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7화 (157/193)

  소녀는 상대방을 유혹하듯 옷자락을 내렸다. 속옷은 입고 있지 않았기에 쇄골과 젖가슴이 훤히 보였다. 방금 보여준 예절과 다르게 천박하기 그지없는 짓이었지만, 자신이 식재료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제 이름은 소피아에요. 이제 내년이면 아스트라에 입학해, 클레이드의 핏줄이 돌아왔노라 선언할 거예요. 물론, 어제까지만 해도요. 무슨 말인진 알고 계실 거라 믿어요."

  왼 어깨에 새겨진 방패 모양 흉터. 소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곤 장난스레 옷자락을 올렸다.

  "저는 오늘 사고사로 죽을 예정이에요. 백작님에게 요리되어 식탁 위에 올려질 운명이죠. 부디 머리, 가슴, 팔, 다리. 어느 부위도 빼놓지 않고 모두 조리해주시면 좋겠어요."

  ……

  …

  "하아… 어때? 도움은 좀 됐어?"

  연기의 끝.

  나는 몰입을 멈추고 머리를 흔들었다. 선을 그어야 했다. 이렇게 계속 몰입하다간 욕망이 변질할 수도 있었다. 안 그래도 피학성향이 나락을 향해 치닫고 있는데, 요리 당하는 취미까지 생겨버리면… 끔찍했다.

  그보다, 페카폴리스의 추천장만 있으면 더 완벽했을 텐데. 아쉬운 점이 많았지만, 아직 준비 단계니 그러려니 했다.

  "어어…."

  소피아는 말이 없었다. 통역 마법을 사용했으니 뜻 자체는 전달됐을 텐데,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만 우물거렸다.

  나는 굳이 소감을 묻지 않았다.

  * * *

  나와 소피아의 열연은 클락이 돌아오면서 끝을 맞이했다.

  클락은 몸이 바뀌어버린 우리를 보더니 크게 혼란스러워했지만, 편지를 받더니 익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포기 끝에 순응해버린 건 소피아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클락에게 주의사항을 알려주며 포탈을 열었다.

  "클락, 나 없는 동안 너무 격렬하게는 하지 마. 소피아가 나를 완벽하게 연기하기 전까진 몸 관리를 해야 하니까."

  "제, 제가 그렇게까지 변태는 아니에요!"

  클락은 얼굴을 붉히며 항변했다. 나는 풉 웃으며 손을 저었다.

  "굳이 소피아랑 하고 싶거든 더미 육체랑 해. 의식과 영혼이 없을 뿐 '살아는 있는' 상태거든. 박으면 보지도 조이고, 유두 꼬집으면 허리도 튕기니 문제는 없어."

  "아, 으으! 진짜…."

  "아, 내 본체는 보호 술식 때문에 못 쓰니 알아두고."

  포탈을 넘어가기 전 몸 상태를 점검한다. 누가 봐도 입학 준비생으로 보일 수 있게 교복 비스무리한 옷까지 입었다.

  차갑고 무덤덤하게 살아온 유진은 잊어야 했다. 나는 소피아다. 아스트라에 입학하기 위해 노력하는 활기찬 열다섯 살의 소녀다.

  속으로 자기 세뇌를 하며 활짝 웃는다. 동시에 힘차게 소리쳤다. 보이지는 않지만, 포탈 너머로 페카폴리스가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소리쳤다.

  "…좋아! 가볼까!"

  끔찍했다. 억지로 '활기참'을 연기하려니 속이 뒤틀렸다. 뒤에서 클락이 큭큭 웃어댄다. 나는 망가지려는 입술을 필사적으로 막으며 포탈 너머로 폴짝 뛰었다.

  "―안녕하세요!!"

  치맛자락이 휘날리지 않도록 꾹 누르며 착지한다. 중심을 잡지 못해 휘청거리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나는 흰머리를 휘날리며 멋쩍게 웃었다.

  "읏차… 죄송해요. 포탈 사용은 익숙하지 않아서요."

  "…누구죠?"

  페카폴리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책을 내려놓았다. 면식이 있다고 해도 고작 한 번이고, 그때의 소피아와 비교하면 복장부터 성격까지 모든 게 달라져 있으니 눈치채지 못할 만도 했다.

  나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되물었다.

  "유진 언니가 말 안 했나요?"

  "유진?"

  페카폴리스는 나를 한동안 노려보더니 과거의 기억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녀도 마법사인 만큼 기억력이 상당했다.

  "아, 미궁에 납치당해서 머리 다쳤다는 그 아이?"

  "그, 그건! 제가 방심만 안 했어도…!"

  "됐어. 정신은 멀쩡해 보이니 다행이네. 이름이 뭐야?"

  "소피아 입니닷…!"

  "그래그래. 그보다 긴장 풀어. 그렇게 힘 숨겨봤자 다 아니까."

  "네, 네?!"

  뜨끔한 표정으로 입을 다문다.

  어떻게 알았냐는 뜻이 담긴 표정이었다.

  '…전부 연기지만.'

  연기는 순조로웠다.

  나는 어설프게 마나를 감추었다. 딱 페카폴리스 정도의 마법사가 간단하게 알아차릴 정도로 숨겼다. '자연스러운 어설픔'이라는 모순을 연기한다. 효과는 확실했다. 내 완벽한 연기에 속아 넘어간 페카폴리스는 입가를 가리곤 키득키득 웃었다. 감히 누구 앞에서 힘을 숨기는 것이냐는, 그런 오만함마저 엿보였다.

  그래. 그렇게 믿고 있어라. 이 모든 게 의도된 것이란 걸 모르는 페카폴리스는 가소롭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여긴 왜 왔고?"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된 얼굴로 말했다.

  "페카폴리스 언니는… 적색마탑의 부탑주라고 하셨죠?"

  "…그것도 유진한테 들은 거야?"

  고개를 끄덕인다.

  페카폴리스는 눈을 굴리며 나를 훑어보았다. 아카데미를 연상케 하는 복장. 그리고 눈동자에 담긴 감출 수 없는 흥분.

  "하."

  그녀는 피식 웃었다. 왜 찾아왔는지 대충 감이 왔나 보다.

  "너구나."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안경을 벗는다. 적청색의 오드아이가 조명을 받아 반짝인다. 페카폴리스는 나를 살벌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너였구나. 내게 겁도 없이 추천장을 따려는 아이가."

  ―쿵! 구두굽을 이용해 바닥을 찍는다. 탑이 흔들린다. 나는 이것이 '시험'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르르 돌아가는 톱니 소리. 바닥이 회전하기 시작한다.

  페카폴리스는 손과 발을 풀며 입을 열었다.

  "특기는?"

  나는 양손에 불길을 일으키며 씨익 웃었다.

  "화火."

  그리고 화話. 불로써 말하겠다. 페카폴리스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입꼬리를 올리며 눈을 빛냈다.

  "붉은 마녀의 인정을 받았다고 하니 기대가 되는구나 꼬마야. 하지만 명심해. 난 안 봐줘."

  나는 일부러 땀을 만들어 흘렸다. 그녀는 이를 긴장으로 받아들이곤, 사방에 퍼진 열기를 조금 누그러트렸다.

  "겁 나면 미리 말해. 지금이라도 그만둘 테니까. 만약, 네가 한 발자국이라도 더 다가온다면…"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간다.

  "…바로 시험을 시작할 거야."

  무시하고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간다.

  "당돌한 게 유진이랑 똑 닮았네. 좋아. 배짱 하나는 두둑하구나."

  그렇게 세 걸음.

  앞으로 다가갔을 때.

  ――후우웅!!!!

  "윽…!"

  숨 쉬는 것조차 어려운 열풍이 휘몰아쳤다. 페카폴리스가 만들어낸 바람이었다. 나는 적당히 강력한 베리어를 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페카폴리스는 양팔을 교차해 두 개의 마법진을 만들어냈다.

  다중 케스팅.

  뜨거운 숨을 들이키며 소리친다.

  "시험, 시작―――!!!!"

  땅을 박차고, 불길이 치솟는다.

  두 번째 시험의 시작이다.

  패카폴리스의 시험은 화끈하고 폭렬적이다. 마탑 일 층을 통째로 무대 삼아 벌이는 실내전, 그리고 마법사답지 않은 격투술과 접근전. 시험에 발을 들인 자는 지금까지의 상식과 편견을 모두 버리고 그녀를 맞이해야 했다.

  의존성이 심한 마법사에게 그녀는 재앙과도 같았다. 폭발을 이용해 순식간에 좁히는 거리. 정신을 집중할 틈을 주지 않았다. 거기에, 불길이 자욱한 벽과 바닥은 정신력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이런 답답한 상황에서 마법을 쓰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압도적인 공간 장악 능력. 압도적인 화염 내성을 바탕으로 주변을 불바다로 만들곤 상대방의 체력을 소모한다. 이를 파훼하려면 그녀와 비등한 화염 내성이 필요하거나, 다른 마법으로 열기를 누그러트려야 했다. 후자의 경우 정신을 분산할 필요가 있어 상대하는 쪽에선 상당히 부조리했다.

  "흐읍!"

  몸에 불꽃을 두르고 코앞까지 돌진한 페카폴리스는 돌연 진각을 밟아 급정지하곤 오른 주먹에 불꽃을 담아 크게 내질렀다.

  ―쿠우웅!!!

  불꽃이 오른팔을 휘감으며 주먹 끝으로 뻗어나간다. 나선형태의 불길은 마치 용의 형상을 닮아있었다. 염룡권. 내가 유진의 몸으로 시험을 봤을 때 사용한 기술과 비슷했다.

  "너무 진지한 거 아니에요―?!"

  나는 경악한 얼굴로 다급히 베리어를 생성했다.

  ―화아아악!! 불꽃은 반원 형태로 전개한 베리어를 집어삼키며 위아래로 갈라졌다. 베리어는 파괴되지 않았다. 하지만 뒤로 퍼져나간 불꽃은 그대로 잔류해 주변 온도를 크게 높였다. 머리카락이 살짝 그을린다. 나는 너덜너덜해진 베리어를 해제하고 땅을 박찼다.

  염동력. 열풍에 치맛자락이 뒤집힌 줄도 모르고 높게 점프한다. 천장까지 높이는 대충 8미터. 나는 5미터 정도 떠올랐을 때 더 이상의 상승을 멈추고 공중에 머물렀다. 아래를 내려다본다. 페카폴리스는 회축을 시도하려다 말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약간의 틈. 움직임을 수정하고 행동하기까지 몇 초의 틈이 생겼다. 나는 그 작은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 타이밍을 잡았다. 양손에 불덩이를 생성한다.

  ―화르륵!

  평범한 화염구. 페카폴리스의 불꽃과 비교하면 초라한 위력. 하지만 열다섯 살 소녀가 만들었다기엔 지나치게 강력했다. 나는 위로 떠 오른 뜨거운 공기를 흡수해 크기를 키우곤 그대로 페카폴리스에게 내던졌다. 

  그런데. 페카폴리스는 날아오는 화염구를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세를 낮추고 화염구를 향해 손을 뻗었다.

  "…!"

  그녀는 양손에 화염구를 받아내곤 몸을 비틀어, 시계 방향으로 빙그르르 회전했다. 화염구는 폭발하지 않았다. 그녀의 몸동작에 흘러가듯 궤도가 틀어졌다. 공격을 받아내고, 흡수하고, 궤도를 틀어 반격에 이용한다. 그렇게 한 바퀴 반. 그녀가 회전을 멈추고 내게 화염구를 던졌을 땐, 크기가 처음 것보다 다섯 배는 더 커져 있었다.

  ―콰아아앙!!

  "끅!"

  다급히 베리어를 전개했지만, 폭발의 반동을 견뎌내지 못하고 추락해버렸다. 나는 추락지점에 거대한 강풍을 생성해 불꽃을 밀어내고 충격을 받아냈다. 하지만 더 거센 불길이 나를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쿠구궁…!!

  그녀는 사그라들기 전 강렬하게 불타오르는 불꽃처럼. 스스로가 화염이 되어 내게 돌진해왔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화염 폭풍을 일으키며 모든 걸 날려버린다. 숨을 쉴 때마다 폐가 타들어가는 기분. 나는 살인적인 온도의 열풍에 이를 꽉 물었다.

  저 성난 소의 공격을 막아야 한다. 막지 못하면 피해야 한다. 머리를 필사적으로 쥐어짠다. 열다섯 소녀의 몸으로 만들 수 있는 최적의 경우의 수를 생각해라. 찰나의 시간. 판단을 내리지 못하면 페카폴리스와 충돌해 날아가 버린다.

  ―없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저 미친년의 공격을 막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고작해야 열다섯 살의 소녀였다. 오로지 마법만을 사용해 저 공격을 막아내려면 소피아의 수준을 넘어야 했다. 그러면 필히 의심을 사겠지. 연기가 들키는 건 사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소피아'가 아닌 '소피아 클레이드'였다.

  클레이드 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전설을 떠올린다.

  대대로 유전된 방패 모양의 흉터에 엄청난 힘이 깃들어 있다는 전설. 그들이 말하길, 이 힘을 각성하면 무엇이든 막을 수 있는 강대한 힘을 준다고 했지만――

  '…대화재로 전부 죽어버려 거짓말로 드러났지.'

  하지만.

  소피아 클레이드는 다를 것이다. 이는 내게 가치를 더해줄 특별함. 나만이 쓸 수 있는 능력. 내가 클레이드의 핏줄이라는 것을 확신시켜줄 쐐기.

  "끄으읍…!"

  왼 어깨의 새겨진 흉터가 밝게 빛난다.

  화아아악! 주변을 감싼 불꽃보다 더욱 강력한 빛이 서로의 눈을 강타한다. 나는 잿불로 만신창이가 된 얼굴을 들어 맹렬히 달려오는 페카폴리스를 마주 보았다. 페카폴리스는 아직 꺾이지 않은 의지에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꼈지만, 이미 가속한 속도는 늦출 수 없었다.

  클레이드의 고귀함을 내세우기 위해 허구한 날 떠들었던 거짓말은―  모순적이게도 더 큰 거짓을 만나 믿음이 되었고, 진실이 되어 눈앞에 현현했다.

  방패가.

  거대한 순백의 방패가.

  나와 페카폴리스를 가로막았다.

  "커흑――?!!!"

  ―터어엉!!! 페카폴리스는 방패를 뚫지 못하고 처참하게 튕겨 나갔다. 쿵! 벽과 부딪혀 수많은 파편을 떨어트린다. 그녀는 입가에서 피를 주륵 흘리더니, 축 늘어져 부들부들 떨어댔다.

  나는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리고 왼팔을 부여잡았다. 팔 일부분을 괴사시켜 시커멓게 만든다. 이만한 능력을 쓰고 멀쩡하면 그 또한 의심받을 테니 상응하는 '패널티'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했다.

  "끅…."

  나는 부들거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키곤 화염의 고리를 생성했다. 화륜火輪. 불꽃의 바퀴가 쓰러진 페카폴리스를 향해 굴러간다. 하지만 '방패를 사용한 패널티'가 있어야 하므로, 위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대체, 뭔 짓, 을. 한 거냐아… 끄윽…."

  페카폴리스는 피 섞인 침을 뱉으며 일어났다. 근접전을 고집하는 만큼 체력이 상당했다. 그녀는 창백한 내 얼굴과 시커멓게 물들어가는 왼팔을 보더니 혀를 쯧, 하고 찼다. 쿵! 그녀 가볍게 땅을 밟는 것으로 간단하게 불꽃의 바퀴를 제거했다. 

  그 순간.

  "시험 종료――!!!"

  커다란 외침과 동시에 모든 불꽃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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