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은 훈련으로 극복해낼 수 없는 공포였다.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지치는군요."
내려가는 데만 수 시간이 걸렸고, 급박한 경사라 체력소모가 극심했다. 다행인 점은, 계단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몬스터들이 생매장이라도 당했는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려가는 것 자체는 조심만 하면 됐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든 계단을 밟고 미궁의 가장 밑바닥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마스크를 뚫고 들어오는 시체 썩은 내에 얼굴을 한껏 찡그렸다.
"…시체가 많습니다. 독이 있을 수 있으니 얼리도록 하겠습니다."
수신호로 들어가기 전 카미에르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손을 빧어 냉기를 분출했다. 쩌저적!! 입구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모두 얼려버린다. 썩은 내는 여전했지만 그래도 전보단 나아졌다.
시체를 밟고 전진한다.
'…뭐야?'
우리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끝을 모르고 이어진 수평굴이었다. 마나를 흩뿌려 길이를 가늠하려 해도 중간에서 뚝 끊겼다. 마나를 차단하는 종류는 아닌 것 같은데… 공간이 분리된 건가? 그러지 않고서야 끊길 리가 없는데…
"…."
카미에르가 수신호를 보낸다.
전진하자는 말이었다.
―키에엑…
그를 뒤따라 움직이자 벽 안에서 기괴하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쌍둥이 악마의 탑에서 한 번 보았던 것이었다. 몬스터의 발생. 미궁 코어의 힘을 사용해 저주받은 피조물을 탄생시킨다.
이는 신의 영역을 침범한 행위였다. 생명의 탄생은 예외 없이 자연의 섭리대로, 신이 정한 규칙대로 만들어져야 했다.
몬스터도 예외는 없었다. 응당 영혼을 지닌 생명을 탄생시키려면 암수가 만나 몸을 섞어야 하거늘. 하지만 던전 마스터들은 달랐다.
절망과 분노, 질투와 원한, 회한과 체념. 온갖 부정적 사념이 뭉치고 굳어 보석이 되어버린 미궁 코어. 그들은 이것을 이용했다. 코어엔 절규하는 빛바랜 영혼이 담겨있었으니까.
신은 순리와 운명으로 생을 빚어내지만, 던전 마스터는 역리와 혼돈으로 악惡을 빚어낸다. 그렇게 탄생한 게 미궁의 몬스터였다.
"…!"
선두 병사 둘이 수신호를 보내고 칼을 뽑는다. 그들은 머리가 막 생성된 몬스터를 향해 칼을 내질렀고, 촤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핏방울을 튀겼다. 벽에서 꾸득꾸득 기어 나온 몬스터는 어둠에 몸을 맡기자마자 목이 날아가 세상을 떠났다.
'…돌연변이 오크.'
벽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는 오크 아종이었다. 도시 근처 평원에서 서식할 만 한 몬스터는 아니었다. 조금 나가야만 볼 수 있는 위험도 C급의 몬스터. 아직 20m도 전진 안 했는데 오크라니. 처음부터 강하게 나가는 건가. 이런 몬스터들이 미궁 밖으로 나오니 파헬른이 그 꼬라지가 난 거였다.
'그냥 굴째로 매몰시키고 싶지만…'
던전 마스터가 금세 복구시켜 별 효용은 없다고 들었다. 미궁을 부수는 방법은 오직 코어의 파괴뿐이다.
―콰직.
"하이익…?!"
하염없이 앞으로 나아가던 도중, 클락이 무언가를 밟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는 클락을 품에 안고 광원 구체를 아래로 내렸다. 구체가 바닥을 비춘다. 검푸른 풀과 거무칙칙한 흙 위에 무더기로 쌓여있는 건―
'뼛조각…?'
뼛조각.
클락이 밟은 건 뼛조각이었다.
어느 부위지? 인간의 것과는 구조가 달랐다. 인간치곤 너무 두꺼웠다. 나는 카미에르에게 수신호를 보내고 뼛조각을 집었다.
'이런 몬스터가 있었던가.'
구조를 보면 다리뼈였다. 나는 주위에 널브러져 있는 다리뼈를 더 수집해 대략적인 모양을 유추해냈고, 조금 익숙한 동물의 뼈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말.'
카미에르와 병사들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나는 묘하게 떨떠름한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오늘따라 말과 관련된 일들을 많이 겪는다. 수상할 정도로 똑똑한 말과 지금 널브러진 말 다리뼈라든지…
'…깊게 생각하지는 말자.'
우연이겠지.
그리 생각하고 다시 전진한다.
"으앗…?!"
그리고, 우리를 방심할 수 없게 만드는 존재는 몬스터 말고도 하나 더 있었다.
―캉!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 염동력을 이용해 저 멀리 날려버린다. 카미에르는 내게 감사 인사를 하고 튕겨나간 화살을 뽑았다. 보랏빛 액체가 뚝뚝 떨어진다. 화살촉 끝엔 독이 발라져 있었다.
"조심해."
함정.
침입자를 제거하기 위해 사방에 깔린 함정은 그 개수만큼 종류도 다양했다. 클락이 발동한 함정은 가장 흔한 보우 트랩이었다.
구체가 모든 곳을 밝힐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가시범위 밖에서 날아오는 화살은 자연스레 내가 처리해야 했다. 이 정도의 범위를 감지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었으니까.
"힝…."
함정을 발동시킨 클락은 건어물처럼 늘어져 내 눈치를 봤다. 귀엽기는. 이런 조잡한 함정 따위는 위협도 안 됐다. 나는 시선의 사각지대로 이동하곤 클락의 뺨에 입을 맞췄다. 짧은 버드 키스. 클락은 당황하며 얼굴을 붉혔다.
가기 싫다는 클락을 데려온 건 나니까, 그의 실수를 커버해야 할 책임이 있다. 또한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클락도 내가 책임을 져야 했다. 나는 내 사람을 쉽게 버릴 정도로 무책임하지 않았다.
"돌아가면 잔뜩 기분 좋아지자…?"
"으, 읏…"
좋아. 돌아가서 클락을 괴롭힐 생각을 하니 의욕이 났다. 나는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공략에 임했다. 카미에르는 밝아진 내 얼굴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적극적인 거면 좋은 거지. 그는 이내 고개를 돌리고 공략에 집중했다.
굴은 꺾인 길 없이 오직 직선으로만 뚫려있었다.
공략하는 입장으로선 지도 작성이 편하니 나쁠 것 없었지만, 왜 이런 식으로 설계했는지는 의문이었다. 계속해서 몬스터를 생성해 침입자의 생명력을 흡수해야 하는 던전 마스터로선 길을 최대한 꼬아놓는 게 이득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쌍둥이 악마처럼 침입자를 미치게 하는 저주라도 걸어놓던지.
"흐읍!"
―촤아악!!
카미에르의 검에 목이 잘린 몬스터는 성체 드레이크였다. 위험한 몬스터인 건 맞았으나 초입에 등장한 오크와 비교하면 위험도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난이도는 무난한 편이네.'
쌍둥이 악마의 탑을 공략하느라 너무 눈이 높아진 것일 수도 있었다. 이게 미궁 평균이라면 납득이 됐다. 그간 내가 너무 말도 안 되는 괴물들만 상대해온 것이겠지.
―잠시 휴식.
쭉 공략을 이어간 카미에르는 네 시간이 흐르자 손을 흔들어 휴식 신호를 보냈다. 얼굴이 밝아지는 병사들. 그들은 생수통과 건량을 꺼내 마구 먹어 치웠다.
얼마 되지 않는 양이지만 이게 어딜까. 어둡고, 건조하고, 시체 썩은 내가 나는 미궁은 한 시간만 있어도 정신이 마모된다. 체력도 중요하지만, 적절한 휴식을 통해 멘탈을 관리하는 게 더 중요했다.
――후우웅…
"음…?"
클락과 도란도란 앉아 육포를 씹고 있자니,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머리칼이 흔들렸다.
정말 미약한 바람이었다. 처음엔 카미에르가 무의식적으로 뿜어내는 한기인 줄 알았는데 종류가 달랐다.
'밖에서 바람이 들어오나?'
나는 손가락을 들어 바람의 방향을 측정했다.
"…."
그런데.
'앞에서 불잖아…?'
바람은 '앞'에서 불고 있었다. 우리가 진입한 곳에서 부는 바람이라면 이해를 하겠지만, '앞'이라니? 안 그래도 일직선 굴이라 바람이 모여 꺾일 공간도 없었다. 수평 동굴의 구조상 앞에서 바람이 분다는 건…
'…반대편 출구라도 있는 건가.'
이곳 말고 입구가 있었던가. 아니, 미궁에 출구가 존재하긴 했던가. 지금까지 미궁 관련 서적을 스무 권 가까이 읽어봤지만 그런 내용은 없었다. 미궁은 항상 잡아먹는 존재였다. 왔던 길을 돌아가지 않는 이상 탈출할 수 없다. 그게 미궁이었다.
"…클락. 잠시만 여기 있어."
"네…?"
"아니다, 같이 가자. 물어볼 게 있어."
클락을 이끌고 카미에르에게 다가간다. 그는 병사들의 컨디션을 체크하며 식량을 배급하고 있었다. 딱 필요한 양만 나눠서.
"음?"
"카미에르."
수신호를 무시하고 육성으로 말을 건다. 카미에르는 잠시 눈을 찡그렸지만, 진지한 내 얼굴을 보곤 다시 얼굴을 풀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물어볼 게 있어요."
"음…?"
손가락을 들고 턱짓한다. 너도 한 번 들어보라는 소리였다. 카미에르는 나를 따라 손가락을 들었고, 손끝을 스치는 바람에 얼굴을 굳혔다.
"이건…"
"미궁에 출구가 있었던가요?"
"…."
없다.
그도 알아차렸다.
이건 이변異變이었다.
눈을 부릅뜨고 굴 너머를 바라본다. 바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세지고 있었다. 아직은 미미하지만, 곧 다가올 태풍을 예고하듯 잔잔한 바람이 우리를 향해 날아왔다.
―다그닥, 다그닥…
"…!"
그때.
미궁과 어울리지 않는 말발굽 소리가 바람을 타고 울리기 시작했다.
"마, 마녀님?"
"…."
대답 대신 광원 구체의 크기와 위력을 키운다. 병사들은 눈을 찌르는 빛에 고통스러워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태양처럼 밝은 빛은 그간 보지 못했던 굴 깊숙한 곳을 비추어주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다그닥, 다그닥…
"히, 히익…?!"
"저게 뭔지 알아?"
"가, 간칸. 목 없는, 괴물. 간칸…!"
칼날숲의 산주山主라 불리는 목 없는 괴물. 소문뿐인, 전설로 취급받는 목 없는 금수.
"모두 무기를 들어라―!!!"
간칸이.
네 다리를 박차며 달려오고 있었다.
순간 폭풍이 휘몰아쳤다.
짐을 메고 있는 병사 몇 명이 뒤로 날아갈 정도로 거센 폭풍. 나는 클락이 날아가지 않게 발을 묶고 간칸을 바라보았다. 상처투성이의 회색빛 몸. 그런데 조금 더 위를 보면, 얼굴은 어디 가고 비어버린 목만이 보였다.
칼날숲의 산주山主 간칸. 체격은 평범한 말과 다름없었지만, 털 대신 가시처럼 날카로운 돌기가 몸을 뒤엎고 있었다.
간칸은 바람을 이끌고 초월적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간칸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굴이 이따위로 생겨먹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건 활주로였다.
비행기가 떠오르기 전 가속을 받는 것처럼, 간칸은 기다란 수평굴을 박차며 살인적인 속도를 내고 있었다.
"…!"
카미에르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무기를 들었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눈 한 번 깜박일 때마다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진다. 저것을 어떻게 막아야 할까. 마법을 쓴다 해도 저지할 수는 있을까. 확신이 서지 않았다. 다른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저런 걸 상대하다간 튕겨나가 즉사해버린다.
누군가는 막아야 하지만.
그게 자신이라면.
분명 죽어버린다.
"카미에르."
카미에르를 향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는 눈동자만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너라면 어떻게든 가능한 거냐. 순식간에 수천 개의 계단을 만들어낸 붉은 마녀라면 해결책이 있지 않을까. 그런 약간의 희망을 품은 눈동자였다.
그렇고말고. 물론 있다.
하지만.
"전부 이끌고 후퇴하세요."
혼자가 아니면 조금 귀찮았다. 나는 무심한 얼굴로 명령했다. 카미에르는 그럴 수 없다는 표정으로 뜨거운 눈빛을 보냈다.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너를 버리고 갈 수는 없다는 소리였다.
"하아…"
압도적인 힘은 제약이 많았다. 특히 보는 눈과 지켜야 할 사람이 많다면 말이다. 결국 이렇게 될 것 같긴 했다. 또 나 혼자 모두를 지키면서 싸워야 한다니.
그런데 아쉽게도.
"카미에르, 클락 좀 부탁할게요."
"…?"
"거부권은 없어요. 싫어도 보낼 거거든요."
그런 짓은 싫증이 난 지 오래다.
단체 텔레포트는 머리가 찢어지게 아파서 가급적 안 쓰려고 했지만… 알 게 뭐야. 얘네 죽는 것보단 낫지. 내려올 때 왜 안 썼냐 물으면 한 번밖에 못 쓴다고 대답해야겠다.
간칸이 우리와 충돌하기까지 40초. 나는 손을 비틀어 장거리 이동술식을 준비했다. 좌표는 미궁 앞… 아니, 베이스캠프가 적당하겠다. 다시 들어오겠다고 난리 부리면 귀찮아지니까.
"클락?"
"네, 네?"
"좀 늦을 수 있어. 얌전히 기다려야 해.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