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뭘 하시려고…?"
충돌까지 20초. 병사들의 긴장이 극한까지 다다른다. 나는 50장의 두꺼운 베리어를 준비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자, 잠시만! 유진―"
"마녀님―?!"
―딱!
그들의 발밑에 푸른 마법진이 생겨난다. 나는 빛에 잠겨 사라지는 그들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내게 손을 뻗는 카미에르의 표정은 웃기다 못해 다이나믹해 사진기로 찍어두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럴 여유는 없었다.
"끄응… 힘 좀 써볼까."
사족은 여기까지.
손목 위에 마법진을 생성한다. 페카폴리스와 다르게 새파란 마법진. 두 손목을 교차하자 마법진의 크기가 커진다. 나는 풍압에 날아가지 않게 바닥에 발을 박아두고 방어 술식을 전개했다.
자세는 낮추고, 마법진을 펼친 양손은 앞으로. 기하학적 모양의 도형들이 회전하며 신비로운 빛을 뿜는다.
"…."
충돌까지 10초.
결정화를 준비한다.
'지금.'
―쿠구궁…
거대한 유리 장막. 목 없는 말이 내 코앞까지 당도했을 때, 나는 마력을 발산해 거대한 유리 장막을 설치했다. 빛에 의해 공간이 왜곡된다. 세상이 갈라지는 듯한 몽환적인 풍경. 모든 게 유리 조각이 되어 깨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간칸은 멈추지 않았다. 허공을 떠다니는 유리 조각이 자신의 몸을 찢어발길 걸 알면서도 달리는 발을 멈출 수 없었다. 자신마저 통제할 수 없는 살인적인 속도는 멈추고 싶다고 멈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간칸은 몸에 달린 가시를 크게 부풀리고 유리창과 격돌했다.
"흐읍…!"
몸이 밀려난다.
――쩅그랑!!!!
두꺼운 유리창이 한 겹, 두 겹, 세 겹. 형체를 잃고 무너져간다. 간칸은 결계와 다름없는 유리 장막을 오직 물리력 하나로만 뚫고 들어왔다.
'47겹….'
총 50겹의 장막.
간칸은 47겹의 장막을 부수고 나서야 돌진을 멈췄다. 당연하지만 평범한 유리가 아니다. 겉모습만 유리일 뿐이지 경도는 강철과 다름없는데 그걸 47겹이나 뚫었다. 마법이나 오러 없이 오로지 몸통 박치기로 말이다.
'게다가 멀쩡해.'
태생적인 마나 저항력이 상상을 초월했다. 간칸은 몸에 박힌 유리 조각을 몸을 털어 떼어내더니 나를 향해 발굽을 두드렸다.
―쿵!
'화났다 이거지.'
나는 손을 들어 유리 장막을 통째로 밀어버렸다.
――쩌저저적!!!
왜곡된 세상이 간칸을 향해 날아간다.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수만 개의 유리 조각들. 유리에 비친 붉은 머리가 쉴 새 없이 지나간다.
간칸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유리 조각을 모두 몸으로 받아냈다. 가시를 부풀려 갑주처럼 자신의 몸을 감싼다. 간칸의 몸에 직격한 파편은 가시를 뚫지 못하고 그대로 파괴됐다. 나는 허공에 흩날리는 유리 잔해를 보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하."
역시 칼날숲의 주인. 아무 상처도 없었다. 저놈에게 날붙이는 아무 효용도 없었다.
헌데.
―….
간칸은 공격을 멈추고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얼굴도 없는 놈에게 응시한다는 표현이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느낌을 받았다. 경계일까. 나는 가볍게 발을 굴러 간칸을 위협했다.
"…."
그러나 살기 없는 공격은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모든 마법을 취소하고 간칸을 바라봤다. 지금 당장 공격하면 종잇장처럼 찢길 터인데, 움직이긴커녕 미동도 없었다.
"…뭐야?"
기운이 쭉 빠진다.
대치… 라기엔 간칸의 공격 의사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몸에 베리어를 두르고 간칸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발길질이라도 날리는 건 아니겠지. 말 뒤에 서는 것만큼 위험한 짓이 없긴 했다만, 베리어도 있으니 문제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거야.
그때.
굴을 울리는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하는 거야!
조금 앳돼 보이는 자의 목소리. 남성체로 추측된다. 정체불명의 목소리는 벽을 타고 메아리쳤다. 나는 기이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팔짱을 끼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간칸! 뭐 하는 거야! 빨리 죽여버리라고! 아, 아니! 죽이진 말고!
간칸의 주인? 아니면 던전 마스터인가. 정황상 던전 마스터일 가능성이 컸다. 간칸이 왜 명령을 듣지 않는가에 대한 건 둘째치고, 상황이 상당히 재밌게 돌아간다. 나는 낯선 악마와 움직이지 않는 간칸에게 흥미가 들끓었다.
피식 웃으며 간칸에게 다가간다. 내가 간칸에게 접근할수록 던전 마스터의 목청도 점점 커졌다. 왜 내 말을 듣지 않는 거야! 난 이곳의 주인이라고! 어딘가에서 지옥을 운영 중인 하얀 뿔의 악마가 생각나는 대사였다.
"…너 대체 뭐야?"
간칸의 코앞까지 다가갔는데도 공격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흠…."
그러고보니 이놈도 말인데, 그거랑 관련이 있는 걸까. 말을 비롯한 동물들이 내게 이상할 정도의 호의를 보이는 것 말이다. 꼭 동물뿐만이 아니라 정령들도 날 좋아했다. 카르드라실에서 뼈저리게 느꼈었지.
근데 얘 몬스터잖아. 이게 맞나 모르겠다.
"…."
간칸, 칼날숲의 산주.
보통 이런 놈들은 일반적인 몬스터로 분류하지 않고, 특수 몬스터 혹은 유니크 개체로 따로 분류한다.
단 한 개체밖에 없으니까.
'몬스터, 라는 정의에 들어가지 않는 놈일 수도 있고.'
목 없는데 어떻게 움직이냐고? 이 세상이 상식대로 돌아간 적이 있었던가. 그냥 그런갑다 할 뿐이다. 용도 엘프도 드워프도 마나도 있는데 목 없는 말이라고 없을까. 그냥 몸 전체에 가시를 튀어나오게 할 수 있고, 목이 없는 것만 빼면 평범한 말…
'…일리 없지.'
간칸에게 다가가다 못해 쓰다듬고 있는 내게 던전 마스터가 호통친다.
―당장! 그 단명종 계집! 빨리 내 앞으로 데려와! 기, 기절 시키고!
"얘는 그럴 생각 없는 거 같은데."
―닥쳐!
어린 악마인가. 그냥 이름 없는 떠돌이 악마가 분수에 안 맞는 코어를 줍고 마스터 행세를 하는 것 같았다. 목소리도 어렸고, 하는 짓도 영 어설펐다. 간칸을 손에 넣고 어떻게든 사용하려고 미궁을 개조한 모습이었지만, 음. 얘가 그럴 의사가 없다는데 어째.
"나 태워줄 수 있어?"
간칸은 가시를 거두고 매끈한 회색빛 가죽을 내보였다. 출발할 때 탔던 말처럼 등허리를 낮춰주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무장을 해제하는 걸 보면 무언의 허락으로 보였다.
―말 안 들으면 둘 다 죽여버릴 거야!
던전 마스터는 피 끓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떻게 죽이게?"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나는 던전 마스터에게 중지를 날리며 간칸 위로 올라탔다. 여전히 얌전하다. 이럴 거면 병사들을 돌려보내지 말 걸 그랬나. 못해도 클락이라도 남겨둘 걸 그랬다. 한 명 정도는 지키고 싸울 수 있었는데. 아쉬웠다.
―그건 무슨 의미지? 당장 설명해!
무시하고 다시 엿을 날린다. 던전 마스터는 이 가는 소리를 내며 으르렁댔다. 발을 동동 구르는 소리까지 들렸다.
"저놈한테 갈 수 있어?"
간칸은 발굽으로 땅을 몇 번 긁더니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후, 후회하게 될 거야!
던전 마스터의 마지막 말이었다.
무엇이 나를 기다리든 전부 박살 낼 준비가 되어있다. 마법 무효는 좀 골치 아플지도 모르겠지만, 마탑에서의 오랜 연구 끝에 적당한 파훼법을 알아낸 상태였다. 술사의 몸에 접촉하면 어느 정도 통제권을 내게 되돌릴 수 있다.
'뭐… 그렇게 강한 악마 같지는 않지만….'
점점 속도를 높인다. 고삐와 안장도 없이 말을 타는 건 꽤 힘든 일이었다. 지금 내 모습은 '탑승' 보단 '운송'이 더 어울리는 꼴이었다. 마나의 실로 몸을 묶고 떨어지지 않게 고정한다.
어떻게 죽일까… 그냥 뿔만 꺾고 살려두는 것도 나쁘진 않아 보였다. 그럼 알아서 죽을 테니까. 아니, 그건 좀 심심한데. 간칸이 문제일 뿐이지 본체는 형편없는 게 분명했다. 던전 마스터들이 다 그렇듯 코어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니까.
'일부러 당해봐?'
일부러 당해주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다. 산채로 해부당하는 건 에일린이 있어서 무리일 것 같고… 그럼 고문? 지금으로선 이게 가장 유력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하는 시츄에이션은 간칸이 중간에 배신하거나 하는―…
……
…부탁하면 들어줄려나?
"…간칸?"
신나게 달리는 간칸에게 속삭인다. 간칸은 목 절단면 주위에 가시를 생성해 대답을 대신했다. 나는 던전 마스터가 들을 수 없게 방음 결계까지 치며 간칸에게 부탁했다.
"네 주인 앞에 도착하면 음, 날 공격할 수 있겠니? 처음은… 그래. 다리가 좋겠네. 다리를 잘라버리는 거야."
내가 봐도 미친 소리라 조금 걱정됐지만, 간칸은 흔쾌히 목덜미를 끄덕거렸다. 알겠다는 의미였다. 나는 인간과 똑같은 의사 표현에 잠시 어이없어하다가,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곤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요즘 많이 참긴 했지.'
클락을 괴롭히는 건 한계가 있다. 음, 정확히 설명하자면 해소되는 욕구의 종류가 달랐다. 소심하게 피어오르는 가학심을 해결하면, 마음 구석에서 과격한 피학성애가 들끓는다.
자극이 없으면 미쳐버리는 저주받은 몸.
"하아…"
입술을 깨물면서도 올라가는 입꼬리를 멈출 수 없었다.
* * *
던전 마스터의 실험실.
코어를 조작하는 악마의 얼굴은 초조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멍청한 말 대가리가 예비 실험체까지 전부 죽여버렸잖아…!'
거처 없이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이름조차 없는 흔하디흔한 악마. 가진 힘도 보잘것없고 할 수 있는 거라곤 함정을 설치해 소동물 따위를 잡아먹는 것뿐이다. 인간 사냥? 인간 정도야 손쉽게 잡아 죽일 수 있지만, 추적을 감당할 힘이 없어 하고 싶어도 못 한다.
인간들은 이런 악마를 '소악마'라 부른다.
저들이 다른 멀쩡한 악마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자신이 뭘 원하는지 정확히 모른다는 것이었다. 모든 악마는 자신이 진실하게 원하는 욕망을 따라 살아가지만, 소악마들은 그러지 못했다.
'…만들 수 있는 함정이 뭐가 있지?'
엉덩이에 난 꼬리는 그가 소악마라는 증거이다. 욕망을 발현시키지 못한 초짜 악마. 꼬리는 악마로서의 정체성을 찾으면 자연스레 사라진다.
'전기 올가미? 이걸로 그놈을 막을 수 있을까?'
던전 마스터는 꼬리를 살랑이며 코어를 조작했다.
'몬스터를 만들어 봤자 그 멍청한 말 대가리가 다 찢어발길 게 분명하고…'
답답했다. 간칸 그놈을 조종하려고 코어의 힘을 너무 많이 썼다. 지금 남은 에너지로는 끽해야 오크 열댓 마리다. 던전 마스터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 붉은 머리 계집이 보여준 마법은 봐도 이해가 안 갔다. 잘 모르겠지만, 자신이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건 분명했다.
정말, 정말 우연히 얻은 미궁 코어.
드디어 악마로서의 정체성을 찾고 '진짜 악마'로서 탈피할 수 있나 싶었더니 허망하게 죽게 생겼다.
'이래서야 칼날숲에 기어들어 온 보람이 없잖아…!'
소악마는 다른 악마에게 코어를 뺏길까 봐 늘 마음 졸이며 안전한 곳을 찾았다. 그렇게 수소문해 발견한 곳이 칼날숲이었다. 인간들도, 몬스터도, 악마들도 쉽사리 다가오지 못하는 곳.
이곳에 서식하는 몬스터들은 가까이 다가가지만 않으면 공격하지 않으니까, 날카로운 풀만 조심하면 됐다. 그렇게 숲 최심부에 미궁을 세웠다. 몬스터도 많이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몬스터가 밖으로 나가 인간을 잡아 죽이면 코어의 생명력이 충전됐다. 그러면 더 강한 몬스터를 만들 수 있었다.
'그 말 대가리만 아니었어도….'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머리 없는 말이 몬스터를 싹 죽여버렸다.
간칸.
산의 주인이 겁도 없이 침범한 소악마를 공격한 것이다.
'침착하자. …아, 아직 배신 안 한 거일 수도 있잖아.'
결론만 말하자면 소악마가 이겼다. 코어의 힘은 몬스터를 상대로 절대적인 힘을 발휘했다. 신에게 버림받은 피조물은 부정적 사념체가 모인 코어의 힘에 지배당하기 쉬웠다.
코어를 두드려 화면을 비춘다.
단명종 계집은 목 없는 말을 타고 자신에게 접근 중이었다. 뜀박질만으로 풍압을 일으키며 세차게 달린다. 아마 이대로 5분이면 실험실에 도달할 것이다.
소악마는 코어에 머리를 박았다.
코어에 비친 자신의 모습.
악마답지 않게 순하게 생긴 얼굴. 거기에 발목까지 닿는 기다란 머리칼은 천사를 떠올릴 게 할 만큼 새하얬다. 키라도 컸으면 카리스마라도 있었을 텐데, 소악마 특유의 작은 몸집은 귀여움만 더했을 뿐이다. 심지어 양 관자놀이에 난 귀여운 뿔은 끝이 뾰족하긴커녕 둥글었다.
"으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