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악마라니.
자신이 봐도 한심했다.
'모, 모른 척 하고 살려달라고 빌면 살려줄까?'
구석에 웅크려 벌벌 떤다.
간칸을 얻었을 땐 땅을 뛰며 기뻐했는데. 막상 그놈이 자신을 죽이러 온다니 형용할 수 없는 공포가 전신을 지배했다.
'…한 번만, 한 번만 명령해보자.'
그래도 살고 싶으면 뭐라도 해야 했다. 던전 마스터는 제발 간칸이 자신의 명령을 듣길 바라며 실험실 밖으로 나섰다.
* * *
수평굴은 5분 정도 달리자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몬스터의 발생 빈도도 줄고, 함정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간칸은 다섯 갈래로 갈라진 갈림길에서 발을 멈췄다.
"도착이야?"
간칸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푸르르 떨었다.
나는 곧바로 내려 갈림길을 확인해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누군가 이곳에서 지낸 흔적이었다. 먹다 남긴 음식의 뼛조각과 새하얀 머리카락이 주변에 깔려 있었다. 뼛조각을 만져보면 최근에 먹은 것이었다.
이런 미궁에서 고기를 먹고 머리칼을 날릴 존재라면…
'던전 마스터'
악마밖에 없겠지.
다섯 개의 굴은 던전 마스터가 활용하는 방으로 추정된다. 각자의 용도가 있겠지. 그렇다면 이 앞에 악마 놈이 있다는 말이었다. 안 그래도 마기의 농도가 짙어졌다. 집중해서 눈을 뜨면 보일 정도였다.
'…오른쪽부터 들어가 볼까.'
간칸이 나를 공격하는 건 무조건 던전 마스터 앞에서 해야 했다. 그래야 배신을 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으니까. 나는 간칸에게 신호를 주며 발을 움직였다.
그런데.
그쪽으로 몸을 꺾은 순간.
"머, 멈춰라!!"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던전 마스터와 똑같은 목소리. 바로 백스텝을 밟아 목소리의 근원지를 확인한다. 다섯 개의 굴 중 가장 가운데 굴에서 나온 목소리였다. 아직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던전 마스터가 나오길 기다리며 간칸을 불렀다.
하지만.
그렇게 굴 밖으로 튀어나온 건―
"…내, 내 실험실에 온 걸 환영한다! 이 열등한 단명종!"
꼬맹이.
기다랗고 새하얀 머리카락을 땅에 질질 끌며 등장한 맨발의 소녀…는 아닌 것 같고. 티는 안 나지만 약간 다부진 체격을 보면 분명 남자였다. 하여튼 클락과 비슷한 키의 소년은 악마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곱상한 얼굴이었다.
"…악마 맞아?"
소년이 발끈한다.
"악마 맞아! 여기 뿔도 있다고!"
머리를 돌려 뿔을 보여준다. 잘 보이지 않아 광원 구체를 비추자 작고 앙증맞은 둥근 뿔이 눈에 들어왔다. 웃음이 터져나올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는다. 나는 간칸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도 잊고 입을 열었다.
"성별 헷갈리게 머리는 왜 기른 거야?"
"난 수컷이다! 머, 머리는 귀찮아서 안 자른 거고!"
"그래그래…"
마나를 끌어모아 마법진을 생성한다. 고위 수속성 마법. 손가락 끝에는 어느새 새파랗고 날카로운 소용돌이가 치고 있었다. 크기는 돌멩이처럼 작았지만 위력은 실제 소용돌이와 똑같았다.
"…."
악마의 눈이 흔들린다. 뭔가 클락을 괴롭혔을 때랑 비슷한 반응이라 묘하게 익숙했다. 나는 던전 마스터에게 다가가며, 나머지 손으론 간칸에게 손짓했다. 손가락 다섯 개를 펼친다. 오 초 후 공격하라는 뜻이었다.
"지, 지금이라도 공격을 멈추고 고개를 조아린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악마 주제에 말이 많네."
"이익, 으, 가, 간칸!!"
손가락 세 개가 접혔을 때.
간칸은 뒤로 빠져 돌진할 준비를 했다.
"아프지 않게 죽여줄 테니 얌전히 목 내밀어."
"히, 힉…"
네 번째 손가락을 접는다. 눈앞의 악마 소년은 겁에 질린 채 움직이지도 못했다. 나는 악마의 목에 소용돌이를 갖다 댔다. 삐져나온 하얀 머리칼이 잘려 허공을 떠다닌다. 이윽고, 소년의 피부가 소용돌이에 스쳐 새빨간 실선을 내자.
"저, 그. 으. 사, 사려, 사, 살려주세, 요오…"
소년은 창백한 얼굴로 방울진 눈물을 떨어트렸다. 나는 악마다운 웃음을 지으며 다섯 번째 손가락을 접었다.
―다그닥, 다그닥…!
간칸이 가시를 세우고 달려온다. 던전 마스터는 내게 달려드는 간칸을 보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희망이 깃든다. 드디어 자신의 명령을 들었다 생각 한 건지, 되려 재수 없는 미소로 날 응대했다.
"다, 단명종 계집아! 내 얘기를 들어보아라!"
"…?"
"나, 날! 죽이, 면! 그, 그. 보물! 보물을 얻을 수 없다!"
"보물?"
의도적인 시간 끌기. 급조해낸 거짓말이란 게 뻔했다. 하지만 어울려준다. 간칸이 달려올 때까지 대충 10초 정도 남았으니까.
"일단 그 손부터 떼보거라!!"
"…거짓말이면 고통스럽게 죽일 거야."
손을 뗀다. 내게 풀려난 악마는 목을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다. 살아남은 게 실감이 안 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보물은?"
없는 걸 알면서도 묻는다. 그는 숨을 한껏 들이마시더니 썩소를 지었다. 심지어 그걸로 멈추지 않고 내게 혀를 쭉 내밀었다. 나는 험악한 표정을 연기하며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장난해?"
그 순간.
――콰직!!!
"어, 라?"
몸이 기우뚱 기울어진다. 나는 얼굴부터 넘어져 코피를 왕창 쏟아냈다. 몸에 문제라도 생긴 걸까. 그래서 다시 일어나려 했는데. 다시 일어나 저 악마를 죽이려고 했는데.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고개를 내리면.
무릎 아래로 다리가 보이지 않았다.
"아, 아크흑. 끄윽…?!"
한 발짝 늦게 찾아온 고통에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린다.
"자, 잘했어 간칸!!"
뒤에서 달려온 간칸이 다리를 날려버렸다. 분명 허벅지까지 날려도 된다고 손짓했건만, 쓸데없이 착한 몬스터였다. 나는 바닥을 기며 악마에게 다가갔다. 그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손가락질했다. 꼴 좋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악마는 무언갈 기억해낸 듯 자신의 방으로 달려갔다. 얼마 후. 그의 손에는 수갑 비스무리한 도구가 들려 있었다. 마나 운용을 방해하는 구속구였다. 물론 내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봉인당한 척을 해야 하나…'
본체가 생각보다 더 형편없었다. 마나량이 클락보다 살짝 높은 정도였다. 이딴 놈이 어떻게 악마로 살아남았는지 더 궁금할 지경.
―철컥.
과다출혈로 정신을 못 차리는 내게 쇠고랑을 채운다. 약간 짜릿한 통증이 팔목을 감돌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역시 단명종은 내 지혜를 따라올 수 없는 것인가…!"
악마 소년은 자아도취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간칸! 실험실로 끌고 와!"
간칸은 내게 발굽을 두드리며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악마에게 들리지 않게 전음傳音으로 속삭였다.
'끌고 가.'
발굽에 목덜미를 걸고 끌고 간다. 나는 새하얀 머리칼을 질질 끌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악마를 어떻게 구워삶을지 고민했다.
* * *
코어는 던전 마스터의 실험실 정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저걸 부수기만 하면 미궁이 폐쇄된다는 거란 말이지. 그런 중요한 걸 내게 훤히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마법이 봉인 당했다고 단단히 믿는 모양이었다.
"…이거 당장 풀어."
분한 표정으로 이를 간다.
악마 소년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너희들이 내 실험을 방해했으니, 직접 실험체가 되어줘야겠어."
"무슨 실험?"
"그야 몬스터 번식 실험이지!"
몬스터 번식이라. 처음부터 강하게 나온다. 나는 눈을 찡그리고 되물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니들이 다 죽여버렸잖아! 이익… 이 멍청한 말 대가리가 돌진하면서 그나마 남은 놈들도 다 쓸어버리고…"
정리하자면 몬스터 생산에 차질이 생겼다는 말이었다. 벽에서 마구 찍어내는 줄 알았더니 그건 또 아닌가보다.
"그런고로, 직접 낳아줘야겠어."
"…미친 소리. 몬스터랑 인간끼리는 번식 못 해."
고블린과 오크를 제외하면 인간의 이종간 임신은 불가능하다. 미노타 같은 예외가 있긴 하지만, 말 그대로 유니크 개체의 특성이라 일반적인 상식에 들어가지 않았다.
고블린이나 오크를 꺼내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글쎄. 저놈 말마따나 남아있는 몬스터가 없었다. 여깄는 몬스터라곤… 흠. 설마. 악마는 분한 표정으로 빼액 소리쳤다.
"날 가르치려 들지 마! 직접 해보기 전엔 모르는 법이야!"
날 이종간 실험에 쓰겠다 선언하고 얼마 후.
귀중한 실험체를 피가 흐르는 채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는지 직접 붕대를 감아주었다. 그냥 맨살에 천을 덧댄 형편없는 조치였지만 한결 나았다. 나는 던전 마스터가 눈치채지 못하게 출혈을 멈췄다. 그는 자신의 훌륭한 의술 솜씨에 입꼬리를 방끗 올렸다.
"도망치면 죽여버릴 거야! 얌전히 기다려!"
고개를 빼꼼 내밀어 경고하곤 굴 밖으로 나간다.
간칸과 단둘이 남은 상황. 나는 포박도 하지 않은 허술한 관리에 참아왔던 웃음을 터트렸다. 어차피 다리가 잘려서 움직이지도 못하지만, 이렇게 무방비하게 붕대까지 감아줄 줄은 몰랐다.
―쿵.
미친년처럼 실실 웃고 있자 간칸이 발굽을 두드려 인기척을 알려주었다. 나는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고 '납치된 마법사'를 연기했다.
"나왔어! 간칸! 실험체 안 도망쳤지?"
던전 마스터는 몸에 맞지 않는 커다란 옷을 입고 돌아왔다. 손은 가볍게 넘는 기다란 소매와 끈으로 묶어야 겨우 입을 수 있는 통 큰 바지. 인간의 것을 빼앗아 입은 건진 모르겠지만, 한껏 펴진 어깨를 보면 나름 위엄있는 주인 행세를 하려고 한 것 같았다.
머리도 옷도 새하얀 걸 보면 얘가 진짜 악마가 맞나 싶다. 이 녀석을 악마라고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등허리에 솟은 기다란 꼬리뿐이었다. 스페이드 문양의 전형적인 악마 꼬리.
그런데, 가올리스나 아르타니아는 저런 거 없었는데… 종이 다른 걸까.
"간칸! 단명종 끌고 네 번째 방으로 와!"
그리하여.
본격적인 실험의 시작이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간칸에게 눈짓했다. 당분간 던전 마스터의 명령을 들으라는 뜻이었다. 간칸은 발굽에 목덜미 걸어 질질 끌고갔다. 네 번째 방이면 바로 옆 방이다. 이동 자체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윽."
네 번째 굴.
고약한 냄새가 난다. 눈을 굴리면 썩어가는 몬스터들의 사체가 보였다. 나는 혐오감을 넘어서는 악취에 눈을 찡그렸다. 던전 마스터는 이 냄새가 아무렇지도 않은지 침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번엔 성공해야 하는데…"
몬스터 교배의 실패작들.
새끼 몬스터로 추측되는 사체 위엔 '5'라는 숫자가 적혀있었다. 태어난 직후의 생존 기간일까. 눈을 돌려 더 많은 사체를 확인한다. 숫자가 새겨진 몬스터는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 6일을 넘지 못했다.
하기야 코어의 힘으로 태어난 몬스터들이 정상적인 생식 활동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신의 영역을 한 번 침범한 것도 저주받을 일인데, 그걸 두 번씩이나 침범하려 하다니. 당연히 잘 될 수가 없었다.
"끄응… 가, 간칸, 이것 좀 옮겨줘…"
던전 마스터는 구속구가 달린 거대한 철판을 낑낑대며 옮겼다. 혼자 힘으로는 부족한지 간칸의 힘까지 빌리며 철판을 옮겼다. 땅에 아무렇게 널브러져 있던 나는 저것이 '실험대'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철컥.
간칸에게 목덜미를 잡혀 실험대 위로 올라간다. 목과 팔에 사슬이 채워지고, 다리는 양쪽으로 쭉 벌린 뒤 허벅지를 고정한다. 실험대에 매달린 나는 떨리는 눈으로 던전 마스터를 바라봤다. 그는 실험대를 40도로 눕히곤 정체 모를 노트를 가져왔다.
"준비는 끝났고…"
"…이런 짓 해봤자 헛수고야."
"조용히 해! 해보기 전엔 모른다고 했잖아!"
빼액 소리 지르고 노트를 펼친다.
"남은 몬스터가… 으, 드레이크 두 마리랑…"
드레이크 둘과 오크 아종 셋. 끝이었다. 던전 마스터는 한숨을 퍽퍽 쉬며 머리를 싸맸다. 실험에 써먹긴 너무 아까웠다. 실험에 쓰인 몬스터들은 처분당한다. 저기 아무렇게나 쓰러진 냄새나는 사체들처럼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처분보다는 자멸이 더 어울리는 말이었다. 안 그래도 없는 생명력을 소모한 몬스터는 그대로 죽어버린다. 코어로 탄생한 몬스터의 한계였다. 칼날숲의 몬스터로는 이미 한차례 실험해봤는지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으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