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124/193)

  저 멀리 콜린의 외침이 들린다. 카미에르의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무시하고 등을 돌렸다. 그의 손가락 끝이 흔들리는 진동이 느껴진다. 망설임이었다.

  "…."

  그는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망설임을 이겨내진 못했구나. 그래. 아직 그럴 정도는 아니란 거겠지.

  짧지만 인상 깊은 만남이었다. 다음에 만날 일이 있을 진 모르겠다만,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저 미약한 망설임 정도는 이겨냈으면 좋겠다.

  * * *

  "유진님―!! A급 승급 정말 축하드려요―!!!!"

  모험가 길드로 복귀한 나를 처음으로 맞이한 건 접수원 메리였다. 그녀는 어디서 났는지 예상조차 불가능한 플래카드를 들고 나를 환영했다.

  조금 과한 환영식에 모두의 시선이 쏠린다. 허나 처음같은 관심은 없었다.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번에 붉은 마녀가 파헬른을 구원했다더군.

  ―시발. 질리지도 않고 업적을 싹쓸이 하는구만.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A급 모험가이자 붉은 마녀였다. 모두가 나를 우러러본다. 고작해야 모험가였지만, 나는 평범한 이들보다 더 높은 곳에 서 있었다.

  "A급 패는 원하는 모양으로 만드실 수 있어요! 굳이 크리스탈이 아니더라도 루비, 사파이어 등으로도 제작할 수 있다는 점 알아두세요!"

  "…그냥은 못 받나요?"

  "으음… 그래도. A급인데. 아, 죄송해요! 물론 기본으로 제공되는 패도 있어요!"

  "그걸로 주세요."

  "정말요? 진짜루요?"

  "하아… 메리."

  메리는 정말 아쉬운 눈으로 입을 우물거렸다. 자신이 주관하는 모험가가 A급이 되었다.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래서 최대한 챙겨주고 싶은 거겠지. B급까지만 해도 날 무서워했건만, 내가 무해하다는 걸 깨닫자 강아지처럼 엉긴다.

  하지만 내 의견은 바뀌지 않았다.

  "아쉬워라… 그럼 임시 패를 가져다줄 테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몇 분 후.

  메리는 자그마한 크리스탈 패를 하나 가져왔다.

  "임시 패라 크기는 작지만, 권한은 똑같아요! 유진님은 이걸로 A급 모험가예요! 앞으로도 많은 활동 부탁드려요!"

  패를 품에 넣고 짧게 인사한다.

  '적색마탑….'

  고개를 돌리자, 시야 가득 높이 솟은 탑이 눈에 들어왔다.

  마탑에 들어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아카데미 수료증을 제출하는 것이다.

  수도 탈레온에 위치한 아카데미 '아스트라'. 그곳을 졸업한다면 마탑은 물론이고 잘만 하면 황실까지 들어갈 수 있다. 허나 아카데미를 졸업한 이들은 보통 백색마탑에 들어가기 때문에 별로 실용성은 없었다.

  둘째. 고위 귀족 혹은 그에 준하는 인사들의 추전장을 내는 것이다.

  귀족의 경우 가주나 장남만 가능하다. 슈리엘에게 추천장을 받지 못한 이유였다. 하이라크가 내게 추천장을 내밀 리 없으니까. 하여튼 맺은 인연이라곤 카미에르밖에 없는 내겐 해당하지 않았다.

  셋째. 전통의 실기시험.

  평민이 마탑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 내가 노리는 건 세 번째였다. 등반 자격은 A급 모험가 패를 내밀기만 하면 알아서 충족될 것이다

  내 힘을 생각하면 이런 짓 따위 안 해도 될 테지만… 밑바닥부터 올라가려면 너무 오래 걸린다. 마탑은 유입에 적대적이다. 이렇게 기반을 다져놓으면 트러블에 휘말릴 일도 없다.

  '지금 당장은 어렵겠고….'

  

  날이 어둡다.

  지금은 신청 시간이 아니니, 부득이하게 내일 신청해야 했다.

  "아…."

  그러고 보니, 내일이면 브리도니아에 도착한 지 10일째 되는 날이다.

  '슈리엘은 뭐 하고 있으려나.'

  10일이면 대회의가 열리는 날이다. 제국 수도 탈레온, 마드리아 대회의장. 네 명의 마탑주와 세 명의 대행자. 그리고 다섯 신관이 모두 모이는 유일한 날.

  '…별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딱히 슈리엘이 걱정되지는 않았지만, 역시 머리에 난 뿔이 마음에 걸린다. 회의에서 공격이라도 받는 건 아니겠지. 뿔 달린 대행자라니. 내가 봐도 기괴하긴 했다.

  '대행자 자격을 박탈당하면… 어떡하지?'

  내가 데리고 살아야 하나. 으음. 모르겠다. 귀족은 썩어도 귀족이라고, 처신 정도는 잘하겠지.

  에일린 보기 부끄러운 아비가 되면 내가 손을 써서라도 제자리에 올려놓을 것이다.

  * * *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깨어난 나는 곧바로 적색 마탑으로 향했다.

  바람에 무너지는 게 걱정될 정도로 높이 솟은 탑. 층만 해도 무려 100층을 자랑한다. 과하게 높고, 또 이쑤시개처럼 얇아 보이지만, 각 층은 공간 마법으로 확장된 상태다.

  탑을 오르는 마법사를 이르길 등반자.

  탑은 위로 올라갈수록 등반자에게 시련을 내린다.

  자신의 한계를 넘는 것부터, 마법 연구나 논문을 내는 등 비교적 간단한 것들도 있었다. 마법사는 그것을 극복하고 층계를 최대한 많이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중에서도 1층.

  마법이 시작되는 곳에 나는 발을 들였다.

  "…."

  마탑 내부는 홀처럼 넓은 공간에 비해 아주 한적했다.

  홀 한가운데서 접수를 맡고있는 단안경의 접수원을 제외하면, 음침한 마법사 몇 명만이 책을 바리바리 싸 들고 위층으로 올라갈 뿐이었다. 텔레포트. 사실상 엘리베이터를 대체한 기술.

  "흠?"

  책을 읽고 있던 단안경의 접수원이 고개를 든다.

  "무슨 일이죠?"

  청아한 목소리. 여성이었다. 분홍색 머리의 그녀는 읽고 있던 책을 덮고 단안경을 바로 세웠다. 오른눈은 파란색인 데 비해 왼눈은 빨간색이었다.

  나는 눈을 찡그리고 그녀를 분석했다. 1층에 상주하는 마법사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마나가 느껴진다.

  "용무를 말하세요."

  못해도 80층 근처. 아니. 혹은 그 이상. 마탑은 이런 괴물밖에 없는 것인가? 괴물 중의 괴물인 내가 말하니 조금 웃기기도 했지만, 눈앞의 여성이 비상식적으로 강하다는 것은 틀림없었다.

  '나를 천 명으로 쪼개면 그중 서너명은 질 수도 있겠네.'

  객관적인 분석이었다.

  나는 분석을 그만두고 품에서 A급 패를 꺼내 들었다. 그러곤 눈앞의 여성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등반."

  탑을 정복하러 왔다.

  "…."

  A급 패.

  감히 무시할 수 없는 경지다.

  눈앞의 여성은 눈을 날카롭게 뜨며 나를 바라봤다. 파란 눈과 붉은 눈이 반월이 되며 빛을 발한다. 주변을 지나가던 마법사는 사방에 깔린 마나에 흠칫하며 발을 놀렸다.

  "수료증이나 추천장은?"

  처음부터 시험인 거냐. 역시 폐쇄적인 마탑답다. 나는 그녀가 발산하는 마나의 폭력에 굴하지 않고 더 강한 마나를 발산했다.

  "실기로 신청하러 왔어요. 그런데…"

  눈앞의 여성은 더 강한 파동으로 응수했다. 바닥 타일이 갈라질 정도로 강한 파동. 마나가 흔들린다. 나는 무너져가는 1층을 보며 눈을 찡그렸다.

  "지금 이게 실기인가요?"

  더 어울리다 진짜 무너지겠다. 결국 백기를 든 건 나였다. 분홍 머리 여성은 전형적인 마법사였다. 고집 심하고, 지기 싫어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군상. 그녀는 내가 백기를 들자 마나를 거두었다.

  "푸하, 미안해요. 붉은 마녀가 왔다길래 너무 신이 나서 그만."

  그녀는 단안경을 품에 넣으며 말했다.

  "…한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제 발로 올 줄은 몰랐네요."

  블링크.

  눈앞이 번쩍이며 그녀의 모습이 사라진다. 나는 마나가 흔들린 곳을 파악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내 뒤에 서 있었다.

  "반가워요! 저는 부탑주 페카폴리스에요. 탑주 대리로 자리를 지키고는 있지만… 편하게 대해주세요!"

  "…."

  방금 블링크로 깨달았다.

  이 여자는 힘을 숨기고 있다. 사전 동작 없이 저 정도로 정밀한 술식을 짜내긴 여간 쉽지 않은 일이다. 위력을 제하고, 술식의 정밀도와 속도만 본다면 평상시의 나와 다르지 않았다. 이런 술식을 보여주고서 내가 방심하길 바란 걸까. 아니, 애초에 힘을 숨기려고는 했던 걸까.

  ―쿵!

  평가를 수정하던 찰나, 그녀는 구두굽을 이용해 바닥을 찍었다. 탑이 흔들린다. 나는 톱니가 돌아가는 소리를 귀에 담으며 시선을 내렸다. 원형 바닥이 빙그르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윽고 외원과 내원이 교차하며, 나와 부탑주의 거리가 멀어졌다. 그 돌아가는 원 위에서 조용히 부탑주를 응시한다.

  부탑주는 적청색의 오드아이를 빛내며 싱긋 웃었다. 빛을 등진 역광 속에서도 눈동자만은 선명하게 빛났다. 나는 그녀의 눈에서 광기를 느꼈다. 마도를 추구하는 자의 광기어린 열정이 뜨겁게 타오른다. 그녀는 여유롭게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적색마탑은 불만을 다룬다고 말하지만, 사실 우리는 보다 더 강렬한 마법을 추구하는 것뿐이랍니다. 더 격렬하고, 더 화려하고, 더 강대한 마법을! 이것에 가장 잘 어울리는 원소가 불이었을 뿐이에요."

  ―딱. 중지가 손바닥을 치며 청명한 소리를 낸다. 허나 결과는 청명하지 않았다. 뜨거운 열기가 홀 내부를 가득 채웠다. 나는 목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으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계속해서 파악했다.

  좋지 않았다. 부탑주의 페이스에 휘말려버렸다. 어떻게 하면 내 턴으로 돌릴 수 있을까. 지금으로선 마땅한 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부탑주 말을 계속해서 들어보는 게 좋아 보였다.

  그녀는 자기도 더운지 소매를 걷고 옷 단추를 두어 개 풀었다. 풍만한 가슴골이 드러난다. 길게 뻗은 생머리는 뒤로 묶어 말총머리로 만든다. 순식간에 바뀐 인상. 그 털털해진 모습만큼 어조도 격해졌다. 부탑주가 말한다.

  "바다 위를 유영하듯 조용한 마법은 눈에 차지 않아요. 전투에서 중요한 건 오로지 화력이에요. 적을 압도하는 거대한 불덩어리, 귀를 찢는 폭음! 상상만 해도 몸이 달아오르네요. 붉은 마녀, 동의하시나요?"

  "…."

  화력이 중요하긴 하지. 대규모 전쟁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건 항상 마법사였다. 하지만 파괴만을 추구하는 마법은 마법이라 부를 수 없었다. 차라리 마도 공학을 마법이라 부르겠다. 나는 한기를 일으켜, 주위를 떠다니는 열압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마법의 본질은 창조에요. 파괴뿐인 마법은, 동의할 수 없어요."

  그 순간. 부탑주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허나 주변을 감싸는 열기는 더욱 강해져, 냉기 마법 없이는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뜨거워졌다. 그 뜨거운 열기에 나도 옷을 푼다. 어차피 서로 성별도 같고, 보는 놈도 없는데 다 풀어버렸다. 

  벗어 던진 상의를 허리띠처럼 맨다. 상체는 속옷만이 남아 맨살을 가려주었다. 부탑주는 과감한 노출에 한쪽 눈을 찡그리더니, 픽 웃으며 똑같이 옷을 벗었다. 그녀는 옷을 저 멀리 벗어던지며 입가를 틀었다.

  "흐… 청색마탑 놈들이랑 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그런데 왜 이곳에 오셨을까? 적색마탑이 가장 가까워서? 아니면 만만해서?"

  "등반. 그것 말고는 없어요."

  "등반! 탑의 본질 자체이자 모든 마법사의 목표! 좋아요, 이해했어요. 그렇다면 붉은 마녀, 당신은 몇 층까지 올라갈 생각이죠?"

  부탑주의 양손이 붉어진다. 동시에, 새빨간 마법진이 선을 이루며 손목을 감쌌다. 그녀는 하하 웃으며 주먹을 쥐었다. 그 순간 팽창하는 마법진. 팔찌 정도로 작았던 마법진은 순식간에 크기를 불려 커다란 접시처럼 늘어났다.

  자세를 낮추고 숨을 내쉰다. 뜨거운 공기가 목을 타고 폐를 찔렀다. 나는 이 답답한 공기 속에서, 도발적인 얼굴로 하늘 위를 향해 손가락을 펼쳤다.

  "백 층."

  탑주를 포함해 극소수의 마법사만이 도달한 자리.

  이곳은 단순히 실력만 있다고 도달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벽'을 넘어야 했다. 자신의 한계를, 추구하는 마법의 너머로 가야만 도달할 수 있었다. 아마 파괴만을 추구하는 페카폴리스는 영영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어디서 싸구려 동화책이라도 읽고 오신 건 아니겠죠? 백층? 하하! 백층?"

  "누군가에겐 싸구려 동화책일 수도 있겠죠."

  "뭐라, 고?"

  "근데 전 아니에요. 당신이 못한다고, 저까지 못 할 거라 생각하지 마세요."

  마탑을 오르는 마법사에게 층계는 민감한 정보였다. 더 높은 층계의 마법사가 아래 층계 마법사에게 조언하는 건, 일종의 금기로 여겨질 정도였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바둑 두는 사람 옆에서 훈수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고로 방금 내 말은 강도 높은 조롱에 가까웠다. 빠득. 이 갈리는 소리. 부탑주는 보기보다 화끈한 성격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화가 났음을 감추지 않았다. 페카폴리스는 손목에 두른 마법진의 크기를 키워가며 말했다.

  "실기로, 신청한다고 했죠?"

  폭발하는 열기.

  마법진은 손목에 그치지 않고 발목까지 기어가 술식을 짜냈다. 사중 캐스팅. 모두 강렬한 화염 마법이었다. 그렇게 몸에 불을 두른 페카폴리스는 화염 자체가 되어버렸다. 바닥 타일이 녹기 시작한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위를 향해 뻗어있었다.

  "아하하… 어디 갈 필요 없어요."

  "…."

  "왜 부탑주나 되는 년이 고작 1층에 처박혀 접수원 일이나 하고 있을까요? 궁금하지 않아요?"

  불길이 솟아오른다.

  "1층, 마법이 시작되는 곳."

  1번. 마법사The Magician.

  "저는 이곳을 오르려는 마법사들의 시작점이 되어준답니다."

  실체를 가진 최초의 수이자 모든 것의 시작.

  "본래 수준에 맞춰 상대해주지만… 당신은 그럴 필요가 없어 보이네요."

  순간, 주위를 감싼 열기가 한 곳에 모여들었다. 페카폴리스의 손과 발. 그 위를 감싼 네 개의 마법진. 그곳에 모든 열기가 모여들며 부스터가 터지듯 점멸한다.

  그녀는 호기로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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