니다 하면서 등반시켜야지."

  "치―, 거짓말. 저랑은 진심으로 하셨으면서."

  페카폴리스는 하하 웃으며 다리를 꼬았다.

  "평소에 이리 심하게 하진 않아. 상대방 눈높이에 맞춰서, 무리 가지 않게 시험하는 편이야."

  "그럼 저는요?"

  "그거 관해서 말할 게 있는데, 너 혹시 내 제자 될 생각 없냐?"

  음, 그건 안 되겠다.

  나는 조만간 죽을 예정이거든.

  * * *

  페카폴리스의 추천장을 따내고 사 일이 지났다.

  "자, 떨지 말고, 표정 관리 잘하고, 돌발 상황 일어나면 무표정으로 능청 떨기. 알겠지?"

  "아, 알겠다…!"

  내게 지속적인 지도를 받은 소피아는 나름 훌륭한 연기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시험 삼아 페카폴리스와 만나게도 해보았는데, 다행히 별 의심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그녀가 냉소적인 미소를 지을 때면, 일순 카피 에고를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이에 관련해서 내가 간과하고 있었던 점이 있었다. 몸을 완전히 교체하는 마법은 '대외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일시적 변신인 폴리모프는 비교적 흔했지만, 교체는 아니었다. 의식 쪽으로 들어가게 되면 성황청에서 금기시하는 사술로 취급되기 때문이었다. 고작 하룻밤 만에 사용할 수 있는 기술도 아니었고.

  고로. 의심이 있을지언정 눈치채기는 힘들다. 몸에 별다른 마법적 처리를 가한 게 아니니까. 말 그대로 의식만 이동했을 뿐이다.

  "그래도, 백작은 감이 좋으니까 조심해. 이상한 걸 요구하면 '해드릴까요?' 하면서 재수 없게 웃는 것도 잊지 말고."

  "마, 마법을 요구하면…?"

  "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몰래 써줄게. 넌 그럴싸한 몸짓만 취하면 돼."

  옷을 모두 갈아입고 거울을 본다.

  "도와줘서 고마워 클락. 지금이라도 아스트라에 가고 싶으면 말해. 손이 닿는 데까지 도와줄 테니까."

  "괜찮아요. 마탑에 박혀서 연구하는 게 훨 재밌으니까요. 그리고, 아스트라는 실습이 무섭기도 하고요…"

  클락의 도움으로 구한 '진짜' 생도복.

  서부에 아스트라 생도복을 취급하는 곳이 없어 그냥 갈까 고민했지만, 클락이 아는 지인이 있다면서 한 마법사를 소개해주었다. 아스트라의 중퇴생이었다. 성적이 안 돼서 나갔다나 뭐라나. 덕분에 그때 입은 옷을 받을 수 있었다.

  조금 사이즈가 크지만… 여성용으로 받을 수 있는 게 어딜까. 나는 거울 앞에서 헤실헤실 웃으며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우와… 진짜 어색하네요."

  겉모습은 소피아지만, 속에 붉은 마녀가 있다는 사실을 유이唯二하게 아는 클락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이미지 매치가 안 되는 탓이었다. 나는 끼 부리기를 멈추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소녀는 잠깐의 정적 동안 금세 원래의 표정을 되찾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무감정한 얼굴, 축 늘어진 입꼬리. 소피아의 몸을 만들면서 올라가게 했는데 금세 내려갔다.

  언뜻 차갑게 느껴질 수 있는 어조로 말한다.

  "나도 좋아서 하는 거 아니야."

  "이제야 마녀님답네요."

  클락이 건넨 물을 들이켜고 짐 정리를 한다. 추천장, 돈주머니, 여분의 옷가지 등등. 곧 떠날 사람의 모습. 나는 짐보따리를 꽉 싸매며 소피아를 불렀다.

  "소피아, 아니. 유진 언니?"

  "으, 응?"

  "이제부터 모두를 속일 거야. 페카폴리스는 한번 만나봤으니 평소대로만 하면 돼. 알겠어?"

  "…알겠어, 소피아."

  "완벽해."

  평소대로만. 소피아가 뺨을 두드린다.

  나는 목소리 톤을 조절한 후 소피아를 시켜 포탈을 열었다. 약간 가라앉은 미적지근한 공기가 포탈 너머로 들어온다. 텁텁한 공기의 발자욱을 쫓아 도달한 곳엔, 분홍머리의 아가씨가 단아한 자세로 책을 읽고 있었다.

  소피아의 손을 잡고 포탈을 폴짝 넘는다. '유진 언니'는 약간 귀찮은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 손에 이끌려 따라왔다.

  "페카폴리스 언니―!!"

  "응?"

  홀을 가득 채우는 명랑한 목소리.

  페카폴리스는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오랜만에 둘이 왔네. 무슨 일이야?"

  나와 페카폴리스는 농담이나 사적 얘기를 스스럼없이 주고받을 정도로 관계가 발전했다. 이렇게 가까워질 수 있는 이유는 역시, 내 재능이 그녀가 보기에 몹시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시시때때로 제자가 될 수 없냐는 질문을 하면서 말문을 트는데 안 친해질 수가 없었다.

  나는 '유진 언니'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제 수도로 올라가려구요. 그동안 신세져서 고마웠어요. 유진 언니도, 페카폴리스 언니도요."

  추천장을 따냈으니 입학 준비만 하면 된다. 페카폴리스는 내가 입은 생도복과 짐을 보더니 아쉬운 얼굴로 입을 다셨다.

  "결국 가는구나. 수도에 머물 곳은 있고?"

  "그것도 유진 언니가 도와준다고 했어요."

  "유진이면… 믿을 만하겠지. 가는 길 신의 축복을 빌어줄 수는 없지만, 평탄하길 바라."

  "빛 아래 평안하기를! 고마워요!"

  고개를 들어 '유진 언니'를 바라본다. 그녀는 한숨을 푹 쉬며 손을 잡았다. 나는 고개를 숙여 아쉬움을 표한 뒤 같이 등을 돌렸다.

  "잠깐, 유진."

  그때, 페카폴리스가 말을 걸어왔다. 반사적으로 대답할 뻔했으나 다행히 고개만 돌리는 선에 그쳤다. 그녀는 유진을 향해 말했다.

  "너도 같이 가는 거야?"

  소피아는 자신이 '유진'이라는 것도 잊고 벙찐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금세 차가운 표정을 되찾고 입을 열었다.

  "저는 데려다주기먄―, 흠, 큼… 데려다주기먄 하고 돌아올 생각이에요."

  "그래? 알겠어."

  네가 혀를 다 씹네. 신기해하는 페카폴리스를 뒤로 하고 바삐 발을 놀린다.

  * * *

  마탑에서 나온 우리는 준비해둔 로브를 걸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가는 길 최대한 노출을 줄일 생각이다. 여기에 인식 저해 마법까지 걸어 존재감을 지우면 완벽했다.

  "죽을 맛이다 언니야…"

  소피아는 인간들이 북적이는 거리에 두려움을 표하면서 발발 떨어댔다. 하지만, 그녀가 죽어가는 얼굴로 푹푹 한숨을 내쉬는 건 비단 인간들뿐만이 아닐 테다.

  "한 번만 더 하면 돼. 고생했어."

  길이 점점 험해진다. 소피아는 '귀족'이라는 작자가 왜 이런 산골짜기에 사는지 의문을 품었지만, 자세한 내막을 설명하기엔 입만 아플 뿐이었다.

  "잠시 떨어져 있어."

  우리를 알아차리지 못한 병사들을 지나쳐 저택 정문에 도달한다. 나는 인식 저해 마법을 풀고 로브를 벗었다. 그러곤 대문 옆에 달린 황금 종을 가볍게 쳐 청아한 종소리를 울렸다.

  "에르제가 말을 걸면, 몸이 안 좋아서 얘기할 기분이 아니라고 해."

  에르제 헤르도나. 브리도니아의 전속 시녀이자 이 저택의 시녀장. 나는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며 웃는 표정을 유지했다.

  ―휘이잉…

  부자연스러운 바람 소리가 나고, 불규칙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진다. 하여간 뒤에서 나타나기 좋아하는 여자다. 나는 소피아에게 전음을 보내 말없이 뒤를 돌라 명령했다.

  소피아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일단 내 명령에 따라 뒤돌며 중얼거렸다.

  "…에르제?"

  그러자 사르륵, 하고 풀리는 투명화.

  "…여전히 감이 좋으시네요. 반가워요."

  시녀장이 나타나 고개를 숙인다.

  "다시 오셨군요. 저기 계신 생도분은 일행이신가요?"

  에르제의 얼굴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밝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여기에 다시 찾아올 이유는 '그것'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희망을 품곤 다시 물어본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일단은요. 그리고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 대화하기가 벅차네요. 죄송해요."

  "혹시 아프신―…"

  "…."

  "…알겠습니다."

  더는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문다. 눈치 빠른 에르제는 그녀가 대화할 기분이 아님을 직감하곤 내게 고개를 돌렸다. 나는. 소피아 클레이드는. 고개를 푹 숙이며 활기차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소피아 클레이드에요."

  "어머, 작고 귀여우신 분이네요. 귀족 자제이신가요?"

  에르제는 자신과 같은 머리카락 색에 첫 번째 호감을 표했고, 성이 있다는 사실에 두 번째 호감을 표했다. 귀족 자제라면 필히 다른 문제로 올 게 분명했으니까. 적어도,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그게, 말하자면 복잡한데…. 문서상으로는 멸문한 곳이거든요. 남부의 클레이드 자작가라고, 들어보셨나요?"

  "…멸문?"

  "그리고 생도도 아니에요. 정확히는 입학 준비생이죠. 헤헤. 부끄럽네요."

  에르제가 당황한다. 상대는 몰락 귀족에, 생도도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올 이유가 무엇이냐.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불현듯 스친 불길한 가능성.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백작님을 만나러 왔어요."

  "…이유는?"

  "으음, 자세히는 말하기가 어렵고, 백작님에겐 '선물'이 도착했다고만 말해주실래요?"

  "…."

  입을 열었다 말기를 반복한다. 에르제는 말하기를 주저했다. 설명을 요구하려 고개를 돌려도, 몸이 아프단 핑계를 댄 유진은 요지부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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