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1화 (151/193)

  그녀는 마른 입술을 쓱 핥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발끝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 본모습. 투명화가 풀렸다.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젊어 보이는 외견과 다르게 중후한 목소리. 나는 의구심을 묵살하고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브리도니아의 시녀장님을 뵙습니다."

  그도 그럴 게 시녀장이다.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못해도 자작가. 혹은 백작가 출신일 수도 있었다. 보통 방계 출신일 가능성이 컸으나, 평민인 내겐 어느 쪽이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귀족 영애들에게 열려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정략결혼에 이용되고, 그게 아니라면 정치적 교류를 목적으로 시녀 일을 하게 된다. 따라서, 시녀는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닌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다. 수틀리면 때려치우고 본가로 튈 수 있다는 얘기다.

  나는 슈리엘과 함께 다니며 강박증 수준으로 외워둔 '평민 예절'을 시녀장에게 손보였다.

  고개를 낮추고 허리를 숙인다. 그녀가 부르기 전까진 감히 고개를 들지 않는다. 두 손과 발은 다소곳하게. 각도와 손동작은 한치의 실수 없이 행한다.

  "호…."

  시녀장은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예절에 살짝 놀란 듯 보였다. 그녀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

  "고개를 드세요."

  "예."

  "따로 공부하셨나요?"

  "조금은."

  저벅저벅. 시녀장은 나를 지나쳐 굳게 닫힌 철문을 열었다. 끼이익, 하고 울리는 금속 마찰음.

  "들어오세요. 로브는 벗으시고. 아, 그냥 이리 주세요."

  "감사, 읏. 합니다."

  내 뒤로 돌아 로브를 직접 벗겨준다. 

  "말 놓으셔도 돼요. 전 예의 바른 사람을 좋아하거든요. 제 이름은 에르제에요. 보다시피 이곳의 시녀장을 맡고 있죠."

  "고마워요, 에르제."

  "좋아요. 무슨 일로 오신 거죠? 혹시 영주님 때문에 오신 건가요?"

  "…맞아요."

  "팔? 아니면 다리?"

  "네?"

  "다른 일이군요. 방금 말은 무시하세요."

  에르제는 로브를 개며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페이스가 상당히 스피드하다. 모든 일을 빠릿빠릿하게 처리해야 하는 시녀 특성상 몸에 밴 것일 수도 있었다.

  "마탑의 손님을 어설프게 대접했다간 주인님께 혼나겠죠."

  우리는 빠른 속도로 백작저의 입구까지 다다랐다. 에르제는 총명한 눈을 밝히며 문고리를 잡았다. 황금 사자의 입에 물린, 동그란 고리를 들어 탁탁 두드린다. 그러자, 문이 자동으로 열리며 그 속을 보여주었다.

  거대한 나무 계단을 중심으로 갈라진 복도. 형형색색의 빛이 눈을 비춘다. 이를 보아 가로되 호화豪華. 바닥엔 고급진 레드 카펫이, 천장에는 사치스럽고 화려한 조명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따라오세요."

  지금부터 나는 '손님'이다.

  내가 고개를 숙이는 일은, 저택의 주인을 응대하지 않는 이상 결코 일어나선 안 된다. 에르제는 입구 옆에 있는 손님용 옷걸이에 로브를 걸어두곤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깊은 산속까지 걸어오느라 힘드셨을 테고, 그만큼 할 말도 많겠지만― 일단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백작저에 오신 걸 환영해요. 전 브리도니아 백작님의 전속 시녀이자, 시녀장을 맡고있는 에르제 헤르도나에요."

  "헤르도나. 북부 출신이군요."

  "어머, 저희 가문을 아시나요? 서열이 낮아서 성만 듣고 바로 북부를 떠올리는 사람은 얼마 없는데… 상당히 해박하시네요."

  북부를 다스리는 다섯 가문. 다른 말로 제국의 기둥. 헤르도나는 북부 서열 4위에 해당하는 자작가의 딸이었다.

  그녀가 말하길 자신은 헤르도나의 삼녀. 12년 전, 브리도니아와 몬스터 부산물 관련 계약을 맺는 과정에서 끌려왔다고 한다.

  다만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쪽으로."

  귀빈실은 삼 층에 있었다. 나는 삐걱이는 목재 계단을 밟으며 입을 열었다. 아직 인사를 안 했다.

  하지만, 에르제는 괜찮다고 말하며 손가락을 올렸다.

  "자기소개는 안 하셔도 돼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으니까요."

  "절 아시나요?"

  "모를 리가요. 잔혹한 붉은 마녀, 파헬른의 구원자. 혹은 대행자의 파트너, 루셸리니의 영원한 동반자. 사교계에선 온통 당신 얘기뿐이랍니다. 그 사납고 기계적인 남자가 여자를 들일 줄 누가 알았겠어요? 안 그래도 잘생기고 능력 있어서 아이들 사이에서 말이 많은 남자였는데… 잘도 가약을 맺으셨네요. 대단해요."

  "커흡. 큭. 뭐, 뭐요? 가, 가약?"

  가약이라는 소리를 듣자 침이 잘못 넘어갔다. 나는 한참을 컥컥대며 헛기침을 이어갔다.

  에르제는 수줍게 웃으며 삼 층으로의 계단을 밟았다.

  "아닌가요? 그래도 괜찮아요. 곧 될 거 같으니. 처음엔 대체 무슨 수로 대행자를 꼬셨나 했더니… 과연, 청옥공주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은 미모에요. 저도 나름대로 자신이 있는 편인데, 당신을 보니 어깨가 절로 주눅 드네요. 그보다 대행자의 취향이 단신의 소녀일 줄은 몰랐―"

  투머치토커인 게 어느 사이비 미친놈이랑 닮은 부류였다. 다른 게 있다면 에르제는 그나마 말이 통하는 부류라는 걸까.

  "…흠. 말이 길어졌네요. 죄송해요. 산속에 박혀 살다 보니 정보에 민감해져서요. 소문이 도는 게 워낙 느려서 원."

  쫑긋쫑긋. 안 그래도 어린 시녀들이 몰래 고개를 내밀고 나를 엿보고 있었다. 산속에 처박힌 저택 관리하느라 여러모로 고생이 많았다.

  ―끼이익…

  그리하여 도착한 삼 층, 귀빈실. 하얀색 문을 열자 널찍한 방이 나를 반긴다.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주세요. 주인님이 한창 업무 중이라서… 제가 불러도 반응이나 하실지 모르겠네요. 차라도 드릴까요?"

  "부탁할게요."

  북부인의 필수 덕목은 지혜도, 무력도 아닌 차 달이기랍니다. 에르제는 싱글벙글 웃으며 차를 우렸다. 온갖 전문 용어를 들이대며 다도에 대해 설명해주었지만, 딱히 조예가 있는 편은 아니라 한 귀로 흘려들었다.

  ―쪼르륵. 샛노란 찻물이 잔을 가득 채운다. 찻잔을 들어 들이켜보면 유자차 비스름한 맛이 났다. 나는 특유의 신맛을 음미하며 등을 기댔다.

  에르제는 내게 고개를 숙이곤 방을 나섰다.

  대충 십 분 정도만 기다리란다. 나는 차와 함께 준비한 과자를 씹어먹으며 에르제를 기다렸다.

  ……

  …

  그렇게 12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이제 곧 올 것이다. 아마도.

  '올 때가 됐는데…'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과자 통이 바닥을 드러냈을 때, 밖에서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유진님?"

  "들어오셔도 돼요."

  ―끼이익.

  허락.

  에르제는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주인님께서 독대를 원하셔요."

  "…독대? 방에 찾아가면 되는 건가요?"

  독대. 문제없다. 오히려 독대가 더 편했다. '나만의 협상'을 하기엔 아무 시선도 없는 게 나았으니까.

  그런데, 에르제는 일어서려는 나늘 저지하며 말을 이어갔다.

  "2층 식사실에 가시면 돼요. 아직 시간이 이르니 조찬부터 들자고 권유하시는데… 굳이 무리해서 먹으실 필요는 없어요. 앉아있기만 하면 충분해요."

  식사 권유라. 시간을 들여 관찰하고 싶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나와 슈리엘이 추천장을 모은다는 소문을 들었다면, 그를 이용해 어떻게든 이익을 짜내려 할 테니까.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먹은 것도 없고, 물론 앞으로도 영원히 안 먹어도 되지만, 굳이 먹으려면 몇 톤이든 먹을 수 있다.

  에르제는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입맛에 안 맞으면 바로 뱉으셔야 해요?"

  "괜찮아요. 딱히 가리는 건 없으니까요."

  "알… 겠, 습니다."

  에르제가 손을 내민다.

  나는 에르제의 손을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에르제의 안내를 받아 2층 식사실로 내려간다. 손님에게 대접할 때만, 혹은 파티를 열 때만 쓰인다는 이곳은,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아 어딘가 스산한 느낌이 들었다.

  브리도니아는 아직 오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하였다. 자존심이 강한 귀족일수록 자리에 늦게 앉으니까. 하물며 나는 평민이니 그러려니 했다.

  "어둡네요. 죄송해요."

  ―딱! 에르제는 손가락을 튕겨 꺼진 조명을 살렸다. 전보다 밝아진 식사실. 이제야 뚜렷한 윤곽이 잡히기 시작한다.

  "음?"

  그 순간.

  불규칙한 발소리가 들렸다. 구두굽이 바닥 타일을 두드리며 엇박자를 이룬다. 나와 에르제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고, 또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파하르 슈발리에 폰 브리도니아를 뵙습니다."

  갈색 올백 머리의 미중년. 눈썹이 진하고, 눈두덩이가 깊게 파여있어 피곤해 보이는 인상을 준다.

  브리도니아의 주인이 이곳 행차했다.

  "에르제, 수고했어. 이만 요리 준비하러 가봐."

  "예, 주인님."

  "너도 고개 들고. 추천장 받으러 온 거 아니까, 빨리빨리 넘어가고 밥이나 먹자고."

  어머, 쿨하기도 하셔라.

  나는 조그만 미소를 띠며 고개를 들었다.

  드르륵! 거칠게 의자를 당긴 브리도니아는 그대로 풀썩 앉아버렸다. 이윽고, 그는 양손을 모아 턱을 괸 채 나를 응시했다. 상당히 껄렁한 모습이었지만, 그는 천박함 속에서 절도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퇴폐적인 외모가 자아내는 압박감까지.

  그는 타고난 분위기 메이커였고, 공기의 떨림마저 자신의 것으로 이용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눈두덩이 사이가 가늘게 좁혀진다. 어디, 너 먼저 패를 꺼내 보라는 얘기 같아 보였다.

  나는 고개를 숙인 뒤, 아주 조용히 의자를 끌어 다소곳하게 앉았다. 앉는 순간까지 브리도니아와 시선을 떼지 않는다. 이는 나를 제대로 응대해달라는 무언의 요구이기도 했다. 정말 사소하고, 유치한 반항이었다.

  "하."

  브리도니아는 가볍게 웃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굽은 허리는 펴고, 난잡하게 어질러진 발은 각도를 맞춰 바로 세운다. 내 요구에 알겠노라 대답한 것이었다.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재차 고개를 숙였다. 부탁을 들어줬으면 응당 감사를 해야 하는 게 인간의 도리며 덕이다.

  "좋다. 어디 너 먼저 말해보거라."

  "부디."

  "날 위해 무엇을 준비했지?"

  처음부터 본론. 빨리 끝내고 밥이나 먹자는 소리가 빈말이 아니었다. 나는 브리도니아가 원하는 대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지하수로의 반영구적인 정화 시설, 마석폭열탄의 독점권과 생산 이권의 이전, 자율공격형 소형 골렘 다섯 기, 도시 내 모든 도로의 포장. 그리고 이 모든 걸 포함해서 '마음을 담은 돈주머니'까지. 어때요?"

  그는 눈썹 하나 꿈틀대지 않고 내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얼마 후, 내 말이 모두 '진심'이라는 것을 깨닫곤 눈을 지그시 감았다.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린다.

  필히 계산 중이리라. 하지만, 손해 따위는 전혀 없는, 내 쪽의 일방적인 출혈만 있는 거래였다.

  거래를, 아니 승낙할 수밖에 없는 제안을 들은 브리도나아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게 다인가?"

  메마른 목소리.

  "부족한가요?"

  "설마. 골렘 다섯 기만 받아도 네게 절해도 모자랄 판인데."

  "그럼?"

  반응은 무미건조했다. 블러핑은 아니었다. 나 또한 상대방의 감정 변화에 민감하기에, 그가 정말로 내 제안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곤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는 차가운 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전부냐고 물었다."

  "전혀요. 이는 아주 사소한, 빙산의 일각일 뿐이에요."

  "그럼 내가 저것보다 더한 걸 요구하면 들어줄 건가?"

  "세상의 절반이라도 가져다드릴까요?"

  "배 터져 죽는 꼴은 피하고 싶다만."

  마지막 말마저 진심이구나. 브리도니아가 입술을 삐죽 내민다. 그는 의미 없는 문답이 이어지자, 테이블을 탁탁 두드려 더 이상의 발화를 막아버렸다. 나는 입을 꾹 닫고 그를 바라보았다.

  "주제를 바꾸지."

  브리도니아는 눈빛을 바꾸며 새로운 화두를 꺼내 들었다.

  "우리 가문의 특징을 아나? 내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인데."

  "…감히 말해도 된다면."

  "부담 없이 말해도 되네."

  "기행."

  기행이 심하다고 들었다. 오죽하면 슈리엘이 영 미덥지 않은 놈이라고 말할까. 서부의 귀족들이 하나씩 나사가 빠진 건, 물론 카미에르도 포함해서, 그다지 이상하진 않은 일이었지만, 브리도니아는 유독 심하다 들었다.

  "맞아, 기행."

  "헌데, 왜?"

  "혹시 모르지 않는가. 집안 내력을 말하면 좋은 방법이 떠오를지."

  티를 내지 않았지만, 브리도니아는 말하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

  나는 오른손으로 입을 가리고, 왼손으론 목을 긋는 시늉을 보였다. 살해 협박 따위가 아니다. 이는 지금 듣는 내용을 발설하면 목을 베 자살하겠다는, 일종의 금언 약속이었다. 물론 강제적인 효과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브리도니아는 흔쾌히 말을 이어갔다.

  "내 증조부는 식인을 즐겼다네."

  느닷없는 식인 고백.

  "…."

  고개를 옆으로 꺾는다. 기울어지는 세상. 그 상태로 테이블 위에 검지를 올린다. 손가락 끝에 마나를 모아, 검은 잉크를 만들어낸다.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정십자 모양을 그렸다.

  입술을 움직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오로지 입 모양으로만 무언의 음音을 자아낸다. 그렇게 만들어낸 소리 없는 말은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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