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해내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추천장을 따려면 소피아― 그러니까, 나만 잘하면 됐으니까.
"소피아."
"흐, 히, 힉. 자, 잘모, 자모테서요. 제, 제바아."
"…."
울먹이는 소피아를 지나쳐 거실로 향한다.
'피가 필요해.'
마법진을 그릴 준비를 한다. 재료는 피였다. 어느 도료보다 마나가 픙부한 내 피.
"끅."
―촤악! 날카로운 단검을 만들어 엄지를 잘라낸다. 툭 떨어지는 손가락, 촥 하고 튀는 피.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고통을 참았다.
엄지를 줍는다. 나는 잘린 손가락을 붓으로 삼아 커다란 원을 그렸다. 신체를 연성할 마법진이었다.
'일단은 내가 빙의할 육체부터.'
기하학적인 문양을 채워 넣으며 피의 마법진을 그려간다. 피가 모자라면 다른 손가락을 자른다. 검지, 중지, 약지, 소지. 그렇게 다섯 개의 손가락을 모두 자르면, 재구축으로 다시 만들어 잘라낸다.
피냄새가 진동한다. 나는 퀭한 눈으로 마법진을 완성했다. 이제 신체 일부분을 떼어 놔야 하는데… 팔 한짝 정도가 괜찮겠다.
마법진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연성 수인을 맺는다. 소피아의 꼬리를 잘랐을 때 사용한 블레이드를 생성한다. 질기고, 딱딱한 것을 자를 때 용이한 칼날이었다.
―콰드득…
나는 블레이드를 왼팔에 갖다 대곤 톱질을 시작했다.
"끄윽, 큽…! 흐긋…"
팔꿈치를 기준으로 잘리는 왼팔. 그렇게 왼팔이 반쯤 잘려 너덜너덜해졌을 때, 마나의 실을 묶어 단박에 잘라낸다. 어마무시한 양의 피가 흐른다. 나는 상처 부위를 불로 지지고 출혈을 막았다. 재구축은 나중에 해도 됐다.
"후우…."
잘린 왼팔을 마법진 한가운데에 놓는다.
이제 저 왼팔로부터 새로운 육체가 자라날 것이다.
의식은 없는, 껍데기뿐인 육체가 말이다.
"하아… 후으…."
만들려는 육체는 두 구.
나와 동일한 능력을 갖춘 소피아의 육체, 그리고 모든 마나 회로를 차단한 유진의 육체.
굳이 마나회로를 끊은 건 주종역전을 방지한 일종의 보험이었다. 서로 반대편 몸에 들어가야 하잖는가.
나는 마법진 앞에 무릎을 꿇곤, 몸속의 마나를 모두 끌어모아 마법진 안에 주입했다. 점차 푸르게 빛나는 마법진. 연성의 시작이었다.
"연성, 시작."
- 우우우웅―!
연구실이 통째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천장에서 먼지 부스러기가 잔뜩 떨어지더니, 곧 벽장과 장식물이 대거 떨어져 난장판을 이루었다. 쿵, 콰직, 쨍그랑. 연구실이 파괴돼가며 아수라장이 되어간다.
"끄흐읍…"
한쪽 눈을 찡그리고 점차 완성되어가는 육체를 바라본다.
거의 다 완성했다. 어렵지는 않았다. 이는 재구축의 연장선일 뿐이다. 내장부터 근육, 세포 하나하나 전부 재창조하는 건 처음이었지만, 이론이 완벽하니 문제없었다.
그리하여.
피로 얼룩진 거실 바닥 위에, 두 구의 의식 없는 육체가 만들어졌을 때.
"하아―"
나는 풀썩 주저앉아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아주 개판이 다 됐네….'
엉망이 된 연구실.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껍데기 육체로 다가갔다.
새롭게 만들어진 육체의 이마를 짚는다. 따듯했다. 분명 살아는 있었지만, 살아있는 게 아니었다. 영혼과 의식이 없었다. 그야말로 껍데기. 보다보면 소름이 끼친다.
'이래서 안 만들려고 했는데…'
카피 에고든, 여분의 육체든― 인간을 벗어난 무언가에 손을 대는 기분이라 영 꺼림칙했다.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육체를 만드는 게 더 나았다. 생명을 창조하는 기분은 아니라고 해야 하나. 시체를 만드는 기분이다.
따라서, 이 시점부터는 다른 귀족의 추천장을 따겠다는 가정은 접어두는 게 좋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 끝까지 해보자 이거야. 반드시 브리도니아야만 했다.
"하아아…."
의식을 옮길 준비를 한다.
'아….'
―파직, 파지직. 세상이 꺼져가는 기분. 의식이 쪼개진다. 나는 세상이 붕괴하는 듯한 끔찍한 감각을 버텨가며 남은 시간을 쟀다. 대충 10초. 10초면 의식이 옮겨진다.
9초. 세상이 하얘진다.
…7초.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4초. 모든, 감 각이. 사라.라라. 진.
1초.
ㅤㅤ세상이
ㅤㅤㅤㅤㅤ 돌아온다.
………
……
…
동기화.
완료.
"…하아."
눈을 뜨고, 손과 발을 움직여본다. 정상적으로 움직여졌다. 체구가 작아져서 어색한 감이 있었지만, 감각에 이상은 없었다.
눈앞을 바라보자 픽 쓰러진 내가 보였다. 의식을 옮기자 껍데기만 남은 육체였다. 나는 본래 육체를 질질 끌어다 구석에 두곤 보호술식을 전개했다. 누가 내 몸 가지고 장난질했다 못 돌아가면 그대로 인생 끝이였다.
"아, 아―"
발성 테스트를 하자 소피아와 같은 목소리가 나왔다. 나는 손가락을 튕겨 거울 조각을 생성했다.
'모습은 똑같고… 마법도 평소처럼 잘 써지고…'
완벽했다.
그런데.
"…너, 넌 누구냐!"
소란을 듣고 침실에서 나온 소피아가 겁에 질린 얼굴로 손가락을 뻗었더. 자신과 똑같이 생긴 소녀. 게다가, 바닥에는 두 구의 유진이 나뒹굴고 있었다. 실로 기괴한 풍경이었다.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야, 유진."
소피아는 인식과 현실의 부조화를 견디지 못하고 공황 증세를 보였다. 성별이 바뀌고, 깊게 배인 팔은 눈 깜짝할 사이에 멀쩡하게 되돌아오고. 그것도 모자라 이번엔 자신이 둘이 되어버렸다.
이 모든 게 꿈은 아닐까. 악몽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소피아는 눈을 감고 웅크려 앉아, 현실을 부정하며 도리질쳤다.
"하아…."
상태가 안 좋다. 미쳐서 폐인이라도 되면 혼자서라도 가야겠다.
나는 소피아의 머리채를 잡아 더미 육체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곧 내가 될 소피아의 육체. 조심해야 했다. 중간에 술식이 끊어지기라도 한다면 자아가 둘로 쪼개지거나 붕괴한다. 고도의 집중을 요구하는 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늘 그랬듯 이론은 완벽해 걱정은 없었다.
피로 그린 마법진 위에 산제물처럼 세워진 소피아. 나는 무미건조한 말을 넌지시 던지며 눈을 감았다.
"…지금 미치면 나중에 힘들 텐데."
백치가 되는 걸 대비해 백업 자아를 만들어둘까. 그리 고민했지만, 그렇게까지 힘을 쓸 필요는 없어 보였다. 의식을 옮길 준비는 모두 끝마쳤다.
나는 눈을 감고 마력을 흘려보냈다.
* * *
나와 소피아의 몸이 바뀌고 30분이 지났다.
점점 미쳐가던 소피아는, 이내 현실을 받아들이고 체념 단계에 이르렀다. 항거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은 부정할 의욕마저 없애버렸다.
"이게, 나라는 말이냐…."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던 그녀는 영혼이라도 빠진 것처럼 허탈한 얼굴로 어깨를 늘어트렸다.
유진이 된 소피아, 소피아가 된 유진.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나는 언니야를 연기하면 되는 것이냐?"
목소리엔 떨림이 없었다. 극도로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나는 소피아가 내려놓은 거울을 옆으로 치우며 물었다.
"이제 좀 괜찮아졌어?"
소피아는 침대 위에 쭈그려 앉아 투덜거렸다.
"그냥… 뭘 해도 언니야에게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다."
"어머, 약속만 지키면 풀어준다는 말은 정말이었는데."
"…내가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잖느냐."
이걸 극복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건 극복이 아니라 포기였다. 모든 걸 포기했다. 무엇을 해도 내 손바닥 안인 걸 알아버렸다. 떨어진 자존감과 더불어 바깥세상을 향한 두려움은 극한의 의존성을 만들어냈다.
소피아는 두려웠다. 여전히 두려워했다. 내가 두렵고, 인간이 두려웠다. 아픈게 싫었고, 능동적이길 싫어했다. 겁쟁이. 감히 불확실성에 운명을 내걸지 않았다.
포기의 끝은 순응이었다.
소피아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 그리고… 이렇, 게. 사는 것도. 나, 나쁘지는 않고…"
소피아는 내게 납치당한 후의 생활이 그리 나쁘진 않았다고 말했다. 밥도 제때 챙겨주고, 따듯한 곳에서 잘 수 있으니 만족했다고 말했다. 또한 혼자 있는 것도 익숙하다 말했다. 지금까지의 생활은, 악마로 살아갈 때보다 수십 배는 낫다고 말했다.
전에 내가 말했던가. 악마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고. 좋은 건 좋다고, 싫은 건 싫다고 말한다. 감정 표현이 확실한 종족이다.
그야 다섯 배나 증폭된 쾌감이다. 기분이 나쁠 수가 없었다. 클락과의 교미를 통해 확실하게 체감했다. 그때의 일을 상기한 소피아는 얼굴을 붉히며 발가락만 꼼지락거렸다.
"내 몸으로 부끄러워하지 말아 줄래? 기분 나쁘니까."
나는 소피아를 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저렇게 소녀다운 내 모습을 보니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흑역사를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형용할 수 없는 역겨움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소피아는 내가 왜 짜증을 내는지 이해하지 못 하다가, 이내 '맞을 일'은 아니란 걸 깨닫곤 고개만 푹 숙였다. 기분이 좋지 않아도, 절대복종만 하면 내가 칼을 빼 드는 일은 없다는 걸 학습한 것이다.
나는 클락에게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할 편지를 쓰며 말했다.
"네 역할 알려줄 테니 잊지 말고 잘 기억해."
―딱! 손가락을 튕겨 둥근 물방울을 만들어낸다. 사람 얼굴만 한 크기의 물방울. 손날을 내리쳐 물방울을 반으로 가르자, 양면에 익숙한 얼굴이 둘 떠올랐다. 부탑주 페카폴리스와 브리도니아 백작이었다.
"꼭 만나야 하는 사람이 둘 있어. 일 층에 있는 분홍머리 접수원 페카폴리스, 그리고 파하르 브리도니아 백작. 나머지는 무시해도 돼. "
훌륭한 연기자가 되려면 나를 이해하고 상대방을 이해해야 했다. 페카폴리스야 대충 응대해주면 알아서 관심을 끌 테지만, 백작은 달랐다. 광인은 광인을 알아차리는 법. 브리도니아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와 소피아의 몸이 바뀐 걸 단박에 알아차릴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줄게."
소피아는 강아지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따랐다.
"자 따라 해, '백작님을 위해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어요. 부디 마음에 들어 하셨으면 좋겠네요.' "
"백작님을 위해, 트, 특별한 선물을…"
"그만."
"미, 미안하다아…"
"말 더듬기 이전에 표정이 너무 굳어있어. 조금 더 자연스럽게, 무표정하게. 평범한 선물을 건네는 것 같은 느낌으로."
아직은 어설펐지만, 주어진 시간은 많았다. 못해도 3일, 길면 5일. 그동안 소피아를 완벽한 '유진'으로 만들어야 했다. 백작은 인내심이 강한 편이지만, 기다린 시간만큼의 결과물을 가져다주지 못하면 성을 내는 부류의 인간이었으니까.
소피아가 말한다.
―백작님을 위해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어요. 부디 마음에 들어 하셨으면 좋겠네요.
표정 관리가 어설펐으나 목소리 톤은 합격점이다.
그러면, 이제 나도 어울려줄 필요가 있었다. 벽만 보고 연습해서야 서로 힘들 뿐이다. 그녀가 제대로 대사를 읊을 때면, 나도 진심을 다해 '소피아'를 연기했다.
"하아…."
'소녀'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활짝 웃으며, 기쁨에 찬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올렸다.
"개척과 도전의 상징, 모든 모험가의 아버지. 대부, 브리도니아의 주인을 만나게 되어 영광이에요. 오늘 저를 요리하실 분으로 부족함이 없으니 저도 기쁘네요."
소녀는 가슴께에 손을 올리곤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얼굴에 공포는 없었다. 되려 끈덕진 열망만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느끼길 진심眞心. 거짓 없는 참된 기쁨이었다.
소녀의 몸짓은 고작 음식물 찌꺼기가 될 운명 치곤 지나치게 예의 바르고, 고혹적이었다. 심지어 귀족들만이 사용한다는 북동부 가드리슈어로 말하기까지 했으니― 이는 소녀가 필히 고등 교육을 받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며, 의심할 바 없는 '고급 인재'라는 뜻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