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금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병을 내밀었다.
"…마실래?"
"포션인가요?"
"비슷해."
클락이 나랑 일한 지 10일이 조금 넘었다. 그동안 클락을 갈군다거나 과한 업무를 떠넘긴다던가 하는 일은 일절 없었기에 감히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편의를 봐주고 있다. 아마 독을 내밀어도 감사히 마실 것이다.
"킁킁…."
마개를 따고 냄새를 맡는다. 그는 '우유인가?' 하고 중얼거렸다. 클락의 얼굴은 오묘했다. 그러나 손가락을 찍어 한 번 맛을 보더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맛에 그 즉시 내용물을 들이켰다.
"…맛있네요! 달고, 음. 그리고, 달아요! 이렇게 달콤한 우유는 처음 먹어봐요!"
"더 줄까? 아직 두 병 남았는데."
"정말요?"
클락은 히히 웃으며 병을 받았다.
주는 건 거절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그런데 이런 걸 대체 어디서 구한 거예요?"
"…."
"마녀님 방엔 아무것도 없었는데…"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단추를 조여 맸다.
"마녀, 님?"
어디선가 나는 향긋한 냄새는 필히 살 내음이 아니었다. 방금 마셨던 우유와 같은 냄새가, 지금 눈앞에 보이는 마녀의 가슴에서 나고 있었다. 클락은 지진이라도 난 듯 맹렬히 흔들리는 눈동자를 굴렸다. 이제 막 단추를 끼워 맞춘 가슴으로.
나는 더러운 배덕감을 느끼며 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런 거에 맛 들이면 안 되는데.
"맛있었어?"
"저, 전. 그. 그게. 그."
"다 마셨으면 옷 입어."
"네, 네?"
나는 로브를 두르며 팔찌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준비해. 파헬른으로 갈 거야."
그가 몬스터 웨이브의 원인을 밝혀냈다고 한다.
* * *
카미에르가 '얼음 남작'으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파헬른은 마법의 온상지가 되어버렸다. 그가 펼치는 마법에 매료되어 찾아온 마법사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을 뻗으면 흩날리기 시작하는 얼음 조각들… 그 장면을 묘사하길 마치 별세계에 온 것 같다고 한다.
물론, 항상 앞장서 몬스터를 무찌르는 그의 행보 덕도 있었다.
각성 이전부터 맨몸으로 몬스터와 부딪힌 그였다. 마나를 각성하지 못한 일반병의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그는, 병사들의 평균 전력 향상과 안전에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그 덕에 병사들의 만족도와 존경심은 끝을 모르고 치솟았다.
그는 오만하지 않았다. 허나 자신의 실력을 믿었다. 실력도, 인성도 모자람 없는 군주는 아랫사람들을 끌어모으기에 적합했다. 유일하게 없었던 힘마저 충족되니 완벽한 군주의 상이었다.
'공격대를 모집한다고 했지.'
그리고, 마침내 몬스터 웨이브의 발생 이유를 알아냈다고 한다.
'칼날숲.'
하크나르 산맥과 산줄기를 공유하는 칼날숲. 그곳에 던전이 생겼다.
칼날숲은 브리도니아, 파헬른 남작령, 그레들린 자작령과 인접해 있어, 가만두면 세 곳 모두 피해를 볼 수 있었다.
헌데 파헬른만 보내기엔 양심에 찔리는지 다른 곳에서 약간의 지원을 해주었다. 브리도니아는 군수품 지원을, 그레들린 자작령은 식량을 조달해주었다. 메인 공격대는 파헬른의 부대였다.
나는 이번 공격대에 용병으로 참가할 생각이었다.
'던전이라… 오랜만이네.'
가본 곳이라곤 쌍둥이 악마의 탑밖에 없지만 말이다.
그리고 던전을 공략해야 한다는 건, 악마를 족쳐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던전은 악마밖에 만들지 못하니까. 소위 '던전 마스터'라 불리는 놈들… 본체의 무력은 보잘것없는 수준이지만, 쌍둥이 악마처럼 예외는 늘 있었다. 부디 성가시지 않은 놈들이기를 바랄 뿐이다.
또, 다행히 미궁 공략은 전쟁의 악마 바르페우고스를 소환하지 않았다. 미궁 공략은 공략일 뿐 전쟁으로 치는 건 아니라는 걸까. 나름의 기준이 있는 것 같았다.
"어디가?"
페카폴리스는 1층에 내려온 나를 보며 단안경을 끌어 올렸다.
나는 흔들리는 분홍 머리를 보며 말했다.
"파헬른으로 갈 거예요."
"공격대 들어가게? 뭐 부탁할 거라도 있어?"
"마차 하나만 준비해주세요. 2인용으로."
2인용. 그 소리에 눈을 돌린다. 그녀는 내 곁에서 안절부절못하는 클락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굴도 붉은 게 엄한 짓이라도 당한 것 같았다.
"덮쳤냐?"
"설마요. 그리고 익숙해졌다고 막 나가시네요. 미쳤어요?"
"미친 건 2주 만에 50층 노리는 네가 아닐까? 자, 그 커다란 가슴 덩어리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고. 내가 미쳤을까, 네가 미쳤을까?"
심드렁한 표정으로 턱을 괸다. 그녀는 균열을 생성해 그 너머로 뭐라뭐라 말하더니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마차 준비해뒀어. 거리로 나가면 될 거야."
"고마워요."
페카폴리스는 나와 클락을 한동안 지켜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리고, 흠… 뭐 알아서들 해라. 애 생기면 책임 못 지고."
"애는 이미 있는걸요."
"뭐―, 푸큭. 큽. 뭐?"
페카폴리스와 클락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나는 능청스럽게 휙 고개를 돌렸다. 허둥지둥대는 클락의 손을 잡고 거리로 나선다.
"클락, 가자."
"…네!"
이때 페카폴리스의 얼굴을 말로 풀어 설명하자면, 대체 널 따먹은 놈이 도대체 누구냐는 표정 같았다. 약간의 혐오감마저 깃들어 있는 걸 보니 슈리엘이 불쌍하기까지 했다. 하긴. 내가 어려 보이긴 하지. 제삼자 입장에서 본다면 나와 클락이 남매로 보일 지경이니까.
준비는 신속했다.
마차를 준비해달라 말한 지 5분도 안 지난 것 같은데, 마차는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날렵해 보이는 2인용 마차. 요구사항과 딱 들어맞는 마차였다. 크기도 작고, 전체적으로 유선형으로 깎여있어 마차보다는 현대의 자동차가 떠올랐다. 물론, 커다란 나무 바퀴와 마차를 이끄는 말을 보면 역시 판타지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말이다.
"마, 마녀님? 반대편에 앉을까요?"
"응? 왜?"
"그야, 다, 당연히…."
―덜컹, 덜컹.
콜린처럼 시에라 바위지대를 가로질러 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시간은 두 배 정도 더 걸렸다. 이른 아침부터 출발한 이유이기도 했지만, 최근 너무 여유가 없었다. 이렇게 시간을 넉넉히 두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저기 앉으면 찬바람 맞잖아. 그냥 여기 앉아있어."
"으으…."
가을이라 그런지 공기가 서늘했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 감기 걸리기 딱 좋았다. 나는 엉덩이를 들썩이는 클락의 어깨를 살포시 눌러 일어나는 걸 방해했다. 얌전했다. 그는 내 명령을 무시하고 움직일 정도의 깡은 없었던 모양이다.
"클락, 너도 공격대 들어갈 거야?"
"네, 네?!"
클락이 내 조수로 들어온 건 순수하게 학문적 이유 때문이었다. 그에게 개량품을 보여주니 '대단해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신 거죠?!' 하면서 끊임없이 달라붙더라. 꼬리를 달면 헬리콥터마냥 흔들릴 것 같아서 내버려 두니 나를 향한 찬양을 멈추지 않았다.
"왜 그렇게 놀라?"
"아, 아니. 그게. 옆에…"
"그래서?"
"…후으. 공격대요? 글쎄요. 관심이 가긴 하는데…."
"기여도가 오백이라는데."
"오, 오백?!"
솔직히, 홧김에 받은 거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했고, 또 혼자 처박혀 있으니 사람 사는 것 같지 않았다. 누구라도 옆에 붙여놔야 안심이 됐다.
"그, 그래도오… 위험한 건 싫은데에…."
"흐음… 클락."
"네?"
"지금 나 두고 죽을 걱정 하는 거야?"
쿡쿡 웃으며 입가를 가린다. 클락은 소심한 자신이 창피했는지 어깨를 축 늘이며 입을 다물었다. 애써 괜찮은 척 해봤자 늦었다. 나는 그가 건어물이 되기 전에 주제를 바꿔버렸다.
"층계가 몇이라고 했지?"
"아, 34요!"
"얼마나 걸렸어?"
"이 년, 정도려나요. 마녀님에 비하면 형편없지만…"
"대단한 거지. 그 나이라면 더더욱."
"맞아요! 전 제 실력에 자부심을 느껴요. 남들은 삼 사 년을 보내도 30층에 머무른다고 하는데, 전 아니니까요. 안 그래도 곧 35층에 올라갈 거예요. 저기, 음. 마녀님?"
"응?"
클락은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 회색빛 눈동자를 정면으로 바라보니 클락의 몸이 잠시 흔들렸지만,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그는 입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마녀님은 제가 몇 층까지 올라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
개안開眼.
눈을 뜨고, 그의 마나 파장을 읽는다.
"사실대로 말해도 돼?"
"…네!"
클락의 몸을 살펴본다.
마나 회로는 풍부한 편이다. 길은 많이 뚫려있지만 통로가 좁다는 게 흠일까. 그래도, 가짓수에서 부족함이 없었다. 이런 몸은 섬세한 마법을 쓰기에 더없이 적합했다. 화력 만능주의인 적색마탑과 어울리지는 않는다는 게 흠이지만.
층계는…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가정하에…
'78층'
잠재력 자체는 뛰어났다. 여기에 응용을 더하면 더 높은 층을 노릴 수 있을 정도다. 자신의 잠재력을 어떻게 쓰느냐는 본인에게 달린 일이지만 말이다.
클락은 내가 뚫어져라 바라보자 약간의 부끄러움을 느꼈지만, 꾹 참고 자세를 지켰다. 나는 그가 기가 죽지 않게 약간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만약. 네가 정말 노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길을 따라갔을 때."
"…."
"못해도 60층. 어디까지나 내 의견이니 걸러서 들어."
최고점을 알려주면 나태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이럴 땐, 저점을 말해주는 게 먼저였다. 클락이 60층으로 만족할 리 없을 테니까.
"60층…!"
클락의 얼굴이 환해진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필사적으로 참았지만,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내게 말했다.
"그, 그러면. 노력한다면…?"
이렇게 나오기냐.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비밀이야."
"네, 네?"
이 호기심을 마음에 묻고 성장의 발판으로 만들어라. 만약 정말로, 네가 60층에서 평생을 보낸다면 꽤 실망할지도 모르니까.
"후우… 제가, 정말 60층에 갈 수 있을까요?"
클락은 뛰는 가슴을 붙잡고 심호흡했다.
내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것도 나름대로 적응이 된 모양이다. 그는 이제 더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자신이 마신 게 모유라는 걸 깨달았을 땐, 진짜 얼굴이 폭발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빨갰는데… 이 정도면 많이 나아졌다.
"흐음…."
그런데 왜.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들까.
괴롭히면 바로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순진한 얼굴. 슈리엘이 날 괴롭혔던 게 이런 느낌이었을까. 가학심이 끓어오른다.
"클락?"
"네?"
나는 그가 챙겨온 배낭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클락이 눈치채지 못하게 몰래 배낭을 열었다. 염동력. 시선은 클락에게 고정한 채 몰래 손만 움직인다.
"…챙겨왔네?"
눈을 굴려 배낭 안을 바라보니 모유가 담긴 병이 두 개 있었다. 하. 귀엽기는.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후후 웃는다. 나는 손가락을 들어 우유병을 꺼냈다. 클락은 자기 뒤에 뭐가 떠다니는지도 모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에? 뭐가요?"
"이거."
클락의 눈동자에 진도 5.0 지진이 찾아온다.
"어, 어. 어어――?!!!"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모유병을 흔들어 보여주자 얼굴이 폭탄처럼 달아올랐다. 나는 그의 허벅지에 손을 올리며 얼굴을 들이댔다. 가까이는 아니고, 살짝만. 하지만 클락에게 이런 사소한 접촉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아, 아니. 그게. 이건! 그, 그러니까―!!"
나는 저열한 쾌락을 느끼며 큭큭 댔다. 덩달아 달아오르는 몸. 그러나 아직 때가 아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죄송합니다아아앗――!!!!"
홍당무가 된 얼굴로 무릎을 꿇는다. 이 좁은 마차 바닥에서 어떻게 저리 빨리 꿇을 수 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내공이 장난이 아니다. 나는 모유병을 흔들며 말했다.
"이게 뭔 줄 알고?"
"그, 그게."
"난 아직 아무 말도 안 한 걸로 기억하는데."
"…."
"일어나. 옷에 먼지 묻잖아."
반대편에 앉으려 했지만, 염동력으로 강제로 끌어왔다. 클락은 인생 포기라도 한 듯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내 옆에 앉았다. 전보다 더 가까이. 서로의 허벅지가 닿을 정도로.
"으음… 어지간히 맛있었나 봐? 여기까지 가져올 정도면."
"하하…."
"저기, 클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